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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3장
1.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1-8)
사람은 자신의 죄가 타인들 앞에서 드러났을 때, 수치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죄가 있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죄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드러났다는 사실로, 수치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죄가 있는 자신을 수치스러워 한다면, 타인이 자신의 죄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항상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보기 때문에, 착한 일도 자신을 죄 없는 깨끗한 자로 만들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무게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살인죄와 도둑질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물론 행위적인 면에서 본다면, 살인죄와 도둑질의 무게는 다릅니다. 그래서 법정에서도 각기 다른 형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본질을 따지게 되면, 결국 모두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도둑질의 본질이 탐욕이고, 살인의 본질이 미움이고 분노라고 한다면, 탐욕이 있고 미움과 분노가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같은 범주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 말하는 죄에 대한 시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합니다. 롬 1:32절을 보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언급하는데, 그 죄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등등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인데, 성경은 그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사형판결을 받아야 하는 악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악인이라고 할 때, 악인이라는 말이 사실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형에 해당한 것으로 말씀한 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형에 해당하는 모든 죄가 우리에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1-2절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패역하고 포학하고 더러운 곳으로 말하는 성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제사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집결해 있는 곳이기도 하고,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백성을 신앙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곧 제사장과 서기관 장로와 같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은 다른 성보다 더 신앙적인 면에서 뛰어나야 하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와 장로, 신학박사, 소위 믿음 좋다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성이라면, 다른 성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성을 패역하고 더럽고 포학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3-4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방백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로써 귀족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지도자라면,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이를 찾아다니며 부르짖는 사자처럼,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라고 말합니다. 오로지 자기 탐욕을 위해 재판을 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했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백성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전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했다는 것도, 하나님께 제사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전하고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제사를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은 방백부터 제사장까지, 오직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하나님께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패역하고 포학하고 더럽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를 살펴본다면, 우리 역시 패역하고 포학하고 더러운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나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곧 탐욕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존재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깨끗한 척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패역과 포학과 더러움에 해당되는 악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화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운명이 그와 같다면, 동일하게 패역과 포학과 더러움의 상태에 있는, 모든 것 역시 화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는 자신에 대해, 심각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패역이나 포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탐욕이 있고, 시기가 있고, 분노가 있고, 때로 수군거리기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패역하다 하고, 포학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인식만 강합니다.
5절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며, 아침마다 자기 공의를 비추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서게 되면, 자기 수치를 알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수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의에 취해 살면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하심 앞에, 인간의 의가 얼마나 보잘 것 없으며, 인간의 의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을 멸시하는 패역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패역하고 포학하고 더러운 자에게 형벌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형벌을 정하기는 하셨지만, 거처가 끊어지지 않게 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성도가 자기 수치를 알고, 자신에게 정해진 것이 형벌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있게 됩니다.
형벌이 당연한 자신을, 건지시고 거처가 끊어지지 않는 복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죄를 알고 자신의 수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9-20)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을 패역하고 포악하며 더러운 것으로 화가 있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리고 15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이유를, 여호와가 형벌을 제거하였고,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함께 하심으로,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으로 말합니다.
이 내용만 보자면, 유다는 분명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곧 구원을 선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에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심판과 구원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 사이에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의 단계입니다.
곧 심판에서 구원으로 돌이킴 받을만한, 조건이나 계기가 인간 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외침은 아무런 조건과 계기가 없이, 심판에서 갑작스럽게 구원으로 방향을 바꾸어 버립니다.
유다는 그들의 포학과 패역으로 인해서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그들의 형벌을 제거하여, 바벨론부터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대대적인 회개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감동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의 그 어떤 조건도 보지 않으시고,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나의 구원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곧 나의 구원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인간이 가진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인간은 심판이 마땅한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이같은 인간의 본질은 불변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심판이 마땅한 불의한 존재였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취소하는 것은 없습니다.
9절 “그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심판이 마땅한 유다 백성 안에서, 입술이 깨끗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남기신 자들입니다.
13절을 보면, 이들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고, 먹고 누울지라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하나님이 택한 성도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성도는 교회생활에 충실한 것으로, 그 믿음과 성도 됨을 인정받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도는 9절의 말씀대로, 깨끗한 입술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깨끗한 입술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패역하고 포학하며 더럽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불의와 더러운 수치를 알지 못한 자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더러운 입술에 해당됩니다.
죄 있는 자가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마치 죄 없는 자처럼 육신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 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끗한 입술은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을 보면서, 자기 수치 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11절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범죄한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 수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더러움과 수치를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오직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그런 사람을 참된 성도로 인정합니다. 아무리 자기 수치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교회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교회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믿는 자로서, 패역과 포학과 불의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우리 현실은 여전히 죄의 세력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수치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현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나의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 돌리겠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점점 구원 받을 만한 사람으로 무장되어 갈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실상인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했던 것도, 그들을 쫓아왔던 애굽 군대로 인해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죽었다’며 절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는 자리가지 내려갔을 때, 그들 앞에 열리는 홍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실감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만약 쫓아오는 애굽 군대가 없었다면, 그래서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면,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단지 신기한 기적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지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한 것으로 바라본다면, 아직 죽음에 처한 자신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죽음이라는 형벌에서 우리를 건지신 십자가를, 기쁨과 즐거움이 아닌 내 구원을 위한 사건으로만 여긴다면, 성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기뻐하시는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자비하심의 존귀함을 깨닫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존귀한 피가 부어져서, 깨끗하다고 일컬음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