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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생활 중에서
장 혜 자
詩集 “대나무에게”를 하룻밤에 다 읽고 또 읽으며 애 잔잔하고 아릿아릿한 詩心에 넋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감성의 가장 적나라한 소용돌이가 느껴졌습니다. 두고두고 낭송하겠습니다.
“옥살리,풀라틴”이라는 저의 항암약은 암을 단칼에 베어버려서 재발의 싹도 없애버린 느낌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정상세포까지 죽여 버릴 정도로 독성이 강해 암세포만 죽인 것이 아니어서 무서운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햇수로 3년째 저의 지구력도 정신통일도 망가뜨렸습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가까운 저의 교회에 나가면서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참을 인 자 천 번을 쓰라 시던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을 생각하며 “아이고 나 죽겠다”는 말 대신 범사에 감사함을 깨닫고자 있는 힘을 다 하고 있습니다.
발이 저리는 것만이 아니고 24시간 전기가 통하듯 무릎 밑까지 조이고 아파서 발바닥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기가 충천합니다, 집안에서는 크고 넉넉한 솜버선을 신어야 합니다. 신발은 신을 수가 없어서 모든 외출은 불가능합니다. 두꺼운 면양발로 겨우 병원만, 그것도 남편의 차에 의지하고 다니는데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발밑은 굵은 모래와 공깃돌이 합쳐서 짓누르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한계의 끝까지 참아내고, 부엌일,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양말 속, 버선 속, 신발 속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래와 돌로 가득차서 24시간 비명을 지르게 합니다. 얼마나 아프게 발바닥 뼈 마디마디를 짓누르던 지요.
집안일이란, 예를 든다면 4월에도 미나리 김치를 나만 맛있게 먹는 것이 목에 결려서 커다란 미나리 단 10개(큰 함지박2개분)를 사다가 뻣뻣한 곁줄기는 입사귀와 합께 모두 따내고, 속 줄기의 부드러운 것 만으로만 가려내어 다듬어서 씻어서 뜨거운 물에 여러 번 나누어 살짝 데쳐내고 찬물에 건져서 검지 손가락 길이로 자르고 물기를 빼고 나면 두 개의 함지박이 한 양푼으로 줄어듭니다. 쪽파, 양파, 풋고추, 홍고추, 당근 1개의 채썰기, 배 한 개의 채썰기, 새우젓 육젓에 풀 국 한 컵, 통고추 말린 것을 곱게 갈고, 멸치 액젓 서너 숫갈 쯤 넣고 김치와 똑같이 다진 마늘 다진 생강을 넣어 도움이 아줌마도 없이 혼자서 삼삼하게 버물리자면 하루 온 종일을 고부라져야 합니다.
큰 아들집, 작은 아들집, 우리 집 세집이 나누어서 먹으며 큰아들의 “어머니 무슨 미나리 김치가 그렇게도 맛이 잇습니까?” 그 말 한 마디가 그리도 좋고 또 며느리가, 어머니 너무 맛있어서 아침저녁 잘 먹고 있어요. 라고 하는 마을 들었을 때, 옹글 지다는 말은 이런 때 이지요, 큰며느리도 학교 강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돕고 싶은 마음은 꿀 같습니다. 5월말에는 오이소박이, 잘 자란 오이 40개를 사고 손수 수세미로 씻고 금 뿌리듯 싱겁게 소금에 간 절이고 온갖 양념에 오이 소를 버무려서 오이 속에 박고 세 집이 나누어 먹으며 삼삼해서 맛있게 먹었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여름 통고추도 바닥나고 몸살 끼도 나기 때문에 누가 담으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니 요즈음은 총각무, 얼갈이배추 1단씩 내 것만 담으니 일도 아니랍니다. 일을 만들어 가면서 한다고, 부엌일 좀 그만 하라는 후배 시인, 제 친구들, 일리는 있는 말이지요, 그 많은 항암 약 중에 “풀라틴”을 맞은 사람은 도두 비명을 지르고 4년 반이 지나서야 조금씩 발이 낳아간다는, 병원 대강당 암환자 모임에서의 발표, 다시 재 임상 시험에 들어갔다고 정식으로 발표했습니다. 죽기 살기로 괴로웠던 항암치료 기간은 모든 문병객을 면회 사절했지만, 8,5kg이나 체중이 빠지면서 손님이 와도 이러나 앉을 수조차 없던 순간들이었으니까, 요즈음은 식사도 잘 하고 체중도 전부 회복하고 겉은 멀쩡해졌는데 발 때문에 길 건너 집 앞의 은행출입도 겨우 간신히 다녀야 합니다.
담당의사 선생님은 치료약은 없다고 하십니다. 수술 후 3년이 되어가지만 갈수록 더 아픈 발 때문에 앞으로 2년 더 견디면 슬그머니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믿기지가 않지만 희망이라도 가져 보겠습니다. 신발속도 양말속도 버선속도 써그럭 써그럭 발바닥을 짓누르고 머리 꼭대기까지 신경이 아프고 참는 것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삶을 주신 하나님께서 완쾌도 주시리라 고 기대합니다. 열손가락 끝이 전부 아파서 펜을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시조로 본 풍류 24경” 이란 책은 남편이 먼저 읽고 있습니다. 다시 받아서 읽을 예정입이다.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 선생님께 늦게야 올립니다. 부디 전주에서 문학관을 잘 지켜 주시옵소서.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有終의 美
장혜자
유종의 미란 무엇일까? 한글국어대산전 에는 한번 시작한 일을 끝가지 잘하여서 끝맺음이 좋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신통치 않은 허무간,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스스로 자기자신을 추스리지 못하는것을 무엇 때문인가, 수십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금혼식을 지내도록 정들었던 생활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가. 무가치한 생태로 아무것도 필요한것이 없어졌다. 그이가 한방에서 혼자 앉아 마른기침 한번만 하여도 주위는 충만하고 모든것이 다 있는그대 로 필요하다.의욕이 넘치는 생활의 아름다움들이 어디론가 모두 흩어져버리고 산산조각이 난것이다. 83세까지 부모님의 성묘를 빠지지않고 다니며 전주에서 가까운 소양면의 선산에서 더 이상 고갯길을 넘어 걸어 올라갈 수 없자 부모님을 앞으로 더 이상 찾아뵐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드디어 2014년 11월에 서울집엥서 가까운 일산의 국제공원묘원에 부모님을 모시고 자주 찾아뵈오며 자기자신도 같이 부모닌 곁의 납골당에 합쳐질 미리을 준비하게 되었다. 6시간 동안 부모님 양위분을 화장하여서 욺기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면서 그의 여린 심성은 감당할 수가 없었음이다. 귀가길, 서울까지 빗속에 어두운 밤길을 9시간 동안 달려오게 되었다. 큰아들이 내려와서 운전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앞자리에 눕다시피 기대어 가고 나는 뒷자리에 혼자 앉았다. 평소의 그의 주량은 소주 1병에서 한잔을 덜어내아만 했고 1병을 다 마시면 혀가 꼬부라지고 눈동자가 이상해지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그날은 소주 3병을 몰래 감추어서 갖이고 차에 탔고 3병을 음료수 마시듯 비오는 어두운 밤길에 혼자서 다 마셨다는 것이다. 1병도 못견디는 약한 주량에 안주도 없이 3병을 다 마셨으니 이튿날 부터 식음을 전폐하였다. 갑자기 담낭에 염증이 나더니 동이 없어도 무결석증 담낭열으로 6개월간 치료와 재발이 반복되었다.수술은 불가는상태, 마취주사가 깨어날 수 없는 상태라면서 두분의 박사님이 수술을 거부했었다. 형소에 내앞에 먼져 가야한다던 소원대로 4시간 동안 호흡수가 1개씩 줄어들면서 0 이된 순간 두입술은 곱게 다물고 고요히 눈을 감고 그것이 끝이었다. 고요히 고요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生사病死라 더니 떠남은 이리도 숨막히는 두려움인것일까? 죽지 부러진 새처럼 내 몸과 마음은 무너져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처참한 고독의 심연에 빠지고 말았다. 젊은날에는 한때 술에 취하면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었다고 내자식이 아니라고 어떻게 잘수 있느냐면서 한소리 하고 또 하고 4시간 이상 똑같은 소리를 들러주어야만 했었다. 술이 어느정도 께면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어서 자자고 잠을 청했었다. 나이 들면서 점점 술을 줄이고 술을 끊어갔기 때문에 술버릇도 좋아져갔다. 나는 황혼에 더욱 사이좋게 최고의 배려를 받으며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48시간 맞는 함암주사를 배앞에 매달고 저녘식사는 일주일에 5일간씩 연속 한우 샤브샤브집에 가서 야채와 국물만이라도 먹어야만 그이는 마음을 놓았었다. 점심은 혼자서 굶는것만 같아서 사무실 나가기가 힘들다면서 어느날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와저렸다. 나의 점심을 감독하려고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다던 그이, 민물생선도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5년동안의 투명중 열번이면 열번, 백번가면 백번, 생선살을 발라서 내게 먹이던 그 마음든 억지로는 흉내낼수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대장암 판정이 나자 그이가 가장 충격에 빠졌다. 젊은날 ,주사가 있던 자기 때문에 내가 스트래스를 받아서 대장암에 걸렀다는 것이다. 금혼식 기념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시작된 나의 치료는 그의 정성으로 5년만에 완치판정을 받았다. 눈물겹도록 정성껏 섬세하게 간호해준 그의 덕택으로 나는 지금 재생의길을 걷고있다. 내앞에 먼저 가야한다며 입버룻처럼 말했지만 그이가 입원후 6개원만에, 평소에 건강했던 그이가 홀연히 내앞에 먼저 떠난것은 나는 아무래도 믿을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따뜻하고 섬세하게 나를 간호래 주었던가! 눈물을 쏟으면서 나의 소꿉친구 세병에게 각각 전화를 해서 만약 내가 떠나면 바로 뒤따라서 죽어버리겠다던 그가 갑자가 먼저 떠나버렸다. 짧은 투병기간동안 두아들의 간절한 효도를 받고 나의 최선을 단한 보호를 받았음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수 없다. 옛날과 달리 현대인에게는 늙어서 하게된다는 황혼 이혼이란것이 문제가 되고있다. 나는 황혼에 더욱 사이좋게 최고의 배려를 받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었다. 새벽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전복을 사나르고 망고를 사러 헤매던 그의 정성을 잊을수가 없음이다. 시아버님은 89세에 병명없이 노환으로 가셨으므로 84세의 아까운 나이에 내앞레 눈을 감은 그이가 유종의미를 거둔것이라고 나는 나를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것이다. 젊은날의 주사는 기억도 아스라하고 그 주사를 피아노 소리로 들어줄수 없겠느냐고 애원했던 그이, 오뉴월 염천에도 붕어를 달여 먹이고 인삼 대추어 찹쌀 반수저를 넣어 다려서 매일 물먹듯이 먹게하고 칡가루를 장만해 놓고 매일 아침 출근전에 칡죽을 한컵씩 먹이며 술먹은 속을 열심히 달랬였던 나, 한달이면 25일간을 못먹는 술을 마시고야 귀가했던 그의 주사는 나의 대장암 치료를 정성껏 간병해준 그의 간호와 상쇄되고도 남음이 있다. 5년동안의 나의 치료때문에 차속에서 1시간-3시간 이상씩 기다려준 그이가 너무 미안해서 한번은 어렵게 말문을 열고 너무 미안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 늙어서는 서로가 상대방을 간병하기 위해서 부부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뿐아니 미안하다는 그런말은 다시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와서 그이를 잊지못해서, 미워해보고 싶어서 나빴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간절하게 간호받았던 그의 정성만 기억에 남아서 은혜에 감사하는 행복한 마음만 남아있다. 84의 아까운 나이 이지만 내앞에 조용히 눈을 감은 그가 진정 유종의미를 거둔것이라고 나는 나를 거듭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여행의 추억
장혜자
7월의 장마비가 며칠간 계속되고있다. 수년 동안 살던 여의도에서 7월24일 마포로 이사를 앞두고 있다. 대형트럭 3대에 짐을 옮긴다는데 버릴것도 많고 정리할것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나이 80에 척추관 협착증이며 디스크가 겹쳐서 수술은 불가능 상태라고 한다. 재활의학과의 물리치료에 다니고 있다. 완치는 없다지만 6층의 근골격도수치료와 1층의 3 가지 물리치료를 끈질기게 다니고 있다. 마침 오늘 아침 두째 손녀가 인천공항에서 전화가 왔다. 항가리의 부다패스트로 혼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 할머니" 저 없는 동안 건강하시란다. 워싱턴 주립대학교 1학년인 두째 손녀는 여름방학으로 저의 언니가 일주일전 스톡홀름에 먼져 갔다가 오늘 항가리로 와서 둘이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한다. 밤의 부타패스트의 강물위에서는 항가리안 라푸소디 연주를 들으며 절경의 사원을 바라보는 낭만적인 코스가 있다. 할머니 나 체코의 프라하를 들려서 폴란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다패스트 관광을 했었다고 말해주었다. 동구라파 일주일 관광코스에 들어있는 멋진 여행이었다고 말한다. 나도 한때에 동베르친의 왕궁 도예실에서 실컷 도자기 들을 감상하면서 우리나라의 고려 청자와 이조백자에는 비할바가 못되였으며 우리의 찬란한 문화예술에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였다. 프라하는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다시한번 가야하는 여행코스다. 북구라파 갔을 때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잊을 수가 없다. 스톡홀름에 간 토론토에서 재학중인 큰손녀가 바르셀로나 학회에 가있는 아빠를 찾아가서 만나고 스페인 여행을 거쳐서 돌아오면 어디가 좋았었는지 물어 볼것이다. 내가 스페인의 마드리 공항에 두번째 갔을때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가 마중나왔었는데 마침 도착한 시간이 석양이 기우는 시간 이였다. 미니버스에 일행을 태우더니 출발과 함께 우리를 환영한다는 의미로"먼싼타루치아"를 스페인어로 불러주는것이 아닌가! 잔잔한 바다위로 저 배는 떠나가며 노래를 부르니 나포리 라네. 황혼의 바다에는 저 달이 비취이고 물위에 비친 하얀 안개속에 나포리는 잠잔다. 싼타루치아! 잘있어, 서러워 말어다오! 아! 얼마나 가슴 뜨겁고 미소로운 추억의 한 토막인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돌아 올때에는 씨디 매장을 찾았고"요로고스,달라라스" 그리스 노래 신곡 씨디를 사들고 오면서 얼마나 가슴 설레었던가. 세고비아, 톨레도, 그라나다, 알람부라, 등 얼마나 아름다운 관광의 요새었는가. 스위스 2번 파리 3번 스페인2번 항공여행에 매달렸던 좋은 시절이 있었지 아니한가. 내가 여행에 대한 행복한 이야기를 쓰려하자 즐거운 추억들이 여기저기서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다. 로레라이 언덕에서 내 놓고 한국의 아리랑을 연주 해달라고 했을때 아리랑에 마추어 용솟음치듯 일어나서 춤을 추었던 꿈같은 기억을 끝으로 이만 이 글을 맺고저 한다. 지나간 추억들이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여 조금은 진정하여야 할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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