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전쟁 9. 평양성탈환, 행주대첩, 서울수복
작전권 없는 조선의 설음
by온기철 James OhnJan 22. 2022
나무위키; 이여송
평양성 탈환
명나라에서 온 인사들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유성룡은 이여송을 극진히 모셨다. 변변한 군대가 없었던 조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명나라 군대가 대신 싸워주는 방법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여송에게 평양성의 지리와 일본군의 동양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명나라 군대 3만명이 우수한 대포로 평양성을 총공격 했다. 불랑기포, 멸로포, 호준포등 당시에 가장 발달된 화력이었다. 강행군으로 피로에 지친 일본군은 명군에게 압도되었다. 일본군 1200명의 목을 베었고 말2900필을 노획 했다. 조선백성 만명이 불에 타서 또는 물에 빠져 죽었다.
명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여송은 자신의 병력 손실을 줄이려고 고니시에게 퇴로를 열어 주었다.
고니시는 평양을 이여송에게 내주고 퇴각했다. 이소식을 들은 선조는 북경을 향해서 5번 절을 했다.
명군 작전참모에게 2번절을 했다. 이여송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이여송에게 사당을 지어 주었다. 산사람에게 세워준 사당이었다. 생사당이라고 한다.
유성룡은 고니시가 퇴각하는 길목에 이일을 시켜 복병을 배치했다. 이여송은 이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니시는 무사히 퇴각했다. 평양성이 함락된 후로는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조정은 명군이 좀더 적극적으로 싸워주기를 바랐다.
왕조실록에는 일본군 수급의 반이 조선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 원군은 남군과 북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여송은 북군이었다. 남군 측에서 북군이 조선 백성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깍아서 일본사람 처럼 꾸며서 수급의 숫자를 부풀렸다고 주장하여 조선 측에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여송을 영웅시 하는 조선에서 그에게 흠이 갈수 있는 조사를 적극적으로 할리가 없었다.
이여송 벽제전투에서 패하다.
일본군이 퇴각한 직후 이여송은 기마병 5천을 이끌 수 고니시를 추격했다. 포대를 동반하지 않은 명군은 조총을 가진 일본군에게 불리 했다. 또한 일본군은 오랜 전쟁 경험으로 백병전에 능숙했다. 고니시는 5만명을 인솔하여 한양으로 가는 중이었다.
벽제관은 경기도 고양시 부근에 있는 역관이었다. 북경을 오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묵었다. 고니시는 이곳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이여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복병의 습격을 받은 이여송은 참패 했다. 부장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평양성으로 돌아 왔다.
이여송 전투 회피, 협상 추구
일본군에게 혼줄이 난 이여송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조급해진 조선 신하들이 이여송에게 싸워달라고 애걸 했다. 순변사 이빈이 명장수에게 싸워달라고 조르자 발길로 찼다. 유성룡이 이여송의 바짓 가랑이를 잡고 싸워달라고 애걸 하자, 이여송은 조선신하들에게 무릅을 꿇으라고 하고, 군량과 말에 먹일 풀을 조달하지 못한 죄를 따졌다. 유성룡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 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여송은 유성룡에게 사과 했다.
일본과 명은 협상후 종전을 원했다.
1593-1594년에 조선에 기근이 와서 70만명 가량이 굶어 죽었다. 그리고 전염병이 퍼졌다. 타향에 와 있는 명군과 일본군에게는 치명타 였다. 명군은 군량미대신 은을 가져와서 조선에서 직접 식량을 구입하려고 했다. 무거운 식량을 북경에서 평양 까지 운반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제해권을 조선에게 빼앗기고 호남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상항에다 기근까지 겹치니 진퇴양난 이었다.
굶어 죽고 전염병에 걸려 죽는 병사가 전 병력의 반 이었다.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서 집에 돌아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명군은 일본군이 명을 침공 할 수 는 없다고 판단 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 한 것이다. 더구나 국내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서 조속한 시일 내에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기를 원했다. 양국은 협상을 선호 했다.
권율 장군과 행주 대첩
권율(daum)
광주목사 권율 은 순찰사가 되어 1592년7월8일 이치전투에서 승리하고 12월에 수원방어에 성공한 후 한양공격계획을 세웠다. 수원 광교산, 양천, 통진, 파주와 양주에 병력을 배치했다. 명군과 연합하여 한양 탈환 작전을 계획 했었으나 명군이 전투를 회피하여 조선군 단독으로 한양수복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권율은 행주 덕양산에 군사 2300명을 동원하여 진을 쳤다. 남쪽은 한강변이었고 장릉천 쪽은 절벽이었다. 토성을 복구하고 북쪽에는 목책을 설치하여 방어 했다. 퇴각할 수가 없는 일종의 배수진이었다. 일본군 3만명이 무려 7 차례나 공격했으나 관군과 백성들은 힘을 합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조선군은 화차, 수차석포, 각궁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지자포와 비격진천뢰의 위력에 일본군은 혼비백산했다. 성안에 일본군이 들어 올 때마다 권율은 직접 나서서 싸웠다. 군과 백성들이 의지 할 만한 장수였다. 그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은 주효 했다. 병사들과 백성들은 안간 힘을 다해서 싸웠다.
조선군이 명군의 도움 없이 일본군을 대파하자 이여송은 권율과 조선군의 전투 능력을 인정했다. 3대 대첩중의 하나인 행주 대첩은 조명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전투였다. 권율은 전군을 지휘하는 도원수가 되었다.
한양 수복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 군은 군량부족으로 하루에 한끼만 먹었고 그나마 죽 이었다. 병력은 이미 반 토막 나 있었다. 고니시는 도요토미에게 철수 한다고 보고 하고 한양에서 철수 했다. 1593년4월18일 이었다. 겨우 일년 한양을 차지 했었다. 조선군대는 추격하여 섬멸시키고 자 했으나 이여송은 조선군에게 공격 금지령을 내렸다. 고니시는 명나라에서 보낸 협상 대표격인 심유경과 조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데리고 철수 했다. 이틀후 권율은 한양에 무혈 입성 했다.12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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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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