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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리스도
1991.3.7. 한영우 장로
성경 로마서 5:1-21. 성가 ‘희생가’ 다 같이 부릅시다.
오늘 로마서 5장은 아담 한사람으로 죽음이 왔고 예수님 한사람으로 우리가 다시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과 화목 되는 이 성경말씀을 읽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또 우리나라에 과거 역사를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일본사람들에게 완전히 예속이 되어있을 때 독립운동을 부른 이 3월 달이지요? 그래서 이 3월달 하면 우리 국가적으로 잊어버릴 수 없는 독립 만세를 부르는 기미년 3월 1일에 만세를 불렀다고 그래요. 그 만세를 부른 3월 1일 날로 선택된 것이 원인이 무엇이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거의 정했다고 그래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동이 되었다고 그래요.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16인이 기독교인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모든 운동한 사람들이 거의 그렇고 맨 처음에 만세를 부를 수 있는 그런 저기도 일본에 있던 우리 유학생들 그 사람들이 YMCA에서 그런 착안을 해가지고 한국에 나와서 그런 일을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뭣을 할 적에 유관순 이라는 17살 된 소녀가 이 결심을 하고 주동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분은 지혜가 있어가지고 어떻게 했냐하면 옷을 세벌을 껴입었다고 그래요. 한 벌은 어떠한 젊은 여자와 같이 치마저고리 입고 또 학생복을 입고 또 이런 식으로 해서 옷을 세벌을 입고 어디 가서는 학생으로 나타나고 어디 가서는 젊은 여자로 나타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잡으러 다니느라고 그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잡아 가지고 이렇게 희생을 시켜가지고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그 사람들의 공로가 크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 3월 달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도 또 크게 잊을 수 없는 3월 달이지요. 오늘 몇 돌입니까? 이 선생님 세상 뜬지가, 26돌입니까? 몇 돌입니까? 1964년도 세상 뜨셨으니까, 그런 뭣입니까? 우리도 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또 기독교가 크게 생각을 잊을 수 없는 거는 뭐냐 하면 사순절, 앞으로 4월 달에 부활절을 기해서 지금은 수난기라고 합니까? 수난절이라고 합니까? 이런 시기에 놓여있지요. 그러니까 상당히 뜻이 있고 의미가 있는 이 3월 달, 그래서 3월 1일 날, 만세 부르게 된 뜻이 무엇인가하면 3월 2일이 주일이어서 토요일에 이렇게 터졌다고 그래요.
또 그 다음에 3일 날인가 4일 날에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서 추도식 그런 문제가 붙어있고 또 일본사람들이 독살을 시켜서 국민이 다 울분 하는 그런 때 겹쳐서 만세를 부를 때 어떤 사람은 한사람이나 어떤 특정인 한사람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만 한 것이 아니라 태극기를 만들어서 장터에나 곳곳에 나눠줘 가지고 마을에서나 어디나 부를 수 있도록 해서 상당히 국민이 동하는 그런 체제에서 불렀고 수원에 있는 제암리 교회라는데 서는 29명이라는 숫자가 주동이 되어서 교회에서 이 사람들이 그 만세를 불렀다. 해서 교회에다 다 그 사람들을 넣고 불을 질러버렸다고 그래요. 그 사람들이 희생을 당해 가지고 오늘에 있어서 그때 당시에는 예수 믿는 것 하고 국가 찾는 것 하고 똑같이 생각했다 그래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국가를 우리가 찾아야 된다는 결심 하에서 합동을 해서 이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그래요. 그래서 상당히 뜻이 있는 이런 저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오늘에 있어서 우리 국가가 있는 동안에는 더욱 인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어쨌습니까? 누구의 피가 하늘에까지 들렸다고 그랬지요? 아벨의 피가 하늘에까지 들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와 같이 어린 소녀의 유관순 자녀 없이 청춘나이로 인간적으로 따졌으면 사춘기라고 그러지요. 사춘기 사춘기를 맞이하면 이성을 잃어요. 이성을 잃어서 정욕적인 문제에 발해가지고 자기정신이 아닌 것처럼 부모의 말도 안 듣고 누구의 말도 안 듣고 자기마음대로 활동하려는 그런 처지에서 봅시다. 그런데 우리가 큰일을 만나면요. 이성이고 지랄이고 없고 거기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이야. 정신이, 왜냐? 이 아주 어린나이에 제가 전번에 서울 가서 그랬습니다. 최 광옥의 딸, 최 선애라고 있어요. 국민 학생인데 그 할머니 허 간난 씨지요. 그 손자지요. 그 사람에게 제가 그런 말했어요. 아빠 엄마 에게 감사를 해라. 감사하냐? 안 하냐? 네가 더 나은 처지에다 대면 너는 자기가 밥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학교에도 가요. 아침에 밥 싸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면 네가 어따 대고 감사해야 되겠냐? 봐라. 네가 텔레비전서 보니까 너보다 더 못한 사람 너 만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장이된 사람 많이 있지? 동생들도 많이 있고 그런 처지에서 부모가 다 세상 떠나 버려서 이런 사람이 될 때에 너는 아빠 엄마가 다 이렇게 대주고 네가 현재 밥을 못가지고 네 손으로 담아가지고 가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너는 불안할 것이고 더 좋지 못한 사람에 대면 못한 사람에 대면 너는 감사해야 될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냐? 그러니까 그런다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거 잊지 쉬워요. 그러나 나한테 더 큰일이 부닥칠 때는 이 어떠한 육체의 생각이나 어떠한 허영적인 생각은 물러가기 나름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소녀 유관순에게는 우리 국가가 이렇게 국민이 모든 조금 안다는 사람은 전부 그 사람들이 잡아다 가두고 죽이고 또 여기서 못 배기니까 외국으로 도망가고 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해요. 그렇게 되면 국가를 위해서 그 사람들이 희생을 하는 거예요. 그중에서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이 희생을 당했다. 다른 종교에 비해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한갓 그때 국가를 찾는 사람들과 똑같이 예수의 제자들도 11제자가 다 순교를 당했어요. 왜 그랬나? 이 사람들이 천국이 더 좋고 영혼이 산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믿기 때문에 그렇게 희생을 당한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국가를 위해서 하나님을 먼저 믿고 믿는 여자니까 그렇게 용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토막토막 고기 동태토막 자르듯이 잘려서 희생당했지만 오늘날 아들 딸 낳아서 훌륭하게 자기 아들딸이 대통령 나왔어도 이 사람 이름만큼 훌륭하게 기억을 합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지요. 누가 보더라도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이 유 관순 여자만큼 제물을 많이 받을 수가 없어요. 3월 1일이 되면 모두 독립 기념관에서 우리도 기념을 하고 또 모든 사람이 부르짖고 아들 딸 낳아서 잘 길러서 성공한 사람들 무엇입니까? 한갓 묘 등 좀 크게 세워놓고 비석 좀 세워놓고 자기네들 족보나 좀 남아있을런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이름이 날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죽음이 뜻있는 죽음을 할 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뜻있는 분을 믿고 생각할 때 우리가 이런 용기가 나온다. 이것을 기념해서 이 아담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이 똑같은 죽음인데 다를 거 없어요. 우리가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져 있다고 그랬어요. 정해져 있는 죽음을 뜻있게 죽음으로 이러한 국가도 위해서 죽고 본인의 믿음도 위해서 죽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럴 수 있는 죽음을 우리도 하자는 것이 믿는 사람의 도리지요. 그래서 이 죽음을 우리가 이렇게 찾아봐서 지금 읽어봤습니다. 성경말씀 지금 읽었던데 6절과 또 9절입니까? 또 15절, 그렇게 한번 읽어 주세요.
6절,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9절,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의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힘이 얼마나 큽니까!
여기는 은총이라고 개역에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여기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서 우리 국가가 그렇게 위기에 빠졌을 때 독립운동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의 오늘에 빛나는 그 이름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땅위에 태어나서 아담 하와 때문에 태어나 가지고 다 이제 영원히 아주 절망 했어요. 왜? 노아 홍수로 몽땅 내려버렸지요. 또 소돔 고모라도 망했지요. 왜? 아담이 말 안 듣고 따라가니까, 아버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내 아들도 내 손자도 전부 죽는 길로만 달려가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이 우리가 죽도록 해봐야 더러운 물에다 하루 종일 빨래 빨아봐야 깨끗해 질수가 없어요. 깨끗한 생수에다 옷을 빨아야 옷이 하얘지지. 평생 빨아 봐요. 또 우리가 목이 마르다 해서 바닷물을 맨날 마셔 봐요. 맨날 먹어도 갈증이라. 이거 맨날 먹어도 갈증이야. 이와 같이 이 아담 이와를 따라가니까 몽땅 다 죽는 길 살길이 없어. 이 길로 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누가 나타났냐? 예수님께서 나타나 가지고 살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나타난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자 해서 가는 사람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일인데 이 길을 간다고 우리가 이름은 불렀어도 도로 예수 이름 둘러쓰고 도로 뭐입니까?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다 예수이름 둘러쓰고 도로 세상과 더불어 같이 따라가는 거예요. 같이 배워서 성공해야 되고 같이 배워서 아들 딸 여위는데 같이 뭐입니까? 다를 거 뭐 있어요? 그냥 예수이름 불렀다고 교회에 나가서 찬송 부른다고 기쁩니까? 그 마음속에는 아담 이와 생각에 따라가느라고 바쁘지요. 힘이 없어요. 죽었어. 다 죽겠다는 거예요. 우리까지 따라서 죽겠다. 해서 되겠어요? 살아야 쓰겠다. 하는 이야기 해보자. 했어요. 우리가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는 아이고 살겠다. 그러지요? 아이고 살겠다. 무엇 무엇이 시원한 것이 무엇, 무엇 입니까? 목이 마를 때 물먹으면 시원하지요? 시원하고 또 시원한 거 뭐 있지요? 더울 때 바람 불면 시원한 게 좋지요? 그 다음에 또 시원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시원한 거 우리가 먹고 버리는 배설물 다급할 때 가서 탁 버릴 때 그 상쾌한 시원함,
바울사도는 그렇게 생각 했어요. 뭣을 이 보이는 것은 배설물로 여긴다. 버리므로 시원해. 종교시간에 그럽디다. 어떤 스님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데 이 성한 사람도 건너가고 눈먼 장님도 건너가는데 장님은 건너가다가 외나무다리를 툭 떨어 지려고고 하니까 다리를 탁 붙잡았다는 거야. 나무를 붙잡았어. 그러니까 눈 보는 사람이 놔버려, 놔버려. 그러니까 안 놓고 붙잡고 있다는 것이야. 아 보니까 발이 곳 닿으려고 그래. 땅에 그러니까 놔버려도 살겠거든. 안 죽고 놔버려라. 놔버려라. 그러니까 안 놓았다는 것이야. 팔이 잡고 있다가 보대끼다, 보대끼다 못해 팔 아프니까 놔버렸다는 거야. 아이고, 진작 놔버릴 것인데 그랬다는 거야. 진작 놓으라고 안하대야 바울사도는 이것을 얼른 놔버렸다고 그랬어요. 얼른 놔버리라고 하니까 우리에게도 이 버리라는 것을 안 버리니까 우리가 예수를 못 믿어요. 별거 없어요. 탁 버리면 새로운 것이 생긴다. 살 길이 생긴다. 그랬어요. 이 살길을 우리가 찾자고 해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 사람들은 희생 했어요. 앞일을 내다 봤던지 우리가 희생을 해서 내가 영광 받으리라. 그 생각 안했어요. 국가를 생각한 나머지 희생한 거예요. 그 사람들 오늘날 영광 받아요. 그러니까 여기 뭐라고 했습니까? 9절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뭐라고 했어요? 공동번역 있으면 한번 읽어 보세요.
9절,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진노에서 우리를 벗겨줄라고 또 6절, 제가 읽어 봅니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담 이와만 따라간다면 우리는 다 죽을 길 밖에 없습니다. 도저히 그러니까 경우가 다르다. 죽는 경우가 다르다. 유관순의 죽음도 우리 평민들의 죽음과 다르고 또 이 아담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도 다르고, 또 이 현필 씨의 죽음도 달랐습니다. 무엇이 다르냐? 성경한번 읽어 봅시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4절과 13절 7절 읽어봅시다.
4절, 우리는 하느님께 인증을 받아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사람으로 말하는 것이며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말하는 것입니다.
7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내 세울 수도 있었으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13절, 우리가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드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믿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서 움직인다고 했지요? 예 이 말씀이 마음속에서 움직였다. 4절은 어떤 사람의 이 현필씨 이런 분들이 인간이 이렇게 항상 퍼지는 것은 여자와 남자를 통해서 이렇게 항상 자손이 퍼지지요. 그런데 한 여자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서 그 분이 사셨다면 오늘의 동광원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의 우리 참 신앙 자유스러운 신앙을 찾을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똑같이 기독교인들처럼 같은 길을 갔다면 그러나 어떤 사람 한사람의 그 마음을 만족 시키지 않기 위해서 좀 더 예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사셨어요. 또 7절에 보니까 어머니와 같이 그렇게 저기를 했다 했습니다. 이 저기는 본인이 누구냐? 한 의순 이라고 하면 한 의용 이라고 하면 아는 분은 알고, 모르는 분들은 모를 겁니다. 또 순갑씨 조카라고 하면 더 쉽게 알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난겨울에 와가지고 뭐라고 말 하냐? 하면 서울 학생들 능곡에 와서 옛날에 살 때 초창기 때 태평이도 어렸고 그 사람도 어리고 그랬었는데 무엇이 왔냐? 눈병이 와서 눈이 딱 둘이 다 눈이 봉창이 되었다는 것이야. 그래가지고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이 그렇게 되니까 며칠간을 이 선생님은 혀로 핥다가지고 그 눈을 뜨게 해줬다는 거예요. 한번만 했다는 것이 아니야.
어땠습니까? 부모의 사랑, 육체적으로도 부모의 사랑을 이렇게 가해서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이런 노력을 하시고 수고를 하신 그런 스승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26돌입니까? 27돌입니까? 이 스승의 세상 뜬 날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역할을 하셨단 말이지요. 바울사도도 2천 년 전의 바울 사도도 그렇게 교인들을 위해서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셨지만 그 분들 우리가 못 봤지만 현재 우리들이 직접 어린 사람들로 부터서 그 분이 살아계실 때 본 사람들은 우리가 실지로 목격한 바의 생활한 것을 우리가 같이 체험한 바입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말해도 알고 안 해도 알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오늘 우리가 더 기억하고 넘어가자는 이 사실 이지요. 그러니까 이 무엇이 우리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해야 병신이 아니지 그러면 어쨌습니까? 자녀를 암만 많이 낳았어도 병신만 낳았으면 부모 네들이 평생을 책임을 져요. 오히려 안 낳은 것만 더 못하게 열 명이든지 스무 명이든지 그러나 똑똑한 아들들 낳았을 때 그 부모의 이름도 높아지고 본인들에도 좋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도 말을 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고 우리도 보고들은 것은 우리들이 말 할 수 있고 또 생활화 할 수 있고 우리들이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지요. 그래서 이 아담 하와 따라갔다 하면 다 죽을 거예요. 우리들 인류가 전부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저 같으면 그런 생각을 해봐요. 나 뿐 아니라 내 후대 또 후대 까지도 예수만 내가 잘 믿어버리면 구원 시킬 수 있다. 그러한 무엇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무엇 때문에? 이 분들이 바로 이렇게 살아 주었기 때문에 예수를 바로 믿었기 때문에 이 분들 다른 분들 아니에요. 다 이 선생님이나 장로님이나 원장님이 다 이 세분들 다 여자 둘 결혼을 두 번씩 하신 분들이지요. 한번 뿐 아니라, 그렇지만 이것을 깨달았을 때 깨달았을 때 이것이 아니다. 이것을 부르짖고 본인들이 부르짖은 것 뿐 아니라 실천하고 생활화했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운동을 한다. 아까 13절에 데살로니가 전서 어떤 사람들 속에서 했냐? 남원에 계신 어머니들 마음속에 운동을 해버렸다는 것이야. 살아버렸다는 것이야.
이 땅에다는 씨를 묻으면 씨가 거기서 싹이 터서 자라는 것처럼 그 말씀이 그 사람들 속에서 살아서 우리 동광원을 길러준 겁니다. 이 현필씨 혼자 기른 게 아니에요. 이 분들이 협력해서 그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길러준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동광원이 있는 것이에요. 귀일원 과 동광원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우리 평생 산다하면 몇 년 사냐? 우리 홈실 어머니는 백 살이 지금 넘었습니다. 백년 이짝 저짝이야. 백년 이짝 저짝 될 것을 몇 년을 바꿔 준다고 했습니까? 은혜는 몇 년을 바꿔 준다고 했어요. 수천 대, 또 성경 묵시록 기록에는 몇 년이라고 그랬습니까? 천년, 요한계시록 20장 4절 6절 읽어보세요. 천년 문제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요한계시록 20장 4절 6절.
4절.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리 운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을 하였습니다.
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 그들에게는 둘째 죽음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제가 되고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4절 6절 읽었어요? 이 왕으로 생활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 준다고 했어요. 우리 이천한 몸이 이 똑같은 죽음에 가치 있는 유관순이나 기독교를 믿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그 영혼들이나 이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분들은 자신 있게 말 했어요. 스데반 집사, 예수님 다음에 순교당한 스데반 집사, 얼굴에 해같이 빛났다고 그랬어요. 얼마나 하나님의 영일 때는 이까짓 거 문제가 아니에요. 이 세계 아무 때라도 우리 한번 죽을 건데 이 죽음을 깨끗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바칠 때 그의 죽음이야. 천년을 바꿔 준다고 했어요. 잠깐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통당하면서 다른 우상이나 이런 것들에게 일본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
독립운동 하지마라고 자꾸 데려다가 때리고 뭣하고 그러면 생각을 해봐라. 국가를 위해서 노력하고 우리가 국가를 생각 하는 것이 우리가 잘못이 뭐있냐? 너희도 너희 국가를 위해서 너희도 저기하지 않느냐? 하등의 우리더러 국가를 위해서 뭣하게 하는 것이 누가 잘못이냐? 그런 식으로 따지고 희생하고 죽었다고 그래요. 그와 같이 우리도 잠깐 이 세상에서 변화 이 천년세계로 변화시켜 준다. 이것이야. 변화 한다는 이 저기가 큽니다. 왜 우리가 먹는 이 물 우리가 먹는 이 밥알 이것이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가 움직일 수가 없어요. 이 물과 밥알이 변화 되서 우리 피가 되니까 우리가 움직이고 사는 거예요.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시켜 준다고 했어요. 물과 성령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수가 없다 볼 수도 없다. 니고데모에게 분명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했어요. 마찬가지로 이 변화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아직 변화되지 못했으니까 완성되지 못한 이 세계에서 우리를 변화시켜 줄라고 이렇게, 이렇게 가고 이렇게, 이렇게 믿어라.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말씀을 받아서 생활을 하고 살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보자는 것이 우리들이지요. 그래서 여기 보니까 뭐랬습니까? 풍성한 은총을 은총, 은총 은총을 많이 여기 은총이라는 말이 여기 몇 번이나 있어요? 지금 로마서 5장 읽어 본 중에 은총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찾아보기 뭣합니다만 제가 얼른 보니까 열 번이나 있데요. 열 번, 이 은총이라는 말이 삶의 은총, 이 은총을 쏴버리면 죽습니까? 삽니까? 죽어요? 살아요? 이 은총, 우리가 안보이니까 안 죽지요. 그런데 마취를 하면 사람이 죽어요? 살아요? 예, 죽지요. 우리 이 활동하는 저기는 죽고 무엇은 살아있지요? 숨은 쉽니까? 안 쉽니까? 예, 숨은 쉬지요. 마찬가지고 이 은총 은총의 선물을 받으면 무엇은 죽고 무엇은 삽니까? 예, 우리의 그 은총의 선물로 쏴 버리니까 또 마취 총으로도 쏘면 죽지요. 그 팔팔한 힘은 죽습니다.
그전에 갈월에서 사는데 오뚜기 풀장이라는 데가 있어요. 그 옆에 가서 사슴 목장이 있는데 어떻게 문이 열렸든지 어떤지, 사슴이 있는데 꽃사슴은 작지만 저럼 사슴은 아주 커요. 소리를 지르면 크게 소리가 납니다. 뿔이 이렇게 나가지고 저기가 되어있어. 그런 사슴이 도망을 가버렸어. 사슴이 도망을 가버렸는데 사람들이 뭐 소같이 굴레도 안 짜지고 아무 저기할 수 없으니 잡을 수가 없어요. 사람이 붙들러 가면 한번 흔들어 버리면 사람이 푹 쓰러져 버려요. 그러니까 못 잡고 모두 동네사람들이 나서서 포위를 하고 있다가 마취 총을 가지고와서 탁 쏴 버리니까 푹 쓰러져 버렸어요. 그 큰 몸뚱어리가 푹 쓰러져 버렸어요. 그러는 동안에 큰 궤짝을 가지고 와서 담아가지고 끌고 갔어요. 그래서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성경에도 푹 쓰러진 사람 있어요? 없어요? 예? 누가 쓰러졌지요? 네, 그래서 이 은총도 그런 마취 총처럼 믿는 사람들이 쏴버리면 죽는다고 봐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말씀 어디가 있어요? 말씀이 빛이라고 그랬지요? 요한복음 1장 9절 보세요. 말씀이 빛인지 아닌지 저도 잘 모르는가 모르겠네요. 요한복음 1장 9절
9절,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또 인제 어디를 보냐하면 이렇게 전도인 들이 전도를 자기같이 되라. 이 선생님은 그런 말씀 안하셨어요. 그래도 이 선생님도 무엇을 시켰냐? 얻어먹는 일 하라고 시켰어요. 또 냉수마찰 하는 거 하라고 시켰어요. 자급자족하는 거 하라고 시켰어요. 그렇게 시켰습니다. 왜냐? 제가 얻어먹는 거, 시킨 거, 아는 것 무엇이냐 하면 내가 옛날에 얻어먹기 맨 처음 저기 할 때 얻어먹으라고 하면서 당신 윗도리 옷 누더기 옷 그놈을 탁 벗어. 탁 던져주면서 그것입고 밥 얻어가지고 오라고 그래요. 말씀이에요. 그때 탁하면 지금같이 안 할래요. 할래요. 나는 어쩌고, 저쩌고 이유가 없습니다. 탁 던져서 그걸 받아가지고 내가 그놈입고 밥을 얻으러 갔는데 얼마나 부끄러운지, 왜 부끄럽냐? 내가 한쪽 병신이나 되면 당연히 얻어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건데 건강한 몸으로서 일 할 수 있는 데 밥을 얻으러 가다니 이 생각이 나한테 한 짐이 되어가지고 옆도 못보고 앞만 보고 그 옷을 입고 밥을 얻으러 갔어요.
그래가지고 와서 몰라요. 얼마나 얻어가지고 왔는가? 조금 얻어가지고 와가지고 내가 그런 식으로 시작을 했는데 그런 뭣을 할 때 탁 가라. 그러면 가게 되었어요. 또 나 뿐 아니라 우리 동광원에 큰 아들, 김 준호 선생님 그분도 장로님 따라서 소재서 장로님 일을 잘하시니까 남의 집 일을 해주는데 밥을 먹으라고 밥을 차려주니까 밥 먹으려고 하는데, ‘준호는 밥 얻어가지고 와서 먹지.’ 그랬다는 것이야. 그러니 안 간다고도 못하고 밥 얻으러 갔다는 것이야. 할 수없이 나보고 어떻게 해서 얻어먹게 되었냐?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서 배웠다고 하니까 당신도 그렇게 배웠다고 그래. 그러니까 이것을 잘했다 못했다 보다도 옛날에 초창기에는 그렇게 해서 가르쳐 줬어요. 가르쳐 줘서 이렇게 저희가 되었는데 우리가 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다. 이 빛이 각 사람 마음속에 비친다. 누구의 마음속에 비췄는가? 한번 봅시다. 빛에 대해서 또 조금 이야기, 여기 두고 사도행전 26장 13절과 16절 17절 18절까지 읽고 거기까지만 읽어보고 봅시다.
13절, 그런데 전하 제가 그리로 가다가 한 낮에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해보다도 더 눈부시게 번쩍이며 저와 저의 일행을 모두 비추었습니다.
16절, 자, 일어나 바로 서라. 내가 나타난 것은 너를 내 일군으로 삼아 네가 오늘 나를 본 사실과 또 장차 너에게 보여줄 일들을 사람에게 증언하게 하려는 것이다.
17절, 나는 너를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에게서 구해 내겠다. 그리고 다시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18절,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로 돌아 가게 하겠다. 그리하여 나를 믿고 죄를 용서받아 성도들이 차지할 몫을 나누어 받게 하려는 것이다.
18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8절은 우리의 몫이니까 지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췄다. 이 빛은 무슨 빛이냐? 각 사람 마음에 비추는 그 동행들 중에도 이 바울사도에게 더 비춰 버렸어요. 더 뜨겁게 푹 쓰러져서 눈이 딱 안 보였어요. 이 보이지 않는 은총으로 팍 쏴버리니까 푹 쓰러져가지고 어쨌습니까? 이 분이 전도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데 쓰러질 때는 9장에 나오는데 이것은 전도하는 말이에요. 지금은 그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하는 이 말이에요. 그 전도를 또 어떻게 했는가? 봅시다. 지금 26장 또 29절 한번 읽어 보세요.
29절, 바울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쉽게든 어렵게든 저는 전하뿐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느님께 빕니다. 물론 이 쇠사슬만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예, 다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울사도는 특히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 내가 복음으로서 너희를 낳았다. 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 나와 같이 되라. 이런 말을 많이 강요 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많이 그런 말은 안했어도 제가 말한 거와 같이 그렇게 그런 일을 가르쳐줬다. 이런 저기를 했습니다. 그와 같이 이 바울사도도 쉽게 든 어렵게 든 사슬에 매인것 외에는 바울사도처럼 다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만 알기위해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빌립보서에는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그와 같이 이렇게 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입니까? 아까 18절에 그 우리 몫을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 받고 우리 몫을 차지할 것을 전도하게끔 하게하는 일꾼을 만난다. 우리 어찌하였습니까? 우리 이 감이나 무슨 귤감이나 사과나 과자를 내 몫으로만 찾아먹을라고 하지 말고 우리 믿는 사람의 몫이 무엇이냐? 천년왕국을 쥘 수 있다는 얻을 수 있다는 우리의 희망, 이 희망을 우리가 잊지 말고 이 괴로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짜증보다는 더 감사하는 희망을 품고 사사건건 불평하는 사람들은 불평만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모여 사는 이치가 무엇이냐?
이스라엘 백성들 광야에서 훈련시키는 훈련장이에요. 저 태능에 가면 선수촌에는 선수들을 불러다놓고 날마다 훈련시켜요. 운동경기가 있을 때까지 훈련시켜요. 우리도 이 성령 받을 때 까지 우리가 성령받기 위해서 모아다 놓고 뽑아다 놓고 선택 해다 놓고 훈련하는 훈련장인데 시시각각으로 원망이나 불평이나 짜증 보다는 할 수만 있으면 감사하는 생활을 많이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야. 오늘 아침에 나 행복한일 쪼금 나 하나 해봤어요. 내 육체적으로 무엇이냐? 방에 앉아있으니까 뭔 소리가 나데요. 뭐 이렇게 발을 좀 더 높이 뛰라고 어쩌고 그런 소리가 났어요. 그래 문을 열어 보니까 교님 언니가 원장님을 팔을 한쪽을 잡고 이렇게, 이렇게 팔을 잡고 해요. 그래 내가 같이 가 팔을 잡고요. 그 나는데 저기로 빙 돌아가지고 일 병동 마당으로 돌아서 방으로 모셔다 드리고 했어요.
내가 그 시간에 만났으니까 내가 그 행복 된 일을 한번 해봤지요. 내가 남원 있으면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딱 맞췄어요. 내가 그런 것을 잘했다 못했다 보담도 우리가 원장님 지금 애기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걸음을 자꾸 걸어봐야 이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걸음 걸으러 나왔으니까 그 나 있는데 방문 앞에 의자가 있으니까 거기 원장님 생각으로는 앉고 싶어요. 앉지 마라. 그래요. 앉지 말고 걸으라고 그래. 안 앉고 할 수없이 이렇게 걸어서 갔다 오시는데 다리가 뻣뻣해. 아파. 그러고 그런 저기를 합디다. 그러니까 원장님 살아계신 동안에 세상 떠서 울음 울지 말고 거짓 깔 울지 말고 살아계실 때 혹시 그런 일이라도 있으면 한 번씩 도와줄 수 있고 많은 또 기도가 있으시길 바랍니다.(끊김)
이분들을 지금 모실수도 없고 우리들이 가는 길에 보호 받을 수도 없지요. 그러나 이 이분들의 마음속에서 그분 말씀이 운동을 해버리는 거예요. 역사를 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그분들 마음속에 역사를 해버려 가지고 같이 동업해서 협력해서 이 귀일원 동광원이 이렇게 서 나가도록 오늘까지 살아 있도록 보호가 되고 그 분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독립운동을 위해서 희생하는 그 분들이나 오늘에 우리 신앙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을 한 이 분들이나, 다 하늘나라가 목적이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또 천년왕국이 있다는 것 분명히 알기 때문에 이 아담의 걸음에 아담의 생활에 아담의 죽음에서 청할 때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추월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뭣 하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뭐라고 하셨지요? 나는 세상의 뭣이라 그랬어요? 예? 그 말씀이 어디 있어요? 요한복음 8장 12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또 요한복음 12장 15절, 16절 46절 빛에 대해서 많이 있지요.
네, 이 빛 그 전에 10절 11절 한번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에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 하셨다.
그 말씀이 바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이 세종 씨나 이 현필 씨나 이 분들이 현재까지는 아담의 말을 듣고 자녀를 낳아서 자손이 있어야 세상에 사는 줄 아는데 이 성경말씀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보니까 천국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했어. 너희는 다 형제다. 형제로 살아야 한다. 형제같이 살아야 된다.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장에서 잡혀왔습니다. 음란한 짓거리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도 죄를 정하지 않겠다. 돌아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와 같이 하신 것 같이 이 아들딸 낳고 현재까지는 살았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형제같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동광원 어머니들의 마음속에서 운동을 해가지고 그것이 커가지고 오늘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그 여자에게도 나도 죄를 정치 않겠다. 돌아가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그런 것을 선택해 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매스콤에서 이런 무엇입니까? 전기제품 선전 할 때, 순간의 선택으로 십년을 좌우한다. 우리는 순간의 순간적인 100년 세상에 사는 동안에서 천년을 바꿀 수 있지요? 그와 같이 우리들 마음속에 날마다 바울사도는 죽는다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도 좋은 것을 자꾸 택해서 선택해서 나가면 좋은 것이 우리들 마음속에 쌓이고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고 나쁜 것을 우리들에게 받아지면 우리는 갈수가 없어요. 갈 곳이 그곳에 나쁜 곳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마귀와 똑같이 심판받는데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들 마음속에 선택도 날마다 바울사도가 죽음을 선택했어요. 날마다 육체적으로 고통당하는 그런 일 이것을 선택을 하는 것이 바울사도가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리가 저기를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깨닫느냐? 예수의 사랑을 믿고 육체적으로는 고통이 되어도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바라보고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니까 이본을 보여준 이 분들을 따라가는 것이 분명한 일이요. 우리가 껍데기로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쓰면 속은 누가 채워 주냐? 성령이 채워줘요. 성령의 역사로 채워주지.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요한복음 12장 35절 36절 한번 읽어봅시다.
35절 36절,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어둠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자녀가 되어라.’
빛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또 46절
6절,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어두움 속에다 살리려고 오시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를 아담의 죽는 그 길로 따라가라고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음의 경우는 달라요. 이 부활로서 승리하는 거예요. 죽지만 다시 승리할 것을 새로 살 것을 약속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전도 하신 거예요. 나와 같이 되라. 하시는 거 아닙니까? 빛의 아들이 된다. 찬송하나 부릅시다.
이 선생님 기도문 한번 외웁시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옵소서. 죄인 된 것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행복 된 것은 구주가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너의 약함을 기억케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복된 것은 크신 권능 물밀 듯이 찾아 주시는 까닭이로소이다. 이 험악한 세대에서 이 두 가지 위로가 제 자랑이 되나이다. 성령의 역사로 참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이들은 주님 구원만 믿고 바라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아멘.
우리가 이 믿는 사람들의 추도식이나 무엇을 저기 할 때는 그들의 생활 모습을 기억하고 이야기하고 또 우리도 그를 본받자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그분들의 은공을 갚으려면 우리들이 그와 같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싸우고 살라는 것도 아니고 서로 희생하고 그분들처럼 세속을 바라보지 말고 영원한 세상이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는 조금 억울하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렇게 알고 살아갑시다. 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고 본받으라는 것 아닙니까? 바울사도가 쇠사슬에 매인 것 빼놓고는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선생님이 말하신다면 뭡니까? 폐병 앓는 것 빼고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말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들은 우리 생활이 현실로서 좀 더 분투노력 해가지고 될 수 있으면 제가 금년 벽두에 그런 말 했습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자는 화로다. 단체생활 하니까 싸움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싸우는 자는 화가된다. 피차 물고 뜯으면 서로 멸망한다. 그러므로 이 귀일원에서는 우리 동광원에서는 싸우자고 모이는 자는 아니지요?
우리의 남은 때를 개선시키자고 변화시키자고 이 현필씨, 이런 분들도 성질이 고약한 분들이요. 왜냐? 옛날에 안 믿었을 때는 그 동네 사람들 말 들으니까 사립학교 학교 선생이 국민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학교교실이 없어서 어떠한 저기에서 가르치는데 디딜방아를 찧고 있으면 거기 애기들이 눈을 팔고 있으면 디딜방아 줄을 다 잘라버렸다고 그래요. 그 동네 사람이 그러는데 그렇게 성질이 고약한 분이지만 이 성질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피로 성령의 역사로 바꾸어 졌지요. 바울사도 같은 이도 몽땅 뿌리를 뽑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 죄다 죽이려고 쫒아가다가 더 밝은 빛이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취나이다. 이것을 전도한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그 뿐입니까? 김 익두 목사님 이라는 분이 나를 보라고 그랬다는 거야. 전도 제목이 이거야. 왜? 아, 어디 장에 간 사람들이 장꾼안기면 돈을 모조리 빼앗고 다 뺏어서 장에 못 가게 해버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날 김 익두 안 만나게 해주라고 기도를 하고 안 믿는 사람도 빌고 간다는 거야. 김 익두 안 만나게, 만났다 하면 장 봇짐, 자기 아버지 제사지내러가던 뭐라도 싹 빼앗겨 버리고 그날 장 못 봐버려.
그 많이 깡패노릇을 한 이 김 익두씨가 예수를 만나가지고 성령의 은총으로 팍 쏴버리니까 쓰러져 가지고 전도를 하러 다니는데 나를 보라고 어찌 많은 사람들한테 바울사도도 나를 보라는 거예요. 나같이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한 거지요. 이런 분들이 다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들도 이 나쁜 성질 없을 수가 없어요. 왜냐? 아담 하와 근본적으로 하나와 같이 마귀에 속했다. 그랬어요. 예수님께서 그 마귀를 없애러 오셨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씨 그 말씀 그 말씀으로 해서 우리가 안 싸울 수는 없으니까 우리 귀일원 동광원에서는 싸우자고 모인 것 아니니까 싸우고 때리는 사람 있으면 꽉 묶어버려. 협력해서 꽉 묶어 버려가지고 정 말 안들을 때면 정신이상이면 정신병원에 갖다 주고 두드러지고 싸움만 하려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묶어서 인정 적으로 아깝지만 묶어서 어디다 두냐? 갱생원에다 갖다 줘요. 거기는 사람 뚜드려 패서 한다니까 거기 갖다 줘요. 인정가지고 못갑니다.
우리 될 수 있으면 우리가 참고 견디고 기도하고 노력해서 될 수 있으면 이분들의 가는 발자취 힘써서 우리가 노력해서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지. 이 추도식 했다고 해서 우리가 의무가 한 거 아니에요. 그 분들의 우리가 전도를 받았다면 그 전도에 뭐가 살아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위해서 희생을 했다면 그래서 우리나라가 살아났으니까 그 사람들의 뭐가 있지 없어져버렸으면 그 말도 없어 다 무가치해요. 이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 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들이 노력하고 힘쓰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로 생각합니다. 스승의 노래인지 성가인지 그 성가를 불러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