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영원하신 기업 (수 13:32-14:5)
13:32. 요단 동쪽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14:1.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3. 이는 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에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요셉의 자손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 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나의 영원하신 기업"입니다. 찬송가 435장을 생각나게 하는 제목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이 찬송은 패니 제인 크로스비 작사, 사일러스 베일 작곡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크로스비의 영감도 뛰어났지만 이 찬송은 사업가요 작곡가인 사일러스 베일의 간증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기업이 내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하신 기업이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시16:5-6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찬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으로 기업을 삼은 한 지파가 나타납니다. 바로 레위지파였습니다. 레위지파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이유는 33절에 나와 있는 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레위지파는 신약으로 치면 복음전도자들입니다.
그래서 고전9:9-10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는 조금 달리 만인제사장이 된 우리 성도들의 관점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하신 기업으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레위 제사장에게서 그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것인 초태생을 대신한 사람들입니다. 초태생은 에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출22:29에 "너의 처음 난 아들을 내게 줄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출34:19 보면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것이라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흠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팔아 정가한 금액의 오분지 일을 추가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레27:11-13). 그러니까 첫 것은 어떤 경우에도 드려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임무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레위지파가 그 일을 대신하고 오늘날 교역자들이 그 일을 대신해도 성도에게 주어진 그 임무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 레위는 제사장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루우벤처럼 육적 장자도 아니었고 유다지파처럼 영적 장자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처럼 부족을 구원한 위대한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족장시대에 제사장은 한 가족의 장자여야 했는데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사역은 그 전문성 때문에 한 지파를 택하여 제사장 지파로 삼고 백성들은 기도와 첫 것으로서 그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이든 십일조든 명칭에 상관 없이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혹은 내 가족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종들이 수고하고 있다는 의미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임승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태생은 예수님을 예표하기도 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레위 제사장이 초태생을 대신하듯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나의 영원하신 기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2. 세속을 배척하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은 죄와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이웃의 죄를 덮고 용납할 뿐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장자 제사장이 레위지파로 바뀌게 된 동기가 그것입니다. 출 32장을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올라간 사이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며 여호와를 배반할 때 레위지파 만은 거기에 유혹되지 않고 또 레위지파가 유일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모세를 도와 악인들을 척결했습니다(출32:26-29).
또 한 번은 모압왕 발락이 발람의 궤계를 따라 모압 여인들을 동원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인계로 유혹하고 바알에게 제사하게 한 바알브올 사건 때 레위인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편에 서 범죄자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민25:11-33). 바알브올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노하셨던지 이스라엘이 염병으로 2만 4천명이나 죽었습니다. 이 때 미디안의 여인을 이스라엘 진영까지 데리고 온 남자가 있었는데 비느하스가 두 죄인을 한 창으로 꿰뚫어서 죽이자 염병이 그쳤습니다.
민25:10-13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죄악을 멀리하고 마음의 악을 배척해야 신령한 제사장이 됩니다. 구약은 제사장이지만 신약은 신령한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벧전2:4-5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했습니다.
만인제사장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만인제사장은 모두가 누구의 도움이 없이 직접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지 교역자를 배척하는 설이 아닙니다. 천주교처럼 사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 기도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가 있으면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영원하신 기업으로 삼으려면 마음에서부터 철저히 죄악을 척결하시기 바랍니다.
3. 늘 예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레위지파는 성전에서 제사하고 백성들을 위한 신령한 봉사가 그 본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전국에 12지파 48성읍으로 분산되어 살면서 신앙을 가르치고 예배하고 고락을 같이 하고 차례가 되면 성전에 나아가 봉사했습니다.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그 대신 기업을 받은 다른 지파들의 십일조를 통하여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주시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수14:4을 보면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 한 대로 백성들이 십일조로 드린 가축들을 보관하고 길러야 했기 때문이고 재물을 둘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축 기르기가 쉽나요? 그러므로 소규모지만 레위인도 소일거리는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운동도 되고 좋습니다. 사람이 기도만 하고 어떻게 삽니까? 몸을 움질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레위지파의 생활수준은 어떠했을까요? 이스라엘에 지파가 11지파이기 때문에 레위지파의 생활수준이 백성들에 비해 110%가 됩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역시 십일조의 십일조를 아론의 제사장에게 드립니다. 민18:26에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균등의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8:14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과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교인들은 빈곤한데 교역자들은 부요하고, 반대로 교인들은 부요한데 교역자는 빈곤하다면 어찌 그곳에 복이 임할 수 있겠습니까?
교역자들끼리 역시 생활의 격차가 심하면 어찌 하나님 보시기에 좋겠습니까? 그래서 눈이 열린 교회에서는 교역자들의 생활부터 평균케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판공비는 달라도 생활비는 같게 하고 있습니다. 부양가족이 많으면 더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아닌 것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는 완전한 생활비로서 목회의 자유를 주기도 하고, 혹은 교회가 생활을 감당치 못하면 직업을 갖고 봉사하게도 한다고 합니다. 낙도 선교는 교육부의 교사자격이나 보건소의 공의 자격으로 가면 가장 좋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어려운 교회에서는 자립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우리 선배들은 굶어 죽어도 교회에서 굶어 죽자 하고 살았는데 무모하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복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게서 십일조로 레위지파의 생활을 보장하신 것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주업으로 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십시다. 직업은 하루 8시간이지만 하나님 섬김은 24시간 계속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직무를 다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질서 가운데 교회생활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은 대제사장인 아론과 찬양대장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다가 민12:1-10을 보면 아론에게는 성령이 떠나고 미리암에게는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하나님과 교통하고 모세와 동등 혹은 방불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오해였던 것입니다.
제사장 고라와 아비람과 다단 등이 250명의 족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16장을 보면 그들이 당을 짓고 백성들 앞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다가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모두 삼키고 불이 나와 250인을 살라버렸습니다(민16:3). 교회헌법이나 만인제사장설을 오해하여 교회질서를 파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생활이 잘못되면 신앙생활도 잘못됩니다. 하나님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으려면 교회생활도 잘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기업입니다. 하나님 섬기면 영혼도 살고 육신도 삽니다. 그래서 기업을 노래한 시16:2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신령한 제사장 되어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나의 생명보다 귀히 여기고, 세속을 배척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늘 예배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레위지파 (수 13:32-33)
32. 요단 동쪽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레위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각 지파마다 기업을 주셨지만 12지파 가운데 유일하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지파가 있었습니다.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에게 기업을 주시지 않은 이유는 33절에 나와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즉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지파로써 성전에서 봉사하고 모든 지파들의 영적생활을 돌보는 것이 그 본분이었기 때문에 이 지파는 다른 지파들이 낸 십일조를 먹고 살았습니다. 레위지파는 신약의 주의 종들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업에 국한하지 않고 레위지파를 통해 하나님의 종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을까요?
1. 예수 믿어 거듭난 사람입니다.
제사장의 기원이 되는 구약 족장시대 제사장은 각 가정의 장자였습니다. 그래서 출22:29에 "너의 처음 난 아들을 내게 줄찌니라"고 하셨고, 출34:19에는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이 모두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흠이 없어야 합니다. 흠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팔아 정가한 금액의 오분지 일을 추가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레27:11-13). 그러니까 첫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방법을 달리해서라도 드려져야만 했습니다. 여기 첫 것은 완전하신 속죄양이시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일군은 완전하신 예수 공로를 힘입어 일군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 곳곳에서 예를 들면 고후1:1-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인사했습니다.
행 1장에 사도를 보선할 때도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22-23) 한 것처럼 최소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2. 죄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출 32장을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여호와를 배반할 때 레위지파가 유일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모세를 도와 악인들을 척결하였습니다. 민 25장에도 바알브올 사건 때 레위인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죄인을 처단했습니다(민25:11-33).
사실 레위는 제사장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루우벤처럼 육적 장자도 아니었고, 요셉지파처럼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다지파처럼 영적 장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레위지파가 제사장 지파가 된 것은 그들이 세상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의 종은 무엇보다 악과 싸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딤전3:1에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따라가면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그래서 딤전6:11-12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했습니다.
교회에서 화려한 이력만 보려고 하니까 나중에 다른 결함으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무엇보다 신앙의 배경과 영성을 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인지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1:10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3. 예배를 생명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레위인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제사였습니다. 제사가 중요한 것은 그 직무가 그쳐지는 순간 이스라엘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백성들이 십일조하지 않으면 레위인들이 생존을 위해 직업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에 제사는 중단되고 교육도 중단되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예배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교회도 예배가 그쳐지면 문 닫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교인들의 믿음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배를 못 드려 한국의 180개의 대교회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빚을 내어 예배당을 지었지만 헌금이 나오지 않으니 부도가 난 것입니다.
한국교회연합회에서 18일 다음 주부터 자율적인 예배를 드리자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루 747만명이 밀집하는 전철의 밀접 접촉 현장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은 우연인가 기적인가. 마스크를 벗고 식당에서 식사와 음주를 하는 것과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리는 것 중 어느 것이 감염병적으로 명백히 더 위험한가?” 이렇게 불합리한 방역을 꾸짖으며 다음 주부터 전국교회가 예배를 드리자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예배를 생명으로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4.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자여야 합니다.
레위지파는 첫 열매는 아닙니다. 그런데 율법의 제도가 바뀌어 레위지파가 그 첫 것의 의미를 계승하여 제사장이 됩니다. 이처럼 신약의 주의 종들은 다름 아닌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승한 주의 사역자들입니다. 먼저 사도들이 이 사역을 계승하였고 그 후에는 속사도 감독 교부 목사들이 이를 계승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은 주의 이름으로 파송된 주의 사자입니다(고후8:23, 빌2:25, 약2:25, 계1:2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그 권리만큼이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위해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했습니다. 교회를 위해 희생할 수 없다면 사역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직을 근로자로 보고 노조를 결성하려는 것도 교회가 그만큼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생활비를 보장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5. 모두가 기도해 줘야 사역할 수 있습니다.
족장시대에 장자가 제사장이 되므로 제사장이 없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면 모르지만 하나라도 있다면 그가 장자입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이 제도가 레위지파로 변천됩니다. 그런데 그 형태는 달라졌어도 그 의미와 의무는 그대로 존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 낳은지 30일 만에 장자 대속금을 드리고, 또 평생 레위지파를 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 정신은 신약시대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과 자식을 드리거나 드리지 못했다면 기도와 물질로라도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고후1:11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했고, 빌4:18에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교회와 성도를 돌아보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4. 레위지파의 생활수준은 어떠했습니까?
민18:24을 보면 백성들의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단지파가 사라지므로 11지파가 드리는 십일조가 되는데 그럼 생활수준이 백성들에 비해 110%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민18:26을 보면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했습니다(느10:38). 이 십분의 일은 아론의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그러니까 백성과 레위인과 아론의 제사장들은 일대 일대 일로 그 생활이 균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경제원리였습니다. 생활비는 결코 권위주의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 균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공산주의가 아닌 것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도 이 사상 은 이어집니다. 고후8:14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과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신앙 안에서 평균 이것이 은혜로운 것입니다. 교인들은 빈곤한데 교역자들은 부요하고 반대로 교인들은 부요한데 교역자는 빈곤하다면 어찌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임할 수 있겠습니까? 또 교역자들끼리도 생활의 격차가 심하면 좌절감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뜬 교회에서는 교역자들의 생활부터 평균케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십일조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주장하는 사람들을 살펴본 결과 거의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이거나 그들에게 미혹 된 교인들입니다. 헌금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교역자들이 성도 섬기는 일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풍성함은 다르지만 핵심은 같습니다. 그래서 고전9:9-10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바울이 수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 레위지파의 거처는 어떠했습니까?
민35장과 수21장 그리고 대상6장을 보면 레위지파에게는 48개의 성읍과 일부의 목초지와 들이 주어집니다. 이 속에는 6개의 도피성도 들었고 13개의 아론 자손의 성읍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분산된 것은 원래 창49장의 야곱의 저주 섞인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레위와 시므온이 할례 받은 세겜 사람들을 죽인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신앙으로 그 저주를 극복하고 그 분산을 축복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48성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흩으심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과 기도하며 생사와 고락을 같이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성전을 지을 때 레위지파는 게르손 고핫 므라리로 대별되는데 고핫 자손으로 성전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2,750명이었고(민4:36), 게르손 자손은 2,600명(민3:22, 4:40), 므라리 자손은 3,200명이었습니다(4:44). 이들은 일 년의 대부분을 각 지파에 위치한 자신들의 성읍에 흩어져 살면서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했고 자기들의 봉사의 순서가 돌아오면 성전에 올라가 제사장들을 도왔습니다(대상25-26장).
그러니까 레위인들은 백성들의 영적생활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 역시 그랬습니다. 그들은 레위인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며 각종 제사나 행사에 귀한 초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신12:12,18, 14:27,29, 16:11). 그리고 회막봉사의 수당도 지급되었습니다(신18:6-8).
그리고 신26:12을 보면 일반 십일조 외에도 매 삼년마다 추가로 드리는 십일조가 있는데 수혜대상자 중에 레위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백성을 위하여 백성들은 레위인을 위하여 혼연일체가 되어 고락을 함께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이 보여주는 교역자와 성도들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신약의 교훈도 역시 일맥상통합니다. 히13:17에 교역자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한다고 했고 반면에 성도들은 히13:17에 순종하고 복종하며 즐거움으로 일하게 해야 하며 갈6:7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범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레위지파에게 분배된 48성읍과 들은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불가침의 권리가 있었습니다(레25:32-34). 이것은 교회의 재산은 개인이 유용하거나 횡령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6. 레위지파에도 질서가 있었습니다.
모세도 레위지파였습니다(출2:1). 대제사장이 된 그의 형 아론 역시 레위지파였습니다. 그리고 미16:1을 보면 고라 아비람 다단 온 등도 모두 레위지파였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서를 깰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은 대제사장인 아론과 민족을 이끌고 찬양하는 찬양대장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다가 민12:1-10을 보면 아론에게는 성령이 떠나고 미리암에게는 문둥병이 발하는 징계가 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성령의 감동을 받고 계시를 받으므로 모세와 동등 혹은 방불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오해였던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어도 속된 말로 레벨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고 장로는 장로가 되기 위해서, 안수집사는 집사가 되기 위해서 안수를 받은 것입니다. 나도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동등이다가 아니라 그 직분자로 새움을 받기 위해 안수한 것뿐입니다.
옛날에는 전도사들이 담임목회 많이 했지요. 전도사가 목회하는 어느 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나는 전도사보다 높다. 전도사는 안수 받지 못했지만 나는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는데 이건 무식의 극치입니다. 아무리 전도사라도 노회가 양무리를 맡아 먹이라고 목사를 대신하여 파송한 담임목회자니까 목자와 양의 차이입니다.
제사장 고라와 아비람과 다단 등이 250명의 족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16장을 보면 그들이 당을 짓고 백성들 앞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중에 스스로 높이느뇨" 하면서 대적합니다.
광야 이스라엘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천만 번 계속된다고 하더라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의 위치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들도 안수받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모두 삼키고 불이 나와 250인을 살라버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두 명이지만 250명 얼마나 위세가 강합니까? 그러나 아무리 위세가 강해도 모세 아래 순복해야지 우리 의견이 이렇다고 주장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실 것 같습니까? 당을 조직하여 아무리 단체가 잘되고 힘이 막강하고 백성들이 호응한다 해도 모세 아래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질서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지만 영적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약의 레위지파의 연구를 통해서 분명한 목회관을 확립해야겠습니다. 레위지파에서 보여주는 대로 하나님 편에 선 자가 주의 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자기의 책임임을 깨닫고 힘을 합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목회자도 더 새로워지고 성도들도 더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 손잡고 주의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