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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역 4번 출구, 어느 한가로운 평일 오후에 도착한 지하철 역 주변으로 한산한 도심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무르익어가는 여름의 푸르름이 갈수록 짙어져 갈 때, 동반되는 무더움은 이곳으로의 발걸음을 머뭇 거리게 했으나 막상 도착하니 마냥 좋아라 하는 그 모습과 활기찬 발걸음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당장은 더울 지라도 프레임에 담긴 결과물이 가져다주는 복잡 다양한 감정들을 되뇌며 시선을 앞을 향했다. 북촌 한옥마을처럼 정주형 한옥마을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편하게 돌아볼 수 있었기에 갈수록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서울의 다른 정주형 한옥마을과는 다르게 구한말의 시대적 분위기를 간직한 채, 시간이 갈수록 그 예스러움을 더했다. 덕분에 탁 트인 한옥 구조물들 구석구석을 누비며 곁들인 설명글들은 마냥 추상적이었던 분위기에 틀을 제공하며 좀 더 당시의 분위기를 실감 나게 만들어 줬다. 입장료도 존재하지 않아 이곳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참으로 자유롭게 느껴졌다. 곳곳에 자리를 잡은 채 그 여유를 한껏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잠시 동안 그 찰나의 틈바구니를 통해 불어오는 바람의 숨결에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다.
1. 시간이 멈춘 공간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수줍게 그 맑은 모습들을 보여줄 때, 남산골의 짙은 녹음이 더욱 수려한 경관을 자랑했다. 숭례문에서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과거 조선 사회를 이끌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고 전한다. 해서 붙은 별칭 '청학동'은 남산 주변을 한 번이라도 찾아봤다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6월 초가 지난 뒤, 4월 즈음에 걸었던 남산 둘레길에서의 그 몽환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편안함으로 가득 채웠다.
한옥마을 기와 위로 우두커니 보이는 남산타워를 뺀다면 이곳은 현재 구한말 당시에 멈춰 있는 듯했다. 세상의 흐름이 바뀌고, 새로운 흐름이 이 땅에 찾아왔을 때의 그 변곡점에 머물러 있는 듯했던 그 순간. 이런 생각의 흐름이 가능했던 것 또한, 남산골 한옥마을 곳곳에 위치한 가옥들의 위치와 당대의 주인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치만 바뀌었을 뿐, 곳곳에 자리한 가옥들은 여전히 시간의 흐름을 짚어삼킨 채 당대에 머물러 있었다.
당대의 거리를 걷는 듯, 가옥들이 빼곡히 얽히고설켜 있다. 한양 도성 곳곳에 자리해 있던 가옥들의 원형을 고스란히 옮겼다면 상당히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남산골에 복원을 한 뒤, 누가 살았던 곳인지를 가옥 입구에 설명해 뒀다. 와중에 그 좁아 보였던 도성 안에서도 집안의 조상신을 모시기 위해 작게나마 사당을 마련해 둔 것을 보고 성리학의 그 생활 습관이 생활 깊숙한 곳까지 자리해 있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문득 넌지시 어딘가에서 부터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시대적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가옥은 바로 어느 도편수 가옥의 존재를 확인하면서부터 였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시행했던 정책들 중, 이 가옥의 주인은 당시 경복궁 중건 공사에 책임자로 참여했던 분의 가옥이었다. 다른 지배층들의 가옥과는 사뭇 다른 조금 더 평범한 분위기였지만 어릴 적 시골 외가댁에 놀러 갔을 때의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색다르면서도 정겨운 분위기가 참으로 친숙했다. 이곳에 복원된 뒤, 그 원형을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선 따라 기다랗게 늘어진 한옥의 선은 참으로 유려했다. 복원이 되었다고는 하나 드문드문 지나온 가옥들 대문 앞에 적혀 있던 설명들 덕분에 고스란히 백여 년 간 흘러왔던 시간의 흐름을 삼킨 채 고풍스러움을 더한 것처럼 느껴졌다. 드문드문 열려있던 문 사이로 오가는 바람들이 여름의 무더위를 머금은 채 쏘다녔고, 그저 처마 끝에 매달린 청사초롱을 통해서 그 바람길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오감을 거스르는 것 없이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그에서 비롯된 편안함을 오롯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특권과도 같았다.
흔들리는 청사초롱을 보며 흘러가는 시간을 통해 변화의 정도를 가늠해 본다. 오래전, 고궁을 거닐며 한복과 청사초롱을 활용해 사진을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 더불어 과거 전기가 없었을 때의 도성의 밤은 어땠을까?라는 생각들은 여전히 유효한 듯했다. 지난번, 인왕산 성곽길 따라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었을 때 밤 11시가 되자 성곽길의 조명이 전부 꺼졌다. 하지만 저 멀리 도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불빛은 인왕산 전역을 물들이기에 충분했었다. 전기가 없었을 시절 한양의 밤거리는 어땠을까? 가옥들 사이를 걷다 보니 문득 이런 호기심도 샘솟기 시작했다.
2. 풍류(風流)
오래전, 선조들이 이곳을 오르내리며 시조를 읊고, 여가 생활을 즐겼던 것처럼 가옥 곳곳에 즐길 거리들이 즐비했다. 한옥의 분위기를 즐기며 힐링할 수 있도록 낮잠을 위한 공간부터 소정의 요금을 지불한 뒤 즐길 수 있었던 한지공예와, 활 만들기 그리고 자개공예가 눈에 밟혔다. 오래전 이곳에 왔을 때와 변한 부분이 있다면,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으로 체험 가능한 프로그램들이 생겼다는 점은 반드시 오프라인 만을 고집하던 내게 상당히 신선함을 건네줬다.
자개공예의 경우 오래전, 친가에 놀러 갔을 때 보던 자개장과 박물관에서 마주했던 나전칠기 장식함이 문득 떠올랐다. 어릴 적 못 느꼈던 그 고급스러움에 홀린 뒤 오랫동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던 그 아름다운 자태를 이곳에서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물론 장인들만큼 섬세하면서도 전문적인 작업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결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했다. 영상에서 마주했던 장인들의 작업의 순간들은 그저 존경 그 자체였다.
게다가 텅 빈 한옥들은 사진을 찍고자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훌륭한 야외 스튜디오로 활용됐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을 누비며 한옥이 가져다주는 정취에 빠져들던 순간, 뒤 따라 이곳을 찾은 모델 분과 사진작가 분의 열정이 고즈넉했던 공간에 활기를 더했다. 단아한 한복을 입고 주변을 거닐던 그 모습이 순간에 매력을 더했다. 인왕산 자락 따라 형성된 도심 한옥 한가운데를 거닐던 양반댁 규수처럼,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그 찰나의 순간에 담긴 자태는 참으로 유려했다.
반드시 사진작가와 모델이 아니어도 충분했다. 주변을 거닐다 힘들거나 앉고 싶을 때, 마루에 걸터앉은 채 원하는 곳에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순간이 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남산 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처마 끝에 매달린 청사초롱을 간지럽히며 마천루 사이로 향했다. 모든 것들이 멈춘 것 같은 그 순간에도 곳곳에 현실의 그 끈을 붙잡게 만들어 주는 자극제들이 이곳 주변을 감쌌다. 흘린 땀방울에 바람 한 스푼, 계속될 것만 같았던 시간도 정 없이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다.
남산골 한옥마을 가장 높은 곳에서 600년의 시간이 잠든 채 다음 천년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1994년, 조선 개국 이후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가 완성된 것을 기념해 당시 일상생활에 활용되던 갖가지 물품을 담았다고 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없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세상의 변화 한가운데, 당시의 물품을 보게 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남산타워는 말없이 이곳을 굽어 살펴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본래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곳이었으나 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딘가에 남겨진 비석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모를 정도로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오래전 선조들이 즐겼던 방식과는 별개로 도심 한가운데 번잡한 곳을 피해 편안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은 서울 속에서 누리는 몇 안 되는 특권이자 풍류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만 가는 초록빛 그 한가운데, 한옥들은 여름의 그 향과 색을 머금은 채 갈수록 그 매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3. 걷다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다 보면 한가운데 국악당이 자리해 있다. 전주에서 자고 나라 판소리가 친숙한 나로선 오랜만에 향수도 느낄 겸, 바라만 봐도 다양한 매력을 가져다줬다.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해 모든 상황이 중단된 채 덩그러니 빈 공터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지점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다가오는 주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주말의 여유를 만끽할 것으로 여겨졌다.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장마 시즌이 야속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마주할 수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남산골 한옥마을의 야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다. 명절 연휴와 더불어 주말을 활용해 이곳을 자주 찾았었지만 야간개장은 고궁을 제외하고 한 번도 누려 본 적이 없었다. 고궁에서 마주했던 그 은은한 불빛과 고즈넉했던 반영이 자아내던 분위기가 백미였는데, 기와지붕 그 높은 곳에 자리한 남산타워를 두고 이곳의 분위기는 어떻게 만들어질 지 문득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더불어 젊은 신진 작가 발굴을 위한 문화예술 전시회도 함께 열려 이곳의 분위기를 한껏 활기차게 만들었다. 앞서 언급했던 한복 촬영을 포함해 시간이 갈수록, 이곳의 쓰임새가 갈수록 그 폭이 넓어지는 모양새였다. 야간개장을 포함해 밤의 그 분위기를 아름답게 꾸며 줄 야간매점과 같은 행사들이 가만히 있던 문화재들에 새로운 가치를 추가시키는 모양새가 참으로 좋았다. 나 조차도 이곳을 활용해 무엇을 담아볼까를 스스로 고민을 하고 있기에 이런 행보에 참여하는 듯 해 느껴지는 뿌듯함은 성취감을 동반했다.
정적인 그 분위기에 사람들의 참여로 더해지는 그 에너지와 동반되는 가치가 공간의 특별함을 자아내는 중이다. 더불어 서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한옥들을 갤러리처럼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에 더더욱 이곳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와중이다. 각종 플랫폼들 얼 통해 세계 곳곳에 소프트 파워가 더욱 속속들이 퍼져가고 있는 이 시점에 그 결을 함께 하고 있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 흐름을 타고 이런 장소들이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본다. 좋은 건 사람들과 공유할수록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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