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악비 화로 (火爐)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설날이 가까워오면 방안에 이글거리는 숯불을 담은 화로(火爐)가 생각난다. 그 무렵이 가장 춥고 추억이 서려서 인지 모른다. 한편, 화로를 생각하면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말도 떠오르는데 그것은 화로와 하로의 음이 엇비슷해서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화로(火爐)와 하로(夏爐)는 전혀 다른 별개의 개념이다. 전자는 명사로서의 무엇을 지칭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고 다분히 상징어이다. 여름의 화로처럼 당장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미리 준비해 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전 난방시설이 시원찮던 시절에 화로는 방안에 갖춰놓아야 할 필수품이었다. 가옥 구조상 외풍이 심하여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아니되는 품목이었다.
한겨울, 자리끼와 천정은 얼고 문풍지가 울어대는 날에도 방안에 숯불이 이글거리는 화로가 놓이면 얼마나 방안이 훈훈했던가. 실제적으로도 화로는 크나큰 방한의 효과를 주었다.
이즘 나는 공연히 일손을 놓고 허둥대며 지낸다. 명절이 가까워오니 사람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객지에는 집을 떠나 사는 자식들이 있는데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러는데는 들어가는 나이 탓도 있는 것 같다. 해마다 맞이하는 설이건만 마음이 조급해 진다. 금년은 작년에 비해 윤달이 든 탓에 명절이 조금 늦춰졌다. 예전 같으면 보통 1월 하순경에 설을 맞는데 금년에는 2월에 맞게 된다. 그 때문에 늘 입춘절기 안에 든 설이 이번에는 훨씬 벗어나게 되었다.
설 무렵은 언제나 추위가 찾아온다. 흔히 소한, 대한 때가 가장 춥다고 하지만 설 무렵도 만만치 않다. 금년은 윤달이 들어있기도 해서지만 동장군의 기세가 늦게까지 등등하다. 들리는 말로는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강원도 평창은 뒤늦은 추위가 몰아닥쳐 기온이 무려 영하20를 상회한다고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추위다.
그에 비해 남녘의 추위는 추위라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옷 속을 파고 드는 체감추위는 만만치가 않다. 두꺼운 옷을 껴입고 귀막이까지 하는데도 한기가 몸속을 파고 든다. 하나, 입춘이 이미 지났고 우수가 내일 모레이니 머무는 동장군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아무리 춥다 해도 방안에 들어서면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외출을 했다가 언 몸으로 들어오면 옛날 방안에 피워놓던 화로의 온기가 절로 그리워진다.
그 중에서도 떠오르는 것은 설날 아침에 인근 산자락에 잠든 조상님들의 산소에 성묘를 마친 후, 마을 어른들께 세배 드릴 때 내어주던 화로를 잊을 수 없다. 집 집집마다에서는 늘 잘 피워낸 화로가 몸이 언 세배객을 맞았는데 그것이 언 손을 녹여주었다.
“이리 가까이와 불 쫌 쬐어라.”
음식보다도 먼저 화로를 내주었다. 그때 보면 방문하는 집집마다는 내어주는 화로가 각기 달랐다. 사는 형편에 따라 살림이 넉넉한 집은 청동화로나 놋쇠화로를 내주고, 생활 형편이 어려운 집은 투박한 곱돌화로를 내주었다. 그 안에 잉걸불이 피워있었다. 그중의 어느 할아버지 댁이다. 처마 낮은 집을 들어서니 금이 간 곱돌화로에 삼베헝겊을 덕지덕지 붙인 배악비화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언 몸으로 들어서니 그 화로를 내주었다.
그 일은 반세기를 훌쩍 지났건만 잊혀 지지 않는다. 비록 사는 형편은 배악비 화로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넉넉하고 밝으셨다. 그런 품성으로 당신은 마을에 크고 작은 일들을 앞장서서 벗고 나서 일을 했다. 비록 밭뙈기 하나 없이 남의 집 일을 도와주며 사는 형편이었지만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른을 선친께는 늘 깍듯하게 대하고 설 때는 꼭 찾아가 세배를 드리라 이르셨다.
그분은 심성이 착하셨지만 자식농사는 잘 짓지 못하였다. 두 자손이 효도를 못하고 큰아들은 머슴살이를 전전하면서 말년에는 마을의 풍기문란자로 지목되어 내 침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심신미약자로 엉터리 징병검사 때문에 합격이 되어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사고가 나 죽고 말았다. 입대한지 일 년여 만이고 휴가 다녀간지 두말 만이었다. 그는 죽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통상 군복무 중에 사망하면 군에서 장례가 치러지는데 그는 어찌된 일인지 시신이 유골함에 담겨져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렇듯 그 집은 박복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내가 화로이야기를 하다가 조금 엇나갔지만 오늘 갑자기 화로를 떠올린 이유가 있다. 엊그제 지인이 사설로 운영 중인 생활사 박물관을 들렀더니 앙증맞은 인두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니 자연스레 화로가 떠오르고 생각난 것이다.
지금 가정에서 화로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문명의 혜택으로 윗목 아랫목 가리지 않고 따뜻하니 설자리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얼마나 긴요한 도구였던가. 윗목의 다리끼가 어는 것을 막아주는 한편으로, 찌개를 끓이거나 덥히고 인두를 꽂아서 동정을 다리는데 얼마나 유용하게 쓰였던가.
그리고 손님이 찾아오면 ‘어여 몸을 녹이라’며 내어주어 인정을 보여주었던가. 화로는 내 개인적으로도 추억이 깃들어 있다. 어렸을 적 그곳에다 계란밥을 해먹고 설이 지난 후 딱딱해진 가래떡을 부젓가락위에 올려서 구워먹기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잊을 수가 없다.
예로부터 화롯불에는 넣지 말아야할 금기의 나무가 있었다. 그것은 옷 나무와 물오리나무로 냄새도 안 좋고 속설에 안 좋은 기운이 풍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득 설날이 다가오니 형제들이 함께 모여 성묘와 세배를 다니던 생각이 새로워진다. 웃어른에게 세배를 들이면 “너는 몇째냐?” 라고 묻던 말이 그리워진다. 그것을 어찌 몰라서 일까 마는 찾아준 것이 고마워서 그렇게 말씀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때 마주했던 배악비 화로, 그런 화로가 아직도 어느 박물관에 놓여 있다면 한번 가서 만나보고 싶다. 그 어른을 대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싶다. (2018)
첫댓글 제 어린시절에 화로는 겨울철 농가의 필수품이었던 듯합니다.
저녁을 해먹은 후에는 아궁이의 잉걸이나 잿불을 화로에 그러담아 부손으로 꾹국 눌러
자리끼와 함께 안방 웃목에 들이는 게 일과였지요.
무쇠화로가 무거워 낑낑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저도 금이 간 무쇠화로를 벳조각으로 붙여 쓰는 건 보았는데 '백악비화로'라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엣날 다리미고 화로고 귀한 줄 모르고 고물로 헐값에 넘겨버린 일들이 아쉽기만 합니다.
홍두깨나 베틀, 가마니틀은 다들 장작을 패서 불때버리고 했으니...
화로에 얽힌 선생님의 추억담에서 정겨운 고향 냄새가 은은히 배어나네요.
설날이 가끼워오니 세배를 다니던 생각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그때 마을 집들을 한바퀴 돌면 제각기 다른 화로가 방에 놓여여 불부터 쐬라고 하였지요.
세배오는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악비 화로, 가난한 살림의 포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설날이 가까이 되면 할머니 어머니는 각종 음식을 만드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고
머슴이 섣달그믐에는 자기 집으로 가니 소여물도 그득 작두로 썰어 놓고
봄에 쌀을 빌려 간 집에서는 농사지어서 쌀가마니를 가져오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되질하여 받고
할아버지와 저를 아버지께서 기계로 머리를 깎아주던 일이 생각납니다.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여 일 년 동안의 때도 벗기고 했죠.
화로에 밤도 칼로 상처를 내 굽고 인절미도 구워 먹으면 어찌 그리 맛이 있던 지요.
임 선생님의 <백악비 화로>를 통하여 그 옛날 어렸을 적 설날이 다가오는 이 무렵이 그려집니다.
사실상 설날연후로 접어들었군요. 옛날 설 풍경이 많이 그려집니다
가까운 인근 산에 잠들어 계신 선조들의 산소에 성묘를 마친후 마을 어러신의
집을 돌면서 세배를 들이면 언손늘 녹이라고 화로를 밀어주셨지요.
다른 집에서 세뱃존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고 떡이며 유과를 먹었었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옛날 겨울 화로의 추억을 소회를 푸셨군요. 저는 화로가 아니라 석유곤로가 기억이 나네요. 겨울철 석유 심부름도 많이도 했었지요. 아무튼 너무도 빠르게 변해가다보니 옛것들이 추억과 함께 사장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근세 100년의 역사는 지금까지 살아온 수쳔년의 변화보다 빠랐다는 것이 중론이지요. 불과 50년전의 생활상도 오늘날에 돌아보면 천지개벽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중에 난방기구도 그 하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