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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시(永川市)
○ 환구세덕사
-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87호(90.8.7)
- 소 재 지 :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768번지
- 시 대 : 1777년(正祖 1년)創建
- 제 향 : 정세아(鄭世雅: 號호수 임란의병장)
정의번(鄭宜藩: 號栢巖)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인 호수 정세아(鄭世雅)(1535~1612)선생과 아들 백암(栢巖) 의번(宜藩)(1560~1592)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조 1년(1777) 서재(書齋) 뒤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향사(享祠)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그 후 의번공의 충효정려(忠孝旌閭)가 내려 사당 좌측에 충효각이 세워졌다.
그러나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거되어 그 유지(遺地)에 충효각과 부속건물 2동만 남아있다.
의번공은 경주복성전에서 왜적에게 포위되자 아버지를 구출하고 장열히 전사(戰死)하였다.
○ 양계정사
-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88호 (90.8.7)
- 소 재 지 : 영천시 대전동 7번지
- 시 대 : 1645년(仁祖23)創建
- 제 향 : 정호인(鄭好仁: 號暘溪 都護府使)
인조 23년(1645)에 양계 정호인(鄭好仁)이 관직에서 일시 향리로 돌아와 경관이 좋은 현 위치로 초가 수칸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주자서와 근사록을 연구하던 학당이었다.
선생의 호는 양계, 관은 오천이며 임진왜란시 영천의병장을 지낸 호수 정세아 선생의 손자이다.
조선 인조 5년(1627)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호조 정랑을 거쳐 양산, 합천군수가 되고 진주목사와 남원도호부사를 지냈다.
현재 건물은 양계 정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00년대에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양계정사는 고현천을 부감하는 언덕위에 서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조선 후기의 ꡐ乙ꡑ자형의 특이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 정호인(鄭好仁)
1597~ 1654 자는 자견(子見) 호는 양계(暘溪)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1618년 진사에 뽑히고 1627년 문과에 올라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때 공이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향병을 모집하는데 종사하여 도왔고 1637년 이후 1654년에 이르기가지 여러차례를 주군(州郡)의 수령(守令)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돌아 왔다. 돌아올 때에는 행장이 씻은 듯이 간단하며 다만 서책만 두어짐 있을 뿐이었다.
만년에는 사환에 뜻이 없어 주자서와 근사록 등의 책을 취하여 잠심탐구하여 잠시라도 서책을 놓지 않았다.
死後에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에 배향했다.
○ 용계서원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55호 (74.12.10)
- 소 재 지 :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303번지
- 시 대 : 1782년(正祖6년)創建
- 제 향 : 이맹전(이맹전: 號 경은 承文院正言 縣監 贈吏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경은 이맹전 선생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정조 6년(1782) 왕명으로 토곡동에 건립된 것이다.
경은 이맹전 선생은 세종 9년(1427) 친시문과에 급제 , 승문원정자를 거쳐 정언(正言) , 거창현감을 역임하였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탐내자 벼슬을 사퇴하고 선산에 내려가 학문을 닦으며 일생을보냈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건물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노항동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되다가1976년 7월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겨졌다.
익공계(翼工系)형식으로 건축된 누각식(樓閣式)의 팔작지붕이다.
- 이맹전(李孟專)
1393~1481 호는 경은(耕隱) 본관은 벽진(碧珍) 자헌대부 병조판서 이심지 (李審之)의 아들로 선산 구미 현곡에서 태어났다.
야은 길재(吉再)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벼슬에 올랐다.
계묘정란 후 공은 국정에 뜻이 없어 외직으로 거창현감에 부임했다.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 한다는 춘추의리(春秋義理)를 굳게 지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짓 봉사, 거짓 귀머거리가 되어 27년간이나 긴 세월동안 오직 단종만 생각하고외인과의 접촉을 끊고 89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 하천재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73호 (75.8.18)
- 소 재 지 :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
- 시 대 : 1637년(仁祖15 丁丑)創建
- 제 향 : 정세아(鄭世雅: 諡剛義)
이 묘재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인 정호인(鄭好仁)이 조선 인조 15년(1637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강의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1976년 7월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추원당(追遠堂), 신도비각등의 건물이 있는데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다.
○ 자양서당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78호 (75.8.18)
- 소 재 지 :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281-5 번지
- 시 대 : 1546년(明宗元年 丙午)創建
- 제 향 : 김응생(金應生: 號明山),
정윤양(鄭允良; 號魯村),
노 수(盧 遂: 號小庵)
이 건물은 조선 명종 원년(1546) 호조참의 김응생(金應生), 정윤양(鄭允良), 노수(盧遂)가 향리의 후진교육을 위해 자양면 노항동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훨씬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1976년 7월 영천댐 수몰지구에 편입되어 현위치에 이건하였는데이때 건물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서당건물은 전퇴(前退)가 있으나 이 건물에는 없으며 서생들이 모여 글을 읽는 대청과 숙박을 위한 방으로 평범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다.
서당내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동인각(東麟閣)에 봉안하고 있는 김완(金浣) 장군은 김응생 선생의 제3자(第三子)이다.
- 김응생(金應生)
1496~1555 자는 덕수(德秀) 호는 명산(明山) 본관은 경주(慶州) 공은 13세에 부친상(喪)을 당하여 애통함이 성인과 같았으며 장례후에 시묘살이를 하니 향중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했으며 진사에 올라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고 명산의 남쪽 기슭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서적을 번역하여 마을 청년들에게 보급하니 학업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문전에 모이는 지라 공이 노촌 정윤양(魯村, 鄭允良)과 소암 노수(小庵, 盧遂)와 함께 의논하기를 ꡒ우리 향중은 정 포은이 출생한 곳이라 실지로 해동 백록동(海東 白鹿洞)이라ꡓ 하고 공동으로 재물을 모아 집을 건축하고 태학의 제도와 같이 하여 퇴계선생에게 묘우(廟宇)의 액(額)을 청하고 학규를 정하여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창건하게 되었다.
○ 임고서원(臨皐書院)
- 지정번호 : 기념물62호 (1985.10.15)
- 소 재 지 :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21필
- 시 대 : 1553(明宗8 乙卯)創建 賜額 宣祖癸卯重額.
- 제 향 : 정몽주(鄭夢周: 號圃隱 右文館大提學 諡文忠).
황보인(黃甫仁: 號芝峰 領議政 諡忠定).
장현광(張顯光: 號旅軒 左參贊贈領議政 諡文康).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었다. 인조 21년(1643) 여헌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배향하고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 인(皇甫 仁) 선생을 추향하였으나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 보수․정화되었다. 또한, 1990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기존의 서원 옆에 새로이 서원을 세워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옛서원과 새로 지은 서원이 공존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 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부원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전법,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 공을 세웠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4년 (1392)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이후 조선태종 원년(1401) 영의정에 추증되었고익양부원군(益陽府阮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했다.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충숙왕 복위 6∼공양왕 4) 고려 말기 문신·학자.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을 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지냈다. 1367년 예조정랑으로 성균관박사를 겸임하였으며,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을 지내고, 1372년 중국 명(明)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와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지냈다.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풀려나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판서·예의사판서·전법사판서·판도사판서를 지냈으며,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와, 이듬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삼사좌사·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다.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 병조 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 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에 봉해지고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을 지냈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들을 제거하고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피살되었다. 오부학당·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문에 뛰어났다.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포은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 충효재(忠孝齋)
- 지정번호 : 기념물81호 (89.5.29)
- 소 재 지 : 영천시자양면 충효리 626번지
- 시 대 : 1923년
- 제 향 : 정환직(鄭煥直: 號 동엄 義禁府都使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鄭鏞基: 惠民院總務 산남의진 대장)
구(舊) 한말(韓末) 산남의진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정환직(鄭煥直) (1844 ~1907)선생과 용기(鏞基)(1862~1905)선생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검단(檢丹)동을 충효(忠孝)동으로 고쳐 1923년 건립하였다.
선생의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1844년 이고장에서 출생하였으며 처음 태의원전의(太醫院典醫)를 거쳐 고종 24년(1887) 북부도사(北部都事)가 되고 이듬해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가 되었다.
1899년 시찰사(視察使)․토포사(討捕使)를 역임하였고 그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용기는 혜민원(惠民院) 총무를 거쳐 민영환과 더불어 독립회와 만민회에 참여하였으며 보안회, 국채보상 운동에도 앞장서서 회장직을 역임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밀령을 받은 선생은 용기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산남의진을 창군 흥해, 청하, 영해, 의흥, 청송, 영덕, 신녕등지에서 왜구와 격전, 혁혁한 공을 세우고 부자가 연이어 순국하였다. 이 유적은 1987년 보수 정화하였다.
○ 도잠서원(道岑書院)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00호 (85.8.5)
- 소 재 지 :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140번지
- 시 대 : 1613년(光海君5년 癸丑)創建 1678년(肅宗4 戊午)賜額.
- 제 향 : 조호익(曺好翼: 號芝山 牧使 贈吏叅 諡文簡).
조선 선조때 성리학의 대통을 이은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는 귀양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절을 다하고 광해조에는 선산 부사까지 역임한 지산(芝山) 조호익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1613년에 모사리에 건립하였다가 1678년에 용호동으로 이건하였다.
그 후 고종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되고 1914년 복원되어 1981년 보수정화(補修淨化) 되었다.
또한 경내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높이 2.67m, 폭 90cm, 두께 21cm이고 비각 정면과 측면이 1칸 씩으로 되어있다.
조호익 (曺好益)
1545∼1609(인종 1∼광해군 1)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본관은 창녕(昌寧).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으로 학문에 힘썼다. 대구부사·안주목사·성천부사 등을 지냈고, 선산부사·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1575년(선조 8) 검독직(檢督職)을 거절했다 하여 평안도 강동(江東)에 유배되어 관서지방의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을 모아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서 공을 세웠고 이듬해 평양성 싸움에서도 큰 전공을 세웠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영천(永川) 지봉서원(芝峰書院), 강동 청계서원(淸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지산집》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가례고증(家禮考證)》 《역상추설(易象推說)》 《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었다가 뒤에 다시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 함계정사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30호 (90.8.7)
- 소 재 지 :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599번지
- 시 대 : 1702년(肅宗28 壬午)創建
- 제 향 : 정석달(鄭碩達: 號涵溪)
이 건물은 임진왜란때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鄭世雅)선생의 현손인 정석달(鄭碩達)(1660~1720)선생이 숙종 28년(1702)에 학문을 강학하기 위하여 정자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우선 소재(小齋)를 지은 것이 안락재이다.
그 후 정조 3년(1779)선생의 손자 일찬(一鑽)(1724~1797)공이 중건(重建)하여 함계정사라 하였다.
선생은 호는 함계, 본관은 오천, 갈암 이현일 (李玄逸)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을 탐구하여 그의 인품과 덕망이 높았으며, 병와 이형상 선생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일생을 보낸 성리학자로 가례혹문(家禮或問)등 문집(文集)이 남아 있다.
- 정석달(鄭碩達)
1660~1720) 자는 가행(可行) 호는 함계(涵溪) 본관은 오천(烏川) 충무위대호군(忠武衛大護軍) 시심(時諶)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생에 학문을 탐구하고 그 인품과 덕망이 고을에 높았다. 이갈암 현일(李葛庵 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과 횡계 양수와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후에 문집 3권이 있고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선생이 서문을 지었다.
○ 유후재(遺厚齋)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01호 (85.8.5)
- 소 재 지 : 영천시대창면 대재리 210-1번지
- 시 대 : 年代未詳
- 제 향 : 조치우(曺致虞: 號淨友堂 成均館典籍)
이 건물은 조선 성종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조치우(曺致虞) (1459~1529)선생의 묘하 재사이며, 선생이 대구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나라에서 하사한 옥비이다.
선생의 호는 정우당(淨友堂), 본관은 창녕(昌寧), 성종 25년(149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성균관 전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중종반정후 장령(掌令)을 지내고 대구부사 재임시 선정을 펼쳐 칭송을 받았으며 사옹원정(司饔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모친 봉양을 위하여 사임, 모상중 일생을 마쳤다. 사후 조정에서 옥비 두좌를 하사하여 그의 청렴결백한 덕을 표창하였다.
옥비(玉碑) 1좌는 대창면 대재리 송청산(松淸山)의 유후재(遺厚齋)속의 옥비각(玉碑閣)에 안치(安置)되어 있고 또 1좌는 부인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원군 북면 지계동 청용산(靑龍山)의 모원재(慕遠齋)속의 옥비각(玉碑閣)에 안치하고 있다.
○ 송곡서원(松谷書院)
-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 시 대 : 1702년(肅宗28 壬午)創建.
- 제 향 : 류방선(柳方善: 號泰齋 遺逸 主簿).
이보흠(李甫欽: 號大田 府使 贈吏判 諡忠莊).
곽 순(郭 珣: 司諫).
이현보(李賢輔: 號聾巖 知中樞 諡孝節).
심지원(沈之源: 號晩沙 領議政).
○ 위양공사우(威襄公祠宇)
-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 시 대 : 年代未詳
- 제 향 : 이순몽(李順夢: 領中樞 諡威襄).
이순몽 (李順蒙)
1386∼1449(우왕 12∼세종 31) 조선 초기 무신. 본관은 영천(永川). 1405년(태종 5)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랐고, 1417년 무과에 급제,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동지총제를 지냈다. 1419년(세종 1) 우군절제사로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나서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했으나 혼자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경상좌도병마절제사·중군도총제·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 등을 지냈다. 한때 왕의 총애를 믿고 점차 교만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다. 1425년 진하사로 중국에 다녀왔고, 1433년 중군절제사가 되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고 돌아와 판중추원사로 승진했다. 1434년 경상도도절제사가 되어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고리대금업을 일삼아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무사했다. 1447년 영중추원사를 지냈다. 시호는 위양(威襄).
○ 도계향사(道溪鄕祠)
-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 시 대 : 肅宗丁未建(年代未詳)
- 제 향 : 박인로(朴仁老: 號蘆溪 助羅浦水軍萬戶).
박인로 (朴仁老)
1561∼1642(명종 16∼인조 20) 조선 중기 문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 본관은 밀양(密陽).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생. 그의 생애 전반부는 임진왜란 때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고 후반부는 독서와 수행으로 안빈낙도를 실천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좌절도사(左節度使)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들어가 수군(水軍)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고, 거제도에서 군사력을 배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문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은 40세 이후로 성현의 경전 주석연구에 몰두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상탄(船上歎)》을 지었고, 1611년(광해군 3) 용진강 사제에 은거해 있던 이덕형(李德馨)을 찾아가 그의 뜻을 대신해 《사제곡(莎堤曲)》을 지었으며 《누항사(陋巷詞)》에서는 안빈낙도의 삶을 노래했다. 1630년(인조 8)에는 노인직으로 용양위부호군이 되었다. 1635년 가사 《영남가(嶺南歌)》를 지었고, 1636년 《노계가》를 지었는데, 가사가 모두 9편이고, 시조는 《조홍시가(早紅枾歌)》 등 68수에 이른다. 말년까지 물과 돌을 벗하며 시작 생활에 젖어 살았다.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져 《노계집》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작품들이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 백학서원(白鶴書院)
-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
- 시 대 : 年代未詳
- 제 향 : 이 황(李 滉: 號退溪 左贊成文衡 贈領議政 諡文純 宣祖廟 文廟配享).
황준량(黃俊良: 號錦溪 牧使).
백학서원은 현재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백학산 아래 양강위에 세워졌습니다만 나중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백학서원은 명종 10년(1555) 당시 신녕 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 유림들과 더불어 화남면 백학산 아래 양강위에 건립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고 광해군 4년(1612)에 중건하였습니다. 효종 9년(1658)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퇴계 이황 선생을 제향하고 황준량 선생을 배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에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서당으로 복건하였습니다. 이후 1921년 이곳에 창녕조씨(曺氏)문중이 중심이 되고 지역의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 하였습니다. 백학학원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로는 민족적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한 민족적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하여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등이있습니다.
○ 경덕사우(敬德祠宇)
-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 시 대 : 1686년(肅宗12 丙寅)創建.
- 제 향 : 권응수(權應銖: 號白雲齋 工判 都摠管 贈左贊成 諡忠毅)
권응수 (權應銖)
1546∼1608(명종 1∼선조 41) 조선시대의 무신.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 시호는 충의공(忠毅公). 본관은 안동(安東). 1584년(선조 1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북변을 수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수군절도사 박홍(朴泓) 밑에 있다가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永川城)을 탈환하고 병마우후(兵馬虞侯)가 되었다. 그 후 문경(聞慶)의 당교(唐橋)싸움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방어사에 특진되었다. 1599년 밀양부사가 되었으며 1604년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뒤 도총관(都摠管)을 겸했다. 저서로 《백운재일기(白雲齋日記)》가 있다.
○ 상덕사우(尙德祠宇)
- 소 재 지 : 경북 영천시
- 시 대 : 年代未詳
- 제 향 : 윤명운(尹明運: 縣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