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이예(충숙공 / 李藝, 1373년 ~ 1445년 3월 31일)
조선의 '일본통' 외교관… 조선·일본 무역 조약의 기틀 마련해
이예(충숙공 / 李藝, 1373년 ~ 1445년 3월 31일(음력 2월 23일))
https://youtu.be/N1BUoSETZ8E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입력 2024.09.19. 00:33 조선일보
후대에 만든 충숙공 이예 초상화. 이예는 조선 초기 대일 외교 전문가로 활약하며 조선과 일본 외교 관계에 크게 이바지했어요. 외교부는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이예를 뽑았어요. /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
지난 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12번째 정상회담이었죠. 이번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정상은 양국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에 뜻을 모았어요.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과 한국의 외교 관계는 과거 조선 시대 때도 중요하게 다뤄졌는데요. 특히 조선 건국 초기에는 충숙공 이예(1373~1445)라는 인물이 대일 외교 전문가로 활약하며 양국 외교 관계에 크게 기여했어요. 이러한 이유로 외교부는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이예를 선정했고, 2015년에는 국립외교원에 이예 동상이 건립됐어요. 지난 5월엔 ‘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가 일본 교토에서 이예 동상 제막식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예가 활동하던 시기, 대일 외교의 중요한 현안은 무엇이었을까요? 한일 관계 역사에서 그의 외교 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오늘은 조선 초기 대일 외교 전문가로 활약한 이예의 삶과 활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국립외교원에 있는 이예 동상. /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
왜구, 대일 외교 현안으로 떠오르다
왜구는 일본인 해적 집단을 지칭하는 단어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한반도와 중국 해안 지역을 빈번하게 침략했어요. ‘고려사’에 따르면 왜구는 고려에 1350년부터 본격적으로 출몰했어요.
왜구는 배 2~3척의 작은 집단부터 400여 척에 3000여 명의 대규모 집단까지 그 규모가 다양했어요. 주로 쌀과 같은 생활 필수품을 노렸기 때문에 고려의 조운선이나 식량 창고를 습격했지요. 왜구로 인한 피해가 커지자 고려는 군사력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왜구를 격퇴하고자 했어요. 훗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 등에서 공로를 쌓으며 유명해졌다고 해요.
조선 시대에서도 왜구는 중요한 국방 문제로 다뤄졌어요. 조선 초기 여러 왕들은 왜구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적·외교적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고심했지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도맡으며 활약한 인물이 바로 이예였습니다.
대마도에 있는 이예 공적비. 이예는 교토뿐만 아니라 규슈와 류큐(현재 오키나와), 대마도 등에 파견되어 왜구에게 잡혀간 조선인 귀환에 주력했어요. /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
조선인 귀환에 힘을 쏟다
이예는 1373년에 울산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왜구는 한반도 해안 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어요. 또 그가 태어난 울산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등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에 그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던 지역이었어요. 그러다 1380년 이예의 어머니가 왜구들에게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훗날 이예가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며 외교 협상으로 조선인 포로 귀환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실은, 이와 같은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예는 원래 울산 관아에서 군수를 모시는 아전으로 일했어요. 그러다 1396년 왜구들이 울산을 침략해 군수를 잡아간 사건이 발생했어요. 당시 다른 아전들은 도망갔지만 이예는 자진해서 군수를 따라 배에 탔고, 왜구들도 그 정성에 감동해 배에 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해요. 그리고 왜구는 이예가 예를 갖춰 군수를 모시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죽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 생각했고, 이예와 군수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선으로 돌아온 이예는 아전의 역에서 면제되고 벼슬을 받았답니다.
1400년 이예는 일본으로 파견되는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동행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했어요. 이는 어릴 적 왜구에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기록에는 이예가 일본 삼도(三島)에 가서, 집집마다 수색했지만 어머니를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삼도는 당시 왜구의 근거지였던 대마도, 일기도, 송포도로 추정돼요.
이후 이예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 수도였던 교토뿐만 아니라 규슈와 류큐(현재 오키나와), 대마도 등에 파견되어 왜구에게 잡혀간 조선인 귀환에 주력했어요. 이예는 당시 조선 내에서 ‘일본통’이라 불릴 만큼 일본 정세와 외교 정책 등에 통달해 있었고, 외교관으로서 겸비해야 할 외국어 능력과 협상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1426년 세종이 50세가 넘은 이예를 일본에 보내며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게 생각하지 말라”며 손수 갓과 신을 하사했다는 실록의 기록은 이예의 역량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예는 그렇게 40여 차례 일본으로 사행길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 667명을 귀환시켰습니다.
계해약조(1443년) 체결을 주도하다
이예는 1443년 계해약조 체결을 주도하며 조선과 일본 관계를 안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어요. 조선 초기 대일 외교책은 강경책과 회유책 두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어요. 강경책은 군사적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것이었고, 회유책은 교섭과 협상을 거쳐 제한된 무역을 허용해주는 것이었어요.
조선은 강경책으로 1419년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했어요. 이후 왜구 침입이 줄어들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왜구의 침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선 식량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무역을 허용해주는 회유책도 병행돼야 했지요. 이에 조선은 1420년대에 3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일본인에게 개항했어요.
이후 무역을 목적으로 3포에 도항하는 일본인이 급증하자, 조선은 이를 규제할 필요가 생겼어요. 이에 1443년 조선은 이예를 대마도로 파견해 계해약조를 체결시켰어요. 이 조약을 통해 조선으로 도항하는 일본인 배의 수와 인원을 제한하는 등 양국 간의 무역 조건을 규정할 수 있었어요.
고려 말부터 해안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던 왜구는 조선 초기 계해약조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볼 수 있어요. 또 계해약조는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여러 무역 조약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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