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3년 1월3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청주] 하느님의 어린양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1요한 2, 29 - 3, 6
† 복음 : 요한 1, 29 - 34
★ 요한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께 큰 사랑을 받은
자녀임을 상기시키며 이에 맞갖은 삶을 피력한다. 곧 옳은
일을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안에서 자신을 순결하게
할 것이며,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 요한 세례자는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의 체험을
떠올리며 그분이 바로 구약에서부터 고대하던 메시아이심을
증언한다. 그는 이러한 증언을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밝힌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체험한 요한 세례자는, 이제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한 증언을 하는
동시에 두 가지를 포기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요한 1,35-37 참조). 두 번째로 포기한 것은 하느님의 소명으로
베풀어 오던 세례입니다. 자신의 세례는 단지 물로 주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라고 하면서 이제는 바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 세례자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는 두 가지를 기쁘게
포기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며 무엇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자기 중심의 삶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요한 세례자처럼 자신의 삶에서 의미 있는
그 어떤 것을 포기하는 삶이 아닐까요?
-매일 미사 -
◈ [청주] 하느님의 어린 양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월3일 주님 공헌 전 목요일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 1,29-
하느님의 어린 양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습니다.
신년교례미사에 참례해야 하는데 길이 미끄러워 걱정을 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루의 첫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하였습니다. ‘신앙의 해’에 맞이한 새로운 한 해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지만
무엇보다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상태를 구별해 볼 수 있는데 1). 부적신앙을
말씀하시며 고상이나 각종 성상을 모셔두면 자동적으로 복을
얻고 악의세력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기복적으로 액막이용으로 성상을 모신다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2). 변덕신앙인이 있습니다. 감정의
기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성직자나 수도자에 따라 줏대 없이
열심하고, 흔들리는 믿음의 소유자가 있음을 지적하시며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3).쭉정이 신앙인에 관해 말씀하시며 입만
살아있고 실천하지는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강조하시며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함을
지적하셨습니다. 희생, 봉사,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 없는
선교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4)참된 신앙인에 관해 말씀하시며
하느님께 자신과 자녀를 봉헌하는 사람이야말로 참 신앙인임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그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1,29)하며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희생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 ….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 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주님의
종입니다(이사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 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의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7장17은 이렇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어린 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묵시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 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감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죄를 불러들이지 않고
2013년 1월3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 29-34)
죄를 불러들이지 않고(요한 1, 29-34)
참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모르는 세상에 오시어 참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가르쳐주시고 세상의 모든 어둠을 없애시어 빛으로
인도해주시는 주님께서는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세상에 죄를 없애시고, 어둠을 밝히시어
세상에 빛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그
마음에서 죄를 피하고 사랑으로 나아가갑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에 어둠이 없고 주님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는 우리도 매일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고
그분처럼 되라고 (요한 1서 3, 2)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지 않고, 또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머물러 죄를 범하고 어둠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갈수록 줄어들 기세가 아니라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과학과 문화의 변질과 의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하느님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모든 것을 세상 문명에 의지하려
합니다.
아무리 예언자들을 보내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악으로 치달아 자정능력이 떨어져 마침내 구세주를 보내주셨던 것처럼,
세상은 그렇게 스스로 정화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이스라엘에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모 마리아를 세상에
파견하시어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해주셨던
말씀들을 떠올리게 하시고, 그분이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세상에
함께 계심을 알리며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우리 마음에 죄의 어둠이 가득하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개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참 평화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 삶에서 죄를 불러들이지 않고, 회개하여 참 빛에로
나아가는 은총을 구합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인천] 함부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제게 물어봅니다. “신부님, 담배 태우세요?”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담배 안 태웁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만 이 형제님께서는 담배 피우는 사람을
마치 미개인 취급을 하듯이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요즘에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담배를 피우냐고, 또한 신부님들이 담배를
참 많이 피워서 걱정이라는 등의 말씀하십니다.
담배는 하나의 기호 식품이지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는 흡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기호 식품을 가지고 한참 아래로 보고 판단하는
모습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담배를 태우는 것. 분명히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 분명히 죄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침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쩌면 그들이
담배를 태우지는 않아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남을 판단하는
더 큰 죄인이 아닐까요?
함부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남보다는 내 자신을 먼저
판단하고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자매님이 결혼을 했는데 남편의 생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늦잠을 자고, 정리정돈을 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만나서 노는 데에만 집중하는 남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남편의 태도를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태도는 2년 동안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이혼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자매님은 남편을 내버려 두고 자신부터 먼저
바뀌자고 결심했답니다. 즉, 남편의 행동에 상관없이 더욱더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했지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남편이 자기보다 더 변화가 되는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내가 먼저 변화될 때, 남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남의 변화부터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을 합니다. 사실
당시에 대중으로부터 더 많이 알려졌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그 인기를 계속 간직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이러쿵저러쿵 말 하고 싶은 유혹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모자라서 불평불만을 던지며 하느님까지도
판단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에 앞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증언하는 나의 변화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시련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설탕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리튼)
신년하례식이 있었습니다. 주교님과 몬시뇰님, 원로사목자에게
절하는 신학생.
시작법칙 4가지(인터넷에서 퍼온 글)
인터넷에서 아주 좋은 글을 보았는데, 혼자만 보기에 아까워
이렇게 공유합니다.
한해를 잘 시작하고 하루를 잘 시작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훌륭한
‘시작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
그 법칙의 첫째는 세상에 감탄하는 것이다. 거리를 걷다 감탄하고
꽃을 보고 감탄하고 사람을 만나 감탄한다. 추위 속에 핀 꽃에
놀라고, 그 꽃들이 추위 속에서 봄을 읽어 내는 통찰에 감탄하고,
그 믿음에 몸을 맡긴 꽃들의 신념에 감탄한다. 그들의 감탄은
세상에 대한 애정이다. 감탄은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비결은 세상에 대한 감탄을 자신에 대한 감탄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며, 세상의 좋은 것들과 자신의 좋은 점을 연결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강점과 아름다움에 도취될 뿐 아니라 그들을
거울삼아 자신의 아름다움과 강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잘 시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단순 모방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고 디자인 한다.
세 번째 강령은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화작가 실버스타인이
영어 단어 4개를 가지고 만들어 낸 이야기를 기억하자.
‘우다(Woulda)와 쿠다(Coulda)와 슈다(Shoulda)가 다 모였다.
셋은 양지에 누워 자기들이 할 예정이었고, 할 수도 있었고,
해야만 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모두 달아나
숨기 시작했다. 꼬마 디다(dida)-했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실천하라. 시작을 시작하라.
시작의 법칙의 마지막 강령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시작은
끝과 통해 있다. 끝까지 가지 않는 시작은 시작이 아니다. 시작이
반이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끝에 있다. 여행을 시작하면 그
여정의 끝까지 가게 되 듯, 무엇을 시작하면 그 시작의 끝까지
가야한다. 살아 보아야 삶을 알 듯, 끝까지 가서 후회하는 경우
보다는 끝까지 갔기 때문에 깨달음이 많다. 중간에 그만 두지
말자. 포기 하지 말자.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시작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모든 하루는 모든 시작이
이루어지는 출발점이다. 내일 시작 하지 말고, 오늘 시작하자.
오늘 짐을 싸두어야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일찍 떠날 수 있다.
오늘 책을 사서 그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해야 내일 그 책의
절반을 읽을 수 있고, 오늘 계획해야 내일 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나 오늘 시작하자.
한 해의 시작에 서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오늘, 아니 바로 지금 시작합시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마산] 주님의 힘이 함께하면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합니다. 속죄의 날
제물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 어린양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그렇게 죽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구원의 길을 가리라고 예언합니다.
그의 증언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오시어 그분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았다.” 비둘기는 고결한 새였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힘이 함께하면 누구나 변화됩니다. 처음에는 머뭇거려도
결국은 그분을 따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능력이 함께하도록 누군가 기도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청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교리시간에 들쑥날쑥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던 사람이 영세한 뒤
열렬한 신앙인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나중에는 헌신적인 본당
간부가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변화되었을까요? 그의
뒤에는 오랫동안 기도해 온 그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헌신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냉담합니다. 뜨거움이 사라지기에 식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몰랐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내면에 뜨거움을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 신은근 신부(마산교구 교포사목) -
◈ [서울] 곁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해외 여행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방학 동안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로 되었고, 신혼여행도 많은 경우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국내 자산이 외국으로 유출되기에
우려하는 소리도 높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손실만을
문제삼는 것보다 우리가 외국의 문물과 생활을 대하면서
얻게 되고 배워오는 부과효과도 크다고 보야야 하겠다.
고사성어 중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종교의 영역에도 해당되니, 무릇 모든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절대자인 신을 만나뵙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을 애타게 찾는 갈망을 심어놓으셨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여, 당신의 품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은 이렇게
불안하나이다!” 하고 기도했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향수와 목마름에 대해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 하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무엇을 보고 어떤 체험을 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메시아를
만났다는(41절) 제자들의 고백이다!
- 서울대교구 구요비 신부 -
◈ [청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 어린양
독서 : 1요한 2,29-3,6
복음 : 요한 1,29-24
어린양
어릴 적 아무 뜻도 모르고 부르던 성체성가가 생각난다.
‘천주의 고양이며 인자하신 예수`….’ 그때는 막연히
하느님도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키우시는가 생각했다. 참으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발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양(羔羊)은 ‘어린양’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고쳐 부르니 아이들이 혼동할 일이
없으리라.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전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고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고 고백한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혜안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1,33)
여기서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을 앞두고 잡아먹었던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탈출 12,5 참조)을 뜻한다. 그때
어린양의 피는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는
광야를 여행할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식거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파스카 어린양을 잡으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총을 새로이 기념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
을 살리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내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을 고백한다. 이는 우리가 받아 모신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우리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는 어린양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하기 싫은 역할일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자리에서 어린양의 역할을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 청주교구 주영길 신부 -
◈ [청주] 주님을 가리키는 삶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하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사제가 미사 때 그리스도의 성체를 들어 높이며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 1장 34절에서 요한은 다시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생애 전체는 예수님을
증언하고 가리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는 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증인이 되어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주님을 가리키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최양업 신부님(1821-1861)이 지은 사향가(思鄕歌)를
소개합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중략)
갈 길이야 있건마는 찾아가기 어렵도다(중략)
다윗성왕 본을 보며 오주예수 표를 배워/
고난으로 전장 삼아 고공(苦功)으로 성을 삼고/
애덕으로 정병 삼고 겸덕으로 기병 삼고/
의덕으로 병기 삼고 지덕으로 군량 삼고/
묵상으로 병서 삼고 성경으로 방패 삼고/
절덕으로 기(旗)를 삼고 용덕으로 말을 삼고/
망덕으로 투구 삼고 인덕으로 갑옷 삼고/
신덕으로 선봉 삼고 십자가로 창검 삼세.”
- 청주교구 이중섭 신부 -
◈ [수도회] 제대로 된 이정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대로 된 이정표
등산을 다니면서 체험하는 바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산을
오르다 보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해라도 떨어지면 상황은 심각해집니다. 길 잃고 헤매다가, 해
떨어지고, 체온 떨어지고, 비상식량 떨어지고, 그러면 꼼짝
없이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지요. 생명의 위기상황 앞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산에 자주 다니면서 요즘은 요령이 좀 생겼습니다.
길이 애매해지면, 전반적인 산세나, 계곡의 흐름이나, 나무들의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대충 산길의 방향을 잡는데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이정표’
처럼 고마운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하산 길에 한참 길을
헤매다가 ‘매표소’ 몇 Km 라고 정확하게 적힌 이정표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됩니다.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는 정말 고마운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제시해준 제대로 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대로 된 안내자 하나 없이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위험하게도 이정표 하나 없는 험한 산길,
폭설이 내린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 저기 암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짜 메시아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불안한 표정의 백성들은 이리 우르르 몰려갔다 저리 우르르
몰려갔다 하며 오합지졸처럼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깎아
지르는 낭떠러지인줄도 모르고 직진만 하다가 부지기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어둠과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백성들 앞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라도 무척
달랐습니다. 헛된 맹세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지했습니다. 말과 행동에 신뢰가 갔습니다. 백성들도 제대로
된 예언자임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하게 안내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에게로 쏠립니다. 세례자
요한만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마침내 나타나신 진짜
주인공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그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이제 제대로 방향을
잡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한 훌륭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수도자의 삶, 사제의 삶은 어찌 보면
이정표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도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 삶의 배경이 자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 안에서 구원에로의 화살표를
발견합니까? 우리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생명에로
향하는 이정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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