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교육대학원 E56065 박세진-직관경험담 에세이
직관. 분명 처음 듣는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특별히 여겨본 적이 있었느냐 하면, 아닙니다. 처음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은 이번 학기 시작할 무렵, 합리모델과 직관모델을 비교하는 강의영상을 보았을 때입니다. 교직수업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영상을 틀어놓고 수강하던 제가 필기를 하기 위해 펜을 든 것이 그 무렵이었을 겁니다.
저는 마지막 수업 즈음 교수님께서 진행하신 직관성 테스트에서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퍼센트를 결과로 받았습니다. 4.00 : 3.86 이면 그래도 직관력이 높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요? 평소에는 늘 매뉴얼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지만, 막상 막다른 상황에 처하면 직관성이 빛을 발하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직관 에세이를 과제로 받았을 때, 무엇을 주제로 작성할지 가볍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직관을 발휘한 순간은 분명 수없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떠올리고자 한다 하여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발휘한 기지와도 같은 직관이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다는 건 그게 직관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일주일 정도를 틈 날 때마다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을 훑고, 성인이 된 이후의 기록을 모은 외장하드도 뒤지고, SNS 히스토리도 몇 번을 정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들께서 흥미를 갖고 읽으실만한 제 직관 이야기 소스를 몇 가지 골랐습니다.
직관이 등장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곳은 익숙한 공간이 아닐 겁니다. 저는 학부 시절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던 22살이라는 나이에 교환학생을 떠났습니다. 한평생 배운 영어도 아닌, 고작 2년 남짓 배운 러시아어의 모국으로, 그것도 2016년 당시에는 한국인들에게 관광지로 유명하지도 않았던 하바롭스크로 말이죠. 영어도 한국어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가족도 친구도 없이 1년을 지낸다는 것은 마냥 멋지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러시아는 겨울이 긴 겨울 나라거든요. 길거리 풍경도 소련스럽기 그지없는, 기숙사 창밖을 보면 온통 회색투성이인 시간을 잘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제 크고 작은 직관 경험은 러시아 하바롭스크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시작됩니다. 3시간 반의 비행 직후 입국심사 직전 저는 공항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의 화장실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정말 충격적인 모습의 화장실. 변기 커버가 없는 그곳에서 저는 잠시 고민하다 기마 자세로 볼일을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스케줄에 그 이외의 화장실이 존재할지 아닐지 알 수 없었거든요. 그 화장실이 그나마 가장 좋은 화장실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면 바로 귀국하는 비행기를 끊었을까요?
하루는 유명한 중국음식점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구글맵보다 2gis라는 러시아 전용 지도 앱이 오만 배는 더 정확해서 1년 내내 그것만 잘 쓰다 왔는데요, 그날따라 데이터가 안 터져서인지 아무리 버스를 타고 달려도 음식점 근처조차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앱이 가르쳐주는 대로 정처 없이 가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직관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뭔가에 홀린 듯이 아무데서나 내려버렸습니다. 그날 저는 영화 라라랜드의 스크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너무나도 예쁜 보랏빛 하늘을 직관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 볼 수 없으니 사진 첨부합니다. 어찌됐든 그 행동은 옳았습니다. 앱이 미쳐서 중국음식점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거든요. 바로 반대 방향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러시아에서 밤길 다니는 건 무섭습니다. 해당 중국음식점은 다음 날엔가 제대로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맛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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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제가 한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오던 날입니다. 아침 8시 비행기라 새벽부터 일어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잔뜩 들고 기숙사를 나섰습니다. 택시를 불렀어요. 안 옵니다. 러시아에서는 택시를 앱으로 부르게 되어있습니다. 길거리 차들이 택시라고 표시하는 택시 모자도 안 쓰고 다녀서 무슨 자동차가 택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 택시가 안 잡히는 겁니다. 7시가 넘었는데도! 이러다 비행기를 못 타면? 집에 못 가는 겁니다. 그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8시 비행기면 출국수속 밟고 짐 부치고만 해도 시간이 걸리는데 저는 비행기 출발 한시간 전인데도 기숙사 앞에 우두커니 있는 겁니다. 그게 1월 9일이었어요. 러시아의 한겨울, 털부츠에 기모바지에 니트에 코트 입고 그 위에 롱패딩을 걸치고 목도리를 했는데도 추운, 온 사방이 녹지 않은 눈투성이인 곳이었습니다. 7시 10분, 저는 직관을 따라 제 몸집만한 캐리어를 끌고 먼 길을 떠납니다. 눈길 위로 캐리어를 질질 끌고 출근하는 러시아 직장인들이 꽉꽉 들어찬 버스정류장까지 갔고요, 그 길은 수많은 계단이 있었습니다. 짐을 들고 타면 오버차징을 하는 것도 그 날 알았습니다. 공항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야 되더군요. 갈아탔습니다. 내려서 공항까지 또 열심히 걸어갔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정말 한 순간도 춥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영하 30도를 육박하는 아침 날씨에 그 고군분투를 했으니. 여담이지만 한국은 그날 영하 10도였고, 도착하자마자 저는 패딩을 벗어던지고 코트 한 장 걸치고 밖을 쏘다녔습니다. 안 춥더라고요. 그리고 다음날 저는 온몸에 근육통을 얻었습니다.
알고 보니 택시를 아침에 잡으려면 최소 전날 예약택시를 설정해둬야 했더군요. 제가 택시 잡힐 때까지 기다리겠답시고 기숙사 앞에서 백날 기다렸다면? 아마 그날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직관이 제 귀국길을 도왔던 겁니다. 근육은 지키지 못했지만.
앞서 제가 러시아의 밤거리를 걷지 않았다고 했었지요? 하루는 정말 직관대로 밤 산책이 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혼자는 무서우니 러시아 친구들을 꼬셔서 함께 갔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참 유명한데, 시가지는 하바롭스크가 오만 배 더 아름답고 큽니다. 밤 기차 타고 13시간 걸리는 이웃도시니까 기회 되시면 꼭 하바롭스크를 들러 주세요. 저는 그날 직관대로 떠난 밤 산책의 끝에서 그림 같은 야경을 보게 됩니다. 이 또한 저 혼자 볼 수 없으니 사진 첨부합니다. 낮에는 안 예쁘냐 물으신다면, 반박하기 위해 랜드마크인 우스펜스키 사원과 매일 저 색감인 필터 없는 하늘 그리고 제가 등장한 사진 또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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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대로 떠났던 12월 말의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여행 또한 빼놓을 수가 없네요. 종강하고 귀국 비행기가 뜰 때까지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월화수목금을 다 바쳐 기숙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오는 계획을 짰습니다. 남들은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다녀오는데, 저는 이웃도시 기차역에서 기차 타고 다녀오는 계획을 출발 사흘 전에 짜기 시작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은 굉장히 먼 교외에 위치한 공항에 비해 시가지에 위치해서 오히려 편하긴 했어요. 하지만 걱정인 것은 13시간을 타야 하는 밤 기차였죠. 남녀 기숙사도 방만 나누고 한 건물에 때려박는 러시아에서, 기차 3등석에 남녀구별을 바랄 수야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일행들과 따로 떨어진 좌석을 구했어요. 왕복 기차값이 6만원정도였으니 정말 이득이었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로망을 가진 분들이 계신가요? 최소 2등석은 타셔야 합니다. 물론 그 로망은 전부 3등석에서 이루어지고 있겠지만요. 그렇게 나빴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또 아니에요. 그런데 좋지만도 않아요. 특히 겨울 기차는....... 발 시려워요.......
어쨌거나 직관대로 떠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남겼습니다. 저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교환학생을 갔는데, 그런 제게 4년이 지난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 벅찬 기억이 남아 있어요. 장미대선을 치르러 이듬해 4월 말 다시 한번 블라디보스토크행 기차를 탔던 경험도 있습니다. 인생 첫 대선을 재외국민 투표로 치렀는데, 어학시험을 앞두고 있어 안 가는 게 분명 합리적인 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갔고, 그 때 2등석을 탔습니다. 또 봄 기차는 느낌이 다르더군요. 기차 창문을 살짝 열고 베개에 기대 앉아 바람을 맞던 그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합니다. 우수리스크라는 작은 도시에도 들르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고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우수리스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께서 많이 계시던 곳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도 마찬가지고요. 최재형 선생의 집이 리뉴얼되기 전에 제가 보고 왔던 것 같습니다. 사진 몇 장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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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러시아 교환학생을 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직관이 작용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러시아를 다녀오면서 제 본래 성격을 되찾은 것 같거든요. 어쩌면 제 인생을 바꾼 것도 직관이었고, 직관을 따르면 언제나 기대하지 않았던 이벤트가 찾아들었네요. 최근 직관대로 긁어버린 무이자 150만원짜리 피부샵도 그런 이벤트로 되돌아오려나 싶습니다. 뉴욕에 갔을 때도 직관대로 행동해서 얻은 이벤트들이 꽤 있는데, 모두 풀기엔 지면과 시간이 제한되어 아쉽습니다. 아침에 딱 눈을 뜨고 아, 오늘은 왠지 브루클린 덤보에 가고 싶다! 하는 마음으로 향한 곳에서 굉장한 날씨로 멋진 사진을 건졌거든요. 그 사진만 몇 장 드리고 글 줄이겠습니다. 교수님께서 왜 합리보다는 직관을 추천하셨는지 직관 에세이를 쓰고 나니 괜히 더 이해가 가게 되네요. 확실히 알겠습니다. 제 인생은 직관을 따랐을 때 더 반짝반짝 빛났어요. 글 초입에 말씀드린 제 4.00 : 3.86 수치를 유지하면서, 직관을 따르는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 학기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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