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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상처, 위기를 맞은 시대의 비애: 현상연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마경덕 (시인)
7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 있다. 지각변동으로 뒤집힌 호수 밑바닥이 물 밖으로 올라오고 파도에 깎여 모습을 드러낸 ‘채석강’은 켜를 안친 시루떡처럼 층층이다. 한 켜의 지층은 숱한 “시간의 미라들”이다. 아무 말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입이 닫힌 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굳어버린 침묵과 압축된 여백에서 “시간의 올”이 풀려나온다. 해식 절벽은 까마득한 “지구의 역사책”인 셈이다. 조선시대 전라우수영 관하 격포진(格浦鎭)이 있던 곳, 바다를 지키던 수군(水軍)과 그 격랑은 흔적조차 없지만 바다에 존재했던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 에서 “남동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북서 밀물에 밀려 명량을 뒤덮었다ⵈ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라고 죽음에 대한 이순신의 고뇌를 기록했다.
온갖 것들이 떠다니는, 심지어 적의 시체마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이승의 바다에서 칼이 벨 수 없는 것은 “내면에 깃든 죽음뿐”이었다.
프로이트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 승화시키는 치유의 과정”을 문학창작 과정으로 보았다.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시의 힘으로 기억의 지층까지 파고들어 내면의 것을 끌어내는 과정이 시 쓰기이다. 인간을 제압하는 상실감, 그늘에 묻힌 세상의 뼈저린 것들, 실체가 모호한 존재마저 여러 각도에서 절개하고 탐색하여 지면에 펼쳐야 한다. 시 쓰기는 “상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역할은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상징을 찾아내어 정신세계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게 돕는 것”이라고 한다. 시가 지닌 또 하나의 ‘가치’는 그것이 우리의 “반성적 사유”를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상연 시집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에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비감(悲感)이 있다. 미처 감지하지 못한 인간의 고독한 내부, 부재와 결핍, 시대와의 불화, 폐허가 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적 상처에 접근해 다양한 층위의 슬픔을 보여준다. 현상연 시인은 대상과 심미적 거리를 유지하며 이미지를 구성하거나 문제를 차분하게 내면화시켜 진정성을 획득한다. 시인이 채집한 현시대의 불안은 암울한 현실과 밀접하게 이어져 삶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칠월,
익모초 꽃이 필 때면 창문이나 옥상으로
자주 눈길 주며 굳은 결기를 보이던 사내
시위에 걸린 활처럼 팽팽한 화살촉이 되기도 했다
마음을 뒤집으면 꽃 필 수 있다고
또 다른 봄을 기대하지만
꽃피는 계절은 따로 있어
팔년 동안 쓴 줄기만밀어 올린다
만개한통증,
저 눔의꽃대 잘라 버려야지
청산가리보다 독한 고통의 꽃
꺾어버려도 다시 자랄 다년생 병 줄기
깊이 박힌 뿌리 잡고 실랑이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여름의 시작은 어디고 어디가 끝일까
죽음보다힘들었던 그해 초여름,
환장하게 짙어가는 녹음에 나는 시들고 있었다
― 「쓰디쓴,」 전문
불완전한 우리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든 것들은 ‘쓴맛’이 대부분이다.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 「쓰디쓴,」 은 무망(無望)한 한때를 보낸 투병의 기록이다. 직면한 실존적 고통은 팔년 동안 쓰디쓴 꽃대만 밀어올린 막막함으로 나타난다. 끌어안아야 할 대상은 자꾸 품을 빠져나가고 간병을 돕는 시인과 간병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서로에게 지쳐 힘이 부친다. 흩어진 일상의 고리들을 연결하여 질서를 찾는 일이 간병인에게 주어진 문맥이며 의무인데 녹음이 짙어갈수록 병은 뿌리가 깊어 병시중하는 마음마저 시들고 있다. 녹음과 퇴색되어가는 무위(無爲)의 날들이 병치되고 애틋함은 고조(高調) 된다.
약재로 쓰이는 쓰디쓴 ‘익모초’, ‘쓰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단순히 ‘익모초’의 ‘쓴맛’이 아닌 고달픈 마음의 상태, 불안한 환경도 ‘쓴맛’이다. 하나의 뜻이 두 개로 풀이되는 것처럼 “화가와 페인트공”도 구분 없이 영어로 ‘painter’라고 불린다. 한 사람은 작품을 위해 화폭에 붓질을 하고, 또 한 사람은 단순히 색을 덧입히기 위해 붓질을 한다. 전자의 행위는 ‘예술’이고 후자의 행위는 ‘노동’이다. 정반대되는 붓질이 같은 단어로 쓰이고 있다. 붓질을 ‘하다’에 의미를 두었을 뿐, 그 붓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가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 쥔 붓은 ‘하나’이면서 ‘각각’의 붓으로 나타난다. 청산가리보다 독한 “고통의 꽃”은 꺾어버려도 다시 자랄 다년생 병 줄기에 희망은 빠르게 낙담으로 시든다. 생명의 끈을 “붙잡은 손”과 그 “손을 붙잡고 버티는” 환장할 것 같은, 이 미묘한 간격은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다. 긴 시간 억제된 감정이 촉발되는 심리적 현상을 다룬 ‘쓴맛’을 넘어선 ‘쓰디쓴’은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깊은 맛’이다.
평택 고덕지구 도로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집성촌 주택들
바람이 건들거리며 곰팡이 핀 벽을 뜯어먹고
떠돌이 개들이 모여든다
허공의 무게에 철근 골조가 휘어지고
달빛은 공명의 발자국 뚜벅거리며
희미한 그림자를 마당에 풀어놓는다
싸늘한 아랫목에 때 절은 잠이 뒹굴고
문지방 위 빛바랜 액자,
떠나간 얼굴이 갇혀 있다
기척이나 생기가 사라진 건물은 어둠의 묘지
몇백 년 먼지를 둘러쓴 시간이 빠져나가고
기울어진 서까래에 적막이 거미줄 친다
철거라는 현수막이 걸린 담 밑
잡초는 봄볕에 땅을 이고 기지개 켜고
유빙처럼 떠도는 소문을 입증하듯
재개발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폐허를 받아들인 건 사람들이다
― 「폐허의 내부」 전문
주목할 점은 눈으로 “보여지는” 폐허와 폐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다. 잡초는 봄볕에 땅을 이고 일어서지만 폐허를 받아들인 쇠락한 마음은 복원되지 않는다. 대부분 재개발이 시작되면 원주민들은 떠나가고 각지에서 몰려온 낯선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기척이나 생기가 사라진 건물은 어둠의 묘지/몇백 년 먼지를 둘러쓴 시간이 빠져나가고/기울어진 서까래에 적막이 거미줄 친다.”를 통해 시인은 몇 백년의 시간을 버텨낸 마을의 내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주름과 흰머리는 사람의 몸에 시간이 살다간 ‘증거’이듯이 집에도 인생의 계급장 같은 몇백 년 먼지를 둘러쓴 시간이 있다. 철거된 건물의 잔해에도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간 존재해왔지만, 사람들의 인식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은 흘러가 버린 시간일 것이다. 폐허의 주인들은 다가올 마지막 시간 앞에 서 있다. 재개발이란 명목으로 이어지는 거센 물줄기는 마을을 홍수처럼 쓸어버린다. 그 지류를 타고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마을은 형성될 것이다.
「폐허의 내부」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은 시간이 매장된 “어둠의 묘지”이다. 소멸한 것들은 우리의 필요 밖으로 멀어진 것들이고, 경제 논리 안에서 누락된 것들이다. 현상연 시인은 단순히 “물리적인 죽음”만을 말하지 않는다. 철거로 사라진 존재들은 머잖아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인식적 죽음”으로 결말을 맺을 것이다. 몇백 년의 시간이 허물어지는 것은 찰나의 일이다. “물리적인 힘”으로 사라진 그 마을은 기억에서 잊힘으로 “인식적으로” 부재하는 것이다. 재개발로 인한 자연의 파괴에 대한 반성이 저변에 깔려있다. 현상연 시인은 내부 깊이 잠재된 인간 “본연의 슬픔”을 「폐허의 내부」에서 찾아내고 있다.
날짐승의 울음이 또 시작되었다
기계음의 시작은 이륙이다
빽빽하게 날아오르는 날갯짓,
활주로 주변에 떨어지는 은빛 비늘에
회색 숲의 진동이 시작되고 날지 못하는 미물들
팽팽한 고통을 출렁이며 하루를 버틴다
귀가 길어진 사람들,
송곳의 깊이를 재고
수시로 소리를 실어 나르는 기지촌 헬리콥터
익숙해진 일상에 TV 볼륨이 높아지고 말소리가 커진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회색소음
방음벽을 흔들고
주파수가 높았던 귀는
어느새 난청과 접신하여 노랗게 시들어간다
비상을 끝낸 소리가 하나둘 귀로 착륙하고
초저녁,
또 다른 소음 부과를 알리는 초침이 잠을 끊는다
― 「회색소음」 전문
반복되는 소음은 폭력에 가깝다. 수없이 항로를 오가는 날짐승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행기의 굉음은 쉽게 학습되지 않는다. 소음이 오가는 주거지에서 떠나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조건이 발목을 붙잡는다. 이대로 길들여지는 방법이 최선이어서 소음방지 귀마개가 등장하지만 “귀마개를 뚫고 들어오는 회색소음/방음벽을 흔들고/주파수가 높았던 귀는/어느새 난청과 접신하여 노랗게 시들어간다”고 한다.
주변까지 날아오는 공사장 소음, 자동차의 경적, 질주하는 지하철 소음, 반복되는 확성기 소리, 등등 도시는 소음에 노출되어 있다. 잠시 소음에서 벗어난 수면은 인간에게 최적의 휴식이다. 인간의 수명과도 연결되는 잠은 생존이기에 그날의 컨디션은 일상을 지배하고 외부환경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소음에 시달려 잠을 설치면 몸에 탈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소음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프랑스 현대철학자인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은 질병은 비정상이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보았다. “질병은 단순히 불균형이나 부조화일 뿐 아니라 또한 그 무엇보다도 새로운 균형을 얻기 위해 인간 내부에서 자연이 시도하는 노력이다. 질병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화된 반응이며, 유기체는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질병이 된다.”고 하였다. 질병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몸의 “이상 신호”는 스스로 회복되기 위한 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질병은 새로운 균형을 얻기 위한 “몸의 신호”인 것이다. 오랫동안 몸을 돌보지 못한 행위의 결과는 때가 되면 자신에게 돌아온다. 몸의 “구조신호”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과부하 되고 있다.
밤새,
괴산호가 슬픔을 가뒀다
이튿날 아침
몸을 뒤척이는 짐승들 울부짖음에
꽝꽝 언 호수로 귀가 끌려갔다
정오의 햇살이 등잔봉*을 내려와 호수로 들어가고
정수리를 파고든 빛은 팽창되어
틈새에 튕겨지는 울음소리
쩌엉! 띵! 꾸룩!
앞서간 발자국 따라 번지는
울음의 갈피마다 끼워진 빛의 소리, 소리들
하루치 햇살에 금이 가면 얼음도
방전될 때가 있어
비 맞고 쪼그려 앉아 우는 물의 목소리만 듣는다
무리에서 떨어진 한파 몇 조각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굴피나무 껍질 같은 12월,
상처 난 짐승은 침묵하며 은신중이다
― 「얼음의 얼굴」 전문
겨울 저수지가 차갑게 굳어있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겨울 한철은 영하로 떨어진 기온이 주체가 되어 저수지를 지배한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물빛과 층을 쌓고 있는 시간의 안쪽에 무엇이 고여있을까. “하루치 햇살에 금이 가면 얼음도/방전될 때가 있어/비 맞고 쪼그려 앉아 우는 물의 목소리만 듣는다”에서 짐작하듯이 저수지를 파고드는 햇살에 얼음에도 균열이 생기고 그 안에 침묵으로 은신한 것들이 튕겨져 나온다.
「얼음의 얼굴」 은 ‘갇히는’ 곳과 몸을 ‘숨기는’ 곳, 두 개의 행위가 벌어지는 이중적인 장소로 전개된다. 차가운 기온에 저수지에 갇혀버린 물은 “타의에 의한 구속”이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행위는 “자의에 의한 은신”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긍정과 부정”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듯 저수지는 “두 개의 의미”가 대립하고 공존한다.
햇살에 팽창된 물의 표면이 흔들리고 틈이 생길 때 시인은 사물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해 소리로 연결하고 가라앉지 못하고 “부유하는 슬픔”에 주목한다. 얼음을 뚫고 나오는 짐승의 울음은 저수지에서 사라져간 아이들의 마지막 울음일지도 모른다.
유심히 주변에 귀를 열고 사물의 움직임을 주시한 「얼음의 얼굴」 은 단단하고 차디찬 그 이면에 주체할 수 없는 “생명의 뜨거움”이 있다. 시인은 무리에서 떨어진 한파 몇 조각으로 다가올 봄을 암시한다. 봄이 오면 한 덩어리로 뭉친 저수지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 잘게 부서져 출렁거리고 파랗게 일어설 것이다.
현상연 시인은 겨울저수지가 “봄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전까지의 그 두터운 층의 내면에 웅크린 굴피나무 껍질 같은 삶의 비애를 꺼내 올린다. 우리의 삶도 겨울이 지나 봄이 올 것을 알기에 혹독한 삶의 테두리에 갇혀 때를 기다리며 은신하는 것이 아닌가.
계림 이강,
뱃머리에 가마우지 몇 마리
허기진 식욕 움켜쥔 채
사공의 신호로 강물에 뛰어든다
잡힌물고기
가마우지 목에 걸린다
甲이비정규직이란 올가미로 乙의목을 조인다
삼켜지지 않는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밤새자맥질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 가마우지
굶주린 눈빛이 날짐승의 본능으로 거칠게 빛나지만
또 다시 乙이 되어
값없는 달빛만 낚는다
― 「가마우지 달빛을 낚다」 전문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엔 뺏고 빼앗기는 무력이 존재한다. 갑의 수하(手下)에서 밥을 먹고 살아가기에 그 ‘반경’을 벗어날 수가 없다. 최근 벌어진 아파트 경비원의 죽음, 공군 여중사의 죽음과 가정에 입양된 아이들의 죽음, 어느 명문대 청소부의 죽음, 골프장 캐디의 죽음이라는 일련의 사건은 사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죽음까지 몰아간 갑질들, 주도권을 쥔 갑은 권력을 남용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인 을에게 돌아갔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는 자와 “불리한 지위”에 있는 자의 관계가 ‘갑과 을’이다. 가마우지를 부리는 주인은 ‘갑’이고 고기를 낚아야 하는 가마무지는 ‘을’이어서 “갑의 지배”를 받고 있다. ‘갑’은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줄로 목을 묶고 입안에 든 고기를 빼앗아간다. 물고기를 잡아도 가마우지는 늘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기에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거친 바다에 뛰어든다. 그러나 결말은 정해져 있다. 잡고 빼앗기는 악순환은 되풀이되고 최소한의 먹이로 살아가는 고달픈 노동은 끝이 없다. 가마우지가 열심히 낚아챈 먹이는 배를 채우지 못한 달빛과 다름없다. 목을 묶이는 처지와, 묶여서도 여전히 물고기 사냥을 해야 하는 운명의 굴레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현상연 시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에서 여전히 사회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사회체제와 그 제도권에서 살아가는 ‘을’의 고통을 가마우지의 사냥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존재감이 없던 ‘을’은 갑의 횡포로 인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마침내 그가 당면한 불행을 통해 ‘을’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전생에초원을 달리던 시절이
가죽으로 복제되었지
짐승의 본성 숨길 수 없어
비가 오면비릿한 냄새에끌려
빌딩 숲이나 거리를 방황했지
그런 날은부활이라도 한 듯
야생의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지
영역 표시가 된 곳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지린내 같은 가죽 냄새가 번져왔지
고삐도없이명품이란 허영에매였지만
뼛속까지 숨겨진 혈통
어쩔 수 없는지
어떤날은인파 속으로 사라진
가방 혹은 구두를 보고
야생의 무리인 듯 쫓아가지만
눅눅한 동족의 풀밭 찾을 수 없어
몇날며칠을 다시방황했지
방황이란 모든 기억을실종시키는 것인지
사람들은 종종 취중에 나를잃어버렸지
그럴 때면공원 벤치나 유원지에 앉아
두둑해진뱃속이 꼭 외상장부 같다는 생각을 하였지
― 「우울한지갑」 전문
신에게 지구를 다스릴 권리를 부여받은 인간은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이다.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도 악어의 사나운 이빨도 없지만 인간에게는 동물을 사냥할 지혜와 무기가 있다. 악어를 비롯해 물소가죽 뱀가죽, 표범가죽이 가방, 구두, 소파. 코트로 변신한다. 동물 사체의 일부인 가죽은 미적 감각과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최상의 재료이다. 그로 인해 인간에 의한 동물 포획은 그치지 않는다.
「우울한지갑」 은 초원에서 잡혀 와 인간의 손에 해체되어 명품지갑이 된 동물의 말이다. “고삐도없이명품이란 허영에매였지만/뼛속까지 숨겨진 혈통/어쩔 수 없는지/어떤날은인파 속으로 사라진/가방 혹은 구두를 보고/야생의 무리인 듯 쫓아가지만/눅눅한 동족의 풀밭 찾을 수 없어/몇날며칠을 다시방황했지”라고 고백한다.
가죽지갑에는 지갑 이전의 “동물의 숨소리”와 동물 특유의 ‘지린내’가 남아있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지닌 지문(指紋)과 같다. 사물의 입을 빌려 인간에게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명품이지만, 명품이어서 어쨌다는 것인가. 인간이 정한 명품의 가치는 인간에게나 소용되는 말이다.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손에서 닳고 해지도록 늙어갈 지갑일 뿐, 정작 소중한 건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 네 발로 뛸 수 있는 “자유와 생명력”이다.
시대가 바뀌고 이제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지갑 속에는 몇 장의 현금카드나 교통카드가 고작이다. “사람들은 종종 취중에 나를잃어버렸지/그럴 때면공원 벤치나 유원지에 앉아/ 두둑해진뱃속이 꼭 외상장부 같다는 생각을 하였지”라고 말한다.
신용카드는 두둑한 현금이지만 대부분 후불로 치르는 외상카드인 셈이다. 우리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거리마다 유흥을 부추기는 술집이 즐비하고 아름답게 포장되어 우리를 유혹하는 상품들이 TV, 홈쇼핑에서 쏟아진다. 신용카드로 인해 편리한 점도 많지만 그 편리함으로 신용불량자는 해마다 늘어난다. 제때 갚지 못하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독촉장, 신용사회에서 신용을 잃어버리면 일상을 유지하기 어렵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지갑은 무사할까. 이것저것 제하면 빠듯한 살림살이에 지갑은 늘 우울하다.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면 차디찬 심장의 보고픈 이 보이지 않아
흐트러진 목소리 모을 수 있다면
허공에 떠도는 환영, 만질 수 있다면
슬픔은 점점 뚱뚱해지는데
담담하게 지내라는 공기들의 후덥지근한 말들
간절한 게 죄라면 하늘에 심장을 내 걸고 실컷 울겠어
나대신 울어주던 비는 간간이 끊어지고
추적거리던 잔비 사이로 그림자를 끌고 온
햇빛의 발목 어디로 갔을까
과녁을 뚫던 화살은 꺾이고
허공에 빈 족적만 어지럽게 찍힌 길 잃은 기억
염소자리 하나 늘어난 북쪽 하늘을 보며
말없는 말이 벼랑을 기어오를 때
부재라는 단어에 고립된 나,
후회의 부표는 표류를 반복하고
눈물이 떨어지면 멀리 못 간다는 누군가 전언에
마지막 인사 옷깃으로 찍어 내네
― 「비대한 슬픔」 전문
“정신적인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 슬픔이다. 슬픔은 개인의 감정이기에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슬픈 느낌이 오래 지속되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된다. 인간에게는 어딘가에 슬픔을 저장하는 ‘웅덩이’가 있어 슬픔이 이어지면 ‘웅덩이’는 점점 깊어지게 마련이다.
전해수 평론가는 시집 평론에서 ‘슬픔’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였다. “내 안에 간직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일순간 분노로 바뀌어 나를 둘러싼 세계를 향해 돌을 쥐게 하는 슬픔, 설혹 돌을 던져도 결코 내 안에서는 깨어지지 않는 절대적 슬픔, 혹은 돌을 던져 그 대상을 깨뜨리기에는 더욱이 어려운 바람 같은 슬픔, 그러다가 결국 후회로 남아 뒤돌아보는 처연한 슬픔, 나의 전부인 그 슬픔을 누군가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부르는 화자를 둘러싼 모든 감정의 슬픔”을 ‘세계의 슬픔’으로 확대하였다.
「비대한 슬픔」 은 누군가의 부재로 시작된 슬픔이 ‘내부’에서 점점 ‘외부’로 확장되고 있다. 이 슬픔은 개인의 체험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체험적 슬픔”이다. 살면서 헤어지고 떠나는 것이 다반사인 세상, 누군가의 존재가 사라진 그 빈자리를 확인하며 오래 앓아야 하는 일이다.
인간에게 ‘상실감’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상실감’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후회의 부표는 표류를 반복하고/눈물이 떨어지면 멀리 못 간다는 누군가 전언에/마지막 인사 옷깃으로 찍어 내네”에서 알 수 있듯이 슬픔을 꾹꾹 눌러 삼키는 모습에서 시인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결국 슬픔은 고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슬픔의 웅덩이”에 쌓일 것이다. 잠잠하게 고였다가 어느 순간 출렁이며 넘치는 것, 그래서 슬픔을 향해 왈칵, 넘어지는 것이다.
묵은 봄이 잘려 나간다
오른쪽 방향과 왼쪽 방향도 사라졌다
나무는 봄볕에
웃자란 가지를 단속하지 못했다
고목은 햇빛에 흔들렸고
치밀한 가지는
새봄을 채우려 욕심껏 자랐다
도착하지 않은 여름을 기대하며 꽃눈을 밑동까지 달기도 했다
부푼 꽃망울에 귀 세운 다른 가지
떨어지는 나무비듬을 보며
그늘 속 마디의 처진 봄을 솎음질 한다
바람이 드나들 통로에
가지 하나 내주면 두 팔을 달 수 있다고
애써 통증을 참는다
아직 물 마르지 않은 모래톱엔 계절이 몇 번 다녀갔는지
잔물결이 겹겹이 쌓였다
상처로 얼룩진 곳
복대기는 햇살이 덮는다
털어버릴 수 없는 물관 사이로 빼꼼히 내민 곁눈
추위를 견딘 살구꽃망울이 짙고
전정가위와 대립하던 멍울진 봄이 화사하다
― 「가지치기」 전문
“가지를 치는 행위”는 사라진 자리에 “상상을 덧대는” 것과 다름없다. 다시 찾아올 “봄의 자리”를 미리 마련하는 것이다. 그 상상은 작업을 이끄는 동기로 작동된다. 가지치기는 대립이 아닌 평화를 위한 교섭(交涉)이기에 하나가 사라진 자리에 두 개의 움이 솟고 가지는 풍성해진다. 물론 피를 흘리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사물의 경우에는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규정하지만 인간의 행위에는 그와 반대로 미래가 현재를 규정한다”고 한다. 인간은 미래의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자유와 의지가 있고 결과는 노력에 따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지치기 역시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위한 하나의 결단인 것이다.
현상연 시인은 흔한 무언가에도 나름의 이야기를 붙여 특별한 것을 도출(導出)한다. 구체적인 상상을 구현하며 그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다가가 귀를 열고 집중할 수 있도록 일련의 상황을 배치하고, 적당한 여백을 만들어 소통의 장을 구성한다. 이때 자신만의 시선으로 풀어놓는 스토리텔링은 독자에게 한 발 다가서는 “발화의 방법”으로 사용된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소한 사물들로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쉬운 듯하나 결코 그렇지 않다. 짜임새 있는 행과 행이 하나하나 이어져 수식이 절제된 깔끔한 문장으로 태어난다. “감각과 경험”으로 구축한 이미지가 시 전체를 붙들고 있다. 전지가위와 나뭇가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듯이 묵은 생각을 잘라내는 시인은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시도한다.
갈피갈피 아릿한 “삶의 비린내”가 묻어있는 시집『가마우지 달빛을 낚다』는 “살아야하는” 몸부림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의 “내면적 상처”와 위기를 맞은 이 “시대의 비애”을 “보편적 의미”를 담아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첫 시집이 이만한 수준을 지녔다는 것은 치열하게 시를 만난 ‘결과’일 것이다. 단연 저력(底力)이 돋보이는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