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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가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 운동
Ⅰ. Prologue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던 성자(聖者)! 지리산 눈보라 속에서 십자가의 노래를 부르며 통곡하던 성자! 거지굴
속에 칠성판 깔고 누워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받은 성자! 바로 '이현필'이라는 인물이다. 이현필은
한국교회 인물사에 있어서 분명히 특이한 존재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숨겨진 보석 같은 그의 삶
은 거룩한 자취의 순간들로 엮어져 있다. 스스로 알려지길 원치 않았던 겸손의 덕도 있을뿐더러, 그의 제자들
역시 스승의 뜻을 받들어 그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현필은 평신도로서, 정규 신학공부에 관한 교육을 받
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고 증거하고자 하였고, 또한 예수의 자취를 따
르고 본받고자 철저하게 살아간 사람이다. 이현필의 삶의 자취를 밟아가노라면 그 끝에 예수와 하나 된 거룩한
향기가 우리의 부패한 영혼을 일깨워준다. 그분의 삶이 값진 보석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물질의 풍요와 안일 속
에 빠진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기적절한 은혜와 경각심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풍요한 물질문명
을 거부한 채 이름 없는 들꽃처럼 순박하고 순결하며, 청빈하게 살아간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의 삶을 돌아보면,
그들이 걸어간 자취에서 예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발제는 이현필과 동광원에 대한 기초자료 수집으로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발제조는 기초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답사를 시작하였다. 전라도 광주 동광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이현필의 제자들과 그 공동체를 조사해 나갔
다. 그래서, 본 발제에는 미발표된 증언들과 서적들도 인용이 되었다. 발제는 이현필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공
동체 동광원에 대하여 우선 정리를 하겠다. 그리고 정리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현필과 동광원의 영성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현재 이현필을 바로 이야기 하고 동광원의 정신을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물음으로
발제를 시작한다.
Ⅱ. 이현필의 생애와 사상, 공동체 동광원
1. 탄생과 성장
이현필은 1913년 1월28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용하리)에서 아버지 이승노, 어머니 김오산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지혜로워 주위의 기대 속에 자라났다. 보통학교 졸업 후 차차 나이
가 들어 성년이 되어가면서는 독학으로 공부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살던 집이 남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이현
필은 어려서 너무도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생하는 어머니의 소원인 옛집을 사기 위해 영산포 읍내
로 닭장사를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처음 교회에 나가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
을 끼친 것은 도암의 성자로 불리는 '이세종'을 만나면서였다.
이세종 (1880-1942, 전남 화순군 도암면)은 보통 '이공(李空)'이라 불렀는데 그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
들에게 나눠준 뒤 초야에 묻혀 복음의 말씀대로 살다간 인물이었다. 살생을 하지 않고 순결한 삶을 추구하며 일
제시대 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다. 성경을 읽으면 반드시 실천하고야 마는 철저한 삶
을 살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의 삶을 좇아 사방에서 모인 청년들이 날마다 성경을 배웠고 빛된 삶
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특히 이세종의 순결사상은 이현필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이 시절 이현필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고 21세 때는 광주 재매교회(현 신안교회)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거룩하고 철저하게 청빈한 삶
을 살고 싶은 마음에 화순의 도암 화학산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는 많은 어려
움에 겪었다. 거기에는 고민과 치열한 내적으로의 싸움이 있었으나 그는 순결하게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수도생활에 열심으로 정진하였다.
2. 세상을 깨우기 위한 준비
이현필은 30세 전후 수년간은 주로 개인적으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하였다. 이현필은 남원에서
도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이라는 산중에서 파묻혀 수도생활하며, 그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사모하는 10여
명의 소년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이곳이 바로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
는 곳이다.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서 배우려는 이들은 서리내 깊은 산속에서 그의 인격의 감화를 받으며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등 영적 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사는 동안 이현필은 음식은 쌀가루에다 물을 타서
마셨으며 주로 생식을 했다. 그것조차도 어떤 때는 며칠씩 굶고 지내기도 했다. 산중에서 받는 교육은 경건생활
과 노동이 엄격하게 병행되었다.
서리내 근처의 갈보리라고 불리는 작은 동산 역시 서리내와 함께 수도의 도장이 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강해를 들었으며 특히 그의 순결사상을 전수받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갈보리는 서리내와
함께 이현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고 뒷날 동광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현필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경건훈련을 진행할 때에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 스스로가
짚신을 신었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 옷과 불을 때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철저하게 청
빈과 금욕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의 식생활은 일식주의(一食主義)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였다. 또한 은혜 받
은 일이 많았지만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였다. 다만 철저하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하루
종일 하는 대화가 그대로 설교였다. 간혹 누가 병이 들어 기도받기를 원하면 "저는 신(神)이 아닙니다."라고 거절
했고, 어디가 아프다는 이에게는 "더 아프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하기를 가르쳤다. 이 땅에서 겪어야 할 고통이
나 시련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복 있는 자의 신앙인데, 고통 중에 인내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을
닮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려는 숨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기성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를 '금욕주의자' '산중파'로 부르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그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다!", "이 길
이다!" 라고 소리치며 그를 따르고, 그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날은 이현필이 뒷산에 올라가 철야기도를 드리고 새벽쯤에 하산하여 초막에 돌아왔을 때, 그의 잔등에
는 서리가 하얗게 엉겨 덮이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 모양으로 하산해서는 떠오르는 아
침 햇볕 쪽을 향하여 몸을 녹이면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순교자와 같이 처
절하고 엄숙한 모습, 뭐라 형용키 어려운 엄숙한 감격이 일었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현필은 지리산 봉우리마다
가득히 정화된 설경(雪景)을 바라보면서, 수도를 하기 위해 세상도 청춘도 모두 바친 제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 십자가!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라고 호소하곤 하였다고 한다.
3. 예수 살기
이현필은 서리내에서부터 훈련해 온 제자들을 중심으로 탁발수도단을 만들어 전남 광주에서 출발하여 순천,
여수, 평일도, 해남, 강진, 보성 등으로 순회했다. 그는 쓰레기를 줍고, 남의 문전에서 걸식하는 탁발훈련을 통
해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는가를 시험하고자 제자들에게도 그 훈련을 시켰다.
한겨울 맨발로 동냥 그릇을 들고 탁발을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와 그의 제자들을 연상
케 한다. 13세기 당시의 유럽사회가 극도의 사치로 타락해 가던 때, 겨울에도 맨발로 걸으며 식량 이외에는 금
전이건 무엇이건 받지 않고 구걸하며 복음을 전하고 자선을 행했기에 '걸식', '탁발'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
던 것이다. 탁발은 교파ㆍ교리ㆍ의식ㆍ신학 등의 의상을 입기 전에 아직 때묻지 않는 나사렛 예수를 그대로 따
르고 방탕과 사치의 교회를 경건운동으로 건져내고자 착안해 낸 것이다. 교리나 교권보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
을 청빈과 단순으로 착안, 그것을 사명으로 느꼈다는 점은 사치와 타락의 교회에 대한 혁명적 쾌사였다.
이현필은 일찍이 그것을 깨달아 탁발수도를 하며 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빈농을 돕고, 가난한 병자가 있으면 몸소 간호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헌신운동과 전도는 재산ㆍ지식ㆍ재주ㆍ힘
을 바치는 것보다 먼저 " 자기 자신을 바치라"고 요청하는 성경의 말씀을 철저하게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
다. 아울러 종교계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그리스도 운동의 가치를 기대하게
하였다. 오랜 전통과 풍속에 굳어져 버린 세상과 교계를 부드럽게 녹여주는 행동, 그것은 이 세상 풍속에 매이
지 않고 초탈한 행동을 감행해내는 용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이현필의 제자들은 그로부터 철저한 신앙인의 모습을 훈련받았다. 침묵속의 고요한 묵상, 몇 시간이고
무릎 꿇는 기도와 자세, 두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부르는 찬송, 검소한 무명 옷차림, 고무신, 거지의
음식과도 같은 빈약한 음식, 그런 음식조차 그 훈련에 따라 땅에서 먹는 겸손, 아무 장식이 없는 숙소, 소박하
고 검소하며 일체의 형식을 초탈했다. 또한 낮고 천한 곳, 사람들이 살지 않는 쓸쓸한 공동묘지 근처, 혹은 38
선이 가까운 개명산 앵무봉 밑의 고독한 장소를 택하여 세상을 뒤로한 채 경건의 수도생활을 살아갔다. 이현필
의 하루의 대부분은 기도생활이었고 기도는 그의 삶이었다. 해가 지면 거의 자리에 눕지 않고 들에 나가 이슬을
맞으며 밤새 묵상하였다. 제자들이 방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깨보면 그때까지도 이현필은 움직이지 않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가끔 각혈을 하기도 했는데 제자가 "선생님 모기가 많은데 낮에 기도드리시지요"하
면 "기도는 하는 게 아니라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철저한 기도생활 가운데에서도 밤늦게까지 찾아와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일일이 다 들어주고, 그들을 보낸 뒤에는 하루 한 끼 하던 식사도 그만두고 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
도하였다. 이현필은 제자들 앞에서 성경강해를 할 때에도 말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강의 중에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고, 더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다시 했다고
한다. 또한 찬송을 부를 때는 '나'라고 된 대명사는 다 '저'로 고쳐 불렀고, 어미에 '- 겠네'로 하는 말은 '-
겠소'로 고쳐 불렀다. 이것은 예수를 향해서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도 작고 세심한 부분까지 섬기고 배려하
려는 그의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현필의 제자 중에 김광석이란 사람이 3개월간 깊은 산속에서 작정 기도를 할 때의 일이다. 지리산의 1월,
눈이 산처럼 덮이고 먹을 것도 없는 매우 어려운 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찬송가 소리가 나기에 나와 보
니 하얀 눈 속에서 스승인 이현필이 서 있었다. 눈 덮인 깊은 한밤중, 잘못해서 빠지면 몇 길이나 되는 눈 웅덩
이에 빠져 죽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지리산 길이다. 이현필은 그 험한 눈길을 고무신을 옆구리에 끼고
맨발로 걸어온 것이다. 다 와서는 기도하는 제자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밖에서 찬송을 부르며 맨발로 날이 새기
를 기다린 것이다. 방에 들어온 이현필은 품속에서 간직한 것을 꺼냈다. 그것은 둥글한 떡 세덩이였다. 당신 몫
으로 받은 것을 산 속에서 굶고 있을 제자를 생각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훗날 제자는 고백하기를 "저는 예수님
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볼 때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선생님의 삶 속에서
풍겨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거짓 없고 진실하며 예수님과 같은 참 사랑을 계속 실천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간증하며 울었다.
이처럼 이현필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는 지극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애쓰며 살았던 것이다.
4. 사랑의 사도
남원에는 나병환자가 많았다. 이현필은 떡을 많이 해 가지고 제자 몇몇과 나병환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 다
녔다. 이현필은 곪아 터져 진물이 나는 손을 꼭 잡고 악수하며 문안했다. 나병환자들은 자기네 손을 잡아주는
일이 너무도 황송해서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병은 다섯 번 뒤집어 진답니다."하고 절망스런 말을 하면, 이현필
은 "형님, 형님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 나병이 났지만, 이 죄인은 보이지 않는데 병이 더 심합니다."고 대답했다. 지극
한 겸손과 사랑에서 나오는 진실한 위로의 모습인 것이다.
어느 해 겨울 눈이 몹시 오늘 밤, 이현필과 제자 김준호는 불을 때지 않아 뼈가 저리는 차가운 방에 기거하
고 있었다. 다 떨어진 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손에 깡통을 차고 하루 종일 구걸하러 다니다가 저녁 늦게 돌아
왔지만 하룻밤 따사로이 쉴 구석도 없었다. 추운 겨울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마련되지 못한데다가 냉방에서 지낸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날 김준호는 다리 밑에서 가장 불쌍해 보이는 3명의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아이는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탁발을 하고 돌아온 그는 이현필에게 거지 아이의 이야
기를 했다. 밖에는 눈이 세차게 내리는 그날 밤 이현필은 깊은 생각을 하다가, 자신 몫의 이불 한 자락을 선뜻
내어주며 가져다주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이불을 들고 다리 밑의 거지에게로 갔지만 화가 났
다. 자신의 처지도 불쌍한데 다른 이를 돌보려는 이현필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 아이를
보자 가슴 밑바닥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끓어올랐고 그 아이가 죽기까지 간호하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
다.
이현필의 제자들은 이현필의 삶을 어린아이처럼 이해하지 못한 채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결국은 스승의 참사
랑과 그 깊이에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알 수 없을 것 같고 이해되지 않을 것 같던 스승의 행동들을,
사랑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그 자리에서 큰 감동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열정, 이현필의 삶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의 모습도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이
었지만 잠시도 사랑을 실천할 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 사랑을 베풀었던 선생의 모습들에 대해 제자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이후에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이현필은 주님의 고난에 몸소 동참하기 위해 행한 잦은 절제생활 때문에 여러 번 입원하셨다. 또한 제자들
중에 마음이 흔들리고 시험을 받고 있는 제자들의 소식을 들을 때는 마음에 애통하다가 각혈을 하곤 하였다. 그
은 특별히 연약한 영혼을 특히 아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다든지 작은 일에 사로잡
히는 사람을 볼 때는 밤새 앓으며 애통해 하기도 하였다.
5. 고통의 사랑
이현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기인한, 영혼을 위한 진실한 통회의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의 사랑에 대
해 이렇게 노래했다.
"아 !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이시여 ! 저를 지옥 밑창까지 따라와 주시면서까지 권면하시고 훈계하시고 이끌어 내 주
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여 !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었던들 저란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의심할 수 없는
이 사실 앞에 이 좁은 입으로 만방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랑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래서 그는 울었다. 예수의 사랑 때문에 울고,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울고, 그 사랑을 실
천하다가 울고, 그의 삶은 오직 예수의 사랑에 감격한 삶이었다.
오랜 기간 결핵으로 고생하던 제자 김준호를 간호하던 이현필은 자신도 후두결핵병에 걸리고 만다. 그 소식
을 들은 제자 김광석이 문병을 왔을 때, 이현필은 후두결핵으로 인하여 말씀을 하기가 어려워 찾아온 제자 앞에
떡 열개를 내어 놓으며 필담으로 "잡수시오."하고 쓴다. 황송한 제자는 사양했으나 손짓으로 계속 권하여 한 개
먹었다. 그러자 또 먹으라고 권하고 또 먹고 나면 또 먹으라고 권하고 결국 내놓은 떡 열개를 다 먹자 "이제야
제 배가 부릅니다."라고 기뻐했다.
그의 권함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진실한 마음으로 했다. 언제나 깊은 친절, 마음의 친절을
베풀었다. 다른 이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되고 다른 이의 만족이 곧 자신의 만족이 되는, 다른 이로 인해 기
쁘고 감사한 삶이 그의 삶이었다. 그는 또한 병을 보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각하여 " 오! 축복하신 이
결핵병이여! 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마옵소서." 하였다. 곁에서 시중드는 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십니까?"하면 "글쎄
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몸이 아플지라도 자신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그 고통 속에 들어가 그 사람과 하나 된다고 말했다. 한번은 이가 상해서 송곳같이 뾰족한 끝
이, 긴 시간동안 열심히 말씀하시는 동안 찔러서 구멍이 뚫리고 입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런데도 그냥 긴긴
시간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렇게까지 자기희생을 하며 제자들을 위해 한마디라도 더 가르치고자 하시는 헌신하
였다.
선생은 고통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통을 기뻐하
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더 괴로움 당하기를 소원하면서 자기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
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곤 하였다. 이현필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한 방법은 예수를 잘 믿으면 축복을 받아
돈 잘 벌고, 몸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 된다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공리주의적 신앙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의
길인 십자가에 대한 갈망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이며, 따라서 고통을 면하려 하지 말고 도리어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될 수 있는 대로 더 겪기를 원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6. 고난의 종
이현필이 계속 후두결핵으로 말을 못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겨우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던 때에 두제자가 문
병차 와보니, 선생은 몸이 뻣뻣이 굳어져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생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간호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는데, 밤이 되자 그 제자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혹시 이 밤에 세상을 떠나시지 않을까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밤중에 몰래 선생의 방문 앞까지 와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현필은 어느새 이 사실을 알고
방안에서 먼저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를 해 주었다. 안심한 두 제자는 되돌아와서 자고
그 이튿날 아침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여전히 전신이 굳어져 꼼짝도 못하고 두 눈을 충혈이 되어 무척 고통스
러워하고 있었다. 그 때 이현필은 필담으로 종이에 이름 두개를 써 놓으셨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걱정을 끼
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이었다. 밤새도록 헤매는 고통 속에서도 그 제자의 일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이현필이 방에서 각혈을 할 때 한 제자가 선생의 기침소리가 이상하여 달려가 보니, 그 때 선생은 혼자 무릎
을 꿇고 똑바로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각혈을 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빈 깡통을 턱밑에 대고 선생의 입에서 터
져 나오는 새빨간 피를 받아내고 있었다. 선생은 선혈을 입에서 콸콸 토하면서도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기도해
주시오! 기도해 주시오!" 하며 거듭 청하였다. 그 말씀에 감격한 제자들은 기도보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떨고
있었다. "주여 제 피를 다 쏟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 주소서!" 이현필은 각혈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러한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고통의
표정이 없이 평화스러웠고, 그 모습 속에는 육체적 고통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하늘의 기쁨이 서려있었다고 제
자들은 말하고 있다.
"저의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 녹듯합니다. 조금이라도 저에게 고통이 느껴질 때면 주님이 겪으신 고통이 저를
위해 받으신 고통이라는 사실을 극히 적게나마 알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 제가 겪는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주님
이 당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고통의 몇 억분의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맛보게 해 주시는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
할 따름입니다. 제게는 고통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7. 멈추지 않는 사랑
이현필의 임종이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던 때에도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동정을 지키는 것은 복입니다." "가난한
것이 복입니다." "고통이 복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현필은 고통으로 지새 밤을 지새운 다음 날에도 "지난밤에
저는 주님을 만나 뵈었고, 주님의 만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밤에도 십자
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현필은 곁에 있는
제자에게 "아무것도 안 보입니까?" 묻고, 안 보인다고 답하니 "저 빛, 저 빛이 안 보입니까?" 하며 감격해 했다. 그
리고는 기쁨에 넘쳐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는 "아,
이 복음을 누가 전할 것인가! 이 복음을 누가 전할 것인가!"하며 안타까운 절규를 토해 내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고통을 사랑할 수 있고, 그 고통을 감내한 자가 진실되게 예수를 전할 수 있는데, 고통을 사랑하는 자가 없음
을, 진정 거룩한 고통을 겪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전할 자가 없음을 안타까워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루는 이현필이 모든 것을 홀훌 떠나 혼자 있고 싶어졌다. 주위에 있는 제자들을 피해 깊은 산에 들어가 고
요히 주님을 뵙고 싶은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한 제자에게 업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영문도
모르는 제자는 선생을 업고 미끄러운 비탈길을 땀을 흘리며 더듬더듬 내려갔다. 때 마침 가을 소낙비가 내려서
두 사람은 흠뻑 젖었다. '불쌍한 제자들을 두고 나는 도망치는가?' 막상 떠나려하니 자책감이 들어 마음이 무거
워졌다. 이현필을 업은 제자 역시 무조건 순명(順命)을 하였지만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는 수 없이 이현필은 산
막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후에 그는 이때의 심정을 '내 일생에 그 때가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놓치고 말았습니
다. 그 때 소리 없이 그냥 영영 떠나 몸을 감추었더라면... 참 좋은 기회였는데 제 마음이 약해서 그것을 결행
하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현필 혼자서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연약
한 제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어야 하는 희생 역시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보다 철저하고 보다
깊은, 그리고 보다 더 높이 완성과 성화에 이르려는 삶은 잠시도 안온하게 편히 쉴 틈이 없는 법이다. 쉬지 않
는 정진(精進),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향하여 바르게 나아가는 길이다.
8. 순결의 길은 초월의 길 - 파계(破戒)
이현필의 말년, 후두결핵으로 무척 고생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그는 "나를 업고 어디 거지굴로 데려
다 주시오."라고 부탁을 한다. 그래서 서울 신촌의 셋째라고 불리는 거지 제자가 있는 대피소로 이현필을 모셔갔
다. 이현필은 죽음이 가까워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매던 어느 날 밤에 필담으로 놀라운 고백을 한다. 그것은 그리
스도의 제자로서 자기의 태도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결론을 짓고자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저는 이 시간까지 예수님을 섬김에 있어 '선행위주'였습니다. 오늘 그 동안 잘못 믿어온 점을 자백합니다. 예수님의 보
혈만이 저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의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으로만 달려갈 것입니다. 저 역시 죄인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
니다."
이현필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보혈을 의지하는 신앙이었던 것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세상사
람 보기에 그는 금욕주의자 같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인식되었다. 더욱이 곁에서 지켜 본 제자들에게 비
춰진 인상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철저한 절제를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자로 오해될 것
이 두려웠다. 이처럼 그는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 왔을 때, 자기의 근본신앙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분명히
천명(天命)하므로 제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미연에 예방하려 했다. 사실 그동안 사람들이 이현필을 다른 기독교
인들보다 존경해 온 점은 절대 순결생활을 강조했다든지, 거지같이 청빈하게 살았다든지, 살생을 안했다든지,
약을 안 썼다든지 하는 것들이었으나, 이현필은 죽음을 앞두고 철저히 자신을 반성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부질없는 '이현필관(觀)'을 뒤엎고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의 일기에도 기록되듯
'이현필이란 인간 하나가 세상에 왔다 간 뒤에 그를 따르는 이들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교파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다. 사실 그가 그렇게 살다가 죽고 나면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
를 존경하고 따르던 많은 이들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보다는 '절대선행'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인 교파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를 땅 위에서 해결 짓고 떠나기 위하여 이 시간 그 생명을 주님
께서 연장시켜 주신 것으로 이현필은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실제행동으로 제자들에게 알려 주
어야겠다고 느꼈다. "무엇이든 좋으니 먹을 고기를 사다 주시겠습니까?" 모든 제자들이 놀랐으나, 이에 순종하여 굴
비 하나를 사다가 끓였다. "수고했소. 그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시오."했다.
수십 년간 지켜오던 목숨과도 같은 채식의 정절을 의도적으로 파계하는 순간이었다. 그를 신인(神人)처럼 존
경하던 이들은 이현필의 사상이야 어떻든 밖으로 나타난 행실 - 순결생활, 금욕생활, 청빈생활 등 -을 보고 신
성시하여 따랐는데, 지금 고기를 먹는다면 모든 이들이 큰 실망에 빠질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눈물
을 주르르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예수의 보혈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예수를 사랑하
는 일에 자신의 의가 드러날까 죽음 직전까지 자신을 돌아보아 자신을 끝없이 낮추는 삶의 모습을 몸소 실천했
던 것이다. 훗날 이현필의 의도를 이해한 제자들은 스승의 파계에 경의를 표했다.
9. 임종
1964년 53세의 때 제자들과의 고별모임을 갖고, 업혀 나가면서도 말씀을 증거할 때는 "아! 기쁘다"를 연발했
다. 광주를 떠나 벽제 개명산 산장에서 인생의 마지막 자리를 잡았다. 계속 앓으면서도 기도에 파묻혀 지내던 3
월18일 새벽, 모든 제자들이 고요히 둘러앉았다. 숨이 막혀 가는데 가장 나이 어린 제자에게 "나는 지금 곧 숨이
끊어집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는다. 순결한 삶을 살겠노라는 고백을 듣고 싶은 것이다. 순결의 길은 초
월의 길이다. 마지막까지도 제자들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려고 했던 것이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파 무척 애
썼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기쁘다. 오! 기쁘다."라고 했다. 임종 수
일 전부터 천국의 기쁨이 그에게 밀려와 어쩔 줄 모르더니 그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주위 제자들에게 "저 먼저
갑니다. 다음에들 오시오."하며 무릎 꿇은 채 하늘을 바라보면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1964년 3월18일 새벽 3시
였다.
Ⅲ. 이현필과 동광원의 영성
1. 가난(淸貧)
이현필의 가난에 대한 신념은 그의 설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통해 잘 드러난다.
"진실로 가난은 복입니다. 제가 가난의 축복을 입지 못했더라면 천국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천국은 가난한 이의 것
입니다. 가난하지 않고는 천국을 맛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부와 가난, 어떤 것이 복되냐 하면 가난이 훨씬 더 복
됩니다. 저는 부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하게도 말고 가난케도 말라'고 한 이가 있지만, 저는 가난을 감당 할 터
이면 가난케 해 주시기를 구하겠습니다. 찬양할 손, 가난이여! 풍부보다 얼마나 진주일까요. 제가 부했더라면 틀림없이 극히
불행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난한 현실을 오히려 복되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을 맛보고 난 이현필의 마음에는 '가난이
야말로 천국을 맛보는 지름길'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현필은 거지와 친구로 지낼 정도로 거지에
대해 친근함을 보였다. 경기도 능곡 등지에서 탁발 수도단을 만들어 제자들을 훈련시킨 적이 있는데, 이 탁발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광주 양림다리 밑에 살던 고설빈이란 인물이다. 고설빈이 광주 동광원 사람들에게 탁발을
가르쳐 주었다. 거지 수사 고설빈은 걸식해 살아가는 수사로서 세상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이상한 눈치로
관심을 갖고 보는 것 같으면 어느새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 유랑하였다고 한다.
부와 가난에 대한 그의 고백인 "가난을 감사하나이다"를 보면 이현필의 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가난을 감사하나이다. 가난의 자유여! 아! 얼마나 가벼운 짐인고. 헛된 기쁨을 누리지 않게 되는 이 자유로운 시간, 헛
된 인사를 주고받지 않는 이 행복! 깊이깊이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치를 들추어 볼 수 있는 이 가난함의 복이여! 참말 복되도
다. '천국이 가난한 이의 것'이라고 거짓말 하실 줄 모르는 이의 입으로 축복하신 가난이여! 영원히 제게서 물러가지 마사이
다. 자나 깨나 가난이시여, 저를 앞뒤로 둘러 계시옵소서."
이현필에게 가난은 고난이 아닌 축복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보다 쉽게 유지시켜 주는 고리가 바로 가
난이다. "겸손을 위한 기도"에서 '가난은 천국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입니다. 가난의 축복을 받
지 못했으면 얼마나 불행이었을까요?'라고 말하고 있다. 이현필이 추구한 가난의 범주는 보이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포함한다. 육체적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라도 마음의 가난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허락받지 못
하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해지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정욕과 끊임없이 싸워 이겨야 한다. 모든 욕심이 사라질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이 임하게 되고 성령으로 충만한 곳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육체적으로 힘든 것
은 오히려 마음에는 도움이 된다. 그만큼 마음이 타락할 기회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다음의 글은 이를 잘 설명
하고 있다.
"동광원의 축복은 '가난'함과 '몸이 약한 것(病)'에 있습니다. 군수 도지사가 돈을 벌어서는 망하고, 고아원을 경영하는
이가 돈을 벌고서는 타락하고, 이렇게 10년 정도나 사업하는 동안 목적을 잃고 타락하는데, 타락하지 않으면 축복받은 것입
니다. '가난'과 '병' 덕택으로 타락하지 않고 축복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동기가 끝까지 순결하고 타락하지 않는 것이
축복받은 것입니다."
위의 글과 같이 이현필에게 있어 가난과 병은 고난이나 저주가 아니었다. 가난과 육체적 나약함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주는 사랑의 고리였다. 이현필은 그렇게 살다 눈을 감았다. 이현필은 그렇게 가난
하게 살다 눈을 감았다. 심한 폐병에 시달리다가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기었다.
2. 순결(純潔)
순결 사상은 이현필 사상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현필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
다. 이세종의 순결 사상이 그대로 이현필에게 전해져 발전되었다. 순결사상이 동광원 운동의 핵심이었다. 지
금까지 이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동광원과 귀일원에서 순결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전남 화순에 있는 이현필의 제자인 동광원 원장 김춘일은 이현필 사상의 핵심은 "정절"이라는 이현필의 글에
모두 담겨 있다고 말한다.
"안 먹을 수 없고, 안 죽을 수 없고, 안 아플 수 없고, 물 안 마실 수는 없으나 결혼만은 안 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면
자유와 권리가 없어집니다. 인간은 음란 행위를 하지 않으면 더 자랄 수 있습니다. 결혼하면 모든 것에 매이게 되며, 특히
자녀에게 매이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을 바로 알고 보면 짐승과 같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뜻'을 먹고 삽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뜻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 이 아닙니다. 정절은 고독을 먹고 자랍니다. 시험 중 가장 큰 시험이 고독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서만 정절
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정절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부끄러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생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정절을 사랑하는 것은 성모성(聖母性)의 계승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괴롭게 살다가 즐겁게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도 이렇게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씻어지지 않으면 그것이 큰 재앙입니다. 사람은 죽기까지 충성해서 손
해가 없습니다."
또 다른 글에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음란의 요구가 70%나 된다"라고 말한다. 처녀성(處女性)은 영원한 생
명의 씨가 되는데, 처녀성을 파괴하는 일은 생명의 씨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그의 설교 "예수
믿고 정절을 지켜야"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찾는 목적이 떡 얻어먹고 배부른 까닭인가요? 사명 찾기 위함인가요? 지금 세상이 과학 만능이라 하지만, 그
래도 필요한 것은 예수의 정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정절을 지켜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밥값 내는 격'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인간 생활이 음란을 목적으로 삼는 점
을 부정했던 까닭에 무리들은 분노했습니다."
또 다른 설교 "남녀 사이는 조심해야"를 보면 이현필의 육체적 정절을 어느 정도 강조하는지를 알 수 있다.
"남녀 사이는 꼭 조심해야 하고 분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옛날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습니다. 7세가 넘어 남녀가
한방에 있으면 어김없이 일이 벌어지고야 맙니다. 10세 미만 때 범행하면 슬픈지 어떤지를 모릅니다. 20세 넘은 사람은 그
죄를 지으면 마음이 슬픕니다.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망합니다. 평생 귀중하게 지키며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던 것
을 상실했으니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이 허망합니다. 남녀가 처음 음행하면 산천이 웁니다. 음행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낳은 자식들이 부모만한 자식이 한 사람 나온다면 남은 아홉은 부모보다 못합니다. 음란할수록 나쁜 자
식만 나옵니다."
위의 글들을 통해 이현필의 순결 사상을 읽어 낼 수 있다. '순결한 삶을 유지하려면 매일 계속되는 음란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며, 음란을 정복하고 마음이 밝아져 올 때에 자기행위의 어리석음이 보이기 시작하고, 남보
다 자신이 죄인임이 알려져서 고개를 숙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음란을 멀리하고 버리는 것은 거룩함
에 나아가는 첫걸음이며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정절과 음란은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이현필의 순결에 대한 사상은 육체적인 순결이 곧 영적인 순결로 이어진다는 특징을 보여 준다. 육체의 정절
을 고수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첫걸음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이해된다. 마음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욕과 싸우는 정화의 과정은 마음의 순결을 얻게 된다. 마음의 순결함을
회복한 인간은 참 자유를 누리게 되며 참 기쁨을 맛보게 된다. 다음의 노래에서 이러한 육체적, 내적 싸움이 여
실히 드러나고 있다.
정절가
1. 황야에 핀 국화송이 네 정절이 향기롭다.
꽃이 다진 가을날에 너 홀로만 피었구나
임께 바칠 굳은 절개 나도 함께 피오리다.
2. 철이 없는 이내 맘에 임의 은덕 저버리고
천추만대 쩔인 정욕 숨은 미련 공상할 때
수유찰나 빠른 세월 귀한 생명 잘라낸다.
3. 청절고수 저 소나무 눈 밑에서 더 푸르다.
임께 바칠 일편단심 내 정절도 너를 닮아
정욕의 길 벌판에서 나도 함께 푸르리라
4. 어서가자 이 내맘아 만유들이 기다린다.
무사무욕 아이같이 임의 마음 본을 받아
철석같은 성실한 맘 나도 함께 따르리라
이현필의 순결 사상은 육체적 순결과 더불어 영적인 순결 또한 강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성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 내면세계에서의 순결을 구원과 연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와 합일되
는 즉 하나 되는 영성을 위해 내외적 순결의 삶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3. 순명(順命)
이현필은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올곧은 그리스도인 이였다. 순결을 지키는 것, 가난하게
사는 것, 동광원을 통해 고아들을 사랑한 것,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기 위해 고난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
었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는 그의 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제 안에 이루어지는 것만이 제게 소원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부모요, 형제요, 자매처럼 여
기셨습니다. (중략) 제가 그리스도처럼 부모, 형제, 친척, 친구를 위해서 공로를 세우는 자 되기 원합니다. 제가 사람이 되
어야만 하겠나이다. 아버지 소원은 제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사모하는 일입니다. 아버님 뜻 알려 주셨으니 열렬히 사
모하게 하여 주소서.
제 원은 아버지 원이 제 원이 되어지이다. 제 소원은 아버지 원에 비하면 죄된 것이니 치워주소서. 주님의 형상을 제 마
음 안에 모시고 좋게 살아나가게 축복주소서. 노인들을 어머니처럼 모시는 것이 어머니를 위한 공로를 쌓는 것이요. 친구의
자녀를 돌보는 것이 친구를 대접하는 도리인가 봅니다. 사업이 아니요, 주님의 형상 닮는 일입니다."
그는 평상시 제자들에게 기적 중 가장 큰 기적은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말씀이 믿어져 행동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라는 것이다. 이현필은 실천의 사람이다. 무엇이든지 옳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실천하
는 사람이었다.
이현필의 말씀에 대한 순명은 아주 단순하다. 예수께서 배척한 것은 배척하고, 사랑한 것은 사랑하고, 실천
한 것은 실천하자는 것이다.
4. 이현필의 기도
5. 사랑의 영성
위에서 이현필 선생의 영성을 가난, 정절, 순명 등으로 서술했지만 이것으로 이현필의 영성을 다 담아낼 수
는 없다. 이외에도 이현필은 봉사, 이웃에 대한 사랑, 회개, 겸손, 제자됨의 자세 등 많은 것들을 강조했다. 하
지만 이러한 사상들을 모두 꿰뚫고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그분들을 통해서 희미하지만 그분의 영성을 하나로 정리하고자 시도했다. 이현
필 선생을 한 평생 이끌었던 영성을 "예수사랑의 영성" 또는 "사랑의 영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현필의 생애는 예수를 닮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비운 고난의 삶이었다. 그는 "예수님처럼 마음이 정결해
서 죄가 하나도 없는 참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다. 또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는 "예수님을 알게 되는 일,
예수님을 보여 주십시오"라는 고백을 통해서도 그가 예수를 얼마나 닮고자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두 글을 통해서 예수를 알고 닮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는 모르면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은 꼭 알아야 하겠습니
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야겠습니다. 지금 예수를 모르고 있
습니다. 영생은 그의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 참 주님 알려 주십시오. 주님 바로 아는 일이 참 사람 노릇입니다. 주님 사랑 깨닫게 해 주소서. 진실로 주님 사
랑을 깨달아야만 하겠습니다. 언제나 주님은 제 요구보다 더 크시기에 제가 삽니다. 만일 제 원만큼만 해 주셨다면 저는 벌
써 숨 막혀 죽었을 것입니다. 제 원보다 훨씬 높게 길이길이 넓게 사랑하시기에 이제껏 살았습니다. 진실로 주님의 사랑뿐이
로소이다. 제가 살아있다는 것은 두터우신 주님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한 이현필의 사랑은 그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 주던 지렛대와 같은 것이었다. 다음의 글에서도 그
가 예수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주님! 주님만 사랑케 하소서. 제 마음을 빼앗
아 가소서. 온전히 빼앗으사 주님 수중에 두소서. 주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이현필 선생의 예수를 닮
고자 하는 큰 사랑은 예수와 같은 삶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고 소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소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제 안에 이뤄지는 것만이 제게 소원입니다....."
이현필 선생을 사모하여 26살에 고양동에 있는 계명산에 들어와 약 50년 동안 스승을 따르고 있는 박공순 원
장은 이현필 선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이 선생님은 전체가 사랑덩어리여요. 얼마나 사랑이 크신지" 이 말을
하시던 박 원장님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소녀와 같은 해맑은 눈빛이 되시던 그 분은 그 순간 매우 행복해 보
이셨다. 이 외에도 다른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그들은 이선생님을 이야기할 때 매우 행복해 했고 눈에
생기가 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랑은 결국 합일의 영성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과 내가 분리되지 않고 나와 만물이 나누이지 않는 합
일의 영성으로 귀결된다. 이현필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광주 동광원에 있는 식구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
을 하셨다.
"만물은 나의 지체요, 인류와 이웃은 내 몸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과 하나 된 깊고 오묘한 세계에 도달했음을 느낄 수 있다. 결국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모든 자연과 이웃들과도 하나라는 하나님 나라 정신을 진정으로 표현한 말이다.
6. 믿음 卽 실천의 영성
이현필의 영성을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옳다고 믿으면 곧바로 실천하는 그의
실천적 삶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예수의 삶을 닮고자 노
력했다.
"오북환 장로가 이현필 선생의 소식을 듣고 한번 만났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현필 선생이 남원에 있
는 오북환 장로의 목공소로 직접 찾아왔다. 오북환 장로가 '누구요?'하고 물으니까 이 선생이 '내가 이현필이요'라고 대답하
자 오북환 장로가 '그런데 왜 양복을 입으시오!'라고 말하자 그 날 저녁 양복과 모자, 구두를 모두 벗어서 광주에 있는 아내
에게 보내 달라고 오북환 장로에게 말했다. 이후로 이현필 선생은 계속 한복만 입고 생활했다"
이 뿐만 아니라 여순사건과 한국 전쟁으로 인해 고아들이 많이 나올 것을 예상해서 고아원(동광원)을 만들어
돌본 일, 일작운동(밥 한 끼에 한 술씩 모아서 그것으로 불쌍한 사람이나 고아들을 도와주자는 한 술 덜 먹는
운동)등은 그의 실천적 삶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그의 실천적은 모습은 하루하루의 삶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미물일지라도 그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맨발로 걸어 다니고 자신의 옷과 신발 등을 서
슴없이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의 실천은 한국의 성인을 넘어 세계 기독교의 큰 성인으로 추앙받아 부족함
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실천운동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이 동광원이라고 할 수 있다. 동광원의 정신을 알면 이현필
의 정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 동광원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김준호는 동광원
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우회적으로 말했다.
"동광원의 정신을 제대로 기록한 문헌이 없다. 제 3자가 청빈, 순결, 순명이라고 말했지만 동광원 정신을 제대로 기록한
문헌은 없다. 동광원 정신을 말한다면 오북환 장로님의 얘기를 하나 해야 한다. 김흥호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오 장로
님이 한국 전쟁이 끝 난후에 서울 YMCA에서 목수로 수고할 때 서울역과 YMCA화장실이 말도 못하게 지저분했다. 똥오줌이 뒤
엉켜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다니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화장실에 가 보니 너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계속 화장실이 깨끗한 것을 보고는 누가 이렇게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인세 선생을 만나서 그 궁금증을 풀었다고 한다. 오북환 장로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 장로는 그 일에 대해 한
마디도 안했다고 한다."
오북환 장로는 김준호의 표현에 의하면 '말이 없는 사람, 소와 같은 사람'이어서 자신의 공로를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그의 입에서는 성경 말씀만이 나온다고 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도 한결같
은 대답이 나온다. 이현필의 친구로 때론 제자로 함께 했던 오북환 장로의 이런 행동이 동광원의 정신이고 이현
필 선생의 영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서양 전통에서만 배워왔던 완덕(完德)의 성인들이 우리나라에도 계시다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7. 삼온정신(三溫精神)
나와 너는 선 자리와 맛본 일이 다를지라도
뜨겁게 사랑하기를 굳이 마음먹고 그이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 하나가 되자(베드로전서 1 : 11)
따듯이 하나 되기 위하여 다음 말을 지키자.
1. 금과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금에 걸리고 울타리에 넘어진 벗을 찾자.
1. 껍질과 뚜껑을 벗기고
순수한 마음과 마음으로 부딪혀 속마음을 나누자.
1. 글 모양과 말소리밖에 있는 뜻을 찾고
모양과 소리에 걸림이 없이 마음속에 마음을 알아주자.
8. 그분은 왜 신을 벗고 맨발로 걸으셨는가
그분은 자비의 본질을
만물 속에서 발견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본질을
만물 속에서 견성하였습니다.
천지만물 속에서
진선미를 보고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주님께 향한 사랑의
관상 생활을 일상 생활화 하였습니다.
그분이 신을 벗고
흙을 걸으신 뜻이 한 가지 실증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신 뜨거운 흠숭과 공경심이
일상 생활 가운데 드러나 한 가지 실증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만물에게까지 미쳤고
정을 가지고 형제같이 자매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의 사랑이 그분이 지으신
만물에게까지 연장되었습니다.(참고 요한 13:20)
태양이 형제요,
흙이 자매요,
육신에 있어서 흙이 곧 어머니 같고
물이 곧 자매 같고
불이 형제 같고
바람이 곧 자매 같고
사랑의 정으로 생활화되어 무심히 맨발이 되셨습니다.
지리산 서리내 골짜기에서 옥암산 골짜기가 12km인데,
이현필 스승께서 쑥떡 두 덩이를 가지고
김 공을 찾아가신 때가 엄동설한 깊은 밤중이었습니다.
백설이 쌓인 산등성이를 맨발로 가시더랍니다.
"그는 무아(無我)의 사랑이셨습니다."
하느님께의 뜨거운 사랑이 북받쳐
감격할 때는 발이 얼지 않는 신비가 있었지요,
백설이 덮인 하느님 아버지의 발등상이었습니다.
그는 절대 자비의 완성이셨습니다.
Ⅳ. Epilogue
한국 기독교 백년사에 이현필과 같이 독특한 인물은 없었다. 청빈한 삶, 순결한 삶, 겸손한 삶 등 그것을 생
명처럼 강조하며 몸소 그렇게 산 사람도 없었고, 철저한 자기부인을 통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려 애쓴 인물
도 드물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점은 이 같은 금욕고행이나 뛰어난 선행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의 보혈을 의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십자가 앞에 낮추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참회자의 삶을 살면서 예수를 본받으려고 목숨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그만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
주 통곡한 사람은 없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평양 노회에서 제명당했고, 정열의 부흥사 이용도 목사도 교회로부터 제명당했었다.
예수처럼 살아 보려고 그렇게 애쓰던 이현필도 교계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워 철저하
게 핍박당했다. 주를 향해 철저하게 살아보려는 이들의 삶이 금욕이나 고행으로 비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도 모른다. 주님을 닮기 위해서는 자신을 치며 복종시키지 않으면, 청빈과 순결과 순종의 삶을 사신 예수를 따
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갈수록 풍요와 안락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원
하시는 한국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삶, 그 해답을 이현필은 너무도 선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맨발의 성자 ! 그는 지리산 눈 덮인 계곡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통곡하며 걸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
은 빛을 잃고 세속화됨에 가슴 치며 울어야 할 것이다. 청빈을 멀리하고 순결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이들의 정
신에 이현필 선생이 임종시까지 피 흘리듯 강조하시던 그 초월의 정신이 오늘 숭고하게 젖어들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여 순결과 완전성화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제2의 이현필이 속히 나오길 예수님은 간절
히 원하실 것이다. 예수의 눈동자는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 애통하는 상한 심령에 머문다는
것을 이현필의 삶에서 가슴으로 느끼며 오늘 겸손히 무릎 꿇는다.
Ⅴ. 답사 및 발제 후기
현필 선생을 알아가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기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힘겨웠다. 그 분의 삶을 이해하
면 할수록 내 삶의 모습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의 죄 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
은 부끄러움에 하루하루가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현필 선생처럼은 못하더라도
그와 같이 살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현필 선생은 그의 스승 이세종 선생
과 더불어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내게 큰 숙제를 하나 내줬다. - by. 이호진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이 동광원에 갔다. 세분의 할머니들... 그 가운데 박춘일 할머니도 계셨다. 그들의 삶
을 내 눈으로 목도하면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현필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길래 그의 제자
로 따르던 무리가 아직도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충격과 의문, 호기심이 많이 일어났다. 그들의 삶은
자체가 수도요, 기도였다.
함께 계시는 권씨 할머니의 말씀... "이현필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면 그네들도 이현필 선생님처럼 살라우?"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살으라고 말하지 못하겠어..." 권씨 할머니의 덧붙임이 있었다. 그
리고 올라와 이현필에 관한 책을 읽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이곳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으로 살
다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짓된, 오염된 빛, 소금이 아니라, 참 빛, 참 소금으로.... 나는...... 그
렇게 참 빛, 참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 by. 권순만
이덕주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 節食, 節言, 節行, 無慾 > 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이현필 선생의 삶의
모습들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글귀라 생각해 이곳에 적어 본다. 우리의 삶의 거울로 삼아, 우리의 마음에
새겼으면 하는 마음에.. - by. 이정선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탑을 쌓아간다. 어떤이는 일생을 거쳐 탑을 쌓아가고, 어떤이는 기초공사를 통해 한
순간에 탑을 올린다. 이현필의 임종전 파계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참된 길을 찾은 사람
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평생을 살아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과 공동체의 사람들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진리를 행
한다. 고깃국을 마신다. 실망한 제자들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후에야 깨닫는다. 이현필은 예수를 말하고 싶었
던 게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을 말하고 싶었던 게다. 우린 종종 우리만의 사고에 갇힌다. 그리고 헤어나오지 못
한다. 이현필을 보며 예수를 보아야 한다. 예수를 보며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봄으로서 다시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만든 탑과 남겨진 이름은 궁극적 목표는 되지 못한다. - by. 이상수
엄두섭 목사는 청빈과 겸손을 많이 이야기 한다. 그리곤 종종 성 프란시스코에 비유하여 이현필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엄두섭 목사가 말하는 이현필이 전부일 수는 없을 것이다. 동광원의 정신을 이제껏 제대로 이야기 한 사
람이 있었던가? 이현필의 제자들을 만나보면서 하나같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 자기가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을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인 김준호는 이현필의 영성을 사랑의 영성이라고 이야기 한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우리에게 우리가 할 것들을 손수 가르쳐주신 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
를 따라서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를 따라 하나로 살고자 했던 이현필은 기인이거나 괴짜일 수 없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를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며, 말씀의 사람이었다. 이현필이 파계를 할 때 굴비를 사러
다녀왔다는 한 집사도 이현필을 사랑으로 본다.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영성이라고 말한다. 이현필
의 제자들도 성경을 암기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한다. 다음은 우리들의 차례이다. 이들을 기인이나 영
웅으로 만들어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이들을 참 스승으로 받아들여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선택은 언제나 여러분들의 것이다.
** 참고문헌
1. 단행본
엄두섭, 『맨발의 성자 한국의 聖·프란체스코 이현필 傳』, 은성 1992
엄두섭 엮음, 『순결의 길, 초월의 길』, 은성 1993
엄두섭, 『내가 존경하는 인물들』, 은성 1999
박공순 소장, "이현필 선생 강의록"
김준호, 『수련의 고백』, 교회교육연구원 1995
2. 논문
김광진, "성 프란체스코와 이현필의 비교 연구", 2002
3. 월간지
동광원(소식지) 2001년 8월 창간호
성가모음, 동광원 2003
이순화 『 빛을 따라 산 성도 - 맨발의 성자 이현필 』그리스도 복음신보
< nada 영성과 공동체 > 2003년 03+04월호 p. 82-87
4. Internet Web Site
ⓐ사회복지법인 귀일원 홈페이지(광주)
ⓑ주간기독교/행동하는 신앙/한국교회의 아웃사이더7/수도자에 대한 평생의 열망/엄두섭목사
ⓒ신동아/기획특집/한국의 기인 괴짜 10인열전/걸인과 결핵환자 사랑하다 75세 총각된 김준호
ⓓ뉴스엔조이/Theme/아름다운사람/예수처럼 살다가신스승 이현필 선생/동광원 원장 김금남 언님의 증언
ⓔ주간기독교/행동하는 신앙/ 기획/시골교회/'먹고배설'하는 선량한 인생들의 공동체/임락경목사
ⓕ한겨레/문화생활/종교/스승이 물려준 '사랑의 불씨' 수도와 봉사로 이어가지요
ⓖ주간기독교/행동하는 신앙/한국교회의 아웃사이더8 / 자기를 버리고, 오롯이 그분께 순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