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의 능이 있던 곳이라 하여 정릉(貞陵)으로 이름붙인 현재 성북구 정릉은 서울의 허파다. 청와대 뒤편 북악과 북한산에서 내려온 숲과 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도심속의 숲을 만들고 있다. 산속 답게 곳곳에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
봉국사(奉國寺)도 그 중 한 곳. 태조 4년인 1395년에 조선 왕조를 열었던 무학대사가 창건한 후 왕실의 지원과 협조를 받아 번창해오다 임오군란의 와중에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산속 전통사찰이면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이곳에 조계종단의 질서를 지키는 최고 어른인 호계원장 월서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죽음의 위기 관세음보살 가피로 벗어나
60넘어 다시 선방에… “간화선 정립돼야”
호계원장 월서스님은 한국 조계종 선맥의 양대 맥 중 하나를 형성한 금오스님의 상좌다. 전쟁 직후인 56년 지리산 화엄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행자시절부터 호된 수련과정을 거쳤다. “은사스님은 하나도 참선 둘도 참선 밭에 나가 원력하거나 정진할 때도 오로지 참선 정진하라고 가르쳤지” 스님이 출가한 때는 스무살. 부모로부터 이제 막 독립하고 하나의 인격체로 설때 스님은 장부의 길을 택했다. 전쟁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이 하루 아침에 적이 되어 죽이는 생지옥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 스님 역시 전쟁 와중에 죽음을 넘나드는 시련을 겪었다. 스무살도 안돼 전투경찰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스님은 빨치산에 체포됐다. 이제 죽었다는 마음으로 끌려가던 스님은 계속해서 관세음보살을 염송했다. 늘 함께 놀던 실상사 스님들이 옴마니 반메홈을 염송하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염원하는데 신기하게도 빨치산과 떨어져 살아나는 가피를 입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어릴 때부터 친숙했던 스님들, 그리고 전쟁을 겪으면서 느낀 정신적 방황 등이 겹쳐 스님은 스무살이 되자 곧바로 발심 출가한 것이다.
#전쟁 생옥상 보고
은사스님으로부터 엄격한 지도를 받은 스님은 제방선원을 다니며 목숨을 건 수행에 들어갔다. 태백산 각화사 위 동암에서 수행할 때다. 금오스님과 같은 출가형제 3명과 함께 겨울 안거 한철을 나기위해 들어갔다. 3명이지만 서로 소임을 나눴다. 스님이 청소를 맡고 나머지 두 스님이 공양과 땔감 소임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태백산 이었다. 다음해 봄이 되어 눈이 녹을 때까지는 오가는 것도 힘든 깊은 산속이었다. 해제때 까지 버티자고 약속했는데 10일 만에 한 스님이 내려가고 다시 10일 뒤에 나머지 한 스님이 내려갔다.
월서스님 혼자만 남았다. 태백산은 18명의 도인이 나온다는 전설이 서린 곳. 호랑이가 세 명의 수행자를 잡아먹는데 둘은 삼켰지만 한명은 사리가 걸려 실패했다는 그런 전설도 내려오는 곳이다. 해제를 하루 앞둔 날 드디어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제 오늘 밤만 넘기면 된다고 각오를 더 굳게 다지는데 왠 처녀가 나타났어. 어머니 재를 지내기 위해 올라왔다는데 영주여고를 졸업했다고 해. 호랑이에게 먹히느냐 살아남느냐 하는 마지막 관문이었지” 원래 고승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에서 반드시 마장을 만난다. 마지막 시험인 셈이다. 월서 스님에게도 어김없이 시험이 놓인 것이다. “처녀는 자라하고 산신각에서 밤새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했어. 날이 밝자 마지를 올리고 난 뒤 내려왔지”
#태백산 동암서 홀로 동안거 보내
사형인 월산스님이 동화사 주지 시절 금당선원에서 한철을 날 때도 목숨을 걸었다. 섣달 초하루부터 초이레까지 용맹정진기간에 10명이 내기를 했다. 해제때까지 하자고. 안거중에 일주일간의 용맹정진 기간에는 잠도 자지 않는 그야말로 초인같은 수행력을 발휘한다. 그 용맹정진을 해제때 까지 하자고 했으니, 정월 보름 즉 45일을 잠한숨 안자고 버티는 것이다. 10일을 넘어가자 그 때부터 ‘사고’가 나기 시작했다. 공양하다 바리때를 떨어트리고 어떤 사람은 눈속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하얀눈이 솜이불처럼 보였던 것이다. 참다못한 월산스님이 회향하지 않으면 구들장을 파겠다고 어름장을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23일 만에 수마(睡魔)를 조복(調伏) 받은 스님들은 용맹정진을 풀었다. 이 모든 공부가 20대 초발심 시절 은사스님에게서 받은 지도 덕분이었다.
스님의 수행은 하지만 종단 일 때문에 주지 소임과 종단 소임을 맡으면서 중단됐다. “총무원 부장 본사주지 소임 맡은 것이 지금 가장 후회된다. 당시에는 어쩔 수없다해도 거부하고 계속 공부길로 갔어야 했는데 돌이켜 보면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소임을 맡은게 아닌가 반성을 하지” 스님은 “출가한 장부라면 마땅히 깨우침을 얻어 대도행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해. 참선 정진을 오래하면 공도리(空道里) 까지는 이르겠지만 허튼 생각하면 다 부질없게 되지. 다시는 망상이 생기지 않도록 미세한 망상 티끌만한 때까지 다 없애야돼. 미세먼지가 씨앗이 되서 다시 되돌아 가거든. 그래도 최소한 ‘공도리’까지는 가야하지”
#늘 간화선 선양 관심
20~30대 선방에서 수좌로 이름을 떨친 스님은 그후 종단 소임을 맡다 60이 넘어 다시 선방에 가는 ‘파격’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었다. 세월을 뛰어넘어 찾아간 선방은 많이 달라져있었다한다. “선방에 오는 스님들은 예전보다 늘어났는데 망상을 제거하고 화두를 주며 지도할 스님은 없어. 화두하는 사람도 있고 관세음 보살을 호명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안돼. 간화선 아니면 안돼. 간화선 지도를 못받고 쉬우니까 남방선을 찾는데 걱정이야. 빨리 수행법을 정립해야지”
70년대부터 격동의 종단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보내왔던 스님은 “험한 세월을 겪고나니 종단에 대한 애정이 더 생겼다”며 웃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기자에게 스님은 ‘화두’를 던졌다.
“지옥천당구정토(地獄天堂俱淨土) 호혈마궁총연방(虎穴魔宮總蓮邦) 산하불애가향로(山下不碍家鄕路) 찰찰진진자재유(刹刹塵塵自在遊) 운개월색가가백(雲開月色家家白) 춘과산하처처홍 (春過山河處處紅) 아유일륜월 (我有一輪月) 무영역무상(無影亦無相) 약욕견차월 (若欲見此月) 선심체막망 (善心切莫忘)”
(지옥과 천당이 모두 정토요, 범굴마구니집이 다 극락일세, 산과 물이 고향길 막지 못하니, 티끌세계 그대로가 자유스런 처소/ 구름이 걷히니 집집마다 달빛이요, 봄 지난 산봉우리 곳곳마다 꽃 일터라/ 나에게 달이 하나 있으니,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어라, 이 달을 보고 싶거든 착한 마음 잊지마라)
박부영 기자 3Dchisan@ibulgyo.com">chisan@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3Dair501@ibulgyo.com">air501@ibulgyo.com
/ 호계원장은...
대법원장격, 율장 청규 밝아야
호계원은 사회로 치면 법원에 해당한다. 호계원장은 대법원장과 같은 역할이다. 94년 종단 개혁 후 종단 내부의 분쟁을 심리, 조정하기위해 만들었다. 현재 호계원장 월서스님은 2대 3대 연임하고 있다. 호계원이 법원 격이라면 총무원 호법부는 검찰에 해당한다.
종단의 법이나 계율을 위반하면 호법부가 조사, ‘기소’하면 호계원에서 심리한다. 법원의 1심 2심처럼 종단도 초심 재심 두 번의 심리를 거쳐 확정한다. 최종심인 재심은 호계원장이 겸임한다. 그만큼 종단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지키는 막중한 자리다.
월서스님은 그 어려운 자리를 두 번째 수행해가고 있다. 임기 4년인 호계원장은 종단의 사법기관의 수장으로서 재심호계원장이 되며 중앙종회에서 선출한다. 자격은 승랍30년 연령 50세 이상의 비구로 한다. 법계종사 이상으로 율장과 청규 및 법리에 밝아야 한다.
최근들어 호계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98년 종단 사태로 멸빈당한 사람들에 대한 처리 문제 때문이다. 징계가 확정되었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이런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헌을 개정해 멸빈자를 구제하자는 안으로 방향이 잡혔는데, 종헌 개정이 무산되면서 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법을 수호해야하는 스님은 현재 일고 있는 논란에 할말이 많은 듯했다. 스님은 “필요하다면 호계원의 입장을 밝히겠지만 지금은 지켜보고 있다”며 “종단화합을 위한다며 화합을 깨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