|
(2) 說法廣大
慈悲及願力으로 出生入地行하야
次第圓滿心은 智行非慮境이라
是境界難見이니 可知不可說이로다
佛力故開演호리니 汝等應敬受어다
如是智入行은 億劫說不盡이니
我今但略說이나 眞實義無餘니라
一心恭敬待하라 我承佛力說호대
勝法微妙音과 譬喩字相應이니라
無量佛神力이 咸來入我身하니
此處難宣示나 我今說少分호리라
자비와 원력으로
지위에 들어가는 행(行)을 내시어
차례차례 원만하게 하는 마음은
지혜로 행하고 생각의 경계가 아니로다.
이 경계는 보기 어려워
알기는 하나 말할 수는 없네.
부처님의 힘인 까닭에 열어서 설명하리니
그대들 응당히 공경하여 받을지어다.
이와 같은 지혜로 들어가는 행은
억겁 동안 말해도 다할 수 없는데
내 지금 간략하게 연설하여서
진실한 뜻 남음이 없게 하리라.
일심으로 공경히 기다리라.
부처님 힘 받들어 말하오리다.
훌륭한 십지법문의 미묘한 소리와
비유와 문자가 서로 잘 맞으리라.
한량없는 부처님의 신통한 힘이
모두 다 나의 몸에 들어왔으니
이런 것을 설명하기 어렵지마는
내 이제 조금만 설해 보리라.
*
설법광대(說法廣大): 설법이 광대하다
*
뜻만 광대한 것이 아니고 설법도 역시 광대하다. 그러면 설법은 어떤 현상이냐?
자비급원력(慈悲及願力)으로 :자비와 원력으로
출생입지행(出生入地行)하야: 지위에 들어가는 행을 출생한다. 자취는 없지만 십지라고 하는 단계는 분명히 또 있다. 없는 가운데 있고 있는 가운데 없다고 하는 이런 말은 우리가 절에 들어오고 한 3년만 되면 익숙하게 듣는 이야기다.
그래서 자비와 원력이 필요하다. 그런 원력이 아니면 자취가 없는 단계를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차제원만심(次第圓滿心)은: 순서대로 원만해지는 마음, 등불빛이 차츰차츰 열 단계로 밝아지듯이 차례대로 원만해지는 그런 마음은
지행비려경(智行非慮境)이라 :지혜의 행이다. 그것은 지혜의 행이지 생각의 경계가 아니다. 의식의 경계, 심의식의 경계가 아니다.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한계가 있다. 심의식의 한계다.
선가(禪家)에서는 무념의 경계나 오매일여의 경계에서 한단계 더 올라가야 된다고 말한다.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예를 들어서 한 천 미터나 되는 벼랑 끝에 나뭇가지를 딱 잡고 매달려 있는 것은 보통 강한 사람이 아니면 못한다. 그런데 그것이 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심의식의 경계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가지를 놓아버려야 된다. 놓아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동안의 모든 심의식의 삶은 다 없어져 버리고 그 심의식의 경계를 초탈한다. 그래야 비로소 여기 십지에서 밝히고자 하는 모양도 없고 흔적도 없는 이치를 이해할 수가 있다.
지행(智行)이 비여경(非慮境)이라고 하였다.
현애살수장부아 할때 살수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 거기서 손을 뿌리친다.
탄허스님이 나에게 전법을 할 때 호를 살수(撒手)라고 지어주었다.
손 수(手) 변에 흩을 산(散)자를 쓰는 뿌리칠 살(撒)자와 손 수(手)자를 써서 살수다. 그 높은 천미터나 되는 벼랑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잡고 있다가 손을 놔라. 얼마나 높은 경지인가? 최고의 경지다. 모든 심의식(心意識)의 경계를 다 초탈한 경지다.
그런데 음이 안좋다. 살수가 뭔가, 누구 죽이는 건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름의 뜻보다 음이 더 중요하다.
어느 사찰에서 신도님 이름이 묘할 묘(妙)자 지혜 지(智)자 행할 행(行)자라. 참 뜻은 좋다. 묘지(妙智) 최고의 부처님의 지혜다. 그런데 또 갈 행(行)자다. 묘지로 간단 말인가? 우리가 다 묘지로 가긴 가지만 그게 뜻은 좋아도 부르기가 그런 것이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또 그런 것이 있다.
아무튼 살수라는 이름이 뜻은 참 좋은데 음이 그래서 안 쓰고 내가 스스로 지은 자작 호를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설법도 광대하다 하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시경계난견(是境界難見)이니 :이러한 경계는 보기 어려우니
가지불가설(可知不可說)이로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가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마음속에 알고 있는 것이 표현이 안 된다. 아무리 표현해 봐야 자꾸 군더더기만 생기고 표현이 안된다. 그냥 묵묵히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 인간사에도 그런 경우가 많고 법을 설명하는데도 역시 가지난가설이라 알 수는 있으나 설명하기는 어렵다.
불력고개연(佛力故開演)호리니: 부처님의 힘을 입어서 열어서 연설할 것이다. 부처님을 뒤에 모시던지 앞에 모시던지 형식적으로라도 부처님의 힘을 입어서 열어서 연설할 것이니
여등응경수(汝等應敬受)어다:그대들은 응당히 공경히 받아들일지어다.
*
여시지입행(如是智入行)은: 이와 같은 지혜로써 그 행위에 들어가는 것은
억겁설부진(億劫說不盡)이니 :억겁동안 설해도 다하지 못한다. 마음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또 어떤 정도의 지혜가 증득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지혜가 실천으로 옮기기까지는 억겁설부진이다. 참 어려운 것이다.
아금단약설(我今但略說)이나 : 내가 지금 다만 간략히 조금만 맛보기로 설하려고 하나
진실의무여(眞實義無餘)니라 : 진실한 뜻은 남음이 없다. 그 속에 다 포함된다는 뜻이다. 비록 설명은 부족하지만 그 속에 뜻이 다 포함된다.
*
일심공경대(一心恭敬待)하라 : 일심으로 공경히 기다리라.
아승불력설(我承佛力說)호대 : 내가 부처님의 힘을 받들어서 설하되
승법미묘음(勝法微妙音)과 : 수승한 법 그리고 미묘한 설법의 소리
비유자상응(譬喩字相應)이니라 : 비유와 글자가 서로 응함이니라. 서로 딱 맞아 떨어질 것이다. 십지 속에 비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불교는 정신적인 마음의 어떤 이치를 설명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비유가 그렇게 많다.
그리고 부처님은 자주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자는 비유로써 아느니라’고 하셨다.
법만 가지고 이야기 해봐야 표현이 다 될 수도 없고 십 분의 일, 백 분의 일도 표현하기 어려우니까 부처님이 비유를 척척 드는 것이다.
비유와 글자가 서로 응한다. 비록 이치로써는 화엄경은 성도하시고 곧바로 설한 것으로 우리가 가정하지만 그때 문자로 기록한 적도 없다. 오, 육백년 후에 문자로써 결집을 한 것이 화엄경이니까 비유와 그 비유를 표현하는 문자가 서로 응한다. 잘 맞아 떨어질 것이다 하는 뜻이다.
그리고 이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석가모니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소승불교,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하면 무조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 뿐이다. 소승불교에서는 그 뒤에 어떤 깨달음을 이루어도 부처님이라고 안한다.
부처라고 하는 말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만 깨달으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 뒤에 용수나 마명 천친 무착 이런 이들이 훨씬 더 높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시대에는 그렇게 큰 깨달음이 별로 필요치 않았다. 그저 사성제 팔정도만 줄기차게 설명하면 더 이상 필요가 없는 시대였다. 그러니까 줄기차게 사성제 팔정도 십이인연 삼십칠조도품까지 그렇게 줄기차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육바라밀에 대해서 한 마디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그 뒤의 부처님들, 용수 마명 천친 무착 같은 이런 뛰어난 부처님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룩하신 그 깨달음을 근거로 해서 그것을 부연하고 부연하고 발전시키고 발전시키고 한 것이다. 한 번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니까 사정없이 터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엄경이다 법화경이다 유마경이다 온갖 원각경이다 능엄경이다. 열반경이다 별별 뛰어난 대승경전이 사정없이 쏟아졌지 않은가. 그렇게 된 것이다.
후대에 우리가 보살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다 석가모니 깨달음 못지않은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들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깨달은 사람을 원음으로 발음하면 ‘부처님’ 이렇게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과는 세계가 전혀 다르다.
대승경전은 전부 그런 후대에 깨달은 부처님들이 비록 보살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했든 무슨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했든 전부 그런 수준의 새로운 부처님들이 다 결집한 것이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근거로 하고 그것을 원칙으로 해서 그렇게 발전된 것이다. 자주 말씀드리는 내용이지만 한 번 더 짚고 넘어가는 것이다.
*
일심으로 공경해 기다리라. 부처님의 힘을 받들어서 설하되 수승한 법과 수승한 법에 걸맞는 아주 미묘한 설법의 말씀과 비유가 글자와 상응함이니라. 비유와 글로 표현했든지 말로 설법했든지 간에 글자 속에 다 포함된다. 자상응(字相應)이니라.
무량불신력(無量佛神力)이 : 한량없는 부처님의 힘이
함래입아신(咸來入我身)하니 : 다 와서 내 몸에 들어왔다. 함래입아신이다. 금강장 보살의 얼마나 자신 있는 말씀인가.
용수보살이 됐든지 누가 됐든지 다 이 말에 포함된다. 함래입아신이라.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자신이 있는 것이다. 함래입아신이다. 전부 내 몸에 다 들어왔다. 모든 부처님의 신력이 내 몸에 다 들어와 있는데
차처난선시(此處難宣示)나 : 이 도리를, 이 이치를 펼쳐서 보이기 어려움이나, 참 어렵다. 자기가 깨달은 바 그리고 불보살의 어떤 위신력 이것이 내 몸에 꽉 찼다. 몸이라고 했다. 내 마음에 들어왔다는 것이 아니고 내 몸에 꽉 찼다. 이러한 이치를 펼쳐보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아금설소분(我今說少分)호리라 : 내가 지금 조금만 이야기 하리라.
여기까지가 서분이다. 그 밑에 정종분이 나온다. 이런 형식이 아주 철저하게 잘 갖춰진 것이 또한 십지품이다.
正宗分
七, 第一歡喜地
1, 深種善根
佛子야 若有衆生이 深種善根하면 善修諸行하며 善集助道하며 善供養諸佛하며 善集白淨法하며 爲善知識善攝하며 善淸淨深心하며 立廣大志하며 生廣大解하며 慈悲現前하나니라
“불자여,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을 깊이 심으면 모든 행(行)을 잘 닦으며, 도(道)를 돕는 법을 잘 모으며, 모든 부처님께 잘 공양하며, 청정한 법[白淨法]을 잘 쌓으며, 선지식의 잘 거두어 주심이 되며, 깊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며, 광대한 뜻을 세우며, 광대한 지혜[解]를 내며, 자비가 앞에 나타나느니라.”
*
정종분(正宗分)
*
앞에는 서분이 끝났고 이제 정종분이다. 정식으로 십지 중의 제일 환희지에 들어간다.
*
제일환희지(第一歡喜地)
*
심종선근(深種善根) ;선근을 깊이 심다
*
중선봉행(衆善奉行)이 시제불교(是諸佛敎)다. 착한 일하자는 것이 모든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다. 이 말은 불교의 정의내릴 때 제일 많이 언급하는 말이다.
모든 부처님 모든 깨달은 사람의 한결같은 공통된 가르침이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 인데 내가 글이 많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두 구절을 빼버리고 ‘중선봉행(衆善奉行) 시제불교(是諸佛敎)’라고 하였다. 착한 일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착한 일 하는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제악막작이 필요없다. 자정기의도 마찬가지다. 착한 일 하는 사람이 그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어떻게 착한 일만을 하겠는가? 온갖 착한 일 많이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여기도 환희지가 무엇인가? 심종선근이다. 깊이 선근을 심는 것이다.
착한 일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여러 차원이 있고. 그 차원은 일차원에서부터 백차원까지도 분류할 수가 있을 것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약유중생(若有衆生)이 : 만약 어떤 중생이
심종선근(深種善根)하면: 깊이 선근을 심으며
선수제행(善修諸行)하며: 모든 행을 잘 닦으며
선집조도(善集助道)하며 : 도를 돕는 일들 기타 부수적인 것들이 조도다. 그것을 잘 모으며
선공양제불(善供養諸佛)하며 : 모든 부처님께 잘 공양 올리며, 중생공양이 제불공양이다. 중생들을 잘 돌보는 것이 바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다.
선집백정법(善集白淨法)하며 : 좋다고 하는 법 아주 위대하고 훌륭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뛰어난 법을 잘 모으며,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언급하지 못한 깨달음의 이치가 백정법(白淨法)이다. 그것을 잘 모으며
위선지식선섭(爲善知識善攝)하며 : 선지식의 포섭함이 되며
선청정심심(善淸淨深心)하며 : 깊은 마음을 잘 청정하게 하며
입광대지(立廣大志)하며 : 광대한 뜻을 세운다. 뜻을 세우는 것은 유교에서도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입지여산(立志如山) 뜻을 세우기를 산과 같이 하라’ 그런 표현들을 많이 쓴다. 광대한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설사 성공 여부는 모른다 하더라도 일단 그 뜻을 광대하게 심는 것이 중요하다.
대만의 원도선원에서 온 분들이 오늘 이곳에 와서 촬영도 하고 있지만, 견휘스님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조그마한 스님, 밤톨만한 스님이다. 그런데 무슨 원력이 그렇게 커서 대만 전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한문문화권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엄경을 다 공양올리겠다고 하면서 100만부 공양을 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일단 13억 중국대륙에다가 공양올린다고 하는데 지금 얼마를 했냐고 하니까 지금까지 17만부를 공양했다고 하였다.
백만부라니 참 놀라운 일 아닌가.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이 책을 내가 내고 종단에다 천부를 드리고 할 무렵에 ‘누구는 황금으로 땅을 다 깔아서 부처님께 공양했다는데 나는 화엄경으로라도 우리나라에 다 깔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그래서 최소한 일만 부만 공양올렸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나는 3천부를 겨우 올렸는데 견휘스님은 일백만부를 공양하는 중이니 참으로 놀랍다. 엊그저께 대담할 때 그런 경외의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광대한 지혜를 세우며
생광대해(生廣大解)하며 :광대한 이해를 내면
자비현전(慈悲現前)하나니라 :자비가 앞에 나타나나니라.
2, 超凡成聖
爲求佛智故며 爲得十力故며 爲得大無畏故며 爲得佛平等法故며 爲救一切世間故며 爲淨大慈悲故며 爲得十力無餘智故며 爲淨一切佛刹하야 無障礙故며 爲一念에 知一切三世故며 爲轉大法輪하야 無所畏故라 佛子야 菩薩이 起如是心은 以大悲爲首하야 智慧增上이며 善巧方便所攝이며 最上深心所持며 如來力無量이며 善觀察分別과 勇猛力과 智力과 無礙智가 現前이며 隨順自然智하며 能受一切佛法하야 以智慧敎化하며 廣大如法界하며 究竟如虛空하야 盡未來際니라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함이며, 열 가지의 힘을 얻으려 함이며, 크게 두려움 없음을 얻으려 함이며, 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얻으려 함이며, 일체 세간을 구호하려 함이며, 큰 자비를 청정히 하려 함이며, 열 가지 힘과 남음이 없는 지혜를 얻으려 함이며,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히 하여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며, 잠깐 동안에 일체 삼세를 알고자 함이며, 큰 법륜을 굴려 두려움을 없게 하려는 까닭이니라.
불자여,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큰 자비심으로 머리를 삼아 지혜가 늘고, 공교한 방편에 포섭되고, 가장 훌륭한 깊은 마음으로 유지되며, 여래의 힘이 한량없으며, 잘 관찰하고 분별하며, 용맹한 힘과 지혜의 힘으로 걸림 없는 지혜가 앞에 나타나고, 자연의 지혜를 따라 순종하며 일체 불법을 받아들여 지혜로써 교화하나니, 광대하기가 법계와 같고 끝없기가 허공과 같아서 오는 세월의 끝까지 다하느니라.”
*
초범성성(超凡成聖)
*
제일 환희지의 경계를 지금 이야기 한다. 환희지는 범부를 초월해서 성인을 이룬다. 초범성성이다. 삼현의 이야기가 없다.
화엄경은 전체 구조로 볼 때는 삼현십성을 이야기 하지만 크게 연결시킬 필요가 없다. 초지 환희지에서부터 불법을 만나고 화엄경을 만난다.
불교를 만나고 부처님을 만나니까 너무 기쁘다.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는가’ 오온과 육근의 심부름만 하고 그것이 전부인냥 살았는데, 그것만을 계속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하면 인생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초범성성이다.
범부의 경지를 초월해서 성인의 경지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것이 환희지다.
이 제1환희지를 그렇게 중생의 첫단계 부터 시작한다 해도 좋고 사람으로서 첫단계부터 시작한다 해도 좋다. 범부가 무엇인가? 우리 새까만 무명 중생이다. 그것을 초월해서 성인을 이룬다.
*
위구불지고(爲求佛智故)며 :부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한 까닭이며
위득십력고(爲得十力故)며 : 십력을 열 가지 힘을 얻기 위한 까닭이며
위득대무외고(爲得大無畏故)며 : 크게 두려움이 없기 위한 까닭이며
위득불평등법고(爲得佛平等法故)며: 부처님의 평등법, 부처님이 행하고 누리는 부처님의 안목인 평등법을 얻기 위한 까닭이며
위구일체세간고(爲救一切世間故)며 : 일체 세간을 구제하기 위한 까닭이며
위정대자비고(爲淨大慈悲故)며 : 대자비를 청정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위득십력무여지고(爲得十力無餘智故)며: 십력무여지, 십력을 얻으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김이 없는 지혜라고 했다. 그것을 얻기 위한 까닭이며.
부처님을 이야기 할 때 십력이라고 표현을 많이 한다. 갑갑하면 핸드폰에서 찾아보면 인터넷에 친절하게 다 설명해 놓았다.
위정일체불찰(爲淨一切佛刹)하야 : 일체 불찰을 청정하게 해서
무장애고(無障礙故)며 :장애가 없기 위한 까닭이다. 일체 불찰을 청정하게 해서 장애가 없기 위한 까닭이다. 나 혼자만 청정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세상 모든 이웃, 모든 사람들이 다 정직하고 인과를 믿어서 장애가 없기 위한 까닭이다.
특히 고급 공무원들이 거짓말안하고 사기 치지 말고 기업가들이 정직하게 하는 것이 정일체불찰이다. 일체 불찰을 청정하게 해서 장애가 없기 위한 까닭이다.
위일념(爲一念)에 :일념에, 한 순간에
지일체삼세고(知一切三世故)며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다 알기 위한 까닭이며
위전대법륜(爲轉大法輪)하야 :대법륜을 굴려서
무소외고(無所畏故)라 :두려움이 없기 위한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발심한 것이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보살이
기여시심(起如是心)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이대비위수(以大悲爲首)하야 : 크게 어여삐 여기는,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인과를 지키지 아니해서 지옥에 가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가족이나 자기가 아는 친한 사람이나 자기가 따르던 수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형무소에 가 있다면 잠이 오겠으며 편안하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들도 전부 지옥 고통을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시급하게 생각해야 할 세상의 문제는 인과법을 아는 것이다.
인과법을 몰라서 그러한 곳에 가 있다. 설사 금생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어떻게 잘못 걸려서 들어갔다 하더라도 과거생으로 미뤄서 생각해 보면 틀림없이 과거생에 그러한 이유가 있어서 이런 데 들어온 것임을 알면 편안해진다.
인과의 이치를 아는 순간 큰집에 있어도 편안해진다. 인과법을 모르면 남을 원망하고 ‘내가 나가면 한 번 보자. 정권 뒤집히면 보자’ 항상 그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그대로 지옥고통이다.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인연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지옥 고통을 받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인과를 가르쳐서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된다. 제일 급한 문제가 이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아파트 빈 벽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를 좀 써붙이자고 늘 노래 부른다. ‘뿌린대로 거두리라’ 그렇게 큰집에 가있는 결과를 거두고 있다면 뭔가 뿌렸으니까 큰집에 가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는 깜박 잊었던지 아니면 몰랐던지 과거생까지 이해할 수가 없든지 어쨌든간에 뿌린대로 거둔 것이다. 그 교훈을 가지고 온 세상을 가르치는 일이 급하다.
굳이 불교나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까지 이야기 안하더라도 전부 그 이치다. 그 이치를 세상 사람들에게 깨우쳐서 그것을 이해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든지 다시는 그런 일을 안해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든지 먹고 사는 일보다 그런 이치를 깨닫는 것이 더 급한 것이다.
불교 공부도 인과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정일체불찰(淨一切佛刹)한다. 세상을 청정하게 정직하게 모두가 착하게 중선봉행 해서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는 까닭이며 일념에 일체 삼세를 알기위한 까닭이며 큰 법륜을 굴려서 두려운 바가 없는 까닭이라. 불자야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대비위수라. 비(悲)자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지혜증상(智慧增上)이며: 더욱더 지혜가 나아가고 더 높아지고 더 밝아지는 것이 증상이다.
선교방편소섭(善巧方便所攝)이며 :선교방편으로써 섭한 바이며, 중생을 구제하는 데 대한 어떤 선교방편 그것으로써 섭하는 바이며
최상심심소지(最上深心所持)며 :가장 높고 높은 깊은 마음을 가지는 바이며
여래력무량(如來力無量)이며 :여래의 힘이 한량없으며
선관찰분별(善觀察分別)과 : 선관찰 분별과
용맹력(勇猛力)과
지력(智力)과
무애지(無礙智)가
현전(現前)이며 : 현전함을 선관찰하니라.
수순자연지(隨順自然智)하며: 자연지를 수순한다. 본래로 가지고 있는 자연지를 수순한다.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날로날로 지혜가 증장한다고 해도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질, 성분이 아니라면 지혜가 증장될 수 없다. 그것이 자연지다. 본래 갖추고 있는 것, 거기에서 어떤 보조적인 수행을 통해서 완전한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연지를 수순하며
능수일체불법(能受一切佛法)하야 : 능히 일체 불법을 능히 받아들여서
이지혜교화(以智慧敎化)하며:지혜로써 교화하며 그렇게 하기를
광대여법계(廣大如法界)하며 : 법계와 같이 광대하게 한다.
구경여허공(究竟如虛空)하야 : 끝까지 하기를 허공과 같이 해서
진미래제(盡未來際)니라 :미래제가 다할 때까지 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광대여법계’‘구경여허공’‘진미래제’ 이런 말이 자주 나온다.
3, 住地十法
佛子야 菩薩이 始發如是心하면 卽得超凡夫地하야 入菩薩位하며 生如來家하며 無能說其種族過失하며 離世間趣하야 入出世道하며 得菩薩法하며 住菩薩處하며 入三世平等하며 於如來種中에 決定當得無上菩提니라 菩薩이 住如是法이 名住菩薩歡喜地니 以不動相應故니라
“불자여,보살이 처음 이런 마음을 내고는 곧 범부의 처지를 뛰어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여래의 집에 태어나나니, 그 가문의 허물을 말할 이가 없으며, 세간의 모든 갈래를 떠나서 출세간의 도에 들어가며, 보살의 법을 얻고 보살의 자리에 머물며, 삼세가 평등한 데 들어가 여래의 종성(種性)에서 결정코 보리를 얻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은 법에 머물면 보살의 환희지(歡喜地)에 머물렀다 하나니, 동(動)하지 않는 법과 서로 응하는 연고이니라.”
*
주지십법(住地十法); 환희지에 머무는 열 가지 법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보살이
시발여시심(始發如是心)하면 : 처음 이러한 마음을 발하면
즉득초범부지(卽得超凡夫地)하야: 범부의 입장을 초월해서
입보살위(入菩薩位)하며 : 보살위에 들어간다. 초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제목을 초범성성이라고 하였다.
생여래가(生如來家)하며: 생여래가며, 어떤 인연으로든 불법을 만나서 ‘불법이 세상법 하고는 정말 다르구나’ 하고 확실하게 믿음을 굳힌 사람은 그 사람이 여래가에 태어나는 것이다.
불법을 자기 세상살이에 보탬이 되도록 생각하고 믿는 사람이 또 부지기수다. 불법에 인연을 맺고 살아도 세상사에만 도움 되려고 믿는 사람은 국을 아무리 떠날라도 국 맛을 모르는 국자와 같은 것이다.
무능설기종족과실(無能說其種族過失)하며: 능히 그 종족의 과실 이야기 하는 것이 없으며, 여래가에 태어났는데 그런 것이 있을 까닭이 없다.
이세간취(離世間趣)하야 : 세간의 갈래를 떠나서
입출세도(入出世道)하며 : 출세의 길에 들어서며
득보살법(得菩薩法)하며 : 보살법을 얻으며
주보살처(住菩薩處)하며 : 보살처에 머물며
입삼세평등(入三世平等)하며 : 삼세의 평등한 데에 들어가며
어여래종중(於如來種中)에 : 여래 종중에서
결정당득무상보리(決定當得無上菩提)니라 : 결정코 마땅히 무상보리를 얻느니라.
보살(菩薩)이: 보살이
주여시법(住如是法)이 : 이와 같은 법에 머무는 것이
명주보살환희지(名住菩薩歡喜地)니 : 이름이 주보살환희지다. 보살의 환희지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환희지를 공부하고 있다.
이부동상응고(以不動相應故)니라 : 그 환희지에 머물러서 동하지 않고 딱 맞아떨어진다. 상응하는 연고니라.
4, 住地成就十法
佛子야 菩薩이 住歡喜地에 成就多歡喜와 多淨信과 多愛樂과 多適悅과 多欣慶과 多踊躍과 多勇猛과 多無鬪諍과 多無惱害와 多無瞋恨이니라
“불자여, 보살이 환희지에 머물면 여러 가지 환희와 여러 가지 청정한 신심과 여러 가지 즐거움과 여러 가지 희열과 여러 가지 기쁨과 여러 가지 뛰놂과 여러 가지 용맹과 여러 가지 투쟁이 없음과 여러 가지 시끄러움이 없음과 여러 가지 성내지 않음을 성취하느니라.”
*
주지성취십법(住地成就十法)
*
환희지에 머물면 열 가지 법을 성취한다고 하였다. 열 가지 법이라고 했지만 그 뜻은 하나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菩薩)이: 보살이
주환희지(住歡喜地)에 : 환희지에 머묾에
성취다환희(成就多歡喜)와 : 성취한다. 무엇을 성취하는고 하니 다 환희 너무너무 기쁘다.
다정신(多淨信)과 : 또 청정한 믿음이 너무 많다.
다애락(多愛樂)과 : 애락도 많다. 불법 좋다. 여기도 좋고 화엄경 첫페이지도 좋고 중간 페이지도 좋고 끝 페이지도 좋고 이품도 좋고 저 품도 좋고 볼수록 그저 좋고 지난번에 강의도 좋더니 오늘 강의도 좋다. 다애락의 다자가 무슨 뜻인가.
다애락이라서 버릴 수가 없다. 화엄경 책장 넘기는 것이 아깝다.
다적열(多適悅)과 : 적열의 적(適)자는 아주 딱맞는다는 뜻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고무줄이 됐든 뭐가 됐든 허리띠를 다 하고 있을 텐데 그것이 딱 맞아서 허리띠를 한 것을 못 느낀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신발이니 뭐니 몸에 착용하는 모든 것들이 너무 딱 맞으면 잊어버린다. 그것을 적(適), 적열이라고 한다.
그렇게 ‘불법은 바로 내 체질이구나. 내 취향이구나 이런 내 취향을 내가 왜 여태 못났던고’하고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다흔경(多欣慶)과: 흔경은 기뻐할 흔(欣) 경사스러울 경(慶) 이 불법 만나고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해서 밥이 되는지 죽이 끓는지 전혀 관심이 없고 비가 와서 보리 널어놓은 것이 떠내려가든지 말든지 전혀 관심이 없고 그냥 화엄경이 좋고 불법이 좋은 것이다.
다용약(多踊躍)과: 뛸 듯이 기뻐한다. 너무너무 좋아서 뛸 듯이 좋아한다. 다용약이니까 하루 이틀 뛰어서는 성이 안찬다.
다용맹(多勇猛)과: 다용맹과 ‘바로 이거구나’ 하고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용맹심이 생긴다. 용맹심도 다용맹, 너무 많이 생기는 것이다.
다무투쟁(多無鬪諍)과: 투쟁은 세상사다. 그런데 전혀 투쟁할 것이 없다. 이제 시비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나하고는 빠이빠이 하고 완전히 끝난 세상이다. ‘이 불법 좋아하면 됐지 누구하고 시비할 겨를이 어디 있는가’ 다무투쟁 참 좋은 것이다.
다무뇌해(多無惱害)와: 뇌해함이 없다. 번민하거나 어떤 피해를 입거나 무슨 괴로워하거나 하는 것이 전혀 없다.
다무진한(多無瞋恨)이니라: 화내거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한탄하거나 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 너무 많다. 행복감만 가득한 것이다. 꿈속에서도 행복하고 잠을 잘 때도 행복하고 잠이 깨도 행복하고 불법 처음 만나서 느끼는 기쁨 그러한 것을 성취한다. 환희지에 머묾에 이러한 것을 성취한다.
|
첫댓글 당신은 부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
자연지를 수승(수순?)한다
디(다)용약이니까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_()()()_
_()()()_
_()()()_
_()()()_
000000000000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