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진리라는 뜻으로 알고 있듯이 법의 첫번 째 뜻은 진리가 된다.
12연기법 하면 12연기인 진리라는 뜻으로 그것은 변하지 않으며 항상한다는 의미가 된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는 말은 연기는 바로 진리라는 게 아닌가.
그리고 법의 또 다른 뜻은 2법6쌍인 12처에 의해 생기는 일체 각각을 지칭한다고 했다. 그것을 5온이라 하니..
<중아함. 3.30. 상적경>을 보면
3. 사리자상응품 제 3권
30) 상적유경(象跡喩經) 제 10 [초 1일송]
여러 현자들이여, 마치 재목과 진흙과 물풀로써 허공을 덮으면 집이라는 이름이 생기는 것처럼, 여러 현자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몸도 그와 같아서 힘줄과 뼈와 피부와 살과 피로 허공을 싸면 곧 몸이라는 이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 현자들이여, 만일 안의 안처(眼處)가 무너지고 바깥 경계인 빛깔이 광명을 받지 못하면 곧 생각이 없게 되어 안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러 현자들이여, 만일 안의 안처가 무너지지 않고 바깥 경계인 빛깔이 광명을 받으면 곧 생각이 있게 되어 안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러 현자들이여, 안의 안처와 빛깔, 안식이 바깥 빛깔을 알면 이것은 색음(色陰)에 속하고, 만일 각이 있으면 이것은 각음(覺陰)이요, 상이 있으면 이것은 상음(想陰)이며, 사가 있으면 이것은 사음(思陰)이요, 식이 있으면 이것은 식음(識陰)이니, 이렇게 음이 모여 합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여러 현자들이여, 세존께서도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면 곧 연기를 본다.'
이때 법은 5온으로.. 5온 각각은 연기하여 생겨 있다는 것으로 연기가 사라지면 5온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연기하여 생기는 것은 마음을 연해 생기는 것으로 존재가 아니다. 존재가 아니기에 법이라 이름했다. 그러나
연기 대신에 인연으로 생긴다고 하면 그것은 법이라고도 하지만 존재가 된다.
인연이라 하면 연기에는 없는 결과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 있다.
인과 법칙은 존재 세계의 법칙이다.
밥과 존재를 구별하기를 바라면 인연으로 생긴 것은 존재요, 연기로 생긴 것은 법이라고만 해야 한다.
<322경>은 12처를 존재로 보면서 설하는 내용이다.
322. 안내입처경(眼內入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어떤 비구가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눈은 곧 내입처(內入處)입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간략히 말씀하시고 자세히 분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눈이 내입처입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눈은 내입처로서 4대(大)로 이루어진 것인데, 깨끗한 색(色)이어서 볼 수는 없으나 상대가 있는 것이니라. 귀·코·혀·몸의 내입처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불교 역사를 보면..
세존께서 존재와 구별하기 위해 진리인 법이란 말을 차용해 존재와 다른 뜻의 일체를 가르치셨는데..
12처, 18계, 5온을 존재가 아닌 법으로 알고 수행으로 깨치는 게 어렵다 못해 불가능처럼 보이니..
상좌부에서는 슬그머니 법의 의미를 존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그에 대해 반야부는 이치적으로 법은 존재가 아님을 밝혔지만.. 현실이라는 무게는 마음을 연해 생긴 것만을 법이라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법은 존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게 주류가 되어 지금에 이른다.
<잡아함경>은 구전되어 오던 경을 산스크리티어로 수집정리한 게 불멸후 500년이 지난 후 부터였다.
그 사이에 법은 존재라는 말과 함께 사용하고 있었으니.. <잡아함경> 안에는 법이 존재라는 뜻과 심연생이란 뜻이 섞여 있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한다.
<333. 무상경>을 보자.
333. 무상경(無常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와 미래의 눈도 무상한 것이거늘 하물며 현재의 눈이겠느냐?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로서 이와 같이 관찰하는 사람은
과거의 눈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의 눈도 반가워하지 않으며, 현재의 눈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탐욕을 여의어 완전히 소멸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귀·코·혀·몸·뜻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무상(無常)에서와 같이 괴로움[苦]·공(空)·나가 아님[非我]에 대해서도 또한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
내입처에 관한 4경에서와 같이 외입처에 대한 4경도 또한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
존재란 생주이멸하는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어떤 것이든 의지로 멸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경>에서 눈[안]은 의지로 탐욕을 여의면 완전히 멸할 수 있는 것처럼 설하신다.
여기서 눈[안}은 존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314. 단욕경(斷欲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탐욕을 끊어야 한다. 눈의 탐욕을 끊고 나면 눈[안]도 이미 끊어짐을 안다,
마치 다라나무 밑동을 자르듯 그 근본을 끊어
미래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비·설·신·의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314경>을 보면 탐욕을 끊고 나면 안[눈]도 이미 끊어짐을 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보는 자에게 탐욕이 있다면 탐욕을 끊어 청정한 눈이 되도록 한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눈의 탐욕을 끊어 눈을 끊는다는 것은 눈을 존재로 보고 있다면 말이 안된다.
그럼에도 상좌부에 학인들은 마치 12처는 존재를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처럼 설명한다.
<잡. 197. 시현경>에는
"비구들아, 일체(一切)가 불타고 있다. 일체가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안(眼)이 불타고 있고, 색과 안식과 안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귀·코·혀·몸도 마찬가지이며, 이와 같이 뜻도 불타고 있고, 법과 의식과 의촉과 의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불타고 있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있으며,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의 불로 불타고 있느니라."
라고 되어 있음에도 안[눈] 자체가 불에 타는 게 아닌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인해 불이 타고 있다고 해석한다.
몸에 있는 감각기관이 불에 타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정해진 색을 보는 안입처는 탐욕인 눈이요, 성냄인 눈이요, 어리석음인 보는 자[안입처]다.
그런 뇌 속의 눈[안입처]은 멸해야 비로소 감각기관인 눈[안근]은 탐욕이 없어 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감각기관인 눈은 CCTV와 같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여주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CCTV를 누군가가 보고 판단한다. '과속했네, 차 넘버가 .. '
감각기관인 눈 CCTV를 뇌 안에서 보는 자를 안입처라고 하고, 그때 보이는 차 번호를 색입처라 한다.
6근6경과 12처는 이렇게 구별해 알고 있어야만 한다.().
이제 AI(에이아이)는 진화를 거듭해 CCTV 역할은 물론.. CCTV를 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까지 되고 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인 에이아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집단 최면 사회에 살고 있으니..
탐욕인 악을 추구하는 정치인들과 세력은 에이아이와 손 잡고..
언론과 CCTV와 같은 기계 그리고 검찰과 경찰을 통해 점점 더 사회를 컨트롤하려고 한다.
만일 저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사회는 밀물이 썰물이 되듯 에이아이 지배가 더욱 심화되면서..
그들에 반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음 공부하는 자들을 방해할 것이다.
중국에서 명교인 백련교는 마음 공부를 하는 집단이지만 주원장에 의해 명을 세우는 공을 세운다.
그러나 그 세력을 두려워한 주원장은 명교를 박해할 뿌 아니라 악의 근원으로 소문을 낸다.
그와같은 현상이 에이아이와 악을 추구하는 세력에 의해 발생할 것이다.
각설하고
에이아이가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감각기관과 대상이 만나 알게 되는 세계는 에이아이 역시 어디든 무엇이든 알 수 있지만..
안입처와 색입처.. 12처가 만나는 장소인 마음..
아직 열리지 않은 채 무한히 있는 마음은..
에이아이가 갈 수 없는 나라인 것이다.
다시 말해 6근과 6경이 만든 일체는 에이아이 역시 알고 인간이 조작하는 것보다 더 높이 깊게 넓게 갈 수 있지만..
존재를 너머선 12처가 노니는 마음.. 아직 열리지 않는 마음은 에이아이는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
에이아이는 숨겨진 데이터 사이사이를 누비며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있지만..
아직 누구도 방문하지 않은 처녀림 같은 곳.. 그런 마음은 에이아이는 결코 볼 수 없기 때문에..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에이아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에게 열반이 의미가 있을까?.
빅 브라더.. 존재하는 세계로 충분한데..
석가모니 세존은 살아생전에 당신이 태어난 카필라 왕국이 망하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에이아이가 모든 걸 컨트롤하는 사회에서.. 그들의 보조 역할에 만족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존재 사회가 전부라면.. 행복은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에이아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터이기에..
그러나 사람이 바라는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 전부가 아니다.
아직 우리는 물질세계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빈곤한 사람의 꿈은 부자이듯..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려 오늘을 열심히 살고 있다.
SF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외계인은 우리보다 물절적으로 앞서 있듯이.. 우리도 그들만큼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미 물질적 부자였던 석가모니가 그랬듯이.. 물질이 아닌 마음 행복을 찾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
그리고 성현이라 존경받는 그들이 아닌 평범한 우리 역시 마음 어딘가에서는 물질에서가 아닌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 이치적으로 가능함을 알려면..
12처는 6근6경을 너머선 마음을 조건으로 생겨난 것임을 새겨야만 한다.
이치적으로 분명히 알고 나면..
이제는 실천으로 그것을 증명하려 나설 수 있다.
하여 실천으로 증명이 되었을 때..
그를..
진정한 아라한이라 하고..
적정이라 하고..
열반에 이르렀다 하고..
부처님이라 한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해지고.. 삼국, 고려, 조선을 거쳐 20세기가 지나도록..
한반도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지 못했다.
일단 물질적인 풍요를 누려야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아니던..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디로 가아하는지 바른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답은 하나다.
12처는 더 이상 존재가 아닌 마음임을 알아채..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