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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佛國寺)
2024년 1월 6일
청량사 신도회 분황사, 불국사, 기림사 사찰순례 동참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국보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국보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佛國寺 靑雲橋 및 白雲橋) - 국보, 통일신라시대>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위로 16단의 청운교, 아래로 18단의 백운교 전체 34계단의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이다.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였고,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며,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무지개모양의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佛國寺 蓮華橋 및 七寶橋) - 국보, 통일신라시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으로 오르는 다리이고,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이다.
전체 18계단으로, 아래쪽에 10단의 연화교가 위쪽에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는데, 지금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통행이 금지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07년 초 극락전 현판 뒤에서 자그마한 돼지 조각이 우연히 발견됐다. 불국사가 처음 문을 연 통일신라 시대부터 천수백 년, 임진왜란 때 불타고 극락전이 다시 지어진 1750년부터 따져도 250년 넘게 숨어 있던 돼지 조각이 발견된 일은 큰 화제를 모았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찾아와 복을 빌었고, 불국사에서는 ‘극락전 복돼지’라는 공식 이름을 지어주고 기념 100일 법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현판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복돼지를 누구나 쉽게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극락전 앞에 자그마한 복돼지상까지 만들었다.
2017년에는 로또 당첨자가 “불국사 극락전 앞 복돼지를 쓰다듬고 현판 뒤에 있는 진짜 복돼지에게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 다음 극락전으로 들어가 108배를 올리고 로또에 당첨됐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慶州 佛國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 국보, 통일신라시대>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螺髮나발)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肉髻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右肩偏袒우견편단)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는데, 아미타 9품인(九品印)중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慶州 佛國寺 多寶塔) - 국보, 통일신라시대 8세기>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석탑으로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다보불이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탑으로 구현하였다.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산만하지 않게 표현하였으며,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에는 일제의 만행이 전해져 온다. 1925년경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기록이 없고,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佛國寺 三層石塔) - 국보, 통일신라시대 8세기>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 탑이다.
기단과 탑신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새겼으며, 또한 상하 기단에는 탱주(撑柱: 받침기둥) 2주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었으며, 그해 12월 보수중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 공간을 발견하여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慶州 佛國寺 大雄殿) - 보물, 조선시대>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경덕왕 10년(751,辛卯)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甲寅)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751) 대웅전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후 효종 10년(1659)에 중창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 후 영조 41년(1765, 乙酉)에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3년(1767)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에 완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후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동서가 약간 긴 장방형의 평면으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조선 후기의 다포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천정은 우물 천정인데 층단식으로 중앙이 높게 꾸며졌다.
기단은 면석에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설치되어 있고, 상부에 갑석(甲石)을 덮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架構基壇)이다.
불국사 대웅전은 창건당시 기단과 석등 등의 석조물이 보존되어 있고, 창건 당시의 유구 위에 영조 41년(1765)에 중창된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 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이다.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慶州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坐像) - 국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50)>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螺髮나발)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右肩偏袒우견편단)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智拳印지권인)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경주 불국사 사리탑(慶州 佛國寺 舍利塔) - 보물, 고려시대>
불국사 강당 뒤쪽의 보호각에 보존되어 있는 사리탑으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서 말하는 '광학부도(光學浮屠)'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겉모습이 석등과 비슷하게 생긴 사리탑으로,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는 받침이 되는 기단(基壇)을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기단은 연꽃잎을 새긴 반원모양의 돌을 위 · 아래에 두고, 그 사이를 북[鼓고]모양의 기둥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기둥에 새겨진 구름무늬에서 강한 생동감이 묻어난다. 탑신(塔身)은 가운데가 불룩한 원통형으로, 네 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기둥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둥에 의해 나뉘어진 4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안쪽으로 움푹 파놓은 후, 그 안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지붕돌은 추녀끝에서 12각을 이루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6각으로 줄어든다. 경사면은 완만하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평면이 8각인 기본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의 우에노(上野)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慶州 佛國寺 架構式 石築) - 보물, 통일신라시대>
안양문과 자하문 앞에는 아름답게 꾸민 가구식 석축이 동서로 놓였는데, 동쪽 자하문 앞의 것은 백운교의 계단 위에서 단을 달리하여 상단의 석축을 변화 있게 꾸며 조화를 이루었다. 안양문 앞에서는 밑에서부터 수직으로 석축을 쌓되 중간 중간 칸을 이루어 다듬은 석주(石柱)와 인방석을 가구식으로 걸고, 그 가운데를 자연석으로 채운 행태이다. 자하문이나 범영루 앞의 하층 석축은 밑에서부터 거대한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가공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올린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범영루의 돌출부 기둥 밑에는 점차형의 석재를 차곡차곡 쌓아 돌기둥을 만들었고 또 석교 밑에서는 정교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 구역의 서측회랑 하부 석축이 포함되는데, 구조형식을 살펴보면 수직의 석주와 수평의 주두석 및 동자주, 초석, 갑석으로 장방형의 격자 틀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자연석을 밀실하게 채워 넣는 수법으로 쌓았으며, 대웅전 석축은 1단, 극락전 석축은 2단으로 구성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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