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김혜진, 민음사, 2017.
<딸에 대하여>에는 4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성공은 했지만 가족이 없어 요양원에 노후를 맞이하는 젠, 교사였으나 딸을 위해 그만두고 젠을 돌보는 요양보호사 엄마, 서른 중반의 시간 강사 딸, 작은 레스토랑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며 생활비를 버는 딸의 파트너 레인이 나온다. 소설 속 커플은 최소한 경제적 독립도 유지하기 어려워 보인다.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 남성이 일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여성의 지위는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네 명의 여성을 통해 현대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게 된다.
-화자인 어머니는 임금 노동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교사로 일했던 그녀는 그 일을 그만둔 후 교습소, 도배, 유치원 통학 버스 운전, 보험 세일즈, 구내식당 일을 거쳐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일을 할수록 전문성을 인정받아 더 나은 조건, 더 나은 벌이를 기대할 수 있기는커녕 더 나쁜 조건과 낮은 벌이의 일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화자에게 삶은 그저 “견뎌 내야 하는” 너무나 길고 막막한 것이다. 화자는 이것이 늙음의 문제인지, 시대의 문제인지 궁금해 하는데 여기엔 젠더의 문제가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고단함. 더욱이 늙은 미혼의 여성이 젠더문제까지 겹쳐졌을 때 겪어야할 암담함에 화자는 두려워한다. 고정관념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가. 틀에 박인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답답함과 편협한 사고를 전달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진 작가는 60대 중반인 화자의 양가감정을 리얼하게 담았다. 화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개연성있게 밀고 나간다. 화자에게는 애지중지 키운 딸 하나가 전부다. 남들이 어떻게 살든 상관없지만 내 딸만은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걸 바라는 화자의 애정은 과한 것일까.
<딸에 대하여>는 늙음의 문제와 함께 성소수자의 문제, 정상범위를 벗어났을 때 안게 되는 사회적 어려움을 담았다. 딸이 동성애자임을 선포했을 때 받아들일 충격은 화자와 비슷할지 모른다. 레인같은 동성연인을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지내자고 한다면 과연 화자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그 누가 자신하랴. 당사자가 아닐 경우 어디까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엄마는 남의 이목을 굉장히 신경 쓰는 유형이다.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그게 잘못됐다고 떠드는 이유가 뭐니? 그런 일을 왜 네가 해야 해? 잘못된 일이면 자연스럽게 바로잡히는 법이야.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사람들 일에 앞장서고 진을 빼느냐고. 어느 날은 직업도 없고 어디서 뭘 하던 애인지도 모르는 애를 데려오질 않나, 어디서 싸움질을 하고 오지 않나, 강의는커녕 교문 앞에 거지꼴을 하고 서서 시간을 허비하고, 도대체 왜 네가 이렇게 귀한 인생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다.” (p.102)
남들이 자신의 딸과 레인의 관계를 물어 올 때 엄마는 뭐라고 대답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젠의 장례식장에서 누군가 저들이 어떤 관계냐고 물어본다면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런 마음이 보편적인 부모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지만 화자는 정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를 견디지 못한다. 아무리 둘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애써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을 것이다. 단, 화자에게 그 행복은 정상적으로 남편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사회적 책무를 다했을 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p.197)
지금 화자의 딸 그린은 레인과 행복하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며 희생하고 있다. 미래를 걱정하지만 성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서 학교 교문 앞에서 항위 하고 있는 그린을 레인은 뒷바라지 해준다. 자신이 벌어 온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둘은 7년을 만나고 함께 살았다. 둘은 이제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잔다. 그러나 엄마는 이런 이들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눈으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엄마의 두려움은 과연 무엇일까. 화자는 레인만 없으면 그린이 잘 살 수 있을 거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레인이 떠나도 그린은 또 다른 레인을 찾을 확률이 높다. 엄마는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계속 모순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동성애를 비생산적인 일이라 비난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젠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본다. 요양보호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부당한 일이 있을 때 딸 그린처럼 병원에 항의하기도 한다.
“10년 뒤, 20년 뒤, 나를 이렇게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이 애들이 자신들이 노년을, 젊은 날에는 어떻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그때를, 그렇지만 반드시 찾아오고야 마는 그 순간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책임과 믿음을 나눌 수 있는 제대로 된 짝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남겨 두고 가는 것이 걱정과 염려, 후회와 원망 같은 감정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p.184)
요양보호사인 엄마는 치매 어르신 젠을 간호하며 어느 날 다른 병원으로 이송 된 젠을 간호사에게 부탁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엄마가 젠을 데려 이유는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p.144)라는 의도가 있었지만 젠을 돌보며 마지막 인간적인 연민을 젠에게 쏟아낸다. 젠의 장례식을 기꺼이 치러주는 화자의 모습에서 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고 알게 되었을지 가늠해본다. 아마 이젠 함께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서평-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