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약 삼 년 남짓의 삶을 한국에서 방랑자처럼 보낸 것을 제외하면, 제임스 사무엘 리의 생애는 대개 멜버른을 무대로 그려질 것이다. 제임스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나의 외삼촌의 둘째 아들이었고, 잠시나마 나의 연인이었고, 마지막 삼 개월 가량을 머물며 일했던 포항시 근교의 한 화훼찻집 허브 밭에서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역시 나로선 한 번도 만나본 일 없는 제임스의 하나 남은 피붙이가 수습했고, 유서에 남긴 제임스의 마지막 부탁에 따라 대전의 한 조그마한 교회에 아주 전통적인 기독교식 묘비가 세워졌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나는 제임스의 부고가 날아들던 시점에 베트남에 있었고, 심지어는 그곳을 곧장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 때문에 내가 제임스의 묘비를 찾을 수 있었던 건 장례로부터 얼추 백 일 가량이 지난 후였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내려 역사를 간신히 빠져나오니 곧장 지하철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와 마주했다. 어떤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거의 확신에 가깝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에스컬레이터가 대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이리라는 점이다. 이는 마치 기차역과 지하철역의 거리를 단축시키려 무리하게 본래의 에스컬레이터를 잡아 당겨 늘여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역사를 빠져나온 모든 승객들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저 지표 아래까지 무한히 뻗어있을 것만 같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방의 시야가 차단된 지하도로 인도된다. 꼭 다른 길로 새는 것을 방지하려는 양 매우 곧은 직선으로 뻗은 경로다. 하기야 노숙자들과 온갖 종교 단체의 사람들이 불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을 외지인에게 소개하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다. 꼭 그런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역사 주변의 낙후된 환경은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이곳에선 정돈되지 않은 도로를 번잡하게 쏘다니는 오토바이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만이 특색이라곤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상가의 한산함을 메운다. 첫인상이 그러해서인지는 몰라도 상인들마저 어딘지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실제로 불친절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으면 장사하는 법도 잊기 마련이다. 삶이 팍팍하면 친절하게 웃는 법도 잊기 마련이다. 거의 모든 선거 때마다 대전의 후보들은 원도심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걸지만 어느 당의 누가 당선되건 큰 변화는 없다. 이곳은 광역시라는 허울 아래 버려진 현관이다.
풍경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솔직히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던 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지하도와 반대방향으로 걸어 역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멀어진 후에 오래된 연립주택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평일 오후의 주택가는 한산했으며, 이따금 날씨를 잊은 채 민소매만 걸친 중년 남성들이 창틀에 기대어 담배연기를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이 골목길에 난반사하는 내 구두의 또각또각 소리에 와 찬척하는 것을 알았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걸음이 빨라지고 발소리가 커짐에 따라 더 많은 시선이 등 뒤에서 따라붙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발걸음은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간신히, 계획성이라곤 없이 난립한 모퉁이들을 돌고 돌아 한 골목 교차로에 이르렀다.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도 그 골목은 어느새 주택가를 벗어나있었다. 대신 문을 열기는 하는 것인지 싶은 낡은 간판의 세탁소와 컴퓨터가게, 그리고 그 와중에도 꿋꿋이 번식해나가는 GS25의 대리점과 낮은 첨탑의 교회건물이 예리한 대립각을 이루고 있었다. 교회 주변으론 어린아이 키 정도 높이의 벽돌담장이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안쪽에 그리 넓지 않은 부지는 사람 한두 명이 겨우 지나다닐 법한 흙길을 제외하면 대부분 화단으로 가꾸어지는 듯했다. 들어가도 좋을지 먼저 물어볼 만한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멋대로 흙길로 발을 들였다. 길은 교회 건물의 빨간 벽돌을 따라 크게 돌아 입구까지 이어졌다.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지만 유리로 된 문은 마중이라도 나온 양 활짝 열려있었고 현관엔 형광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오래된 흙길은 거기서 끊어져 있었으나 조금 이질적인 질감으로 최근에야 새로 낸 것 같은 길이 교회 건물의 현관을 지나쳐 화단의 깊숙한 곳, 차양처럼 상수리나무 그늘이 드리운 곳으로 이어졌다. 상수리나무는 이 교회의 마지막 자산이라도 되는 벽돌담 앞에 홀로 덩그러니 서있었고 그 뒤론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시금 주택가가 보였다. 이렇게만 본다면 도저히 발밑에 사람이 묻혀있을 만한 풍경이 아니었지만 나무 그늘 아래엔 버젓이 묘비가 서있었다. 미국의 참전용사 묘지에서나 볼 법한 새하얗게 말끔한 돌비석은 나뭇잎을 지나친 성근 햇살을 받고 반짝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음각으로 새긴 비문과 묘비명은 한글이었고, 비석 위엔 오래된 구리동전 하나가 놓여있었다.
묘비 위에 올려두는 동전은 저승 가는 노잣돈이라 함부로 건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의 애도가 제임스에게 잘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임스에겐 좀 더 가련하고 순간적인 죽음이 어울렸다. 가령 해질 무렵 시들어버리는 꽃 한 송이 정도가 애도의 표시로 적당했으리라. 그런데 그러고 보면 내 손에 헌화 한 송이 들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문득 깨달았고, 그 순간에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누추한 차림의 중년 여성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비교적 조심스런 말투로 볼 때 이 여성은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나를 관찰한 끝에 말을 건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궁금했지만 미처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꽤나 오래 계시네요, 아는 사이인가요? 라고 묻는 이 여성의 질문으로부터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았다. 나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여성은 괘념치 않고 말을 이었다. 훌륭한 청년이었죠, 단순히 우리 교회에 기부를 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쯤에 교회에서 잡무를 보며 지냈었어요. 그렇게 많은 재산이 있었는데도 이런 교회에서 지내려고 한 것만 봐도 꽤나 신실한 친구였던 게지요. 또 드물게도 꽃을 참 좋아하는 청년이었어요. 거의 매일 꽃나무를 한 그루씩 사와선 화단에 심곤 했죠. 사실 그 이전엔 우리 교회 화단이 이렇게 넓진 않았거든요. 마지막으로 교회에 머물던 날엔 수국을 한 아름 가져왔었죠. 참 미안하게도 금방 다 시들어버렸지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괜한 말을 했다는 듯 여성이 조금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수국은 원래 금방 이우는 꽃이라고, 잘 알지도 못 하는 말로 적당히 위로를 건넸다. 그러고 나서야 표정이 조금 풀린 여성은 다소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무사히 하나님 곁으로 갔을 겁니다.
여성은 천천히 물러났고 나는 그제야 다시 제임스의 묘비와 마주볼 수 있었다. 지금껏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비문이 눈에 띄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비문을 의지한 것은 제임스 본인이거나 제임스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단 하루도 두려움을 잊어본 적 없다. 제임스 사무엘 리. 연령미상. 연령미상이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유해를 수습한 건 분명 제임스의 가족 중 누군가였을 텐데……. 꽃을 사와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임스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보랏빛 수국을 한 아름 품고 와 그에게 가장 냉담한 작별인사를 고하고자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