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
987년(성종 6)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搏士)를 각 1명씩 보내어 교육을 담당케 했고, 992년(성종 11) 지방 주·군에 학교(州學)를 세워 생도에게 공부를 권장하였다.
학교의 제도는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중심으로 하여 강당으로서 명륜당(明倫堂)이 설치되었으며, 교사는 조교(助敎)라고 하였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하고 학제 또한 퇴폐하니 향교도 역시 쇠미(衰微)한 상태였다. 그 후 충숙왕은 학교를 진흥시키려고 이각(李殼)으로 하여금 여러 군(郡)을 순력시켜서 향교를 부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향교에는 그 공수(公需)를 위하여 정부에서 학전(學田) 7결 5결을 지급하고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을 충당케 하였으나, 지방민으로부터 징수 또는 매수 등에 의한 많은 전지(田地)를 소유한 곳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되고 서원(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다.
학전, 지방 유림의 구림(鳩林) 등 향교재산은 대한제국 정부 학부(學部)의 소관으로 1900년(융희 4) 4월에 향교 재산관리규정을 정하고 부윤·군수로 하여금 정리케 하고 그 수입은 부·군내의 공립학교 또는 지정하는 학교의 경비 또는 문묘의 수리·향사비로 충당케 하였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향교의 총수 335, 소관 토지 48만 평이었다. 그 후 재산 관리규정은 폐기되어 공립학교의 경비에 사용되지 않고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 사업의 시설에만 충당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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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향교도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서무와 동재(東齋)·서재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類)를 두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서원(書院)의 발흥으로 부진하여 효종 때에는 지방 유생으로서 향교의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
享祀)할 따름이어서 1900년에는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정하여 그 재산을 부윤·군수 등이 관장토록 하였다.
1918년 조사된 바로는 당시 향교의 총수는 335, 소관토지는 48만 평이었으며, 그 재산은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사업의 시설에 충당하였다.
이상 [출처] 향교 [鄕校 ] | 네이버 백과사전
※ 향교안(鄕校案) : 조선 시대에, 향교에 있던 유생(儒生)의 명부(名簿).
대구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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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었으며, 1400년에 불타자 곧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 1599년(선조 32) 현재의 달성공원 부근에 재건하였다.
1605년 교동으로 이건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932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문묘·삼문 등이 있으며, 향교내에는 대구성(大邱城)의 축성 및 유래를 기록한 축성비와 수성비, 경상도관찰사·판관·군수 등을 지냈던 사람들의 불망비(不忘碑)·송덕비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한국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아래 : 대구향교, 낙육재, 양사재는 대구 읍지(영조조 발간)의 기록 내용 옮김 -김택규 교수 번역
대구 향교(鄕校)
부에서 동쪽으로 2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는 동문밖의 고성(古城)에 있었는데 지금은 구향교터(舊鄕校) 터라 부른다. 만력(萬曆) 기해년(1599년)에 달성(達城)에 옮겨 지었고, 울사년(1605년)에 달성으로부터 지금의 터에 옮겨 다시 지었다.명륜당(明倫堂)의 동서재(東西齋)는 한결같이 태학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자의 사당 뒷편에 두었다.
낙육재(樂育齋)
부의 남문밖에 있다.선비들을 모아 재주를 시험하여 정해진 인원수 만큼 선발하여 재실에 머물 게 하였다.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이 다시 짓고 장계를 올려 임금님께 보고하니, <심경><근사록>을 하사하시었다. 임자(1732년) 7월에 그 책을 재실의 벽에 있는 감실(龕室)에 봉안하였다.
※ 조현명 :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 1731년 경상도 관찰사에 부임함
[新增]
양사재(養士齋)
향교의 동신문(東新門)밖에 있다. 봄 가을로 재주를 시험하여 인원을 확정하여 양사재에 머물 게 하였다. 병술년(1766)에 관한 김로(金魯)가 창건하였다.
※ 문묘 : 공자를 모신 사당. 명륜당 : 향교나 성균관의 문묘 북쪽에 설치된 유생들의 강학(講學) 장소. 동서재 : 유생들의 기숙사
※ 대성전 : 문묘의 건물 이름. 대성은 공자의 시호(諡號 : 돌아가신후 나라(중국)에서 내린 이름) 공자를 모시는 집이라는 뜻
대성=공자의 시호 대성전=공자를 모시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