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민주주의는 위기인가?
한국의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역사의 능선이 더러는 내리막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다시 보다 높은 봉우리를 향해 전진하리라는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2023년 시월,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44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우리는 이런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에겐 이제 역사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체념과 절망만 남은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든지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부마항쟁 이전으로 퇴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보수단체의 집회에서 서북청년단의 깃발이 등장하고, 제주 4.3사건 추념일에 재건된 서북청년단이 4.3평화공원 앞에서 시위를 벌일 지경에 이른 것은 한국 사회가 한국 전쟁 이전의 적대적 대립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자들이 민주주의를 어떤 식으로 정의하고 규정하든지 간에, 그것이 정치적 존재의 지평에서 경쟁하는 주체들이 다른 주체의 존재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가장 본질적인 전제로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 전제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지금보다 나은 국가 형성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상대방을 멸절시키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전쟁이 되어버릴 것이다. 한 국가 내에서 정치가 전쟁상태로 퇴행한 것을 가리켜 내전이라 한다. 내전이란 폭력적으로 상대방을 제거하거나 제압하려는 정치적 집단 행동이다. 이에 반해 정치 행위가 적대적 대립과 각축으로 치닫더라도 그 대립이 아직 물리적 폭력 행사를 동반하지 않을 때, 그것은 권력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전반, 파시즘이 가장 두드러진 정치행태로 등장한 뒤에, 칼 슈미트가 정치의 근본 범주를 선과 악이나 정의나 불의가 아니라 적과 동지로 구분한 것에서 보듯이, 정치를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맹목적 권력투쟁으로 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기의 파시즘이나 볼셰비즘은 차치하고라도, 최근 미국의 대통령 선거 이후 벌어진 의사당 점거 사태에서 보듯,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적대적 대립 구도는 제3세계 국가만이 아니라 한때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칭송되었던 미국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정치가 공공선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뻔한 구두선으로서, 하나의 비현실적 이념이거나, 설령 현실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일종의 예외적 현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설령 현실에서 정치 행위가 권력 투쟁에 지나지 않고, 보편적 선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은 한갓 철학책에 쓰여 있는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치가 보편적 선의 추구라는 그 이상 자체를 포기해버리고 정치는 한갓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치 변경불가능한 현실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권력의 획득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활개치는 세상 곧 80년 5월 광주에서의 학살과 60년 3월과 4월의 학살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제주4.3에서 6.25전쟁으로 이어진 내전 상황에서 벌어진 학살이 다시 반복되는 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역사가 퇴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다시 민주주의가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한 지금, 그 위기를 근원으로부터 진단하고 그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실천 과제에 대해 말해 왔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자각은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 위기 의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고 그 이후 새 정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목격하면서 증폭된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위기를 현실 정치적 문맥에서 고찰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마도 그것은 철학자보다는 사회과학자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겠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여기서 우리는 그 현실적 위기의 근저에 놓여 있는 어떤 정신적 상황을 드러내려 한다.
2. 비판과 형성 사이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어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민주화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해방 공간에서 온전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은 논외로 하고 좁은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역사만 놓고 본다면 1960년 3.15에서 촉발된 4월 혁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비판과 타도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통치 권력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것, 그것이 민주화 운동의 가장 중요한 실천 과제였던 것이다. 4월 혁명을 통한 이승만 독재 권력의 타도, 부마항쟁을 통한 유신 독재의 종식, 87년 6월항쟁을 통한 전두환 독재 정권의 붕괴 그리고 최근의 촛불혁명을 통한 박근혜 탄핵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현존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역사였다.
부정과 타도가 역사의 진보를 의미할 수 있다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성공적인 진보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시민들의 집단적 저항을 통해 기존의 권력이 그렇게 반복적으로 해체된 역사를 찾아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국 현대 민주화의 역사는 세계사적으로도 독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비단 정치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를 이루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이를테면 오늘날 ‘한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퍼져나가고 있는 한국의 대중문화는 정치적 민주화가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곳에서 문화 예술이 꽃필 수는 없다. 민주화는 이 땅의 예술가들에게 표현의 자유, 아니 비판의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한국 현대 예술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진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위기에 처해 있는가? 그리고 정말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에 있다면 그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정치는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이다. 이처럼 하나의 주체와 다른 주체가 만남 속에서 보다 높은 하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을 ‘서로주체성’이라 하거니와, 정치가 너와 내가 만나 우리를 이루는 행위인 한에서, 모든 정치체(political body)는 서로주체성의 현실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민주주의는 서로주체성의 형성 원리이다. 그것은 타자적 주체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이 존중 위에서 각자는 하나의 주체로 정립된다. 그 존중 위에서 서로 다른 주체들의 차이와 타자성이 보다 높은 하나로 지양되는 과정이 민주주의이다. 그 ‘보다 높은 하나’ 속에서 너와 나의 타자성은 지양되고 개별적 주체는 ‘우리’라는 서로주체로 고양된다. 그렇게 우리가 된 공동체가 나라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그것이 서로주체성의 형성에 실패했다는 것, 너와 내가 우리로 고양되지 못했다는 것, 아니 더 정확하게는, 너와 내가 적대적 분열로 치닫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하나의 국가 형성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된다는 것, 이것은 두 가지 길을 통해 일어난다. 한편에서 모든 주체는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기가 되고 주체가 된다. 이것은 홀로주체성의 경우든 서로주체성의 경우든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남이 아닌 우리가 되는 것은 우리가 남을 우리 아닌 타자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이 아닌 나다’, 그리고 ‘우리는 저들이 아닌 우리다’는 의식이야말로 주체의 자기 의식의 시원이다.
한국의 독재 권력이 몰락한 것은, 그것이 때마다 점점 더 많은 시민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압도적인 다수의 시민을 하나로 묶어 주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집중되고 독점되면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이 소외는 무관심한 타자성이 아니다. 독재 권력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침범당하고 박해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집중되고 독점된 권력은 반드시 압도적 다수를 적으로 만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된 항쟁과 성공적인 정권타도의 역사는 권력이 절대다수 시민을 소외시키고 적으로 만든 데서 기인한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지금의 윤석열 정부 역시 과거의 독재정권이 밟았던 길을 걸을 것이다. 서울법대와 검찰에 집중되고 독점된 권력은 같은 보수 세력 내에서도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제까지 남이었던 사람들이 더불어 같이 배제된 자리에서 ‘우리’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법대-검찰 권력을 적대시하게 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박근혜처럼 윤석열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지. 하지만 이미 박근혜 탄핵이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질되고 그것이 급기야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반전되는 것을 경험한 지금, 비슷한 일이 두 번 반복된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위로나 희망이 되겠는가?
주체의 자기 형성이 한갓 타자의 부정으로 일어날 때, 사실 그 주체는 명목상의 주체일 뿐, 실질적 주체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규정이 부정이라 해서, 부정이 규정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X는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니라고 끝없이 부정한다 해서, 우리가 X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정은 주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한갓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정립되는 주체는 어떤 식으로도 규정되지 못한 공허한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체가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를 주체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단지 타자의 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형성해야 한다. 주체성은 바로 그 능동적 자기 형성의 활동에 존립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진보가 시민적 서로주체성의 형성에 존립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 자기 형성의 좌절과 실패에 다름 아니다. 타자의 비판이 한갓 타자의 부정에 머물러 적극적 자기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인 것이다. 이 자기 형성을 통한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공동의 적을 통해 결속된 우리는 그 적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남남으로 흩어지게 되고 지배 권력은 그렇게 원자화된 시민을 끊임없이 상호 경쟁으로 내몲으로써 자신의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거시적으로 보자면 87년 이후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의 정착은 공동의 적을 사라지게 만들어 시민적 서로주체성을 와해시켜 도리어 지배 권력이 더 공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하면 이것이 87년 이후 촛불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랫 동안 한국 사회에 지난날과도 같은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이다. 하지만 다시 그런 봉기가 일어난다 한들, 그것이 단지 독재적인 통치 권력에 대한 부정과 반발에서 촉발된 것이라면,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는 매번 유사한 방식으로 봉기하고 적대적 권력을 타도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온전한 의미에서 나라를 형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3.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 사이에서
그러므로 문제는 비판이 아니라 형성이다. 낡은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것에 비하면 쉬운 일이다. 한국의 민주화의 역사는 불의한 국가 권력을 파괴해 온 역사이다. 그러나 불의한 권력을 타도한 용기와 열정에 비하면 새로운 나라를 형성하는 데 지혜는 모자랐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집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망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건설은 파괴와는 전혀 종류가 다른 지혜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그다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 그것은 집단적 자기형성의 문제이다. 능동적 자기 형성은, 우선 집단적 의지에 의해 추동된다. 그 의지를 이끄는 것이 집단적 욕구와 동경이다. 개인적 주체가 아니라 집단적 주체가 문제일 때, 의지를 이끄는 욕구는 보편적 선의 이념 또는 보편적 가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현실의 국가는 그 보편적 가치의 현실태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보편적 선의 이념이나 가치가 없을 때, 국가는 통치기구일 수는 있으나, 참된 의미의 정치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처럼 자기 자신의 본래성으로부터 멀어질 때,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 역시 부패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 시민들이 더불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루어야 할 목표가 존재하지 않을 때, 정치는 맹목적 권력 투쟁으로 치닫게 되고, 이 권력 투쟁이 국가의 해체를 추동한다.
이런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추동해 왔던 이른바 진보세력이 민주화 이후에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시민의 일반 의지를 결집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실패했다. 물론 새로운 나라 형성을 위한 다양한 제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87년 이후 한국 사회가 많은 면에서 발전하고 진보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의 민주화는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도 민주주의를 확산시켰다. 그리고 200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설립 이후 오늘까지 이어지는 보편적 의료보험제도로 대표되는 다양한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역시 민주화와 함께 진행된 성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김대중 정부 이래 문화산업 및 정보통신 관련 산업의 발전도 박정희 시대의 중공업의 발전에 대비시켜 민주화가 가져다준 선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한 가지 결정적인 지점에서 국가형성에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에서 공화국의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런데 민주 국가와 공화국은 같은 것이 아니다. 민주국가가 의사결정의 형식에 있어서 시민 주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공화국은 그 국가가 공공선, 또는 더 쉽게 말하자면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 국가는 모두에 의한 국가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국가이다. 아무리 국가가 모두의 뜻에 따라 운영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동시에 모두를 위하여 운영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한갓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형식은 실질이 부합할 때, 온전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사정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공화국이라는 실질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형식적 민주주의는 시민적 삶의 온전함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시민적 삶의 온전함을 담보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라는 형식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화국이 모두의 이익을 위한 국가라면, 공화국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의 공공성에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가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할 때, 그 이익이란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정치적 권리의 동등권에 존립한다면, 공화국은 경제적 이익이 공공적 향유에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경제의 공공성의 확립이야말로 공화국의 요체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의 공공성이란 경제 권력의 공공성 즉 경제 권력의 민주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경제의 공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민주화에 이어 반드시 경제의 민주화가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경제의 발전에만 골몰할 뿐, 학자도 정치인도 시민도 경제의 공공성이나 민주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근대적 국민 국가 형성의 역사를 돌아보면, 17, 18세기 이른바 시민혁명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정치적 권력의 민주화였다면, 19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 권력의 민주화였다. 이 과제가 중요한 과제였던 까닭은 단지 노동자를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대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독일의 경제학자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이 지적했듯이 경제 권력이 민주적 통제 아래 있지 않을 경우, 그것은 반드시 개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질서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민적 자유와 국가의 주권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자본 권력 또는 경제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19세기에는 이론적인 차원 또는 사회운동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연방의 수립과 함께 유럽에서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정책의 과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특히 두 번의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경제 권력을 민주화시켜, 그것이 공공적으로 작동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나갔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진 유형을 살펴보자면, 영국이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경제 권력을 정치적 통제 아래 둠으로써 그것의 공공성을 추구했다면, 독일은 기업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을 자본과 노동이 나누어 가지는 방식으로 경제 권력의 민주화를 실현했다. 즉 노동자 대표가 기업의 최고 의결기구인 감독이사회에 주주 대표와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참여하고, 사업장에서는 ‘사업장조직법’(Betriebsverfassungsrecht)이라는 또 다른 법률적 규정을 통해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안에 대해 공동 결정권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자들이 기업의 임금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시민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정치의 민주화 이후 경제 권력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것은 진보 진영 내에서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물론 87년 헌법 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헌법적 규정은 그 이후 실질적인 법률적 규정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경제의 민주화란 아무런 내용 없는 구두선으로 남았다(금산분리 원칙이나 순환출자규제 같은 것이 경제 민주화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경제 민주화의 구체적 성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경제민주화란 경제 권력의 민주적 통제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경제 민주화’란 구호는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후보의 선거 공약으로 다시 등장하였으나 대선 후 폐기 처분되었다. 이 구호를 널리 퍼뜨린 김종인은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 주제를 다루었으나, 너무 많은 말을 함으로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특히 그는 “출자제한보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해야”라는 소제목 아래 몇 페이지를 할애하여 일본의 재벌해체와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를 언급하고 있으나,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에 대한 서술은 기본적 사실관계에서부터 틀린 서술인 데다가 그마저도 너무 소략하여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를 모르는 일반독자들이 읽으면 저자가 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김종인,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동화출판사, 2012, 144쪽. "독일이 패전하자 연합국은 독일 기간산업의 지배구조를 바꿨다. 기존 방식대로 놓아두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근로자 대표를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기업을 민주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1952년 강요하다시피 도입한 것이 노사공동결정제도다. 경제민주주의를 위하여 노사가 종업원복지와 주요 인사 등에 대하여 공동으로 결정하도록 법률로 정한 것으로 자본과 노동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1952년 몬탄공동결정법에 따라 철강과 석탄 산업에 먼저 도입했다. 제도를 운영한 결과 노사관계 안정은 물론 기업경영에도 효율적이라는 점이 입증돼 1976년 공동결정법에 따라 종업원 2000명 이상 전 산업으로 확대 도입하였다.") 더 나아가 소제목에서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기업지배구조를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지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았다.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에 이 책을 출판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경제 민주화 역시 더는 주요한 정책으로 추진되지 않았다.
그런데 김종인이 경제 민주화를 말하기 전에 김상봉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에서 집중적으로 기업지배구조를 분석하고 노동자 경영권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논증했다. 그는 주식회사는 법인 기업인 까닭에 다른 모든 법인이 그렇듯이, 소유의 주체는 될 수 있어도 객체는 될 수 없다는 법리에 입각하여,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음을 밝혔다. 더 나아가 주식회사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법리적으로는 주주들 역시 주식회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총수 개인도, 주주 집단도 주식회사의 주인(이른바 owner)라고 말할 수는 없다.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다.
그러나 자연인과 달리 법인은 의제된 인격이므로 주식회사 법인이 그 자체로서 인격적 주체로서 상행위를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것을 대신해 주어야 한다. 그 대리인이 이사회이다. 그런데 주식회사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므로 누구도 주식회사의 주인이라고 나설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 누구든 주식회사를 가장 합목적적으로 운영할 사람을 이사진에 선임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법률의 과제가 된다. 이 과제 앞에서 미국은 법적으로 주주에게 이사 선임 권한을 부여하여 실질적으로는 전문 경영인에 의해 기업이 운영되는 그런 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전문경영인이 언제나 기업의 이익을 충실히 보살피리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미국의 경우 이른바 ‘대리인 비용’(agent costs)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미국은 이 문제를 다른 무엇보다 경영진의 배임행위를 형법으로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해결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독일의 경우에는 법인 기업의 이사회를 주주 대표와 노동자 대표가 더불어 구성하도록 법제화했다. 경영진을 임명하고 해임하는 권한을 지닌 최고 의결기구인 감독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500명 이상 2000명 미만의 기업은 1/3, 2000명 이상 법인 기업은 1/2을 종업원 대표로 선임한다. 이외에도 독일은 사업장조직법을 통해 작업 현장의 의사 결정을 여러 단계에 걸쳐 노사가 공동결정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독일 기업은 법적으로 노사가 공동의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 떠맡는 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까닭에 기본적으로 노사 갈등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산업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지금까지 견실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김상봉은 이외에도 일본의 재벌 해체의 역사를 소개한 다음, 이런 다양한 사례들에 비추어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가지는 것이 결코 주식회사의 법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자본이 주식회사의 실체라면 노동은 주식회사 법인격의 주체이다. 기업활동이란 실체적 토대가 아니고 주체적 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자본이 실체로서 쌓여 있다 하더라도 주체적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자본 실체는 죽은 시체와도 같다. 그러므로 기업을 살아 있는 법적 인격체, 곧 활동하는 주체로 만들어주는 것은 자본이 아닌 노동이다. 왜냐하면 노동이 활동이며, 또한 그 활동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볼 때, 법인 기업의 경영권은 실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노동에 귀속되는 것이 옳다.
돌이켜보면 김상봉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주식회사론에서 선구적으로 파악된 통찰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주식회사의 법인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에 근거하여 이 새로운 기업의 형태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속에서 실현된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주주들은 자본의 소유자들이지만 그들이 소유한 주식은 투자가치를 가질 뿐, 경영에 직접 관여할 권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래서 주식회사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도 주인이 아니므로, 그 소유가 이미 사회화된 생산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주식회사 내에서는 경영자 역시 노동자와 똑같은 노동의 사회적 분업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주식회사가 “자본이 생산자 소유로 재전화하기 위한 필연적 통과점”이라고 주장했다.
김상봉의 주장은 몇몇 학자들의 관심을 받기는 하였으나, 정치적 공론장에서는 아무런 반향도 불러오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가 법인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하여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기본적 관념은 윤장현 시장이 추진했던 초기 광주형 일자리 사업에 반영되었으며, 나중에는 박원순 시장 재임 당시 서울시에서 조례가 마련되어 시작된 공공부문에서의 노동이사제도의 도입과 다른 지자체로의 확산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통한 기업의 지배구조의 민주화 그리고 이를 통해 노동자를 기업의 임금노예가 아니라 자본과 동등권을 가진 기업의 시민으로 대접하려는 시도는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의제로서 논의되지 않은 채 있다.
생각하면 노동자 대표가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한다는 것, 또는 이사회의 이사진의 일부를 선임할 권한을 해당 기업의 종업원에게 부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노동조합의 존재방식의 변화를 어떤 식으로든 수반할 것이므로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회사법의 범위 내에서 사외이사 추천권을 종업원에게 주도록 법을 개정할 수 있다면, 현행 기업지배구조에 대해 특별히 충격적인 변화를 주지 않고서도 기업 내에서 노동자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민주화와 관련하여 노동자의 경영참여 문제만큼 중요한 의제이면서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공론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동력을 받지 못해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는 또 다른 의제가 기본소득제도이다. 이 주제는 故김종철교수나 강남훈교수 등에 의해 한국사회에서 선구적으로 제안된 것을 이재명의원이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정책에 반영하여 부분적이나마 실제로 적용하기도 하였던 정책이다.
모든 시민에게 많든 적든 일정한 금액의 화폐를―지역화폐일 수도 있다.―무상으로 지급하자는 이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그렇게 지급되는 금액만큼, 개인에게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는 데 있다. 물론 일 년에 한 달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해서 나머지 열한 달까지도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달이라도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된다는 것은 적어도 그 정도 만큼은 인간에 대한 자본의 지배권이 무효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본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 또는 두세 달 노동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때, 인간과 자본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 착취관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본소득제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놀고 먹는 사회를 만든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의 전면적 지배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인간과 자본의 전도된 관계를 바로 잡아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길에 결정적인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기본소득제도에 대한 그동안의 사정을 돌아보면, 이론이나 실천의 관점에서 새로운 형성을 위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의 유기적인 협력을 통해 공론장에서 보편적인 의제가 되지도 못했고 현실 정당 정치를 통해 입법 절차를 거쳐 제도화되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한계이다. 이재명 의원의 기본소득제는 그나마 가장 성공적으로 정치권에서 공론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가 민주당 대표가 된 뒤에는 도리어 잊혀진 것처럼 더는 논의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의 진보 정치권은 이런 의제를 발전시켜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시민의 일반 의지를 하나로 수렴해내려는 노력보다는 안팎으로 적대적 대립에 기대어 타자를 부정하고 타도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하려는 시도에 몰입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인은 250년 전에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영국인들을 두고 야유했듯이, 투표장에서만 자유 시민일 뿐, 일상의 삶에서는 임금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투표할 수 있는 권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지금, 그런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4. 교육의 실패와 정신의 빈곤
그러나 이런 위기의 책임이 정치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의 무능은 한국인들 전체의 무능의 반영일 뿐이다. 그 무능의 본질은 무지와 무사유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 빈곤에서 비롯된다. 돌아보면 한국의 민중항쟁사는 한편에서는 대중의 정치적 참여에 의해 추동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내적 성숙을 통해 발전해 왔다. 그런데 외적 참여와 내적 성숙은 서로 공속한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자각이 그 모순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한 이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부마항쟁이 일어나기 직전 부산과 마산에서 양서조합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자각이 이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 배움과 성찰의 끝에 새로운 실천으로 나아간 것이 이 나라 민중항쟁사의 운동원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87년 이후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뒤에 이 전통은 거의 단절되었다. 지난날 대학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실천적 관심에서 시작되는 의식화와 자기교육 그리고 그런 자기교육과 자기계몽을 통한 새로운 실천의 선순환의 연결고리는 언제부터인가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더는 타도해야 할 정치적 적이 존재하지 않게 된 뒤에 보편적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고통에 대한 염려로 바뀌었다. 80년대의 금욕적 운동권 문화에 대한 반동으로, 온갖 욕망의 철학이 흥청망청하던 90년대 말 들이닥친 이른바 IMF 금융위기 이후 이 땅의 젊은이들은 사회를 염려하는 예비 지성인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미래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힌, 생존의 노예로 전락해 갔다.
감성이 개별성의 장소라면, 이성은 보편성의 장소이다. 한국인들의 전반적 무사유는,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감성적 사유에서 보편적 가치판단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의 학벌체제와 그에 따른 입시교육은 이런 무사유를 일종의 지속적 사고방식으로 만들었다. 돌아보면 한국의 민중운동은 학생운동이 언제나 중심에 있었고, 60년 4월혁명 시기만 하더라도 그 학생의 중심에는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점점 더 격화되어 온 입시교육과 학벌경쟁은 중고등학생들을 창살없는 감옥에 유폐시켰으며, 타인과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교육이 건강한 시민을 육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미리 앞당겨진 생존 경쟁의 장이 되고, 더 나아가 학생들은 인류의 모든 고상한 지적 성취들을 단지 시험성적을 높이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배우는 현실에서, 이런 교육이 보편적 진리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가진 정신을 배양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의 실패가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일관성의 부재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오직 시험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만 배움을 추구하는 것이 한 사회 속에서 전반적인 습속으로 굳어지게 되면, 우리는 어디서도 일관되게 사유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진다. 일관성이란 진리의 형식적 기준이다. 모든 사유의 첫 번째 원리는 자기동일성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나라는 의식이 없는 곳에서는 생각이 일어날 수 없다. 물론 이 동일한 자기에 대한 의식은 그 자체로서는 공허한 자아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의식의 장소가 구체적 내용으로 채워짐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그 사유의 내용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충돌하지 않을 때, 그 일관성이 한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이 된다. 칸트에 따르면 이처럼 상이한 의식의 내용들을 서로 일관된 정합성 속에서 통일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이다. 개별적 사태에 대한 판단은 지성의 일이지만, 그 판단들을 이어서 추론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개별적 판단과 인식을 확장하여 하나의 일관성 속에서 전체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 출세를 위한 도구가 되고 공부가 한갓 보다 좋은 시험성적을 얻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곳에서는, 가장 먼저 질식되는 것이 이성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사태에 대한 다양한 판단과 인식을 넘어 그런 다양한 판단이나 인식들을 통합하여 전체를 인식하고 통찰하려는 노력은 시험을 위한 공부에 길들여진 정신에는 불필요한 정신의 노동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언필칭 통합교과적인 출제라는 것은,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해 인위적으로 제시되는 문제인 까닭에,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도리어 혐오하게 만들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인식을 추동할 수는 없다. 개별적 이기심에 함몰된 정신이 입에 올리는 전체는 개별적 이익에 도구적으로 쓸모가 있는 한에서 동원되는 수사적 근거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세계 전체에 대한 일관된 관점을 내면화하여 그 세계관에 따라 일관되게 행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좌우,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오늘날 우리는 정치권에서 점점 더 일관된 정치인을 만나기 어렵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양쪽 모두에 넘쳐난다. 정체를 알기 어려운 것은 욕망이 있을 뿐,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주체성에 존립하는 인격이며, 주체성은 오직 세계 전체를 자기 속에서 능동적으로 규정하는 정신의 존재 방식이다. 전체는 부분들의 정합적 결합에 존립하는 것이며, 모든 결합의 지속성은 결합의 정합성에 존립하는 까닭에, 개념들의 정합적 연쇄 속에서 전체를 기투하는 정신은 그 자신 정합적이고 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 일관성이 주체의 정체성을 이룬다. 그러나 개별성 속에 함몰된 정신은 오직 개별적 욕망의 매듭일 뿐, 참된 의미에서는 자아로도 주체로도 존재하지 못한다. 아무런 일관성도 정체성도 없는 존재는 자아도 주체도 아니다. 정당이 그런 좀비들의 집합소가 될 때, 그런 정당이 새로운 세계의 형성을 위해 어떤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5. 혁명과 영성 - 전태일과 서준식의 경우
그러나 정신의 빈곤은 전체를 사유하는 이성의 부재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참된 위기는 이 나라에 자기 자신이 세계 전체와 하나라는 영성(靈性)이 진보 진영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데 기인한다.
이성은 전체를 사유한다. 그리고 전체를 규정하고 형성하려 한다. 그렇게 전체를 대상으로서 사유하고 형성할 때, 인간은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성적 주체에게 전체는 어디까지나 객체이고 대상이다. 그것은 사유와 형성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성적인 것이 언제나 현실적인 것도 아니고, 현실적 대상이 언제나 주체의 형성 의지에 순응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은 이성의 대상이지만, 이성의 거울 같은 반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타자적 대상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깃들인 장소는 언제나 개별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개별적 주체에게 세계는 타자성의 총체이다. 이성은 개별적 주체를 다른 주체와 이어주는 길이다. 이 만남의 총체가 세계이다. 주체는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 속에서 주체가 된다. 만남은 과제이기도 하고 전제이기도 하다. 만남의 총체로서 세계 역시 마찬가지로 전제이면서 과제이다.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의 하나의 세계는 주체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 실현해야 할 과제이면서, 또한 지나간 시간 속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전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주체는 이미 전제되어 있는 기존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세계를 기투한다.
그러나 모든 현존하는 실체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머무름이기 때문이다. 그 머무르려는 힘이 관성이다. 관성은 새로운 형성의 시도에 저항한다. 그렇게 저항하는 것 역시 세계의 본질에 속한다. 개별적인 존재자의 관성력과 비교하면 전체 세계의 관성력은 무한하다. 그 무한한 관성력의 세계 앞에서 주체는 무력하다. 무력한 주체가 세계를 변화시키려 할 때, 그는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전체를 단지 대상으로서 사유하는 이성은 이 상처를 치유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한다.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상과 주체를 일치 속에서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주체가 세계로부터 상처받을 때, 이성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헤겔이 말했듯이,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요, 이성적은 것은 현실적이라는 수사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 정신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말일 뿐, 개별적 주체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한다. 또는 마르크스처럼 이 자본주의의 질곡의 끝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는 것의 역사의 필연적 법칙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할지라도, 그 역사의 길에 오늘 상처받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런 법칙이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죽어가는 자들이 그 수난 속에서도 기꺼이, 기뻐하며 미래의 역사를 위해 자기를 던질 수 있는 것은 한낱 개별자인 자기 자신이 세계와 역사 아니 존재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에 따른다면, 자기가 전체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전체를 위해 기꺼이 죽는 것은 자기를 영영 버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전체를 살려, 전체 속에서 자기를 온전히 되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살아 있는 한, 주체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길에 자기를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처럼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깨달음은 이성이 선사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언제나 전체를 대상으로서 사유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대상 세계의 모순을 어떤 통일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이성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그러나 대상 세계가 나 자신과 하나라는 것은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증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이성을 넘어선 영성의 일이며 믿음의 일이다. 이성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위에서 비로소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다. 이성이 역사는 진보한다거나, 선이 승리한다는 명제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할지라도, 그 명제가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내가 역사를 나 자신의 역사로 긍정할 때이다. 그러나 객관적 세계의 역사를 나 자신의 역사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믿음과 영성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힘은 언제나 믿음과 영성에 근거한다.
세계가 나 아닌 타자일 때, 그것은 인식과 형성의 대상이다. 그러나 세계가 나 자신과 하나일 때, 세계는 단순한 인식과 형성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아끼고 돌보고 책임져야 할 사랑의 대상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악에 맞서는 희생과 용기 그리고 헌신의 근원이다. 그리하여 믿음과 영성은 고통받는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현실의 악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려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 실천이 혁명이다. 그런데 믿음과 영성이 종교를 통해 구체적 내용을 얻게 되는 한에서 혁명적 열정은 종교적 믿음과 결합하게 된다. 이점에서 보자면, 동학혁명 그리고 3.1운동이 종교적 열정과 결합된 정치적 실천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구라기조(小倉紀藏)는 『朝鮮思想全史』에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한국 사상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두 가지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는데, 그 하나가 조선적 영성이며, 다른 하나가 사상의 혁명적인 정치적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처럼 영성과 사상의 혁명적 실천적 역할이 원효와 퇴계 그리고 동학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한국 사상사의 고유성이라고 설명하는데, 그가 영성의 개념을 따로 정의하지는 않지만, 퇴계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영적인 세계관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퇴계가 말하는 사람[人]을 주체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구라기조가 말하는 조선적 영성이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구한말 이 나라가 전대미문의 위기에 빠졌을 때 오구라기조가 말하는 조선적 영성과 사상의 혁명적인 정치적 역할의 결합이 동학혁명을 통해 가장 모범적인 방식으로 실현된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동학 이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국의 민중 운동이 다양한 종교적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마르크스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낙인찍고,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하던 시대에 조선 땅에서 다른 어느 나라 못지 않은 열렬한 혁명적 열정이 종교적 믿음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것은 서양적 판단기준으로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학적 이성은 있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근거지을 수 있을 뿐,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근거 짓지는 못한다. 그 당시로 돌아가 이성의 눈으로 보자면 새로운 세계는 적어도 조선 민중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 민중이 처한 현실로부터 이성은 어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고통받는 조선의 민중이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려는 것은 적어도 이성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민중이 불의한 세계를 폐하고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현존하는 세계와 맞서 싸우는 것은 이성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맹목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의지를 어리석은 맹목이 아니라 없음에서 있음을,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기투하는 창조적 행위로 승인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적 영성의 전통은 3.1운동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종교는 보수화되었고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은 믿음이나 영성과 무관한 세속주의적인 실천의 길을 걸었다.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이렇다 할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태평양 전쟁 상황에서 일제의 탄압이 극단화된 까닭도 있지만, 그뿐 아니라 우리 내부의 이념적 분열이 전민족적인 봉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신간회 해산 이후 이른바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반목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결국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남북의 분단은, 외세의 간섭과 별개로 내부적 요인으로부터 이해하자면, 기독교와 공산주의 세력의 분열에 기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제주4.3사건과 한국 전쟁은 그 이념적 분열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역사였다. 그것은 혁명을 포기한 종교와 처음부터 영성 없는 혁명 운동의 적대적 충돌이었다. 그러나 양자 모두 영성 없는 정치적 실천에 몰입한 것은 같다.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 없었으므로, 나 아닌 타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공간에서의 격렬한 좌우대립은 추상적인 자기 확신과 적에 대한 원한감정과 증오에 의해 추동되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거기 타자에 대한 사랑, 원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계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민중항쟁의 역사에서 혁명적 영성의 전통이 부활하는 것은 1960년 4월혁명에서부터이다. 그 최초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구의 2.28의거는 고등학생들의 봉기였다. 결정적 디딤돌이 된 마산3.15도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마산과 부산의 고등학생들이 번갈아가며 또는 원정 데모를 통해 봉기의 불씨를 이어간 끝에, 봉기의 불꽃이 서울로 옮겨붙었을 때, 시위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그리고 전시민의 봉기로 전환되었다.
이리하여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항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좌익 운동가들에 의해 기획된 봉기도 아니고, 영락교회 청년부가 모태가 되었던 서북청년단 같은 종교적 배경에서 시작된 운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소박한 양심에서 비롯된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4월혁명은 이념적으로 보자면 무전제 상태에서 시작된 봉기였으므로, 한편으로는 소박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심은 불의를 부정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4월혁명 이후 봇물처럼 터져나왔던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의 구호 역시 분단 체제에 대한 부정의 목소리였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을 형성하는 이성의 발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일면적 부정은 혼란과 불안을 낳고, 결국 4월혁명은 5.16이라는 반혁명으로 종결되었다.
그 이후 한국의 진보적 민중 운동이 다시 대중적 참여를 견인하기 시작한 것은 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의 민중 항쟁사에서 전태일의 분신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이지만, 이 사건처럼 그 의미가 은폐된 사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 사람의 독실한 어쩌면 과도하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를 분신으로 이끌었던 것이 계급의식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그 이후 전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대의 유대 민중에게서 민족을 해방할 메시아로 추앙되었으나, 예수가 그 역할을 거부했을 때, 버림받고 살해되었다. 예수가 그랬듯이 전태일이 죽음을 통해 계시했던 것도 사랑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이 오해받았듯이 전태일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짧은 기간 전태일의 공적인 삶의 모든 장면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뜨거운 응답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부신 장면이면서 가장 은폐된 장면은 아마도 그가 착취 없는 사업장을 스스로 만들려 한 시도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우리가 거론했던 기업 민주화의 선구적 기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무엇이라 이름 부르든 그가 꿈꾸었던 것이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으로서의 공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형성의 시도는 그의 생전에도 좌절되었지만, 그의 사후에도 계승되지 못했다. 세상은 그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더 나은 세계를 형성하려는 신적인 사랑의 현현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운동가로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가 선구적으로 보여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은 자기의 권리에 대한 투쟁으로 박제화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70년대 한국의 진보 운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태일의 계승이었다. 첫째로, 외적인 측면에서 70년대 한국의 진보 운동사는 진보적 기독교 운동을 무시하고는 기록될 수 없다. 70년대의 학생운동 및 지식인 운동에서 시작해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그리고 도시빈민운동, 심지어 70년대 말 양서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거의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에서 교회는 매개의 중심이었다. 이것은 당시 도시산업선교회나 가톨릭농민회 또는 그 외의 다른 기독교적 사회 활동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전태일이 독실한 기독 청년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70년대 한국 교회가 천주교와 개신교 가릴 것 없이 전태일의 희생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70년대 한국 교회의 사회 참여는 전태일이 죽음으로 보여준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이 좁은 의미의 교회의 울타리 안에 유폐된 것이 아니고 세상을 향해 열린 운동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70년대 민주화 운동 및 사회 진보 운동이 좁은 의미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영성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도 7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 및 사회 진보 운동은 전태일의 계승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적 교리에 갇히지 않는 영성이란 사랑이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나는 사랑은 나와 타인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 즉 궁극적으로 나와 세계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없이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나와 타인 나와 세계가 하나의 절대자 속에서 하나라는 믿음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기희생적 응답을 가능하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성 종교에 대한 신앙이 그런 영성적 사랑의 전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도 영성도 제도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기성 종교의 신앙은 영성의 한 표현일 뿐, 그것이 자동적으로 참된 영성인 것도 아니고, 그런 신앙만이 영성의 유일한 표현인 것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성이란 언제나 나와 전체의 관계에 존립하는 까닭에 종교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성 종교는 언제나 전체와 절대자를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자신 전체의 진리가 아니라 부분적이고 당파적인 세계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영성은 종교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으며, 때때로 우리는 당파적 신조에 갇힌 종교인들에게서보다, 어떤 신조에도 속박되지 않는 비종교인들에서 참된 영성의 뱔현을 보게 된다. 특히 역사의 진보를 위한 가장 치열한 투쟁의 전선에서 싸우면서도 지난날 안중근이나 백범 김구 같은 위대한 정신이 보여준 어떤 영성을 우리 시대에 가장 탁월한 전범으로 보여준 이가 바로 서준식이다.
그의 『옥중서한』은 한 사람의 혁명적 무신론자의 정신 속에 어떻게 영성이 뿌리내리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책의 일어판 머리말에서 서준식은 “민족, 자생, 전향, 종교 등이” 옥중서한의 ‘라이트모티프’였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자생이란 주체성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7년 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유물론자에게 종교가 왜 그리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서준식 자신이 ‘종교’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천착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삶이었다. 아마도 그의 『옥중서한』의 인명 색인을 만든다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 이름이 예수일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의미의 혁명가들 가운데 로자 룩셈부르크를 한두 번 언급하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누구의 이름도 거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유물론자임을 반복해서 확인하면서도 마르크스의 이름도 레닌의 이름에도 기대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와 베르쟈예프를 반추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서준식에게 그들의 무게는 예수의 무게와 견줄 수 없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언어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복음으로서라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언어로서 먼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오로지 성서만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성서, 그 중에서 특히 복음서 부분은 소외되고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의 인간적 해방을 바라는 자가 몸에 지녀야 할 고귀한 윤리의 보고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소외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구원의 말씀으로서 가치가 있다기보다도, 인간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많은 괴로움에 대한 구원의 말씀인 것 같다. 그것으로부터 주옥과도 같은 윤리를 캐내지 못한 사람들이란 인간해방을 자생적으로 바라는 사람이 아니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준식이 복음서에서 이끌어내려 한 “주옥같은 윤리”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모든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준칙이었다.
“예수의 권력에 대한 항거는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지, 결코 특정 이데올로기나 체제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찬양하는 문맥에서도 비판하는 문맥에서도) 평하여집니다. 그러나 뚜렷한 비전의 부재를 부정적으로 보든 긍정적으로 보든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과 체제대립의 시대에 살고 있는, 따라서 그만큼 경직화 내지는 형식화되지 않기 위해 항상 새로운 피의 순환과 신선한 이상에의 회귀가 필요한 우리들에게, 예수가 주는 교훈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즉,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에게 대한 강력한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 늘 옳은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지표입니다.”
그러면서 서준식은 자기 주변의 이른바 “속류”들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 비판의 요지는 “‘속류’들에게는 분개(내지 증오)의 모체여야 할 연민과 사랑이 희미하거나 증발”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예수의 분노가 사랑의 발로였던 것과 달리 속류 혁명가들은 사랑 없는 증오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속류들에게는 아름다운 이상이나 따뜻한 인간성이 후퇴하고 기술과 효용과 명분과 소속 같은 것들이 상대적으로 강조”된다. 그들은 참된 사랑 없이 “공허한 이론과 기술만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자기모순적인지를 서준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혁명가에게는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아름다운 이상이 있다. 짓밟히고 고난당하는 인간들의 인간회복,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유토피아, 이런 것들이 그들을 한낱 전사나 정치꾼으로부터 구별하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참으로 각박하고 무자비하다. 이 아름다운 이상의 실현에 목숨을 건 정치적 투쟁장에서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고 이겨야 한다. 이상과 열성만을 가지고는 한 순간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고도로 효율이 발휘되도록 짜여진 조직적·전술적 원칙이라는 ‘건조물’이 세워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렇게 세워진 ‘건조물’이란, 그것이 부단히 튼튼하게 입각해 있어야 할 ‘토대’로부터 유리되고 겉돌아 그 자체로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 혁명가의 삶은 다만 비정하고 참을 수 없이 왜소한 한낱 기술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후퇴하고 혁명가는 전사나 음모적인 정치가로 타락한다.”
여기서 서준식은 혁명가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적·전술적 원칙이라는 건조물’에 의해 압살될 때, 어떻게 혁명가가 음모적인 정치가로 타락하는지, 그 위험을 명징하게 서술한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승리와 성공에 대한 열망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집어삼킬 때, 그리고 고통받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정립된 모든 제도가 그 자체로서 물신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억압 기제가 되는 곳에서 닥쳐오는 위험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는 서준식에게 속류 혁명가들이 빠져드는 바로 그 위험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는 음성이었다.
“내가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예수가 단순히 ‘약자의 편’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그 어떠한 강자가 된다 하여도 영원히 약자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예수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다. 예수는 모든 이념이 경직화되고 ‘자율적’인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억압하는지를 나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들이 이념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에 대한 개개의 구체적인 사랑’에 굳건히 발 디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나 개인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겪고 있는) 그 처참한 정신적 위기에 있어서 얼마나 절실하고도 귀한 가르침인가를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이 ‘영원한 약자의 편’일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다.”
따지고 보면 율법도 처음에는 약자를 위한 해방의 규범이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노동하는 인간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체로서 물신화되면, 율법은 안식일에도 노동하지 않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게 된다. 예수가 분노한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러나 서준식은 이것은 예수의 시대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즉각 인식한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모든 이념이 자율적인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억압하는지”를 깨닫는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서준식이 예수의 삶을 가리켜 “저의 인생의 나침판”이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를 추체험” 하려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서준식은 “예수로 말미암아 저의 이 서른다섯 살의 시점에서 하나의 새로운 정신적 지평이 열리고 있음을 저는 지금 감지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예수’를 필요로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약자를 위했던’ 예수가 진정 약자를 위하여 그렇게도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혼자 힘으로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약자를 위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라 한다”는 것을 그도 이해한다. 그리고 “‘약자를 위한 하나님’이 없이 강한 자는 그 강함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약자를 떠나기 마련이라고 한다”는 것 역시 잘 이해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자를 위한다는 주장에는 또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이야말로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준식은 신의 문제를 버리지 못한다. 생각하면 그가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 또는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 그리고 도래할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다림, 그런 것들 역시 이성의 힘으로 근거지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윤리적 이성이라도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이나 하늘 나라에 대한 믿음이 모두 어리석은 믿음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거나 더 나아가 신이 약자를 위한다는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냉철한 이성의 눈으로만 보자면 가망 없는 미래를 향한 기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바로 지금 신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살 만큼 강할까?”
일종의 “냉소와 우수와 염세의 늪”에서 서준식은 “어쩐지 나도 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만약에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내가, 1) 나의 내부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더럽게 고여서 썩어 있는 부분에다가 모진 돌멩이 하나를 정통으로 던질 용기를 가질 수가 있다면, 2) 신이 명하는 바와 사악한 현실과의 터무니없는 괴리에 치를 떨고, 따라서 이 현실극복을 위한 정열과 용기로 충만할 수 있다면 (따라서 냉소와 우수와 염세의 늪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다면!), 3) 그리고 나에게 알맞은 삶의 자리에 뿌리내리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경건하게 신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반동의 레테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인간적 자멸을 진정 두려워한다.”
이런 성찰의 과정에서 서준식은 자신이 오래 지켜왔던 “통속적 유물론”에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유신론적 유물론”에 이르게 된다.
“유물론의 반대 개념은 관념론이다. 유신론의 반대개념은 유물론이 아니라 무신론이다. 유물론=무신론이라는 당연한 상식에서 벗어나서, 그것이 인간의 해방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이원론이 될 수밖에 없을지 모르나) 유신론적 유물론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만하지 않을까?”
서준식은 딱히 유물론을 정의하고 있지는 않으나, 여러 문맥을 고려할 때 여기서 그가 말하는 유물론이란 그가 비판적으로 언급했던 통속적 유물론이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과 거의 같은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생각하면 근대 이래 계몽된 이성이 표방해 온 과학적 세계관이란 존재에서는 유물론, 진리에서는 실증주의 그리고 윤리에서는 공리주의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 유물론이란 물질적인 것만이 존재하며 물질이 아닌 것은 모두 비존재이거나 부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실증주의는 보이는 것만이 진리라는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는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리킨다. 과학은 언제나 물질적인 것만이 존재하며, 보이는 것만이 진리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유물론적이고 실증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근대적 혁명 이론은 이런 과학적 세계관에 입각해 역사의 법칙을 말해 왔다.
하지만 서준식은 그런 혁명 이론이 얼마나 편협하며, 얼마나 허약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자각한 뒤에, 현실 세계에서 유물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즉 과학적 세계 인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보이는 세계 너머 근원적인 진리를 개방하는 유신론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모색한다. 이미 칸트가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이성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신은 이성의 그물에 잡히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신을 믿는다 해서 과학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과 유신론은 상호 모순적인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신은 누구인가? 특정한 종교가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하는 신의 관념이 참된 의미에서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혁명가가 진정한 마음으로 신 앞에서 마음을 연다 하더라도 그 신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대답되어야 할 물음으로 남아 있다.
6. 촛불과 태극기 사이에서
서준식은 혁명적 사랑에서 출발해 종교적 영성의 지평으로 나아갔다. 이 놀라운 성숙의 과정이 우리의 현실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 역시 현실의 한 가지 양태였고 또 반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 전태일과 서준식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그 비길 데 없는 정신의 현실태는 한국의 현대 민중 항쟁사에서 70년대의 시대 정신을 반영할 뿐, 후세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준식이 속류 혁명가들을 비판했던 바, “‘인간에 대한 사랑’은 후퇴하고 혁명가는 전사나 음모적인 정치가로 타락한다”는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는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동지와 적을 가르고, 그 적대적 대립 속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유일한 현실적 목적이 되었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이 급격한 변화의 변곡점에 5.18이 있을 것이다. 5.18은 그 자체로서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나, 그 5.18에 대한 응답은 사랑보다 더 뜨거운 증오와 분노였다. 이것은 마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사랑의 완성이었으나, 그 사건이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았다. 그 증오의 에너지와 함께, 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은 서서히 서준식이 염려했던 속류들로 채워져 갔다.
이와 함께 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은 5,18을 통해 증폭된 저항의 에너지에 힘입어 더는 교회나 다른 종교 기관의 비호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론의 측면에서도 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은 특별한 제약 없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 운동은 더는 종교와 무관한 세속적 정치 운동이 되었다.
그것이 낳은 일차적 결과는 운동 세력 내부의 분열이었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 봉기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경제학자 정성기는 1995년에 쓴 선구적 논문에서 1980년대 마산 창원 지역에서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과 기독교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이 어떻게 갈등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서술하면서, “민중신학은 신(학)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맑스주의를 수용하는 포용성을 보이지만, 맑스주의자들은 자신의 학문적 입장에 따라 ‘신학’과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매우 강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불화가 어떻게 노동 운동의 좁은 경계를 넘어 전사회적인 분열을 초래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근대 이후 서구 철학과 과학이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된 인격적 절대자로서의 ‘신’의 문제, ‘신학의 문제’가 아직도 이 나라의 한 지역인 마산·창원지역 사람이나 한민족 모두,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신(학)의 문제는 바로 인간 간에 심각한 문제로서 거대한 태산같이 버티고 있다. 이로 인해 하늘 아래 누구도 이 종교적, 철학적이고 동시에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마치 맑스 시대에 종교를 비판하는 계몽주의자와 크리스찬이 공존했듯이, 오늘날은 여전히 양상은 다르되 맑스주의자와 크리스찬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칼 맑스의 아버지가 계몽주의자이면서 크리스천으로서 맑스 앞에 버티고 있었듯이, 오늘날은 해방신학자들이 크리스천이면서 맑스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맑스주의자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 기독교 맑스주의자와 맑스주의자들은 이제 손을 맞잡을 듯 가까워진 것 같지만 아직 신의 존재 문제, 이와 연관된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놓고는 아스라한 평행선을 그으며, 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연대하면서도 도처에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정성기 교수가 이 글을 쓴 것이 1995년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94년이었으니, 그가 이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아직 한국의 개신교가 돌이킬 수 없이 극우 보수주의에 투항하기 전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성기가 말한 대립이 얼마나 극단화되었는지를 촛불집회와 태극기시위의 아득한 거리 속에서 모자람 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 대립은 이 땅의 혁명가들이 속류화된 것과 함께, 기독교가 극우화된 결과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다시 남로당 무장대와 서북청년단이 충돌하던 해방 공간으로 퇴행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바로 그 퇴행에 기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퇴행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속류 혁명론과 기성 종교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영성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혁명적 영성이란 이 나라 민중항쟁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므로, 운동이 그 본래성으로부터 이탈할 때, 변질되고 부패하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위기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오직 낡은 종교가 물러가고 새로운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영성이 도래할 때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믿음이 역사와 유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수운과 만해와 전태일이 믿었던 그 ‘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밤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직은 새벽이 올 때까지 깨어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