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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과 금산사를 찾아서
碧草 /朴魯鶴
20 여년전 모악산을 올라본 이후로 참 긴 세월이 흘러버렸다.
다시 한 번 그 모악산과 금산사를 찾아보고싶다는 생각이 나를 찾아온 까닭은 「태조
왕건」이라는 사극 다르마에서 아들 신검과 적이 되어야 했던 견훤왕의 생애가 가슴을
쓰리게 했으며 문경시 가은읍 금하굴을 탐방하고나서부터 견훤이라는 인물은 바로
문경출신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관심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
지난날에는 그저 무심하게 금산사를 스쳐지나기만 했지만 역사탐방을 하다보니 새롭게
금산사를 탐방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않을 필자의 삶을 생각하면 이웃 산악회에 참가해
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몇 번이고 다녀온 산을 또 가야한다는 것은 아직도 탐구하
고싶은 곳이 너무나 많은 나로서는 어쩜 시간 낭비일 것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018년 9월 2일 8시경에 집을 나선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쉬어가기는 했지만 근 3시간 만에야 금산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모악산부터 오르기 시작하니 11시 반경이다.
◈모악산(금산(金山), 母岳山)
높이 794m이다. 노령산맥의 말단부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선각산·국사봉 등이 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이라고 했다.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사면이 비교적 완만하다.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계류는 구이 저수
지에 흘러든 뒤 삼천천을 이루어 전주시로 흐른다.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두월천·원평
천은 동진강에 흘러들며, 김제 벽골제의 수원이 된다.
모악산 정상 방송 중계탑이 있는 곳이다.
모악산에 오르는 중도에 있는 6각정 모악정이다.
8각정은 자주 보는데 6각정은 본적이 있었던가?
20여년 전에는 송학사쪽에서 올라 금산사로 하산을 했는데 오늘은 승용차로 인해
금산사 원점회귀산행을 한 것이다.
방송공사에서만 사용하고 일반인들은 활용할 수 없는 케이블카 승강장 건물앞에 피어
있는 노란 상사화 - 다 타버린줄 알았던 그리움이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야 잠을 깨는가?
등산로 주변에 곧게 자란 편백나무 숲길 - 무더운 날씨였지만 그야말로 산소공급을 충분
히 마시고 산행할 수 있어 얼음골에 온 기분이었지.
◈ 금산사
수도에 정진하시다 열반하시고 남겨진 사리탑, 그리고 마멸된 비문을 살펴보자니
세월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미륵전인데 건물 양식이 매우 예술적이다. 법주사의 팔상전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건축
양식인 듯하다.
1971년 12월 이 산과 주변지역 일대를 포함한 총면적 42.22㎢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
다. 서쪽 기슭에 금산사가 있으며, 그 경내에는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노주(보물
제22호)·석련대(보물 제23호)·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
석종(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보물 제28호)·대장전(보물 제827
호)·석등(보물 제828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또한 금산사의 출입구이기도 한 홍예석문은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절을 지키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귀신사에는 대적광전(보물 제8
26호)·3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그밖에 대원사·심원암·수왕사
등도 자리하고 있다.
지명이름이 금산이라 주변에는 금광이 있었으리라는 지명유래적인 해석이 가능한 곳이다.
모악산 금산사(金山寺)는 백제시대(600년)에 창건한 절로, 766년에 이 지방 출신의 진표
율사(眞表律師)가 크게 중창하여 대(大)가람이 되었다. 920년경에는 후백제왕 견훤(甄萱,
재위 900∼935)의 원찰이 되었고, 주변에 금성(芩城, 혹은 금산산성)을 쌓아 성문의 일
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커다란 나무 물고기가 보이시나요? 이것을 목어라고 하는데 불가에서는 물속 세계를
상징한다고 하더군요. 이번에 이 목어를 자세히 살펴보았답니다.
기록에는 이자개는 원래 이씨였다고 하니 그의 아들 견훤의 성도 이씨였으나 견씨로
바꾼 것이라는 말이되는 것이다.
견훤은 전주 견씨의 시조이고 그의 부친인 아자개는 항간견씨의 시조이니 황간견씨나
전주 견씨는 동일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후백제왕 견훤릉
후백제의 왕 견훤(?~936)의 능으로 전한다 견훤은 상주 가은면(尙州 加恩麵) (현재 문경시 가은읍) 사람의 아자개 의 아들이라 한다.
서기 900년 완산(현재 완주군 전주시 지역)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을 세워 한때는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아들 신검과 내분으로
인해 서기 936년후백제 는 고려에 멸망하게 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하여 등창이 나서 수일 후에 황산불사(黃山佛寺)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은진 조에는 견훤 의 묘는 은진 현 의 남쪽12 리에
떨어진 풍계촌(風界村)에 있는데 속칭 왕묘 왕촌 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종시
유언으로 완산이 그립다 하여 이곳에 무덤을 썼다고 하는데 실제로 맑은 날에는 멀리
전주 모악산이 보이기도 한다. 무덤은 약 10m 높이5m 크기 규모 인데 1970년 견씨
문중에서 후백제왕 견훤릉(後百濟王 甄萱陵) 이라 비를 세웠다 .
◈ 견훤에 관한 다음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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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생애는 극과 극을 달린, 비극의 파노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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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를 세운 견훤,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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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기세는 다하였고, 결국 금산산 불당에 유폐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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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왕건에게 몸을 의탁하고, 아들을 적이라 부르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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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위리안치 되었던, 김제의 금산사.
편지로 싸운 왕건과의 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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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파적인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는 견훤의 다른 면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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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주 북촌이라는 지명의 설화는 문경시 가은읍 금하굴의 설화와 유사한 내용이다.
언젠가 필자가 가은읍 금하굴을 탐방한 사진이다.
삼국사기 열전 견훤전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견훤의 출생지라고 전하는 갈전 아차마을의 부유한 가정에 과년한 외동딸이 있었다.
밤이 되면 미소년이 나타나 처녀와 동침을 하기를 수개월.
처녀는 배가 부르게 되니 하는 수 없이 부모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부모는 딸에게 미소년이 오거든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어 매라고 일러놓고는
다음날 실오리를 따라가니 금하굴로 들어간지라 굴 속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
몸에 실이 감기어 있었다.
10개월이 되어 처녀가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가 후에 견훤이라고 전한다.
그 후 굴에서 금빛을 발하고 풍악소리가 들려 금하굴이라 불렀다.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영웅설화라고 해두기로 한다.
수많은 산을 올라본 사람으로 모악산은 그리 매력적인 산은 아니지만 정상에서 바라다
뵈는 풍경은 너무도 아름답다.
멀리 전주시가지가 바라보인다.
내륙지방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만경평야의 드넓은 들판, 한줄기 스쳐지나는 바람노래,
살아았기에 나는 이렇게 산을 오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농장으로 떠날시간이라 줄여야만 한다. 후일 기억을 떠올리기 위하여 막마구 갈겨둔다.

첫댓글 .모악산 장군봉 자락에는 김일성의 32대조 김태서의 묘소가 있답니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입니다. 하긴 말이지요. 전주김씨는 경주김씨에서 분파했다고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