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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과 부흥 / 하 스테반 선교사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여러분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인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부담감이 하나님의 부담감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읽은 느헤미야서는 무너져 있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다시 하나님 앞으로 새 출발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꿈과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해, 삶의 모든 기초가 무너진 사람들을 향해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가정과 경제, 자녀들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는 이 세대에게 누군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세대에게는 ‘나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부담감은 하나님이 주신 부담감인가, 내가 품고 있는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인가’ 이 느헤미야의 말씀을 통해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 관심을 통해 비전을 보여주심
느헤미야 2장 5절을 보면 바사 왕국 수산궁에서 그 땅의 관료로 섬겼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과 대화중에 “나로 하여금 무너진 성벽을 중수하도록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중수하다’는 다시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새로운 기초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비전은 분명했습니다.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비전은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개인적인 관심에서 출발했습니다. 민족에 대한 관심, 동족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보면 바사 왕국에서 포로로서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재물과 명예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항상 동족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장 2절에서 보듯이 그는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형편에 대해 그의 형제 하나니가 네 가지로 대답합니다. 1장 3절을 보십시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란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고 성문은 불에 타 소화되어 버렸다’고 들려줍니다.
여기서 성문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이방 신을 섬기는 다른 민족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보호막이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보호가 무너지고 구별됨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안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늘 불안정하고 항상 마음 속에 언제 죽임을 당할까 하는 근심과 염려가 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긍휼함을 가진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수 일 동안 슬퍼하고 앉아서 울고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고통속에 부르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너무나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듣고 함께 슬퍼하고 울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늘 동족에 대한 마음을 갖고 있던 느헤미야의 이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줍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영혼에 대한 민망함과 긍휼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 앞에 긍휼함을 구하고 회개기도를 시작합니다. ‘나와 내 아비의 죄악이 민족의 죄악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두 번째로 ‘민족을 구해주십시오’라는 중보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던 언약을 언급하며 이 민족을 버리지 말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개인의 관심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소리내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바사 왕국 아닥사스닥 왕을 통해 환경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 성을 중수할 수 있게 느헤미야를 유다 땅에 보내면서 두 가지 편지를 써줍니다. 하나는 이민국을 통과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비자와 같은 영향력을 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왕의 성벽을 관리하는 아삽을 통해 성벽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도와주라는 편지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편지를 가지고 가장 먼저 예루살렘 무너진 성벽으로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말합니다. 2장 17절을 보겠습니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느헤미야 1장부터 13장 전체를 살펴봐도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너진 성벽을 중수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관심과 부담감으로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 개인의 부담감과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이요 하나님의 부담감이라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2장에서 6장까지 기록된 네 가지 사건을 다루는 느헤미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외부에서 오는 비난, 조롱, 빈정거림입니다.
2장 19절을 보십시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 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이스라엘 자손의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던 산발랏과 도비야는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빈정거렸습니다. 이런 빈정거림을 당할 때 우리라면 일을 그만둬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아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내분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힘들고 피곤하면 짜증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부담감과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힘듭니다. 성벽이 중수되어 간다는 기대감보다는 육체가 고단한 겁니다. 또한 5장에 보면 가진 자가 갖지 못한 동족의 집과 밭을 전당 잡고 고리대금업을 하고 착취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을 때 느헤미야는 이들의 실망을 다루고 물질과 환경을 다루어 주었습니다. 지도력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 장면입니다. 물질을 다룰 줄 아는 것은 대단한 지도력입니다. 성도들이 상행위를 하고 잘못 착취 하고 기만하고 속이고 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들을 깨우쳐주고 꾸짖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그들에겐 두려움도 찾아왔습니다.
4장 11절에서 2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대적이 연합해 그들을 살육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면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격려합니다. 무장을 시킵니다. 하나님 앞에 그냥 꿇어 엎드려 기도만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기도를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하면서 해야 합니다. 적들이 쳐들어 온다고 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확신을 주었던 지도력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적들이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돈으로 매수해 ‘너는 오늘밤 죽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6장 11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느헤미야는 이런 어려움과 반대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졌던 마음을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6장 15절을 보면 ‘52일만에 성벽이 다 보수되어졌다’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느헤미아는 명예가 있던 사람입니다.
성공하고 물질도 있었습니다. 편안하게 살 수 있고 이런 일들을 수행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떳떳하게 자기 나름대로 살 수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중수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부담감입니다.
느헤미야가 개인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민족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기도했을 때 ‘내가 가서 무너진 성벽을 중수해야겠다’라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경을 열어주셨습니다. 반대 세력이 죽이려 했었던 위험이 왔어도 그 마음을 굽히지 않고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요, 관심이요, 비전이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예배·기도의 부흥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중수하자 세 가지 부흥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부흥이 찾아왔는지 그 핵심이 8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청한다’는 것은 ‘자원하는 심령’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도 강요받거나 설득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고 갈급하고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늘 부흥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 자원하는 심령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에서 귀환해서 성전을 복구했습니다. 그런 환경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급했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구약 예배의 개념은 건물이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졌다는 것은 예배의 터전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기간 중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수산궁에 있던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다시 고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주린 마음, 사모하는 마음, 갈급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오게 했을 때 세 가지 사건이 8장에서 13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의 부흥입니다.
8장 5절을 보십시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우리는 예배시간에 일어나라고 해야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너무나 감격스러워 앉아서 편안하게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원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이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모하는 심령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부흥은 8장 6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학사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할 때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너무 커 스스로 손을 들었습니다. 아멘을 한 번 하는 것이 부족해 ‘아멘 아멘’하고 응답했습니다.
예배 중에 그들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댑니다. 오늘 예배 중에 얼굴을 땅에 대고 예배드리는 분이 몇 분이나 있습니까? 아마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개인기도 시간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기는 회중 모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무릎을 꿇고 땅에 얼굴을 댔습니다. 아마 지금 예배시간에 누가 무릎을 꿇고 땅에 얼굴을 대면 이상해 보일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흥에는 이상한 행동이 이상한 행동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상식적인 일을 넘어 버립니다.
세 번째로 기도의 부흥이 나타나 있습니다. 9장 1절입니다.
“그 달 이십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이스라엘 백성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떠났던 것을 회개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삶을 돌이켰던 고백과 표현으로 하나님 앞에 베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사건
기도의 부흥 중 다섯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9장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자기 허물과 죄를 자복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보다는 이방 동맹국의 무력의 힘을 의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아왔던 모든 삶의 모습을 다 바꿔버렸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부흥,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에게는 이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고 물질에 종노릇하고 나의 유익을 위해 찾아다녔던 모든 어리석음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을 살야야 합니다.
☛두 번째, 10장 31절을 보면 안식일에 물화를 팔고 사는 등 안식일에 해서 안 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하나님의 주일로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10장 31절에서 39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질이 회복되었습니다. 자기 부를 위해 축척해 놨던 부를 하나님을 위해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회개를 하고 돌이키고 난 후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던 것을 구별하여 레위인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곡물을 바쳤습니다. 제사를 위한 가장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것이 변화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네 번째, 13장 4절 이후에 보면 제사장 엘리야십이 친분이 있는 도비야에게 개인 사무실로 내어준 방을 회복시켰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밖으로 집어던졌습니다. 과격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도력이라면 어떤 면에서는 목회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잘못을 책망할 줄 아는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기도 부흥의 마지막 다섯 번째 사건은 13장 23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가 자기 모친의 이방 방언은 하고 유대 방언은 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모습, 말씀의 능력, 예배의 경건함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들이 이런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두어 사람을 때리고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지도력입니다. 한국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지도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70년간 포로생활에 들어갔던 두 가지 큰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진 것과 하나님의 성전이 도적의 굴혈이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부인할 수 있는 교회는 한 교회도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 나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신실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이웃을 향해 진실함과 우리 삶의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무너졌습니다. 방황했습니다. 기대감이 무너졌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와 동행해주신다면 모든 것이 회복되어지는 집니다.
오늘 주를 향해 ‘하나님, 너무나 많은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인줄 알았는데 나의 욕심이고 야망이었습니다. 나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이 말씀 속에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긍휼과 은혜와 비전을 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기를 결정하십시오. 내가 오늘 결정한 이 기도를 변하지 않고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한 자에게 긍휼을 주고 비전을 주고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