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백제인의 삶의 흔적을 되짚다
20100614 류소연
역사학과에 들어와서 드디어 첫 답사를 가게 되었다. 사실, 입학 후 한달도 안 되어서 가는 답사여서 마음은 들뜨고 정신은 없었다. 첫 답사의 결과물을 정리하는 이번 보고서에서는 내가 느낀 점이 있고 깊은 인상을 받은 곳을 중심으로 중요한 사실과 나의 느낀 점을 서술하려고 한다.
이번 답사의 첫 코스는 태안마애삼존불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마애불상은 중앙의 불상 1구와 양 옆으로 보살상 2구를 배치하는데, 태안마애삼존불은 가운데 상대적으로 작은 보살입상이 있고 양 옆으로 2구의 불입상이 배치되어 있어 특이한 형태이다. 이러한 이형(異形)의 마애불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이 삼존불은 법화경에 근거한 불상이라고 한다. 백제 성왕 때에 신라 진흥왕이 성왕을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독차지함으로써 양국의 동맹 관계가 파기된다. 이 때 후에 위덕왕이 되는 태자 창이 아버지에게 건의하여 신라를 공격한다. 그런데 태자가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볼모로 잡히게 되고 그를 구하기 위해 직접 전투에 나섰던 아버지 성왕이 관산성 싸움에서 신라군에 붙잡혀 피살된다. 그런 연유로 위덕왕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고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태안마애삼존불은 가운데 관음보살이 무진의보살로부터 받은 보주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왼쪽의 석가여래에게 올리고, 남은 것은 오른쪽의 다보여래에게 올렸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표현한 불상이다. 그래서 이를 이불봉주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고통에 빠진 백제인들에게 관음보살처럼 살 것을 권유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불교 유적과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옆의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 또한 위덕왕이 아버지를 위해 만든 것이다.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사찰 자체가 성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이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어렸을 적에 엄마와 부여에 갔을 때 본 적이 있지만, 그땐 너무 어렸는지 이번 답사에서 그것을 다시 보았을 때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마치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듯이 가슴이 벅찼다. 숱한 사진이나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를 보았을 때에 느껴지는 아우라(aura)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전체적인 형태부터 시작해서 동체의 산봉우리들과 거기에 있는 많은 물상(物象)들, 동체를 받치고 있는 용의 모습,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불교적 세계관과 도교적 세계관이 어우러진 것, 봉래산을 형상화한 것 등 이 향로에 대한 숱한 이론이 있지만 그것들을 배제하더라도 이것 자체로서 아름다웠다. 교수님께서도 마음에 깊이 담아 가라고 하셨는데,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좀처럼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능산리 절터에서는 금동대향로 발견 이전에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금동대향로와 사리감을 발견한 분이 우리 학교 교수님이라는 말을 여러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다. 그런 발견을 했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하나씩 새로 찾아낼 때의 그 희열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찰 것 같다.
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사택지적비를 보았는데, 국사 교과서에서 몇 년 동안 외우기만 하던 이름의 주인공을 만나니 반가웠다. 생각해 보면 교과서에서 이름만 수없이 들어 보았을 뿐 실제로 보지 못한, 때로는 사진도 보지 못한 문화재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이제는 대학에 들어와서 그런 유물과 유적들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바로 그 유명한 ‘백제의 미소’이다. 이 불상은 태안마애삼존불보다 시기적으로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태안마애삼존불보다 세련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번 답사의 답사지들을 돌아보며 위덕왕이 얼마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았는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서산마애삼존불의 석가여래는 위덕왕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신의 시대에 대한 자신감이 드러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위덕왕은 4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신라에 대해 2회에 걸쳐 보복전쟁을 감행했다고 한다. 위덕왕에게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백제 중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신라와의 전쟁에서 고통에 빠진 백제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불상의 협시보살은 미륵반가사유상으로, 이는 7세기 초 무렵 삼국에 공통됐던 신앙경향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 마애불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당시 불상의 미소는 동북아시아 불상의 보편적 유행형식이었는데, 이것은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시켜 상징한 것으로 7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이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절대자의 근엄성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절대자의 친절성을 상징하였다고 해도 이 삼존불의 표정은 너무도 친근하다.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는 유명하지만, 특히 왼쪽의 보살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고, 가운데 여래상은 금방이라도 파안대소할 듯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린 지금에도 우리는 이 불상을 보고 백제인의 마음을 가까이 느낄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얼굴 모습을 새길 생각을 했을까? 많은 것이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새삼 신기하다.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시대의 사람들의 삶이 피부에 와닿게 느껴질 때 말이다.
그 외에 주변 경관과 불상이 새겨진 곳을 연관시켜서 보라고 하셨다. 내가 특히 감탄한 것은 불상 위쪽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는 바위가 불상이 비를 직접 맞는 것을 막아 준다는 사실이다.
둘째날에 방문한 우금티전적지는 내가 답사 원고를 쓰고 발표한 곳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내가 발표를 하는 날에 하필이면 비가 오고 확성기는 고장나서 애를 먹었다. 답사 원고를 쓰면서 동학농민전쟁에 관해 깊이있게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지 않는 용어라는 점, 그리고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견(異見)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대학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단편적이고 죽은 지식들을 배웠었는지를 느꼈다. 또 정말 공부는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임을 느꼈다. 이 곳은 유적지 자체보다는 그 주변 지역과 이 곳과의 관계를 보아야 하는 곳이라고 장규식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우금티에서 그토록 치열한 접전에 벌어진 것은 공주가 충청감영 소재지일 뿐 아니라 서울로의 북상 길목이고, 특히 우금티가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고개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답사 원고를 쓰기 위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기록한 고문헌인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에서, 이 싸움에서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히 메웠다”라고 할 만큼 농민군이 크게 패배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과장된 기록일 뿐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 보려던 농민들의 좌절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그들의 좌절이 있었기에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바뀌어 온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전히 힘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살아가기에 힘든 것 같다. 아직도 그때 그 농민들의 이상은 완전히 실현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미륵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창건된 절이다. 사찰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륵사는 미륵불국토 건설의 이상을 반영한 절이다. 조선시대에 사찰의 대부분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가운데의 목탑과 동탑, 서탑 중 서탑의 일부만 남아 있다. 서탑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수(?)한 상태로 남아 있다가 최근에 보수 정비 작업이 진행 중이다.(??) 탑의 해체 과정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사리장엄구의 금제사리봉안기에는 가람을 건립한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기해년 정월 29일(639년)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적혀 있어, 무왕의 비로 알려진 선화공주에 관한 설화의 진위 여부를 의심스럽게 하고 있다. 가람을 건립한 사람이 사리장엄구 금제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따라 귀족 사택적덕의 딸일 수도, 선화공주일 수도 있으나 무왕의 비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이상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 즉 서탑과 서쪽 가람만 사택씨의 왕후가 짓고, 나머지 가람은 다른 왕후들(선화공주)이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을 보고 싶었는데 보수 작업 때문에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대신 서탑의 남아 있는 부분을 보고 추정하여 현대에 지은 동탑을 볼 수 있었는데, 정말 볼품없었다. 우리의 석탑이 석탑으로서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고뇌와, 그 탑에 켜켜이 쌓여 온 세월의 흔적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깨끗하게 새로 만들어진 동탑보다 무너져 가는 서탑이 훨씬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서탑을 보수한다고 하는데 그대로의 모습이 변하는 일이 없이 잘 복원되었으면 좋겠다.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백제의 초기석탑양식을 보여주는 조형물로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이 있다. 정림사지 석탑이 미륵사지 석탑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이 목조탑 양식에 더 가깝고 목탑과 함께 세워진 점으로 보아 정림사지 석탑이 미륵사지 석탑보다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정림사지 석탑은 이번 답사에서 본 어느 석탑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석탑의 비례가 어떠한지와 체감률까지 고려하였다는 점을 알고 나니 더욱 놀랍다.
익산왕궁리오층석탑은 정림사지오층석탑에 비해 묵직하고 둔탁한 느낌을 준다. 여러 시대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이 탑의 연대에 대해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아직도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보수 작업 때 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의 양식으로 인해, 백제계 석탑양식에 통일신라의 양식이 일부 혼합된 고려 전기의 탑이라 추측하고 있다. 또한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최근에 발견된 익산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구와의 연계성이 주목받고 있다.
백제의 유적들을 살펴보며, 유적의 조성 배경 등을 공부하면서 백제인들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 보니 조금이나마 그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다만, 이번에 둘러본 유적들은 주로 지배층의 삶의 흔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관심을 갖고 찾아보아야겠다. 내가 이번에 조사한 우금티전적지는 평범한 농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오랜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곳은 한성이다. 백제 역사 전체 중 4분의 1의 기간 동안 수도였던 공주, 부여와 그 주변 지역에도 이렇게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있는데, 한성에는 얼마나 많은 백제인의 흔적들이 잠자고 있을까? 고도의 개발과 성장으로 제대로 발굴되지 못한 한성의 백제유적들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짧은 일정 동안에 많은 곳을 둘러봐야 했기 때문에 모든 유적에 집중하기 힘들고 각각의 장소에서 오랫동안 살펴볼 수가 없어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답사보고서를 쓰면서, 답사지에서 설명을 듣기만 하고 지나쳐 버렸던 사실들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생각하니 소중한 공부를 하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시간을 내어 내가 관심있고 더 알아보고 싶은 유적이나 유물을 다시 주의깊게 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답사에서 불교 유적을 둘러볼 기회가 많았는데, 불교미술사와 가람건축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
한편 답사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답사의 준비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서 약간의 사전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또한 답사스터디에서 석가여래상과 보살상의 종류와 수인 등에 대해 배웠던 것을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물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의미있는 답사의 전부는 아니지만, 전에는 답사지에 가서 그냥 ‘불상이구나’, ‘절이구나’ 했다면 이번 답사에서는 그 종류나마 구별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학도로서의 첫 답사를 남다르게 했다. 이제 입학한 지 한 달 반이 되어 간다. 앞으로 학교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기 때문에, 다음 답사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