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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적 전차도 1,500미터 밖에서 격파할수 있을 것 2. 같은 거리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전차무기에도 방어될 것 3, 최고시속이 40km에 이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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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차에 탑재되기로 한 주포는 개래트 725라는 명칭으로 개발중이었는데 텅스텐 탄심의 포탄을 발사하는 75mm 강선포였다.
[티거전차가 등장하기까지 시험전차들의 모습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수 있다]
헨쉘사가 제안한 VK3601(H)는 전면 100mm, 측면/후면 60-80mm에 달하는 뚜터운 장갑으로 보호됨으로써 당시의 많은 연합국측 대전차병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수 있었다.
VK3601(H)의 섀시는 VK3001(H)의 것으로부터 발전했지만 전륜이 8개로 늘어나고 대형 로드휠이 장착됐으며 리턴롤러는 폐지됐다.
VK3601(H)
[VK3601(H)의 실제 사진으로 아직 포탑이 완성되지 않아 차체만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병기국은 VK3601(H)의 주포가 될 예정이던 개래트 725에 사용될 텅스턴 탄심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개발을 중지시켰다.
이에 따라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Krupp사에서 개발중이던 강력한 '88mm KwK 36 전차포'였다.
88mm Flak 18
[88mm포는 '88mm Flak 18'이라는 대공포로 유명한 포였는데 서부 전선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이 대공포는 종종 대전차포로 사용되었다 이 포는 37mm대전차포가 격파하지 못하는 목표물을 쉽게 관통할 수 있었다.]
원래 88mm포는 '88mm Flak 18'이라는 대공포로 유명하다.
서부 전선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이 대공포는 종종 대전차포로 사용되었는데, 37mm대전차포가 격파하지 못하는 목표물을 쉽게 관통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주포를 탑재하기 위해서는 더욱 대형의 차체가 필요했다.
따라서 독일 육군은 '88mm KwK 36' 전차포를 사용한 새로운 전차(VK4501)의 개발을 Henschel사와 Dr. Porsche에게 명령한다.
VK4501의 요구 사양은 최대 중량 60ton 미만, 600hp 엔진 탑재를 하여 최대 속도 40km/h, 야지 주행속도 25km/h의 기동력, 그리고 당시 Krupp에서 개발중인 88mm포를 탑재 할 것 등이었다.
탑재될 포탑은 라인메탈사가 개발중이었다. 라인메탈사는 88mm포 장비형 포탑 이외에도 75mm KwK L/70포를 탑재할 수 있는 또다른 포탑을 목업까지 만들어놓고 제안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이 Project에 대하여 Henschel의 수석 엔지니어인 Ervin Anders는 기존의 VK3601(H)를 설계 변경한 VK4501(H)를 제안한다.
[드디어 완성된 티거의 시제품 VK4501(H) 의 모습 티거의 전형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기존의 VK3601(H)에서 변화된 것은 상부차체가 캐터필러 위까지 돌출하게 된 것 뿐인데, 이는 대형의 KwK 36포를 수납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큰 포탑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상부차체의 측면장갑도 80mm까지 강화됐다.
한편 Dr. Porsche는 당시 적용되고 있던 독일전차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전차를 구상하였다.
이것이 VK4501(P)인데 차체 중앙에 공랭식 디젤엔진을 두어 발전기를 돌리고, 다시 모터를 구동시켜 drive wheel을 회전시키는 electro-mechanical transmission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 방식보다 중량이 더 나가게 되었다.
[포르쉐 박사팀이 개발중이였던 티거전차의 또다른 원형 VK4501(P)의 모습 차체 중앙에 공랭식 디젤엔진을 두어 발전기를 돌리고, 다시 모터를 구동시켜 drive wheel을 회전시키는 electro-mechanical transmission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 방식보다 중량이 더 나가게 되었다. 결국 이방식은 복잡한 구동방식으로 최종경합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차체를 이용 페르디란트를 제작하는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공랭식 디젤엔진의 개발은 결국 실패하였다.
헨쉘,포르쉐 양사의 기술진은 산적한 기술적 문제 뿐만 아니라 시간과의 싸움도 감수해야했다.
1941년 5월 26일 병기국은 히틀러의 생일인 1942년 4월 20일까지 첫 프로토타입을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따라 헨쉘사의 기술자와 근로자들은 밤낮을 가리지않고 작업을 진행, 1942년 4월 17일 '라스텐부르그 총통 대본영'行 화물차가 출발하기 불과 40분전에 프로토타입을 완성할 수 있었다.
[VK4501(H) ProtoType]
완성된 차량을 화차까지 시험주행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첫 프로토타입은 트레일러에 실려 열차에 적재되었다.
[VK4501(P) ProtoType 의 모습 헨셀타입과 는 꽤 다른 형태로 포탑이 앞쪽으로 쏠린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가솔린 엔진을 이용 전지를 총전하고 충전된 전지를 이용 모터를 돌린다는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결국 복잡한 방식으로 최종 경합에서 탈락하게 된다]
포르쉐의 프로토타입인 2대의 VK4501(P)는 니벨룽겐워크(Nibelungenwerke)공장에서 여유롭게 완성되었다.
1942년 4월 19일 헨쉘과 포르쉐 양사의 시험차량이 라스텐부르그로부터 11km 떨어진 역에 도착했다.
시험차량들은 열차에서 크레인으로 하역되었는데, 프로쉐의 차량이 내리자마자 진흙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헨쉘사의 수석설계자 쿠르트 아르놀트는 포르쉐박사에게 VK4501(H)를 이용해 끌어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포르쉐는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사실 이때까지 헨쉘의 프로토타입은 시동 한번 걸어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 결과 라스텐부르크까지의 길은 너무도 멀수밖에 없었다.
양 차량은 몇백미터 가지도 못해 주저앉곤 했고 그때마다 기술진들이 달라붙었다.
이렇게 예닐곱번의 수리를 거친 끝에 히틀러의 눈앞에서 시험에 응할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인 4월 20일 아침, 아르놀트는 히틀러가 오후 2시경에나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하고 말썽많은 VK4501(H)의 최종 감속기(로드휠을 직접 구동하는 부분) 를 분해해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특유의 변덕을 부려 예정보다 세시간이나 빠른 오전 11시에 나타남으로해서 헨쉘사의 기술진들은 기어를 다시 조립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어야만 했다.
양차량은 우선 최대 속도를 테스트하기 위해 수백미터를 전속주행하게 됐다.
포르쉐의 VK4501(P)는 1,000미터 이상을 시속 50km로 성공적으로 주행했다. VK4501(H)도 약 850미터를 시속 45km로 주파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헨쉘의 프로토타입 엔진이 과열되어 아르놀트는 차량에 불이 붙을까 노심초사했다. 결국 간신히 참관단을 지나 차량을 임시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주행시험 결과 포르쉐의 차량이 더 빨랐기 때문에 참관단의 분위기는 VK4501(P)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아르놀트는 한번더 기지를 발휘해 군수상 알베르트 쉬페어에게 접근한 후 양 차량의 기동성을 시험해보자고 제안했다.
전날부터 보아본 바로 그는 포르쉐 차량의 선회성능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VK4501(H)의 선회성능은 대형전차치고는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기동성시험의 결과는 대세를 역전시키고 말았다.
이 외에도 포르쉐의 차량은 2대의 엔진으로 2대의 발전기를 구동시켜 최종감속기어를 돌리는, 매우 복잡한 방식이었던 점이 감점요소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VK4501(H)이며 Tiger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결국 포르쉐팀과 헨셀팀의 경합의 승자는 헨셀팀의 차량으로 결정나게 되었다. 사진은 막 공장에서 출시되고 있는 시제품 티거 전차의 모습]
Ferdinand
비교 평가 이전에 Dr.Porsche는 당연히 자신이 개발한 전차 VK4501(P)가 채택되리라 여겼기 때문에 90대의 차체를 미리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 차체는 개조를 통해 88mm 71구경을 장비한 구축 전차 Ferdinand(Elephant)로 사용된다.
Tiger - 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새로운 중전차의 정식명칭은 6호전차 H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열대용 필터 장착)였으나, 곧 6호전차 E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E)으로 변경된다.]
티거의 최초 정식 명칭은 6호전차 H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열대용 필터 장착)였으나, 곧 6호전차 E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E)으로 변경된다.
[새로운 6호전차는 당시의 어떤 전차와도 1:1 상태에서 지지 않을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가진 전차였다]
하지만 아군,적군을 불문하고 모두 티거(과거에는 영문식 발음으로 타이거로 불렀으나 원어인 독어에 맞게 독일어식으로 티이거라 부르기 시작했고 현재는 좀더 정확한 표현으로 티거라고 부른다)로 불렀다.
훗날 티거 2가 등장하면서 티거I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공식명칭은 아니다.
- Tiger의 생산, 교육 및 내.외부 구조 -
헨쉘사는 중공업과 철도장비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던 기업으로 특히 기관차와 대형 크레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헨쉘은 티거와 같은 중전차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거의 갖추고 있었고, 아르놀트가 이끄는 우수한 기술진을 보유했으며 자체의 주행시험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모든 핵심장비 - 차체, 포탑등 - 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포탑링의 가공과 같은 정밀작업도 외부의 도움없이 할수 있었다.
티거의 최종조립이 이루어지는 건물은 티거 전차의 차체도 왜소해 보일 정도로 거대했으며, 하루에 6-7대의 티거를 출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티거의 승무원은 기존 전차 부대원 전차 훈련 학교의 우수한 학생들 가운데에서 선발됐다.
이들은 차량을 익히기 위해 헨쉘공장을 방문, 각 구성품의 생산과 최종조립과정을 견학했다.
Tigerfibel
[티거전차 승무원들을 위해 티거피벨(Tigerfibel) 이라는 소책자가 만들어졌는데,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티거를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어서 인기가 높았다.]
승무원교육을 위해 티거피벨(Tigerfibel) 이라는 소책자가 만들어졌는데,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티거를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어서 인기가 높았다.
티거는 총 1,354량이 생산되었고, 1944년 4월 한달간 105량이 출고됨으로써 피크를 기록했다. 생산기간은 1942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였다.
적은 수량만 생산된 원인은 독일의 물자부족과 1944년 1월 티거2가 등장한 점 등이 원인이었다.
티거는 거대한 몸집에 비해서는 기동성이 좋았지만, 아무래도 판터 등의 中전차에 비하면 둔한 점이 있었다.
또한 복잡한 구조로 인하여 생산단가가 높았으며, 정비유지도 용이하지 않았다.
중량 또한 당초 계획의 45톤에서 11톤이상 초과하고 있었다.
여기서 독일과 미국의 생산방식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측이 원래 계획에 거의 근접한 수만큼의 티거를 생산했지만, 3년동안 생산된 수량은 1,354량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미국이 대전말기 급히 개발한 T26E3(M26)는, 불과 6개월만에 1,350량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승리와 패배의 갈림길이 있었던 것이다.
티거의 구조는 포탑 후방에 2개의 대형 수납 공구상자가 달린 것을 제외하면 ProtoType인 VK4501(H)과 거의 유사하다.
[동부전선에 급파된 티거의 모습 티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전차였으나 히틀러의 고집으로 동부전선에 3량이 투입되어 격파되거나 노획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차체는 수직장갑판을 용접해 만들어졌으며 끝부분을 서로 물림으로써 견고함을 더했다.
차체전면장갑판은 100mm였으며, 만텔 역시 같은 두께였다.
측면장갑판은 60mm지만 차체상부와 리어패널은 80mmm였다.
포탑은 82mm장갑판을 말굽 모양으로 구부린 형태로서 상면 장갑판은 25mm였다.
[Tiger - 단면도1
내부는 운전석,무선수석,포탑전투실과 엔진실등 크게 네부분으로 나뉜다.
운전석과 무전수석 사이에는 육중한 트랜스미션과 최종감속기어가 가로막고 있다.]
운전석은 차체 앞쪽에 있는데, 조향은 유압식 핸들로 이뤄졌고 파손될 경우를 대비해 2개의 기계식 레버가 준비돼 있었다.
이 레버들은 각각 한쪽씩의 기동륜과 연결돼 있으며 주차 브레이크로도 사용되었다.
[티거전차의 운전석의 모습.. 일반 핸들형태로 되어 있으며 조종성은 이외로 좋았다고 한다.]
[Tiger의 운전석 - 좌측부터 handbrake, left steering stick, steering wheel, right steering stick, gear 조정 레버 스티어링 휠 우상단에 있는 작은 휠은 조정석 바깥에 있는 관측창의 높이 조정용임.]
무전수는 차체 우측에 앉아서 통신뿐만 아니라, 기관총수 역할도 했다. 차체기관총은 7.92mm MG34로, 표준형 큐겔블렌데 마운트에 장착돼 있었다. 무전기는 무선수석 좌측, 트랜스미션 상부에 설치됐다.
포탑링은 직경 1.85미터로 매우 큰 편이며 세개의 지주 아래 원형의 바닥판이 설치돼 있었다.
[티거전차의 주포인 주포인 'KwK 36'은 88밀리 대공포를 전차용으로 개조한것으로 2천미터 거리에서 연합군의 전차를 간단히 격파할수 있었다]
주포인 'KwK 36'이 워낙 길었으므로 포미는 포탑의 거의 뒷부분에 걸칠 정도였고, 이에 따라 포탑은 사실상 좌우로 분할된 상태였다.
주포의 부양 또한 수동식 핸들에 의존했으므로 결국 포수의 경험과 솜씨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셈이었다. 포수 앞에는 차체에 대한 주포각도를 알려주는 원형 계기판이 있어서 급박한 전투의 와중에서 목표를 신속히 조준하고 새로운 목표를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계기판에는 시계처럼 1-12의 숫자가 표시돼 전차장의 방향 지시에 신속히 반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티거전차의 조립라인의 모습 티거 전차를 생산에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 차량으로 대량생산에는 적핮하지 않은게 최대의 단점이였다. ]
장전수는 주포 오른쪽에 자리잡고, 포탄의 적재임무를 담당했다.
포탄은 포탑바스켓 아래, 차체전투실 바닥, 전투실 좌우측 등에 보관되어 있었다.
Tiger - 단면도2
전차장은 주포의 왼편, 포수의 뒷쪽에 위치했다.
[티거전차의 포탑은 꽤 큰편이였으나 주포가 워낙 큰넘이라 그리 남는 공간이 있지는 않았다]
전차장용 큐폴라는 초, 중기형까지 원통형 드럼 모양으로 5개의 방탄 관측창이 설치돼 있었고, 포수석에 설치된 것과 같은 포탑 각도를 표시하는 원형 계기판이 장착됐다.
또한 거리측정기와 포병용 쌍안경을 장착할 수 있는 마운트가 부착되었다.
주포는 KwK 36 88mm 56구경으로서, 워낙 무거웠으므로 포탑 오른쪽 벽에 균형을 잡아주는 스프링을 장착해 조작을 쉽게 했다.
포수용 선회 핸들에 붙어있는 전기스위치를 누르면 포탄이 발사됐다. 포탄은 총 92발의 고폭탄(HE)과 철갑탄(AP)이 적재됐으며 동축 및 차체기관총을 위해 4,800발이 실려있었다.
이외에도 근접전투를 위해 9mm MP40기관단총 1정이 차내에 보관됐다.
이 기관단총은 포탑바스켓 좌우측에 있는 피스톨포트를 통해 발사됐다. 그러나 중기형부터 오른쪽의 피스톨포트는 승무원 출입용 비상해치로 대체됐다.
포탑의 양쪽 앞에는 90mm NbK39 연막탄 발사기가 각각 3기씩 장착돼 있었다.
한편 대전차공격을 시도하는 보병으로부터의 방호대책으로 차체 상부에 S마인 발사기가 장착됐다. S마인은 지름 4인치, 길이 5인치가량의 원통형으로 내부에는 360개의 볼베어링이 들어있는 인마 살상용 무기이다.
발사되면 공중으로 3-5피트가량 튀어올라 폭발하며 사방에 베어링을 흩뿌린다.
장착위치는 차체상면 양쪽의 앞,중간,뒤등 최대 6개소이다. 그러나 중기형 이후부터는 회전식 발사기 1기를 포탑상면에 부착해 360도 발사가 가능하도록 변경되었다
티거의 중량은 애초 30톤급에서 57톤으로 거의 2배가량 늘어났기 때문에 현가장치는 다수의 토션바에 대형 로드휠을 겹친 매우 복잡한 형태가 되었다.
[티거전차는 전통적인 토션바방식과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를 이용하였는데 이것은 바퀴를 여러개 겹쳐 전차의 하중을 지탱하는것으로 57톤이 넘는 티거의 경우 당시 기술로는 적합한 방식이였으나 이로인해 차체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제작단가나 방법도 복잡해지는 이유가 되었다]
캐터필러는 725mm에 달하는 광폭이었으므로, 이것을 실을 경우 화차보다 폭이 넓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520mm짜리 수송용 캐터필러가 별도로 필요했다.
이때는 또 바깥쪽의 로드휠 8개(한쪽 4개씩)를 떼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티거는 특유의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를 이용하엿기 때문에 독일의 철도에는 규격이상으로 사용할수 없었는데 티거의 캐터필러는 725mm에 달하는 광폭이었으므로, 이것을 실을 경우 화차보다 폭이 넓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520mm짜리 수송용 캐터필러가 별도로 필요했다. 이때는 또 바깥쪽의 로드휠 8개(한쪽 4개씩)를 떼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을 떼어내고 장착하는 일은 일일히 손으로 해야했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중 하나였다]
따라서 장비 담당자들은 수송 루트에 철교나 터널이 없을 경우 이런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화차에 싣곤 했다.
티거 1 초기형은 마이바하 HL 210 P45 650마력 엔진을 장착했다.
이 엔진은 배기량 21,000cc의 V형 12기통 가솔린엔진으로 차체 뒷부분 중앙에 장착되었다.
HL 210 P45
1943년말부터는 보다 강력한 배기량 23,000cc의 마이바하 HL 230 P45 700마력엔진으로 교체된다.
HL 230 P45
티거의 엔진은 중량에 비해서 출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얻고 있었지만, 다른 전차를 견인하는 등의 무리한 부하를 가하지 않으면 비교적 신뢰성이 좋은 편이었다.
[대전중반부터는 출력이 강화된 HL 230 P45로 교체되었는데 이후 출력부족 문제는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이럴 경우 견인하던 차량이 고장나면 두대를 모두 잃게되는 셈이므로 독일군은 공식적으로 이를 금지했다.
[당시 독일군은 마땅한 중전차 견인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고장난 티거를 티거로 견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럴 경우 견인하던 차량이 고장나면 두대를 모두 잃게되는 셈이므로 독일군은 공식적으로 이를 금지했다. 독일군이 장비한 10톤트럭을 이용할 경우 총 3대의 트럭이 있어야 1대의 티거를 견인할수 있었고 전장에서 이런 트럭을 구할방법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티거는 파손시 회수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종 감속기어(final reduction gear)는 헨쉘사가 영국 메리트 브라운사의 제품을 토대로 개발한 것이다.
티거의 트랜스미션은 전진 8단 후진 4단의 다양한 기어비를 제공하고 있었으므로 동시대의 다른 전차에 비해 훨씬 우수한 조작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최종 감속기어나 트랜스미션에 고장이 발생할 경우엔 별도의 트랜스미션 커버가 없기 때문에 포탑을 들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뛰어난 유압시스템 덕분에 포탑을 들어올리는 작업은 비교적 용이했다고 한다.
티거 1 초기생산분 495량은 수심 4미터까지 도하할 수 있는 슈노켈장치가 부착됐다. 하지만 실전사용 결과 별로 쓸 일이 없었던지 이후에는 수심 1.3미터를 도하할 수 있는 간단한 도하장비로 교체되었다.
[티거 1 초기생산분 495량은 수심 4미터까지 도하할 수 있는 슈노켈장치가 부착됐다. 하지만 실전사용 결과 별로 쓸 일이 없었던지 이후에는 수심 1.3미터를 도하할 수 있는 간단한 도하장비로 교체되었다.]
또한 건조 기후에서 사용할 차량에는 특제의 파이펠(Feifel) 에어 클리너가 부착되었다.
[초기 티거에는 정교한 파이펠(Feifel) 에어 클리너가 부착되었다. 이는 거친환경에서도 정화된 공기를 엔진에 공급해주는 장비였지만 중기형 이후에는 페지된다]
이 장치는 다량의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부착된 거승로 엔진과 강철제 덕트(duct)와 고무호스로 연결됐다.
무전기용 안테나는 엔진데크 오른쪽 후방의 마스트에 하나가 설치됐다.
- 실전 및 개량 -
독일군에서 최초로 티거를 수령한 부대는 502 중전차대대(sPz.Abt.502)로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방면에 4대를 투입했다.
[최초로 레닌그라드 방면에 투입된 티거 ..아직 준비가 안되었지만 히틀러의 독촉으로 502 중전차대대(sPz.Abt.502)로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방면에 4대를 투입했다.4대 모두 기관고장으로 제대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관통된 전차는 없었고 이중 1대가 소련군에 나포되어 연구하는데 이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전투에 투입된 첫날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경험이 풍부한 소련군 대전차포병에게 전차가 기동하기 어려운 습지와 삼림지대에서 헤매는 티거는 손쉬운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망신스러운 데뷔전에서 격파된 4대 가운데에서 3대가 회수되었고, 운전 실수로 캐터필러가 망가진 1대는 소련군에 노획되었다.
독일군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4대 모두 장갑이 관통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소련군은 노획한 티거를 테스트해본 후 모스크바의 고리키 공원에 전시한다.
[소련군에 노획된 Tiger - 쥬코프 원수가 시찰하고 있다.]
하지만 티거의 진가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502 중전차대대는 곧 완전한 편성의 1개중대를 티거로 장비하고 본격적인 전투에 나섰다.
1943년초 소련군의 동계공세 넉달간 독일군이 파괴한 전차중 1/4은 이 중대가 격파한 것이었다. 이 중대의 가용차량이 7량을 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전과인 것이다.
[이후 문제점을 해결한 티거는 크루스크 전투에 150여대가 투입되어 소련의 최신 전차 t-34-76형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치게 된다]
1942년말부터 속속 티거 부대가 창설돼 북아프리카및 아프리카, 이탈리아등에 배치되고 승무원 훈련을 위한 훈련센터가 독일과 프랑스에 설치됐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서도 티거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당시 이에 맞설 전차가 없었다 영국군및 미군등 연합군은 공식적으로 티거를 만나면 도망쳐도 좋다는 아이젠아워 당시 총 사령관의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독일군은 티거 대대를 최소한 군단급 이상의 직할부대로 운영했는데 각 군에 10개, SS에 3개의 독립중전차대대를 편성했으며 훈련대대 1개가 별도로 운영됐다.
한편 독일국방군 최고의 사단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예외적으로 사단직할 티거 대대를 배치받고 있었다.
티거 대대는 핵심작전지역에서 적진을 돌파하거나 주요거점을 방어하는데 투입됐으며 때로는 전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전투단 (Kampfgruppen) 에 편입되기도 했다.
[회의중인 전차장들 이때부터 일부 전차병들은 유보트용 가죽자킷을 입기도 하였는데 이는 멋이라기 보다는 피탄시 가죽캐칫이 화염으로 부터 승무원을 보호해주는 역활을 탁월했기 때문이다]
한편 티거의 설계자인 쿠르트 아르놀트는 일선 중전차대대의 장병을 접촉하며 개선점을 찾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은 군수업체와 일선부대간의 직접접촉을 허용치 않고 있었으므로 이런 접촉은 미밀리에 이루어졌다.
전선의 장병들이 가장 먼저 호소한 것은 섀시와 동력부에 대한 것이었다.
Tiger 초기형 - 1943년 5월까지 생산
[1941년부터 1943년 5월까지 생산된 이타입은 파이젤 필터나 도하장비등 거의 모든 장비가 풀옵션으로 장착된 타입이다. 아직 전쟁중 물자의 부족을 겪지 못해서인지 대부분의 부품들이 다 붙어있는것이 특징이다.]
[티거 초기형의 가장 큰특징은 도하장비를 장착할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무게 57톤의 티거전차가 제대로 건널 다리가 없을것이라는 생각으로 도입된것이지만 중기형부터는 단가문제로 페지된다]
출력부족 문제는 원래의 650마력 엔진을 700마력엔진으로 교환함으로써 약간 완화됐다. 이로써 티거의 성능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엔진출력에 여유는 없었으므로 다른 티거를 견인할 여력은 없었다.
[티거 초기형은 아직까지 물자부족과는 먼 이야기라 설계상의 모든 장비가 다 장착된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외형적으로는 두개의 전방 라이트와 후방의 파이젤 필터와 연료파이트 등이 특징이다]
결국 적당한 중전차 견인 차량이 필요했지만 수도 부족할 뿐더러 대개는 판터 부대를 뒷바라지하는데도 힘이 부친 상태였다.
Tiger 중기형 - 1943년 5월부터 1944년 2월까지 생산
[중기형으로 불리는 타입은 1943년 5월부터 1944년 2월까지 생산된 티거기종을 말한다. 이때부터 물자부족을 느끼면서 생산공정을 간략화하게 되고 찌메리트 코팅이 기본적으로 코팅되게 된다. 라이트가 1개인 점과 전차장의 큐폴라에 대공기관총용 마운트등이 설치된것도 중기형의 특징중 하나]
1943년부터 독일군은 너무 많은 병기의 종류에 따른 수리부속 보급의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각 장비들간의 부품 공용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43년말부터 티거 1은 티거 2용으로 설계된 신형 큐폴라를 장착하게 됐다.
이 큐폴라의 장착과 함께 포수용 조준기도 단안식 TZF9c로 변경됐으므로 후기형 차량은 만텔 좌측의 구멍이 하나만 뚫려있다.
[중기형으로 오면 실전으로 겪으면서 필요없는 부품들이 간략화 되거나 추가되게 된다 가령 차체 이곳저곳에 있던 S마인발사기와 포탑양옆의 NbK39 연막탄발사기가 폐지되고 대신 포탑에 회전식 발사기 1기가 장착됐다.]
차체 이곳저곳에 있던 S마인발사기와 포탑양옆의 NbK39 연막탄발사기가 폐지되고 대신 포탑에 회전식 발사기 1기가 장착됐다.
이 발사기에서는 인마살상용 폭탄이나 연막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장착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벤틸레이터는 차체 정중앙으로 옮겨졌다.
차체 양쪽에 있던 보쉬 헤드라이트는 하나로 줄고 장착위치도 조종석과 무선수석 사이 중앙으로 옮겨졌다.
Tiger 후기형 - 1944년 2월 이후(강철 로드휠(Steel-rimmed roadwheels) 장착
[Tiger 후기형 은 1944년 2월 이후 생산되 타입으로 가장 큰 특징은 티거 2와 판터 2용으로 개발된 강철 로드휠(Steel-rimmed roadwheels) 장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심각한 물자부족으로 고무를 구할수 없기 때문이였다]
1944년초에는 티거 2와 판터 2용으로 개발된 강철 로드휠이 장착되기 시작했다. 이때 양측 1,3,5,7번째 전륜의 맨 바깥쪽 바퀴가 폐지되므로써 현가장치에 얼음이 달라붙는 문제가 다소 완화되었다.
공장에서 파이펠 에어클리너를 장착하는 일도 1943년을 마지막으로 중지되었다.
티거 후기생산형은 생산당시부터 대부분 자기흡착식 지뢰에 대비해 전체 수직면에 찌메리트코팅을 한 상태였으며 엔진데크의 흡/배기그릴위에는 나뭇잎등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강철 메쉬를 깔았다.
한편 지휘전차의 부족 때문에 티거 1 가운데 84량이 지휘전차로 개조됐다. 이 전차는 포탄탑재량을 66발로 줄이고 기관총탄도 4,050발로 줄인 대신 통신장비를 강화했다.
[지휘전차의 부족 때문에 티거 1 가운데 84량이 지휘전차로 개조됐다. 이 전차는 포탄탑재량을 66발로 줄이고 기관총탄도 4,050발로 줄인 대신 통신장비를 강화했다. 티거 1 지휘전차의 정식 명칭은 Panzerbefehlswagen mit 8.8cm KwK L/56, 혹은 Panzerbefehlswagen Tiger ausf. E이다. ]
티거 1 지휘전차의 정식 명칭은 Panzerbefehlswagen mit 8.8cm KwK L/56, 혹은 Panzerbefehlswagen Tiger ausf. E이다.
[Tiger 지휘 전차(Panzerbefehlswagen Tiger ausf.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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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파트2가 기대됩니다.
정리하다보니 파트로 5개는 나올듯 하네요..머리아퍼라~~
명품 전차죠..늘 좋아라 합니다..이놈이 경사 장갑이었으면..아마도 우린 일본어 하고 있었을지도
이넘 경사장갑 버젼이 나중에 소개하할 쾨니어스 티거 즉 킹타이거 라 불리는 티기-B형입니다. 대전후반에 등장해 이미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지는 못햇지만 당시 1;1로 붙어서 이를 관통할 전차는 거의 없었고 당시 개발되는 모든 전차의 타도목표가 된 무시무시한 넘이였죠..티거1에 장착된 것과 같은 88밀리지만 포신의 길이가 더 길어 셔만의 경우 3천미터 이상에서도 격파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200밀리급에 해당되는 경사장갑을 채용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죠.. 다만 안타까운것 그에 따르지 못하는 엔진과 과다한 무게로 인한 고장으로 대부분 버려지거나 항공기의 폭격으로 모두 타버렷다는게..
정말 그렇네요 --;
참 대단한 민족입니다 독일..그 민족성때문에 전쟁에 졌다는 소리도 있지만..어디까지나 전쟁은 밴츠가 아니라 트랙터가 짱이죠..그래서 소련이 이겼을지도 모르죠
여담입니다만.. 2차대전 당시 일본이 티거를 수입하려 했는데 이넘을 도대체 들여올 방법이 없다는 점이.. 바다는 미해군의 잠수함으로 득실대는 상황이고.. 아쉬운대로 독일로 부터 티거 설계도면을 받아왔지만 당시 일본 공업기술력으로는 이를 따라 만들 처지가 못되었다는 웃지못할 스토리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진짜 일본이 티거급의 중전차를 만들었다면 미군도 그리 만만하게 일본에게 승리를 얻기는 힘들었겠죠.. 티거한테 맨날 줘터지는 셔먼이 일본군에게 티거급으로 불리는 존재였다니... 이사진이 독일에 티거전차 사러왓다가 티거 타보는 일본군 구매팀 사진이랍니다.
일본애들이 이놈 라이세스 생산 했다면 독일 놈들보다 더 독한놈으로 튜닝 했을겁니다
티이거가 매력적인건 사실이지만~ 저는 킹타이거를 더 좋아 해서리~ㅡ.,ㅡ; 잘 보고 갑니당!
티거후에.. 킹타이거 갑니다.. 이게다 트럼페터 39만원짜리 1/16 킹타이거 일반판을 위한 터닦기라... 티거를 알아볼라면 원조격인 티거-1 을 빼고는 말하기 힘들죠...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형만으로도 다른 전차들에 비해 육중함이 눈에 띄는데 실차는 느낌이 어땠을까여. 전에 가조립했던 초기형을 레닌그라드 버전으로 도색해놨는데, 볼수록 매력적인 전차라는 생각이 듭니다. pt2기대하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톰캣이 에어로 매니아들의 로망이라면 티거전차야말로 전차 매니아들의 영원한 로망이죠..!!
단단하고 튼튼해보이네요. 디자인도 각진게 멋지구요.. 전차만드는 노하우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독일제 승용차들이 유명한가봐요..^^
사실 모르는 사람들이 일제 찾는데 독일제품의 무식하리만큼 견고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죠~~ 그넘의 가격만 아니라면요~~
긴글이지만, 아주~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 전에, 티거전차의 기동 동영상을 본적이 있는데,... 기동할때 궤도의 이완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막상, 야지에서는 불순물-진흙,돌덩이...-등이 많이 껴서 빠질것같은 느낌 이더라구요.
티거가 장비하고 있던 오버램 방식의 휠은 과중한 차체 무게를 분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였지만 너무 복잡하고 만들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휠 사이에 진흙이 끼어서 밤새 얼어붙으면 휠을 부서먹기도 하고 말씀하신대로 휠이 이탈되는등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후기형에 이르면 스트로킷 설계를 좀 바꾸고 철제휠 사용과 바깥쪽 휠을 떼어내는등의 개량을 가하게되면서 좀 나아졌다고 합니다.
너무자세하고,재미있늗설명,감사합니다. 노몬한에서도 bt시리즈에 발리던,일본군에게는 티거는 꿈만같은 존재였겠지요.
일본이 말도안되는 경전차 가지고 아시아를 호령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을 비롯 제대로 된 기갑전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은 이점을 이용 유럽에서 티거한테 개발리던 셔먼을 태평양전선에 투입하여 호랑이 없는 전차에 맹수노릇좀 하죠.. 사실 그전에 경전차인 스튜어트 가지고도 일본군 전차세력을 일소하는데 별 어러움이 없었다는.. 이 사진이 그 유명한 셔먼 전차 어부바 사진으로 전투후 일본군 전차를 통째 업고 운반하는 셔먼전차의 모습입니다. 태평양전쟁에 투입된것은 비교적 성능이 떨어지는 a2타입이였데도 말이죠..
예전에 헤스 대령이 쓴 Battle Hymn을 읽다가 한국전에서 사용된 티거전차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전차가 출현하여 항공지원을 요청받고 가보니 대령이 유럽에서 본 독일군의 티거전차가 도로에 있다는 내용이었죠. 번역본을 읽어서, 그게 티거1인지 티거2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책에 따르면, 아마도 소련군에 나포된 전차가 한국까지 굴러오게 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우리와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전차인 것 같네요..
아마도 그건 JS-2 중전차였을 겁니다. 어차피 고속으로 날아가는 항공기에서 땅바닥에 붙어 있는 전차를 식별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게다가 소련군이 노획한 티거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고, 정비상의 어려움 등을 고려한다면 이게 북한군에까지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