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사건과 크림반도, 그리고 ‘그레이트 게임’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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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크라이나 사건, 흑해의 크림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커져가고 있다. 이에 문득 남해의 거문도가 생각났다. 내 머릿속에선 크림 반도와 거문도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도에 들어가 거문도를 하늘에서 살펴보니 전략적으로 역시 대단한 要衝(요충)이다. 두 섬 사이에 둥글게 에워싸인 바다는 호수와도 같아서 큰 항구는 아니어도 중계기지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거문도의 명칭이 ‘커다란 문’ 즉 巨門(거문)이지만, 원래는 검은 섬이란 순우리말이고 옆의 동쪽으로 25 킬로미터 떨어진 흰 섬, 白島(백도)와 대비되는 이름이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그것이 정말로 ‘거대한 문’, big gate의 역할을 할 뻔 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슬슬 구한말에 있었던 거문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거문도 사건이란 1885년 당시 대영제국이 러시아 제국의 세력을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불법 점거했다가 2 년 뒤인 1887년에 철수한 일로 설명되고 있다. 구한말 서구 열강들이 벌인 일종의 뜬금없는 해프닝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엉뚱하거나 단순한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거문도 사건은 당시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이 글로벌 차원에서 펼쳤던 거대한 角逐戰(각축전)의 일부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로서는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까지 갔던 대단히 긴박했던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거문도 사건은 거대한 그림의 일부였다.
먼저 사건의 먼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 워털루 전역으로 유렵대륙을 지배하려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퇴장하자 그 공백을 메울 유럽의 강자로 부상한 나라는 단연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이었다. 하나는 해상의 제국이었고 하나는 유라시아 대륙의 강자였다.
러시아 제국은 그 이전 16 세기에 이미 유라시아 대륙의 북쪽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에까지 영토를 넓혔고, 그 이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당시 淸(청) 제국과 1689 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양국의 국경을 정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서쪽의 유럽에서 동쪽의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아우르는 제국이 되었던 셈이다. 그런 러시아 제국의 약점은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는 좋은 항구가 없었다는 점, 따라서 해상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없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런 반면 대영제국은 1858년에 가서 그 자체로서 하나의 광활한 대륙인 인디아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인디아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황제의 왕관 한 가운데를 장식하는 빛나는 보석’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히 영양가가 풍부한 식민지가 되어주었다.
인디아에서 다량으로 생산되는 木棉(목면)으로 맨체스터의 방직공업이 융성해졌고 그로부터 생산된 면직물은 영국은 물론 인디아를 포함해서 전 세계로 수출되어 영국의 재부를 무한정 늘려주었다.
이로서 영국은 사실상 세계의 모든 대양을 지배하였고 그로서 글로벌 최고의 富國(부국)이자 唯一至尊(유일지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대영제국이 독보적인 위치로 치고 나가자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 나머지 열강들은 질시 반 부러움 반으로 대영제국에게 부단히 도전장을 내밀었다.
특히 유라시아의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은 바다로 나갈 제1차적인 통로로서 크림반도가 있는 흑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에 그 명분을 얻기 위해 흑해 남쪽 터키 반도의 당시 오스만 터키 제국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터키 제국 내에 거주하는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하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종교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투쟁의 명분이 되는 시빗거리라 하겠다.)
하지만 러시아의 속셈을 모를 까닭이 없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터키를 지원하고 나섰고 그러자 1853-1856 년 사이에 크림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는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뼈아프게도 흑해 연안에서의 세력을 잃은 러시아는 이제 더 이상 쉽게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러시아는 복수 차원에서 또 다른 노림수를 들고 나왔다.
러시아 제국은 남쪽에 위치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이슬람 왕국들과 토후국을 끊임없이 제압하고 흡수해가면서 남쪽의 영국 식민지 인디아를 향해 진출해갔다. 南下政策(남하정책)이었다.
영국의 인디아 통치를 파괴하고 인도양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수 있다면 단숨에 영국의 제해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대영제국은 당연히 러시아가 최종적으로 인디아를 침공해서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보았고, 러시아 역시 겉으로는 전혀 그럴 마음 없다고 하면서도 부단히 남하해왔다.
그러자 남쪽의 인디아와 러시아 제국 사이에 놓인 아프가니스탄은 급기야 두 거대 세력 간의 놓칠 수 없는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아프가니스탄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치열한 세력 각축장이 되어왔다.
1979년 구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10 년에 걸친 아프간 전쟁이나 근자에 미국 오바마 정부의 아프간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간 여러 차례 전쟁과 내전이 이어져오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에 놓고 벌인 두 거대제국간의 각축전에 대해 영국 측 인사가 붙인 멋진 명칭이 있다. 웅대한 게임이란 의미,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서쪽의 흑해와 페르시아에서부터 동쪽으로 티베트와 중국의 신장 위구르 지역에 이르고, 북에서 남으로는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인디아에 이르는 거대한 공간에서 펼쳐졌다.
동서와 남북으로 각각 3,0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중앙아시아의 실로 광대한 공간을 놓고 펼쳐진 경쟁이었던 것이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 남하해오던 러시아가 남쪽의 페르시아와 충돌하면서 국경을 정한 때로부터 1907년 영러 협상(Anglo-Russian Entente)으로 두 세력이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티베트에 걸친 중앙아시아의 세력범위를 확정지을 때까지 근 백 년에 걸쳐 끈질기게 이어졌다.
1904년에 발발한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러일전쟁’도 본질적으론 그레이트 게임의 일부였을 뿐이다.
영국은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면서 미국과 함께 뒤를 봐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한 번 놀아보라’고 부추겼다. 이에 일본이 러시아에게 선제공격을 시도한 것이 러일전쟁이었다.
그 이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열강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고, 그로서 열강들의 전 세계 땅따먹기 게임의 끝자리에 참가한 신출내기 일본이었다.
그런 일본을 대영제국은 러시아와 펼치는 글로벌 장기판인 ‘그레이트 게임’에 투입해서 통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한낱 卒(졸)로 부려먹었던 것이다.
돌아가서 얘기하자.
1856년에 터진 크림반도에서의 전쟁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과 연합해서 어렵사리 러시아 제국의 흑해 진출을 봉쇄하는데 성공했지만, 인디아를 겨누는 러시아의 창끝은 더더욱 두렵기 짝이 없었다.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러시아 제국은 끊임없이 강온 양면 전략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북쪽 국경까지 밀고 내려왔고,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철도를 놓으려는 프로젝트도 맹렬히 추진해갔다.
영국은 이에 다양한 대응전략을 모색하면서 치열한 장기 게임을 전개해갔다.
러시아 육군은 1881 년 오늘날 카스피 해 동쪽에 위치한 투르크메니스탄의 군대를 현대화된 무기로 잔인하게 섬멸한 뒤, 급기야 1885 년에는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외딴 오아시스인 판데(pandeh)에 주둔하던 아프간 방위군을 무찌르고 점령해버렸다.
1885 년 3월 30일의 일이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소식이 런던에까지 전해지자 양국 간에는 아연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작은 오아시스 마을인 ‘판데’로부터 남쪽 아프가니스탄의 전략적 요충인 ‘헤라트’까지는 백 여 킬로미터 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조만간 러시아의 정예 대군이 인디아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런던 시민들도 졸지에 먼 중앙아시아의 ‘판데’라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오아시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영국에선 일대 난리가 벌어졌다.
런던 증권거래소는 공황 분위기에 휩싸여 연일 폭락장을 보여주었다. 당시 글래드스톤 자유당 내각은 급기야 전시예산을 배정받았으며, 외무부 관리들은 선전포고문 작성에 들어갔다. 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영국의 모든 전함들은 러시아 군함의 위치추적에 들어갔다.
영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대사를 통해 러시아가 만일 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공을 시작할 경우 즉각 전쟁 상태로 들어갈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한편 북서 인디아에 주둔 중이던 2만 5천의 영국군에게 출동 준비를 지시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증권가를 비롯한 주요 증시들도 일제히 패닉 상태에 들어갔다. 평소 언제나 냉정한 논조의 뉴욕타임스도 타이틀로 ‘영국과 러시아, 싸우다’는 제목을 달고 곧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당시 세계의 최강대국이던 영국과 러시아가 전쟁에 돌입할 경우 그것은 사실상 미증유의 세계대전이 벌어질 판국이었다.
독일과 프랑스도 각각 전쟁이 벌어질 경우 어느 편에 어느 정도로 편을 들고 개입해야 하는 지를 놓고 정신이 없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그것은 서쪽의 유럽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인디아를 돌아 동북아시아의 조선에 걸치는 거대한 규모의 전선이 형성될 판국이었다.
이에 영국 해군은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서 동북아 지역에 있던 해군에게 4월 15일자로 한반도 남쪽의 거문도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왜 영국 해군은 갑자기 난데없이 거문도를 점령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잇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