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고에서 성유진, 김지연 씨는 회화, 안혜신 씨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1989년 이화여대와 서울대 서양화과, 서울대 산업디자인과에 각각 진학한 이들은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왔다. 성유진 씨는 대학원까지 졸업한 후 주로 사진을 매체로 작품 활동을 했고, 김지연 씨는 미술사로 전공을 바꿔 미국 UCLA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안혜신 씨는 광고회사에 취업, 10여 년 동안 광고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아 온 터였다.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6년이 된 2005년, 유진 씨의 한마디가 촉매가 됐다. 혜신 씨를 만난 유진 씨가 “우리 사업 한번 해볼까”라고 말을 건넸고, 여기에 한국에 나와 있던 지연 씨까지 합류했다. 회화를 전공한 유진 씨와 지연 씨는 각각 사진과 미술사로 방향을 틀면서 손으로 하는 작업이 그립던 차였다. 혜신 씨는 “10여 년 동안 광고주의 취향에 맞춰 작업을 하다 보니 답답함과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던 세 사람. 자신들에게 가장 친숙한, 종이를 가지고 문구를 만들기로 마음을 합했다. 혜신 씨는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직했다.
어떤 문구를 할까 고민하는데, 미국 유학 중이던 지연 씨가 “우리 전통에서 모티프를 찾아보자”고 했다. 미국에서는 동양적인 아트상품이 유행인데, 박물관에 가보면 한국 것이라고는 고려청자 모조품 같은 것밖에 없어 안타까웠다고 했다. 전통적인 요소를 체화해서 현대적으로 디자인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회화와 사진을 넘나들며 작업을 해온 유진 씨나 UCLA에서 조선 회화사에 관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 지연 씨, 디자인 작업 경력이 오랜 혜신 씨가 힘을 합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했다.
2005년 말, 성유진 씨의 작업실에 모인 이들은 디자인의 모티프가 될 만한 그림을 찾아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보는 눈은 달랐다. 흔히 알려져 있는 그림이 아니라 ‘화엄경 변상도’(불경 내용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 표지 그림 속에 있는 꽃무늬나 분청사기의 모란 문양, 조선시대 편지지에 문양을 찍던 목판, 사찰의 꽃살문 문양을 새로 디자인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그림 속 모란을 꽃송이 하나만 가져와 색을 바꾼 후 카드 귀퉁이 여기저기에 배치하는 식. 꽃과 새, 나비가 들어간 화조문판은 진분홍 바탕의 하늘색 문양으로 화사하게 살아났다. 특별히 질감이 살아 있는 종이를 고르고,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 인쇄소에 붙어 있으면서 교정을 거듭했다.
박물관, 미술관의 대표적인 아트 상품
2006년 3월 말, 이들은 시제품을 들고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참가했다. “제품이 나오기 전이라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교정지를 부스에 진열했어요.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아트 숍에서 팔겠다고 제의하시더라고요. 여기에 힘입어 다른 박물관들도 접촉했고, 서울의 박물관, 미술관들에는 거의 들어가게 됐지요.”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현대적인 감각이 살아있는 문구. 꼭 필요한 작업이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거나 수지 타산을 따져서 하는 일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들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옛날 책은 제본 기술이 없어 끈으로 묶었잖아요? 한복도 고름으로 여미었고.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 문구도 끈으로 묶자고 했지요.”
처음에는 하나하나 못으로 구멍을 뚫은 후 끈을 끼워 넣어 묶었다. 전통문양을 인쇄한 종이로 액자를 만든 후에는 유화용 바니시를 칠해 마무리했다. 코팅하는 게 훨씬 쉽고 간편하지만,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게 싫어서였다. 바니시를 칠해 나란히 늘어놓고 하루 동안 말리고 다시 칠하고…. 이 과정에서 보다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작가정신과 시장성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했다.
“우리가 아무리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만들었다 해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무슨 문구가 이렇게 비싸?’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잖아요?”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로고를 엠보싱으로 처리한 봉투를 만들었다 기대에 못 미쳐 1만장을 몽땅 폐기처분하기도 했고, 의욕적으로 제품을 만들었지만 가격을 맞추지 못하거나 판로를 찾지 못해 포기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혜신 씨가 그곳 아트 숍에 물건을 보여줬더니 “당장 팔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수출해야 할지 몰라 뒤로 미루기도 했다. 세 사람 모두 사업가라기보다 작가로서의 성격이 강해 규모를 키우려면 마케팅-영업을 맡을 파트너가 필요한 상황. 대중들을 위한 문구 외에도 기업 브로슈어나 초대장, 연하장, 게스트 북, 국제영화제 사인북 제작을 의뢰받기도 하고, 한 벽지회사에서는 이들의 디자인을 가져가 벽지로 만들기도 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우리 디자인으로 만든 벽지나 달력이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러나 모두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한다. 벽지는 원래 생각했던 색감을 살리지 못하고, 달력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까다로운 취향에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이 서로 뜻을 맞춰 함께 일하는 게 신기했다. 컴퓨터로 작업하면서 이리저리 디자인을 시도해 보고, 모두 “좋다”고 뜻이 모아지면 제품화하기로 결정한다. 유진, 지연 씨가 회화적인 느낌을 좋아하는 반면, 광고에 오랫동안 몸담아 ‘시장’을 잘 아는 혜신 씨가 주로 소비자 입장에 선다. 제품을 만들어 놓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제일 좋아한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함께 자식을 낳은 것처럼 흐뭇하게 마냥 바라보지요. ‘진짜 예쁘다. 나라도 이걸 보면 사고 싶겠다’하며 자화자찬하고. 그러다 보니 살 테면 사라는 배짱이지요.”
유진 씨는 이 일이 자신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서울의 옛 건물과 최근에 세워진 건물을 사진촬영한 후 합성해서 보여주는 게 그의 요즘 작업. 현대 도시 속에 살아 있는 시간의 흔적을 좇는 그의 사진작품처럼 ‘셀라돈’의 문구도 과거와 현대를 잇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혜신 씨는 서울대 박사과정에 진학해 디자인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세 사람이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거기에서 축적된 역량을 ‘셀라돈’에 부어 넣고 있는 셈.
어떻게 20여 년 우정을 이어오면서 사업까지 함께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이들은 “우리 모두 나이답지 않게 철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랬기에 “아가씨”라는 소리를 들으며 인쇄 골목을 누비고 다니고, “제발 깎아 주세요”라고 사정도 할 수 있었다고. 돈이 될지 안 될지 따져 보지 않고 자신들의 꿈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은 꿈도 소박했다.
“조그만 공방에 인쇄기를 들여놓고 10장, 20장씩 인쇄해 문구를 만들어 팔고, 원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같이 만들어 보기도 하게 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