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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도 |
미 군 |
남베트남군 |
년도 |
미 군 |
남베트남군 |
1965 |
114 |
937 |
1968 |
1,216 |
2,027 |
1966 |
417 |
996 |
1969 |
785 |
1,578 |
1967 |
782 |
1,060 |
1970 |
352 |
1,782 |
미 국민들의 여론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TV 뉴스 캐스터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는 2월 27일 저녁 뉴스보도 시간에 베트남 전쟁은 이제 가망이 없는 교착상태로 전락되었고 미군이 철수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협상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월터 크롱카이트
미 국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고 딘 디엠의 독재, 끝없는 쿠데타 등으로 남베트남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구정공세의 충격, 언론의 영향 등으로 현재 가망이 없을 것 같은 베트남전에서 계속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베트남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하는 베트남전의 당위성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가졌다. 갤럽(Gallop) 연구소는 공세기간 동안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 지금까지 베트남전을 지지하였던 20%의 인원이 반전으로 돌아섰다고 발표하였다.
미 의회 지도자들도 야단이었다. 윌리엄 풀브라이트(William Fullbright), 프랭크 처치(Frank Church),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조지 맥거번(Geoge McGovern) 등의 상원의원들도 지금까지 베트남전은 실패하였다고 존슨 대통령을 공격하였다.
윌리엄 풀브라이트
프랭크 처치
조지 맥거번
언론의 압력, 반전으로 선회하는 국민여론, 의원들의 공세 등은 선거를 앞두고 있는 존슨 대통령에게 충격적인 일들이었다.
이러한 워싱턴의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전선의 웨스트모얼랜드는 북베트남군이 스스로 군사적 패배를 자초한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작전을 지휘하면서 차후작전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먼저 남베트남 제1군단지역에 대한 적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2월 12일 해병 1개 연대와 1개 공정여단을 2월 말까지 긴급히 증파하도록 요청하여 이 부대는 2월말까지 도착되었다. 이 긴급증원도 보도되어 언론이 또 야단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2월 23일 휠러(Wheeler) 합참의장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현지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2월 18일 사이공 지역에 122㎜ 로켓포 포격을 가하여 미 보도기관을 흥분시켰던 북베트남군은 휠러 대장이 묵고 있는 숙소에도 포격하는 악착같은 근성을 발휘하였다.
합참의장 얼 휠러
당시의 남베트남 상황은 후에의 재탈환작전도 종료단계에 있어 북베트남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케산 기지 방어도 이상이 없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휠러에게 자신의 장차작전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재 예상되는 최악의 상황은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지역에 대규모 부대의 투입, 한국에서 고조되고 있는 전쟁위기에 따라 한국군 철수 등의 세 가지로서 이에 대한 대응책도 강구하고 있으나 지금까지는 이러한 사태가 발발할 가능성은 없다. 특히 북베트남은 이번 구정공세에서 당한 군사적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번 구정공세의 결과로 남베트남 정부도 안정되어 가고 있고 남베트남군도 작전수행능력이 향상되어 베트남 전쟁에서 후방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 밀집지역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미군은 여타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어 장차작전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따라서 작전지역을 남베트남 국경선내로 제한한 정책을 철폐하고 현재의 유리한 상황을 전과확대할 수 있는 과감한 대규모 공세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북베트남에 대한 계속적인 군사적 압력으로 북베트남의 전쟁계속 의지를 말살하여 미국의 군사개입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가용한 공세작전은 다음과 같은 5개 작전이다.
• 남베트남 내 적 지배지역과 작전기지를 제거하여 남베트남의 안전확보
• 북폭을 강화하여 하이퐁(Haiphong) 항과 같은 정치, 심리적인 표적의 무력화 또는 파괴
• 호치민 통로 절단 작전
•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북베트남군 성역 공격
• 상륙작전과 공중기동 작전으로 DMZ 바로 북쪽에 위치한 북베트남군 기지 점령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가병력 525,000명(2월말까지 보충병력은 515,000명) 외에 추가로 2개 사단(기계화, 보병), 1개 기갑수색 연대, 6개 해병대대, 15개 전술비행대대, 군수지원 부대 등 206,000명의 병력증원이 필요하다.
이 병력증원 하기 위해서 부족한 병력은 예비군을 동원하고 동원에 소요되는 시간에 따라 1968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병력을 증원해 주면 예비군 동원 기간인 1년 이내에 작전 종결이 가능하다.
또한 작전지역 제한정책의 철폐와 예비군의 부분적인 동원은 미국의 단호한 전쟁의지를 북베트남에게 보여주어 북베트남이 미 국민들의 반전운동을 부추기면서 미 국민들의 전의를 꺾으려는 그들의 공세를 저지시킬 수 있는 정치, 심리적인 효과까지도 있다.
휠러 대장은 이와 같은 웨스트모얼랜드의 장차 작전계획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였다. 두 군사 지도자들은 현재 가용한 108,000명의 증원 병력은 5월말까지 전개시키기로 하고 추가병력은 미군의 범 세계적인 전략예비의 확보 문제와 관련하여 작전결과에 따라 증원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직 존슨 대통령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제 결정은 미 민간관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휠러 합참의장의 보고를 받은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처음부터 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곧 이어 1961년 케네디 대통령 취임 후부터 7년간 베트남전을 주도하였던 맥나마라(McNamara) 미 국방장관이 2월 29일 물러나고 존슨 대통령 취임 후부터 베트남전에 관한 대통령 고문으로서 신임받아왔던 클리포드(Clark Clifford)가 취임하였다.
국방장관 클라크 클리포드
미 국방부 부장관 니츠(Paul Nitze),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 완크(Paul C. Warnke), 운영부서 담당차관보 앤소븐(Alian C. Enthoven)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인 관료들은 웨스트모얼랜드의 추가병력 요청은 약점을 보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계획하고 있는 공세작전은 현재 실패한 소모전략의 연장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미 재무장관 파울러(Henry H. Fowler)도 이 추가병력은 연간 100억 달러의 전비가 추가로 소요되어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빈민과 흑인들의 복지를 추구하는 존슨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인 “위대한 사회”의 추진계획에 차질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다른 분야의 방위비와 외국 원조까지도 삭감되어야 한다고 재정상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폴 니츠
폴 완크
운영부서 담당차관보 앤소븐
미 재무장관 헨리 파울러
따라서 미 국방관료들은 웨스트모얼랜드가 요구하는 추가병력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도 없고 병력, 재정, 국내 제반여건 등으로 추가병력 증원은 곤란함으로 더 이상의 병력증원을 억제하고 미군은 현재의 전력으로 인구밀집 지역을 방호하면서 시간을 획득하여 남베트남군을 증강하고 전력을 강화하여 남베트남군이 작전을 담당하도록 하는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하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3월 4일 미 국방관료들은 그들의 검토결과를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나 합참은 이에 반대하고 웨스트모얼랜드의 공세전략을 지지하였다. 존슨은 결심을 유보하였다. 존슨은 애치슨(Dean Acheson), 볼(George Ball), 번디(McGeorge Bundy), 밴스(Cyrus Vance), 롯지(Henry Cabot Lodge), 브래들리(Omar Bradley), 리지웨이(Matthew Ridgeway), 테일러(Maxwell Taylor) 등의 자문도 구했다. 이들도 일부 반대자가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확전에는 반대였다.
미 정부의 이 같은 병력증원문제 논의를 간파한 뉴욕 타임즈지가 3월 10일 이 문제를 크게 보도함으로써 문제는 더욱 비화되었다. 북베트남이 군사적으로 패배했다면 현 병력의 40%에 달하는 206,000명의 병력이 왜 필요한지 미 언론이나 국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 국민들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더 이상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전 정책을 지지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다.
3월 12일 뉴햄프셔에서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첫 예비선거가 시행되었다. 반전론자인 무명의 매카시(Eugene McCarthy) 상원의원이 42%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3월 14일에는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도 존슨 대통령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합을 벌이겠다고 발표하였다.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3월 23일 존슨은 작년 11월부터 차기 육군참모총장 감으로 물망에 올랐던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내정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미 언론에서는 이를 해임형 승진이라고 비꼬았고 북베트남에서는 웨스트모얼랜드가 해임된 것은 자기네들의 구정공세가 성공하였다는 증거라고 선전하였다.
3월 24일 존슨은 휠러 합참의장을 필리핀의 미 클라크 공군기지로 보내어 웨스트모얼랜드를 비밀리에 만나 자기의 결심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예비군 동원과 작전지역 제한정책 철폐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고 인가병력은 549,000명이라는 것이었다.
심약한 존슨은 건강도 좋지 않아 가족들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가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3월 31일 존슨은 전국 TV 및 라디오 방송연설에서 미국은 19도선 이북의 전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 북폭을 중지하고 자신은 1968년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폭탄선언을 하고 말았다. 또한 이 선언에서 존슨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호응하여 북베트남은 즉각 평화협상에 동의할 것을 촉구하고 소련, 영국 등 세계 강대국이 협상개최에 협조해 줄 것도 아울러 호소하였다.
이 선언을 바꾸어 말하면 이제 미국은 군사적 승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북베트남과 협상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이 동남아의 하잘것없는 국가인 북베트남에게 협상을 구걸한 것이다. 이것은 지압이 목표했던 대로 존슨이 타올까지 던지지는 않았지만 백기를 들은 셈이다. 이로써 지압의 구정공세는 빛나는 정치, 심리적인 승리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극적인 백기를 보고 북베트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4월 3일 북베트남은 하노이 방송을 통하여 미국의 협상제의를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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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실질적으로 휠러 장군이 머무른 숙소를 알고 쏜 것은 아니라고 하죠... 그냥 우연이라고..-_-;; 미군은 알고 쐈다고 생각해서 패닉이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