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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0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로마서 6장 12절-14절
한국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자기는 고되고 힘든 훈련을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방위 출신들은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뜹니다.
군대에서 가장 대우 받는 병사는 어떤 병사입니까?
두말 할 것 없이 사격 잘하는 병사와 그 다음에는 구보 잘하는 병사입니다.
거기다 특등 사수면 지휘관들에게 제대로 대우 받으면서 군대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훈련 과정 중에서 가장 기합을 많이 받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사격장입니다. 사격장에서 사격 훈련 받는 날은 아무리 교관과 조교의 지시에 잘 따른다 해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기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신병들은 잘 하면 기합을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 보지만 그러나 실제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훈련병들은 사격장에 가기 전에 반드시 눈물 고개라는 곳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는 이가 갈리고 고향 생각이 나는 그런 곳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격장의 군기가 센 것일까요? 자칫 잘못하면 오발 사고로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사격을 잘 할 수 있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총을 잘 만나야 합니다.
만일 오래된 총을 받게 되면 제 아무리 사격을 잘 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진 병사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래 된 총은 사격을 많이 하였으므로 총구 즉 강선이 달아서 유격이 많아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성능이 좋은 총을 누가 소유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잘 맞는 총을 악한 사람이 가지면 그만큼 악한 일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겠지요.
오늘 말씀 속에서 바울 사도는 재미있는 은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모두를 무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죄 속에 있을 때는 녹슨 총으로 비유하고, 주님의 피로용서 받은 것은 총을 수리해서 성능 좋은 무기가 된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려라.”
죽은 자 같은 것, 쓸모없는 것들, 사람들에게서 조차 버림받아 엿장수도 주워가지 않을 철저히 용도 폐기된 그런 인간을 주님의 은혜로 이제 산 자, 쓸모 있는 사람, 의의 병기로 변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들은 다 녹슨 총과 같은 사람들이었다는 말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인격적으로 잘못되어 있었고, 지혜가 없어 무슨 일이든 그릇되게 판단하고 살았던 우리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선을 행하고 싶어도 선을 행할 힘도 없어서 쉽게 악에 굴복하고 살았던 우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전의 우리들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요즈음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가졌든지, 시들어 가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비록 육체는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지만, 영적으로는 날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죄짓는 재미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재미가 없으면 죄를 좇아갈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죄 짓는 재미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수리해 주시고, 이제는 신앙인으로써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새것으로 깨끗하게 수리해 주서서 성능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셨다면, 이처럼 새롭게 된 성능 좋은 무기인 우리를 어디에 쓰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12절과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성능이 좋아진 무기를 악에 쓰면 더 악한 인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한번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타락하면 더 무서운 악이 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자, 이제는 죄에 사탄에 우리 몸을 드리지 말고, 성능이 좋아진 우리를 의에 병기로 오직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리라”는 말씀은 “제공하라” “선물로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시도록 맡겨라, 선물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할 때 능력의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 천국 사역을 하시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필요 하십니다. 그런데 쓸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고민이라고 믿습니다. 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지금 이 땅에 문제는 쓸모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탄에게 내 놓아 악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바쳐서 하나님 마음대로 천국 확장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헌신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 말 속에는 바울의 쓰라린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한마디로 성능이 좋은 무기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머리 좋고, 학식 높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기를 자기 이기심에 바치며 살았습니다. 자기 종교적 출세 즉,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탄의 종으로 바치고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삶이었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을 하던지 방향성이 열심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 좋은 머리가지고, 그 좋은 학식가지고, 그 좋은 배경가지고, 자기 딴에는 잘 한다고 한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한 짓이 고작,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산 것 뿐이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이 모든 사실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잘못되게 살았는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통회 자복합니다.
“왜 나는 그 동안 미련하게 내 것으로 알고 살다가 그렇게 살았던가?”
그러므로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지난날의 자신을 처절하게 뉘우치면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다시 한 번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처럼 사탄에게 자신을 드리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 마음대로 쓰시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오늘 바울 사도의 눈물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가지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무엇에 바치며 살고 있습니까?
영생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럭저럭 사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악의 병기로는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일생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잘못 사용하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가정을 죽이는 도구로 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진 좋은 보화들을 영생을 위하여 쓴다면, 여러분은 이 땅에서 복을 누리는 데 사용할 뿐 아니라, 또 여러분 자녀 대대로 축복을 심는 것이 됩니다. 그 뿐 아니라, 영원히 누리며 살 곳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코치 시대”라고 말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멘토 시대”라고 말합니다.
좋은 코치를 만나면 그만큼 성능 좋은 우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멘토를 만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 최고의 코치는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최고의 멘토는 하나님이시니, 그분에게 모든 것 바쳐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일생을 주님과 함께 살아본 통합적인 경험을 통하여 우리에게 권고하는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훌륭한 코치는 없고, 하나님보다 위대한 멘토도 없고, 예수님보다 훌륭한 인생의 선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함을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보십시오.
그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주십시다.
헌신하는 분들이 생활에서 능력을 체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감을 느끼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났고, 큰 은혜를 체험했다 합니다.
17세기 성령의 사람이었던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는 그의 책, “하나님의 임재 하심의 실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란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어떤 훌륭한 면이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께 그것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나에게 이 일을 가능케 하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면 그럴 때마다 그는 훨씬 더 많은 능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어떤 일에서 실패할 때마다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버려두신다면 저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시고, 제게 부족한 것을 고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난 다음에 그 하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서 친히 역사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후 어떤 어려운 일에도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을 느끼며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도들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뉴욕에 유명한 설교자였던 심슨 박사(A. B. Simpson)께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분에게는 두 개의 신경이 파열된 데다, 심장이 나빠 의사는 38세인 그에게 40세까지도 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슨 목사 자신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할 때, 숨이 차서 말을 하지 못할 때도 많았고,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숨이 차서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이분은 어느 날 성경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가? 그랬더니 주님께서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을 구속하기 위하여 병 고치는 일도 동시에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가슴에 담고 어느 날 산책에 나가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주님에게 온전히 드립니다.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오,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오니 마음대로 하소서. 그러나 제가 맡은 책임을 다 감당할 때까지 주님께서 내 육체적인 생명이 되어 주옵소서.”
삼 일 후 심슨 박사는 3천 피트나 되는 높은 산에 올라갈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가슴속에 새로운 심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년 동안에 천 여 번의 설교를 하고, 일주일에 20번 이상의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한 번도 피로를 느껴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설교로부터 목회로, 집필로 놀랄만한 업적을 남긴 목사가 되었습니다. 결국 76세까지 살았습니다.
어찌하여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무기력함을 인정하면서 드릴 때 그런 놀랄만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 해답이 바로 14절 말씀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의 병기로 드리므로 온전히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되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염려가 안 되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일에 부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바치면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모든 인생을 주님께 선물로 드렸으면, 이제부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드리는 기도도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인데, 주님께서 어떻게 외면하시겠습니까?
우리를 주님께 바치면 이상한 힘이 내 안에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 바친 삶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왠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어떤 것을 소유한 사람보다도 기쁨이 충만합니다. 아마도 나를 주님께 바치니, 주님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되기에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진리를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서도 그러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마음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여, 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원하는 곳에 나를 써 주옵소서. 이 내 몸을 아버지께 드립니다.” 하시며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들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님께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제 가장 영광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응원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주님께 헌신하시기를 권합니다.
가장 능력 있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형제자매들이 시간도 드리고, 가진 재능도 바쳐 일하고, 물질도 인색하지 않게 드리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자신들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용사로 발전해 갈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나에게 충만해서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일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서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려면 반드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다시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도록 온전히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