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 믿음/시민권
제목 : 신앙은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성경 : 빌 3:12~21
찬송 : 324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602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빌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혹자는 신앙생활을 연어의 일생과 같다고 묘사합니다. 연어는 강에서 태어나 자라며 성체가 되면 바다에서 지냅니다. 그러다가 산란기인 9~11월이 되면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생명을 다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삽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폭포와 같은 장애물을 만나면 수면 위로 높이 뛰어 오르는 연어의 모습에서 대단한 근성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바다에서 민물로 진입한 연어는 통각을 차단하고 면역 억제를 시작해야 하기에 몸의 많은 부분을 제어하며 올라갑니다. 그만큼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연어의 열망과 에너지는 매우 강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고향을 향해 가는 연어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하늘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본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험과 유혹을 거슬러야 합니다. 우리 삶 곳곳에 밴 죄악 된 습관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거룩한 습관의 결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롭고 힘들어도 돌아갈 고향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일은 우리의 사명이자 축복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며 삶의 가치와 목적에 대해 교훈합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 다른 가르침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3장에서 바울은 초기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 경계하는 내용을 다룹니다. 거짓 교사들은 반 도덕주의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기에 율법과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며 살도록 가르치는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 중에 이 같은 가르침을 받아들여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이들이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호소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세상적인 지식이 인생의 본질과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경기에 참여한 선수처럼 절제하고 최후의 승리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목표를 두고 노력하듯이 하늘의 시민권을 얻고 최후 승리를 얻을 때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바울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푯대(목적)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 선수에 비유합니다. 당시 그리스 지역에서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에서 달리기 경주가 있었습니다. 우승한 사람에게만 월계관과 상급이 주어졌습니다. 선수들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고 절제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믿음을 경주에 비유해 설명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빌립보 성도들이 이러한 달리기 경주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의 여정이 달리기 경주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달리기 경주를 하는 동안에는 지나온 길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또한 훈련하는 동안 많은 절제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쉬고 마시면 절대로 월계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경주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쾌락주의에 빠져 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거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선한 영향력을 감당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좌우를 살펴보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예수로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합니다.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내가 이미 그것을 얻었다거나 이미 완전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를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새한글성경)
바울은 8~11절에서 언급했던 것을 이미 얻거나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온전히 이루다’(테텔레이오마이)로 번역된 동사는 ‘온전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의 완료 수동태로서, 바울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택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달려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경주자의 이미지를 차용해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바울이 경주자로서 달리며 이미 이룬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뒤의 것을 잊는 것과 앞의 것을 잡으려는 것’을 ‘오직 한 일’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오직 푯대를 바라보면서, 경주를 끝냈을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을 받기를 바라며 달려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고 그와 온전히 연합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기를 원해서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우리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포기하고 절제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고 거듭났다고 해서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경주에 비유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평생 추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때로 더 편하고 쉬운 길이 눈에 보여도, 그 길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의 달음질을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택,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과 어울리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모습을 지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열매 맺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삶
바울은 의도적으로 모순처럼 느껴지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분명 그는 자기가 다 이룬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빌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바울은 ‘온전히 이룬 자들’ 곧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은 앞서 자신이 말한 것처럼 생각하기를 권합니다. 교인들 중에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여 바울과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달리 생각하는 그것과 관련해서도 하나님이 진리를 드러내셔서 그들을 가르치실 것을 확신합니다.
√빌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한 여집사가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 매일 매일 장사한 돈에서 만원씩을 떼어 마루 밑에다 아무도 몰래 감추어 놓았습니다. 어느덧 500만원이라는 거액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한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자기 딸이 가진 돈 전액을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도 헌금을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섬기는 교회가 따로 있으니 백만 원만 드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딸의 이름을 부르며 "할렐루야"하는 회답이 나오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3백 만원을 드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오히려 "온전히" 하는 음성이 자주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다시 5백 만원 전액을 바치기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자신의 이름에도 "할렐루야"하는 회답이 있었습니다.
행여나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에 통장과 도장을 들고 기도회의 전도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은행 문을 여는 시간을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도사님께 말했습니다.
"만일 강도가 내놓으라고 하였던들 마루 밑에 있는 것을 꺼내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성령께서 찌르시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헌금을 드리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과 함께 강도보다 더 강하신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케 된 것을 크게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간에 그대로 행하자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바울이 제시했던 가르침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구원은 이미 온전합니다. 그러나 결코 ‘이미 확보한 것’으로 여기며 안일하게 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을 본받고 그와 같이 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권합니다. 먼저 바울은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합니다. 앞서 바울이 자신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자라고 한 것을 볼 때(12절), 자신을 본받으라는 말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자세를 본받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 생활을 하면서 눈여겨 볼만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셨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눈여겨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닮기 원해서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를 눈여겨보라.”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는 삶
바울 사도는 반도덕주의자들의 미혹을 경계하며, 이들을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칭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완전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성령은 받아 땅 끝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원수라 불리는 이들은 예수님이 부탁하신 사명과 거리가 있는 일종의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된 소식이라는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기꺼이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았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로 먼저 복음 받은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쾌락주의자들은 끊임없는 탐심과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탐욕의 노예가 되고 우상 숭배하는 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육체의 일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이 이룬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만, 이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과 결말이 무엇입니까?
√빌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첫째,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둘째, 그들은 육체적 욕구만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입니다.
넷째,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것보다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가치를 둔 자들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십자가의 원수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계속 자신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거기로부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가치를 두고 사는 자들이기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굴복하며 주라 시인할 마지막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받은 생명의 삶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이생의 자랑과 만족에 치중해 개인의 편의와 쾌락에 몰입된 삶을 산다면, 결국엔 그리스도의 원수라 불리는 쾌락주의자들처럼 자신의 배라는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이라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현재 감옥에 갇혀 있으며, 자칫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생의 자랑이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고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교회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영원한 생명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이생의 자랑은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자의 관점으로 각자의 삶을 돌아보며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바울은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지 말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기를 권면합니다. 우리의 푯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일평생 추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도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얻은 자의 기쁨을 누리며 세상에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다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