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의 이유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단풍
정건우
한줄기에 살았었다고
똑 같이 물드는 건 아닌가 보다
이파리 하나마
바람 한 뼘, 햇살 한 줌
이슬 몇 방울
마디 하나하나가 온통 절박하구나
저마다의 세상
물긋불긋 매달은 사연들
층층으로 뻗어 나간
가지 끝에서
서로 다른 애절함으로 속을 끓이
끝내 혼절해버린
저 생각있는 빛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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