洗心臺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전기의 학자·문인.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김반·윤상에게서 수학하였다. 그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 금오산에서 성리학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유저로는 《금오신화》·《매월당집》·《매월당시사유록》 등이 있다.
紫玉山高溪水深 자옥산고계수심
盤陀有石可登臨 반타유석가등림
洗心臺廢無人見 세심대폐무인견
悵望無由問洗心 창망무유문세심
자옥산은 높고 시냇물은 깊은데,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올라가 볼만하네.
세심대는 황폐해져 찾는 사람이 없고,
서글피 바라보며 마음을 씻는 뜻을 물을 길이 없구나.
紫玉山(자옥산):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산이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주변의 산수 경관을 이루는 네 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오늘날에는 도덕산·무학산·화개산과 함께 ‘사산(四山)’을 이룬다. ‘자옥(紫玉)’은 자줏빛 옥이라는 뜻으로, 산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운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盤陀(반타): 넓고 평평하게 펼쳐진 바위, 너럭바위
盤: 넓게 펼쳐진 모양 陀: 비탈지거나 넓게 이어진 모양
盤陀有石: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登臨(등림):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굽어보거나 경치를 감상하는 것
廢(폐): 무너지다, 황폐해지다, 쓰이지 않고 버려지다.
悵望(창망):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悵: 서운하다, 슬프다 望: 바라보다
無由(무유): 방법이나 방도가 없음, 무엇을 할 길이 없음.
洗心(세심): 마음을 씻는다.-욕심과 번뇌, 세속의 잡념을 씻어 본래의 맑은 마음으로 돌아가다.
세심이라는 말은 『주역』 「계사전 상」의 다음 구절에 나온다.
‘聖人以此洗心’ 성인은 이로써 마음을 씻는다.
이 시의 세심대는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옥산서원 앞 계곡에 있는 세심대인 것이 분명한 것은, 첫 구에 ‘紫玉山’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 자계천의 넓은 너럭바위 일대로, 계류가 바위 사이로 흘러 작은 폭포와 용소를 이루는 곳이다. 현재 바위에는 洗心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퇴계 이황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이 세상을 떠난 뒤인 1572년에 건립되고, 1574년 ‘옥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따라서 김시습이 이 시를 지었을 때는 옥산서원이 아직 세워지기 전이었다.
오늘날의 안내 자료에서는 회재 이언적이 독락당에 머물면서 주변 경승에 이름을 붙였으며, 세심대도 그가 정한 ‘오대(五臺)’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
그런데 김시습은 이언적이 태어난 1491년 이전부터 활동한 인물이며, 시에서 이미 “세심대가 폐허가 되었다〔洗心臺廢〕”고 읊었다. 김시습의 시가 『동경잡기』에 명확히 전하기 때문에, 이 일대의 ‘세심대’라는 명칭이나 옛 유적은 김시습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후대에 이언적이 주변 경승을 정비하고 의미를 새롭게 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이황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지고 옥산서원이 세워지면서 오늘날의 세심대 경관으로 정착하였다.
즉, 김시습이 본 옛 세심대와 이언적·이황 이후 정비된 세심대는 같은 장소의 서로 다른 역사적 층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김시습 이전에 누가 처음 세심대라고 이름 붙였는지는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김시습은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속의 출세를 포기한 뒤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랑했다. 그는 관서·관동·호남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고, 경주의 금오산에도 머물렀다. 생육신으로서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서른 살 무렵 경주 남산의 금오산 용장사 부근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했다. 이 시기 경주 일대의 산천과 유적을 두루 답사하며 여러 시를 지었고, 금오산에서 『금오신화』를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심대」 역시 김시습이 경주에 머물거나 경주 일대를 유람하던 시기에 자옥산 골짜기를 찾아 지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 시의 정확한 작시 연월은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세심대는 이미 황폐한 상태였다. 김시습은 높은 자옥산, 깊은 계곡물, 넓은 너럭바위라는 빼어난 자연을 먼저 보여준 뒤, 그곳을 찾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인간이 남긴 이름과 자취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유적 답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세상과 불화하며 떠돌던 김시습에게, 버려진 세심대는 자신의 처지와도 겹쳐 보였을 것이다.
이 시의 핵심은 마지막 두 구다.
洗心臺廢無人見
悵望無由問洗心
세심대라는 이름은 ‘마음을 씻는 곳’이라는 숭고한 뜻을 지녔지만, 현실의 세심대는 황폐하여 찾는 이조차 없다. 시인은 그 앞에서 “마음을 씻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지만, 대답해 줄 사람도 없다.
특히 마지막의 問洗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세심대라는 장소의 이름을 묻는 데 그치지 않고, 혼탁한 시대를 사는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는지를 묻는 말로 읽힌다.
자연은 맑고 깊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며, 마음을 씻으러 온 시인 자신도 시대의 울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시에는 산수의 아름다움, 폐허를 바라보는 쓸쓸함,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철학적 질문이다.
높은 산과 깊은 물에서 출발한 시선이 마지막에는 ‘心’, 곧 마음에 도달한다. 짧은 네 구이지만, 외부의 산수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깊어지는 김시습 특유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