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교회,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아리마대 사람 2022. 11. 3. 22:44
출처 https://saintjh.tistory.com/1519
1908년도에 건축된 금산교회는 11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북 지방문화재 제136호로 등록된 'ㄱ'자 예배당으로서 처음에는 '팟정리교회' 혹은 '두정리교회'로 불렸고, 1930년대 이후로 금산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금산교회는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한국식과 서양식의 건축특징이 병존하여 건축물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5평 정도의 강단은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구조이면서 동시에 뜰-성소-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연상케 한다. 금산교회 예배당 안에는 초기부터 사용하던 풍금과 강대상, 강대의자 등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강단 뒤쪽에는 목사들이 드나들던 쪽문이 있는데, 목회자들은 이 문으로 몸을 숙이고 드나들며 겸손을 새겼다. 'ㄱ'자 예배당은 그 골조가 100년 동안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2001년 봄 대대적인 개보수작업이 이루어져 지금 더욱 완벽한 옛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전북 김제시 모악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1)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
미국의 남장로교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은 1892년이었다. 북장로교는 이미 1884년 알렌을, 이듬해인 1885년에 언더우드와 헤론 등을 파송함으로써 한국선교를 시작했으나 남장로교는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1891년, 언더우드는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목적은 한국선교에 대한 보고였다. 그리고 또다른 목적은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만났던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으로 알려진 이수정의 부탁대로 한국으로 갈 선교사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해 10월, 언더우드는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신학생 선교연맹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가 영향을 주어 전킨 등 지원자가 생겨났고, 남장로교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되었다.
1892년 9월 17일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한국에 일곱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남장로교 1진인 7인의 선교사들인데, 레이놀즈(이눌서) 목사 부부, 전킨(전위렴) 목사 부부, 데이트(최의덕) 목사와 그의 누이동생 데이트(최마태)양, 그리고 데이비스양 이었다. 이들에 의해 미국 남장로교의 전라도 지방 선교가 시작되었다. 특히 데이트 목사 남매는 1894년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하여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전주에 도착하여 선교지부를 세웠는데, 이것이 전주지부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전라도 지방 최초의 교회인 전주서문교회가 세워졌다.
전주에 선교기지를 둔 테이트 선교사는 정읍을 가기 위해 모악산 자락을 넘어 김제군 금산리 용화마을을 통과하곤 하였다. 용화마을은 전주로 가는 길목과 금산사 절간으로 가는 길목, 또 정읍과 김제읍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말을 타고 다니는 선교여행이었기에 테이트 선교사는 자연스럽게 용화마을 마방에서 말을 쉬게 하였는데, 당시 마방의 주인은 이 지역의 가장 큰 부자이자 집안 대대로 유교를 믿는 보수적 가문의 조덕삼이었다.
김제 지주 조덕삼의 할아버지 조정문, 아버지 조종인은 본래 평안도 출신으로서 중국 봉황성, 고려문을 넘나들며 홍삼 장사 등 무역을 하는 거상으로 유명했다. 조종인은 김제평야의 광활한 농경지와 금산의 금광에 대한 꿈을 안고 재산을 정리하여 단독으로 배를 빌려 이삿짐을 싣고 남하하였다. 군산 앞바다에서 만경포구를 거슬러 김제읍을 지나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금산에 도착한 조종인은 평안도 거상답게 아버지의 유산으로 금광업에 투자하면서 토지를 매입하고 농사로 기반을 닦고 정착하여 아들 조덕삼의 앞길을 튼튼하게 하였다. 김제 부자 조덕삼의 삶은 남쪽의 넓은 김제평야와 금산의 금광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꿈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테이트 선교사가 마방에 말을 맡기고 묵은 집이 바로 조덕삼의 집이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본 조덕삼은 선교사와 그의 조사인 김필수로부터 복음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다.
어느날 조덕삼은 데이트 선교사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교사님, 저는 선교사님을 오랫동안 지켜보아 왔는데 왠지 마음에 쏠립니다.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왜 오셨습니까?"
데이트 선교사는 대답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조덕삼은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했다. 이후 1905년 봄부터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조덕삼 부부를 비롯하여 그의 머슴이자 마부였던 이자익, 같은 마을에 사는 박희서 부부 등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금산교회의 시작이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이들에게 학습을 실시했으며, 1905년 10월 11일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조덕삼, 이자익, 박희서 세 사람이 세례를 받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마부 이자익은 조덕삼의 머슴이었다. 그는 본래 경남 남해군 이동명 탐정리 섬에서 출생하여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후 친척집에 들어가 살다가 17살 때 육지로 가게 되었다. 마음씨 고운 선주를 만난 이자익은 "아저씨 저는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처럼 살고 있는데 육지에 가서 남의 집 머슴이라도 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말했고, 그를 불쌍히 여긴 선주는 이자익을 하동포구에 내려 주면서 용돈까지 챙겨 주었다. 이자익은 계속 걸어서 한 주막에 이르러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침식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걸어서 어느덧 전라북도 남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남원에서는 여러 집을 돌며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전주까지 오게 되었다. 다행히 전라도는 인심이 좋아서 사랑채만 있는 집이면 잠자리는 해결되었다. 그렇게 해서 입에 풀칠할 곳을 찾던 중, 1896년 어느 날 17세의 고아 이자익은 조덕삼의 집 대문을 두드렸고, 조덕삼이 소유한 마방의 마부로 채용되어 일하게 되었다. 오갈 데 없는 고아 머슴은 남다른 눈썰미로 일을 잘 해냈다. 그는 주인집 아들 조영호가 훈장에게 한문 배우는 소리를 어깨너머로 듣고 천자문을 깨쳤다. 하루는 공부방 곁을 지나던 머슴 이자익이 천자문을 줄줄 외우는 걸 본 조덕삼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겨 그날 이후로 자신의 아들과 함께 글을 배우도록 했다. 이자익은 조덕삼과 함께 전주에서 찾아오는 데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자익은 조덕삼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고, 조덕삼의 선처로 결혼도 했다.
금산교회는 조덕삼과 이자익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1905년 10월 11일에 세례도 함께 받고, 집사도, 영수도 같은 날 함께 임명되었다. 교회가 차츰 성장하여 교인이 50명쯤 되었을 때 장로를 피택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조덕삼과 이자익은 함께 장로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 당시 장로는 설교도 하고, 실제적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총책임자였다. 모든 사람들은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교인들이 모여 투표한 결과, 놀랍게도 김제 지방의 유지이자 최고 갑부이며 교회를 지을 땅을 헌물하고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었으며 나이도 12살이나 많았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그 집의 고아 머슴이자 외지인 출신인 이자익이 가장 많은 표를 얻게 되었다. 모든 교인들이 당황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상전인 조덕삼이 머슴 이자익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머슴 이자익에게 함부로 반말도 할 수 없고, 머슴 이자익을 따르며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서울의 승동교회에서는 무어 선교사의 노력으로 천민이었던 백정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백정 출신의 박성춘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 신자들이 반발하고 교회를 떠나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세우는 일이 있었다. 또한 서울의 연동교회는 갖바치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갖바치 출신의 고찬익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 신자들이 이탈하여 종묘 근방에 묘동교회를 설립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교인들이 술렁이던 그 때, 조덕삼이 일어서서 교인들에게 말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에 대한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그제야 투표결과를 놓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던 온 교회가 대환영을 하면서 조덕삼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 두 사람은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로,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장로의 관계로 성실히 자기 본분을 잘 감당해 나갔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할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반년 뒤인 1908년 가을, 조덕삼도 금산교회의 2대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은 자신의 집 마부 이자익이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1910-1915) 장학금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자익은 1915년 제8회 졸업생으로서 신학교를 마치고, 그해 8월에 전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임실에서 목회를 했다. 그동안 금산교회는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여 최대진 목사를 초대목사로 초빙하였다. 최대진 목사는 이웃 임실에서 목회하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로 청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고, 조덕삼 장로는 1905년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받들어 섬겼다. 이 일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놀랍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장로교 역사상 총회장을 재임한 역사가 없다. 그런데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장로교의 개혁헌법을 기초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이다.
이렇게 빛나는 신앙생활을 했던 조덕삼 장로의 손자가 3선 국회의원이며 주일대사를 역임한 고 조세형 장로이다. 훗날, 이자익 목사가 설립한 대전신학교에서 "이자익 목사 기념관 헌판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고 조세형 장로(금산교회, 금산교회 제9대 장로, 3선 국회의원, 주일대사)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 장로(대전제일교회, 고분자화학 박사, 연변과기대 교수)가 만났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히며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으면 우리도 없고,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2009년에 조세형 장로가 별세했다. 천정배 의원은 추도사에서 "김제의 이름난 기독교 집안이었던 당신 조부께서는 집안 머슴이 먼저 장로로 뽑히는 일을 기꺼이 지원하시고 동의하셨습니다. 위아래 없는 민주적 가치가 바로 당신의 유전자였던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1908년 조덕삼은 'ㄱ'자 예배당을 지었다. 조덕삼이 일금 15환을 헌금하고, 교인들의 헌금과 함께 예배당을 지어 1908년 4월 4일 헌당하였다. 현재 'ㄱ'자 교회는 김제의 금산교회와 익산의 두동교회 정도가 남아 있지만,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ㄱ'자 교회가 많았다. 이것은 교회에서 남녀를 구분해서 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ㄱ'자 교회가 아닌 곳에서는 예배당 가운데에 흰색천을 둘러 남녀의 자리를 구분했다. 교회당을 상량하면서 조덕삼 장로의 의견으로 남자석에는 고린도후서 5:1-6의 말씀을 한문으로 쓰고, 여자석에는 고린도전서 3:16-17의 말씀을 한글로 써서 상량문을 지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금산리 마을이 온통 불바다가 되고 온 마을의 주택이 전소되는 상황 속에서도 금산교회는 불에 타지 않고 옛 모습을 지키며 남아있었다. 이는 좌익이나 우익이나 한결같이 "저 교회는 우리 교회"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덕삼 장로는 1919년 3.1 운동 때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그해 12월 17일 5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데, 마지막 유언이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말고 제사는 지내지 말아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찬송가 "주 믿는 형제들"을 마지막까지 다 부르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 가장 많이 통곡을 한 사람이 이자익 목사였다.
이자익 목사는 이후 평생 은인의 유지를 받들며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가난한 교회만 찾아다니면서 농촌 목회에 전념했다. 그 결과 한국 장로교 역사상 유일하게 총회장에 세 차례나 뽑힐 정도로 존경받았다. 광복 후 장관 제의까지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목회자로 종신했다. 1954년 대전신학대를 설립한 주역도 그다. 그는 대전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장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김제 원평에 있는 셋째 아들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