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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승리
信天함석헌
이 순간에 내리는 말씀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과 같이 예배를 드리게 돼서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이라 함은 그저 보통 말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이라고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그렇게는 말 안하겠습니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해야 하는데, 무슨 소린지도 모르게 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보통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다 해야지요. 그렇지만 ‘참’ 산다는 것은, 산다는 말도 안 붙여도 좋아요, 참이란 것은 지금 여기뿐이지, 또다른 시간이 있다든지, 또다른 곳이 있다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될수록은 그러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시간이라는 것도 빈 생각이다, 또다른 곳이라는 것도 빈 생각이다, 또다른 하루가 있다는 그것도 빈 생각이다, 그런 것이 다 건성으로 노는 소리지 참은 아니기 때문에, 참을 해보려고 할수록 다른 시간을 상상 안해 봤습니다. 다른 곳이라는 걸 생각도 안해 보았습니다. 다른 또 뭐라는 그런 생각이 일체 안 났습니다.
이 말하는 이 순간에도 내 속에서는 그걸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참 싸움을 정말 싸우려면, 참 참을 하려면 내가 이 시간에 말도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또 사람이기 때문에 이 순간에 모인 이것을, 몸을 가진 사람으로 예배를 지내야 하니까, 내 속에 그런 어느 순간도 순간뿐이지 그전 순간에 한 것이 그 다음에 무슨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순간에 할 뭣이 지금 할 것에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이 순간만을 살아보려고, 이 순간에 주어지는 말을 하자고 노력을 하는데, 참 의미로 하면 그런 노력도 안해야 되지요.
예수님 말씀하신 것 옳은 말씀 아니에요? “너희가 이제 있다가는 어디로 끌려갈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소위 재판한다, 정치한다 하는 사람 앞에 가 설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대답을 어떻게 할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그 순간에 가면 말할 것을 주실 거다.” 왜?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요 네 속에 있는 그분이 하시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런 걸 이 순간에 내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기 서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순간은 말을 들으셔야지요. 그렇지만 속에서는 그 듣는 말보다 그걸 더 힘을 쓰셔야 할 겁니다. 이 순간밖에 다른 것은 생각도 마시고, 이것밖에 다른 것을 생각도 마시고, 여기 모인 사람밖에 다른 사람들 생각하실 거 없고, 지금 이 순간에 예배밖에 또다른 무슨 생각─이전에 했고, 이 앞으로도 할 그런 생각 다 잊어버리도록 노력을 하셔야 할 겁니다.
형식적으로 말할 때는 틀림없이 이 예배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는 다 각각 자기 집으로 갈 거고, 만날 사람 만날 거고, 또 기다리고 있는 일을 해야 할 것도 있을 거고, 우리 기억이 있고 우리 상상이 있는 이상은 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이 세상이요, 이 사람이란 겁니다. 그렇지만 그걸 해야 할 줄 알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이것을 다 내가 잊어버려야 한다 노력을 하시지 않고, 정말 이 시간 마치고 가면 할일이 있는데, 언제 끝이 나면 가서 할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으시다면 이건 쓸데없는 거예요.
이 순간에 이 일이 쓸데없다면 다른 것도 다 쓸데없어요. 왜? 그 다음 순간이 내게 주어지겠는지 않겠는지 알 수가 없어요.
박정희 씨라는 이가 지난해 10월 26일에 그렇게 될 순간까지 생각도 못했을 거요. 그 요새를 다 지은 다음에 자기 생각을 해 뒀던 것을 계획대로 다 하자고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안 됐습니다. 몰랐습니다.
근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 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지만, 꼼짝할 수도 없었고, 그 닥쳐오는 순간을 자기 힘으로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무슨 특별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 말은 잘 알 거니까, 누구의 일보다도 두드러져서 실례를 들기에 좋으니까 지금 하는 말입니다.
그 하나를 봤으면 이 사람말고, 이 곳말고, 이 일말고 또 뭣이 있거니, 그런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알 거예요. 다른 이에게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지난해 10월 26일에 생긴 일은 사람의 생각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 하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일이라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생긴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마 그러실 줄 압니다.
한 번밖에 없는 싸움
여기, 미리 인쇄를 했는데, 이것도 지금 말씀하던 그 말씀에 비추어 하면, 사람이니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만 쓸데없는 일이오. 한 주일 있다가 할 프로그램을 미리 찍어 가지고 하라고 누가 허락한 거예요. 거기 보면 설교라고 한 제목이 잘못 프린트가 됐습니다. 내가 말을 분명하게 하질 못해서 그랬는지 활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나는 ‘최후의 승리’라 하지 않고 ‘절대 승리’라고 그럽니다. ‘최후’라는 말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최후란 말 가지고는 지금 내 마음에는 부족해요. 최후의 승리라는 건 많이 싸워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긴다는 의미의 최후,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건 아직도 한가한 생각이에요.
‘절대 승리’라는 건, 싸움은 이 순간밖에 없어요. 이 순간에 싸우는 싸움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건 이겨야 하는 것, “어떻게 하면 이길까? 어떻게 하면 질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이기는 거다, 이번에는 못 이겼지만 그 다음번에는 이기겠다, 그런 따위가 아니에요. 한 번밖에 안 싸우는 것, 한 번밖에 모르는 것……
나는 젊어서 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고, 그것이 인연이 돼서 우리 나라 역사 얘기를 하게 되고 그랬는데, 거기서 우리 나라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혹은 환란의 역사다, 고생하는 게 우리 나라 역사다, 그런 말을 했어요. 지금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그런 이름으로 아직도 팔리고 있는 책인데, 그때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고 썼어요.
우리 역사라면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고, 언제부터 시작이 됐는지 모르고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어요. 최후라고 하지만 최후가 없어요. 최후가 있어서는 안 돼요. 우리가 목표하는 건 영원이지. 위로 올라가도 영원이요 아래로 내려가도 영원, 위로 올라가도 무한이요 아래로 내려가도 무한이오. 영원, 무한. 그렇지만 그 가운데 지나온 역사가 사람도 많은 사람이 났다가는 죽고 또 나고, 사건도 많아서 잘된 일, 못된 일, 선한 일, 악한 일, 별일이 다 많지만, 그것을 요약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공통되는 어떤 요소라 할까, 그게 있다면 뭘까? 그걸 붙잡아 보자는 거예요.
가령 우리가 어떤 인물의 전기를 쓴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전기를 쓰는데 그 사람 어디서 나서 뭘 하다가 어디서 죽었고 어디서 이런 일 했고 저런 일 했고, 그것만 죽 늘어놓은 건 잘 쓴 전기가 못 됩니다. 잘 쓴 전기란, 한 일도 많고 여러 가지 공부한 것도 많고 가지가지지만 처음 날 때부터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관해서 흐르는 그 무엇을 잡은 거예요.
적어도 훌륭히 산 사람이라면 누구도 반드시 그건 있을 겁니다. 직업으로 하면야 농사했던 일도 있고, 장사했던 일도 있고, 대학에 교수했던 일도 있고, 무슨 여기 왔다 저기 왔다 별일이 다 많겠지만, 좋은 일도 많고 궂은 일도 많긴 하겠지만, 그 모든 걸 통해서 역시 이런 점에서는 이 사람은 이거랬다, 이 사람은 이거랬다, 그 무슨 일관하는 것,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아요? 사람이란 그런 것 있자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지 말고 생명이란 그런 것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까지 갈는지 모르지만 밖의 모양은 많이 변하나 속에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있어 가지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있어야 해요. 내가 누구를 안다 할 때에는 그 사람 속에서 그것을 보자는 거고, 그 사람 속에서 그걸 보자는 건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해서 그러는 것 아니에요?
그래 공자님이 자기 제자보고 물어 본 일이 있어. “자공아, 너 나를 어떤 사람으로 아냐? 내가 지식도 많고 글 잘하고 여러 가지 일을 아는 그런 사람이라고 아냐?” 자공은 솔직하거든. 자기는 그 점이 훌륭한 줄 알았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니다.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 내 일이란 처음부터 하나로 꿰뚫는 거야.” 여러 가지 했다는 게 아니라 ‘하나.’ 그 하나가 뭡니까 묻는다면 어리석은 거예요. 그건 말로 할 수 없지. 공자라는 이는 훌륭한 이, 전에 없고 후에도 없을 성인이라고 사람들이 그랬고, 그래서 동양에서는 그 공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어. 옛날보다 지금은 좀 못합니다마는 그래도 오늘날까지 동양 사람들 공자라고 하는 이가 와서 드러내 보여줬던 그것 아니었으면 사람 노릇을 못했을 거요.
우리야 지금 예수를 믿지만 그렇게 믿게 되는 데도 공자의 그 가르침을 잘 아는 것이 있지 않았을까? 내 안으로도 내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올라가면, 나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한국 사람이 공자님의 가르침이 뭔지는 적어도 알고, 그렇게 나고 그렇게 입고 그렇게 일을 하고 그렇게 시집 장가 가다 그런 가르침 속에서 죽어서 가는 걸로 알았을 거예요. 그게 아니었더라면 내가 기독교가 왔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다행히 그래도 그런 데서 배운 것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내 속에서 지금도 공자가 죽지 않았지요. 그럼 그것이 참 산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겠어요?
고난은 부끄러울 것 없다
그런데 그럼 역사도 그럴 거다. 우리 나라 이때는 잘했다, 이때는 못했다, 그거야 누구 모르겠어요? 학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군인으로는 이런 사람이 있었다, 정치가론 저런 사람이 있었다, 알면 물론 좋지만 그걸 다 알려면 이다음 점점 역사가 길어 가는데 어떻게 다 알겠어요? 아무리 재주가 있다는 사람도 지나간 역사를 다 아는 재주 없을 거예요. 천생 많이 내버리고 골자 되는 것만을 골라 들어야 되겠는데 그게 뭐냐? 그런 걸 생각을 해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면 이걸 알려 줄까, 그랬는데 역사의 생각 해보자니까 도무지 맥이 나.
왜? 우리 나라 역사에 잘된 일보다는 잘못된 일, 남의 나라와 싸움해 진 일 많지, 남의 나라의 종살이한 일 있지, 정직하게 봐 가면 부끄러운 일이 많으니까, 이런 걸 애들에게 어떻게 가르쳐 주지? 그러니까 이런 것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다, 우리 나라 역사를 들으면 젊은 사람들이 부끄러운 생각 안하고 “그렇지! 우리 나라지”, 말하자면 그럴 만한 때 가르치려면 어떻게 하지? 무엇을 거기다 줄까? 보통 말로는 다 늘 칭찬을 해서 “본래 우리 민족이 날 때부터 훌륭했단 말이야, 단군 때 그랬고 언제도 그랬고, 뭐 역사 그다지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 게 다 참말인가 하면 그래야 된다는 생각에 억지로 거짓말하는 일이 많이 있어.
어느 나라 역사를 봐도 거짓말 안 들어 있는 역사는 없어요. 그걸 내가 아는 이상은 어떻게 그런 걸 할 수가 있나? 그래 고민을 했어요. 난 뭐 우리 나라 어느 때 봐도 밤낮 고생, 고생, 고생, 고생…… 어느 의미로 보면 이 세상에 난 것이 고생하기 위해 나온 민족 같은, 그런 생각이 있었어.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어째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한 민족이 더구나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다가 이제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는 이는, 어디서 누구한테 상패를 받아 봤다든지 칭찬을 들었다든지 그런 것보다는 그 자그마한 일생인데 고생 고생 얼마나 했으면,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나는 어디 가서 멎을 곳도 없다” 할 만큼. 집이 없어요. 자라날 때까지는 집이 있었지만 그 다음엔 집이 있이 사신 분 아니오. 아내는 물론 없었고. 그저 제자라는 사람들과 같이 이리저리 다니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니까 그야말로 고난의 일생 아니냐? 마지막에 승리를 하는 게 아니라, 최후에 승리를 얻은 게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말았단 말이야.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건, 십자가에 달렸다가 살아난 건 세상 모든 사람이 보고 “아, 저 사람이 이젠 살았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깊은 데서 정신적인 어떤 걸 체험하는 사람들이 만났다, 분명히 살아 계시다 하는 그게 부활이지. 빌라도나 가야바가 살아난 예수를 보고 “내 잘못했소. 당신 죽였던 것 잘못했는데 제발 용서하시오” 했다면 참 좋아할는지 모르지만 그렇게는 못 됐습니다.
그러니 고생의 일생인데, 그렇게 일생을 고생 고생하시다가 싸워서 싸워서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도 잔뜩 기다리던 것, 아주 단번에 일이 나기를 바랐던 것을 하지 못하고, 그저 무참하게 잡혀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돌아가셔. 그런 분인데, 그로 인해서 기독교라는 게 생겼고, 몸은 죽었는 데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그 예수님의 영의 살림이 아니었더라면 서양 역사 없었을 거예요. 또 서양 문명의 그것이 없었더라면 동양으로 와서 예까지 퍼질 수도 아마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고난이 반드시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겉으로 보기엔 부끄럽다고 할 만한 치욕의 일생을 살았지만, 도리어 세상을 건지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되어서 우리가 믿고 있지 않아요?
한 사람이 그랬다면 한 민족이 못 그럴 것 없지 않아? 단군 시절부터 이날까지 내려오면서 우리는 고생만 했지,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한 적 별로 없어요.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그 무엇을 붙잡는다면, 그 고난의 의미가 뭔지를 안다면, 그게 도리어 영광의 역사 될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생각에, 그때 말로 우리 나라 역사의 기조(基調)라고 그랬어요. 여기 음악하시는 분들은 다 알지만 모든 곡조에 키노우트(keynote)라는 것이 있어요. 근본 되는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 변해서 훌륭한 곡조가 됩니다. 작곡을 하려고 할 때 그 생각이 있어야 하고, 남의 곡조를 감상하려고 할 때도 그 밑을 언제든지 계속 흐르는 키노우트 혹은 기본적인 톤을 알아야 음악 들을 줄 아는 사람인 모양으로, 역사에도 그런 게 있다 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거예요.
‘하면 안 된다’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얘기가 길어집니다마는, 그렇게 했던 저로서도 요새 갈수록 갈수록 놀랍니다. 고난의 역사라, 남들은 다 싫어하는 소리입니다. 아주 패배주의적인 그런 역사관이 뭘 하겠느냐고 반대도 많이 했지요. 그렇지만 고난이라고 해도, 해방이 돼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나도 참 몰랐습니다. 해방이 됐다고 했는데, 우리 힘으로 된 해방은 물론 아니지요. 세계 역사가 그렇게 돌아가는 바람에 우리가 됐지. 그러니까 그걸 신앙적으로 하면 하나님의 섭리로 해방이 됐다, 그랬어야 하겠는데, 도대체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어.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해방이 될 줄을 알았다면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 꼴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랬으니 다른 사람 말할 것 있어요?
해방이 모처럼 됐다고 해서 이젠 고난이 지나가고 우리 마음에 드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나 기대했는데 불과 오 년 후에 6․25 전쟁 나지 않았어요? 지금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까,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까? 하여간 그럼 이제나 바로 되나 했는데, 어쩌면 그후에 갈수록 이러나!
이것을 사실대로 죽 말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그걸 다 말을 하면 속에 많이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 있어. 그러니까 구태여 내가 그걸 안할 거야. 안해도 다 잘 아는 거니까.
믿는 사람은, 아무리 죄인이라 해도 그 죄인이 정말 언짢아하고 싫어한다면, 구태여 가서 “너 이 자식, 이랬지, 이랬지” 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그 마음이 싸워 가지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이기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절대 승리’라고 해요.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본래부터 이건 이긴 싸움이니까, 이겨도 이기는 거고 져도 이기는 것, 언젠가 가서 몇 번을 이기는 게 아니라 언제고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이기는 싸움이다!
그건 무슨 말이에요? 어느 순간에도 “내가 옳지. 하나님이 우리편이지” 하는 그 확신이 있으면 이긴 것 아니오? 세상 사람들처럼 그럴 것 있어요? 몸으로 보면 형편이 없을지 몰라요. 피스톨 하나도 못 가졌지. 지식으로 봐도 그렇고, 돈은 물론이고, 뭘로 비길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패배감에 “우리 이래 가지고 어떡하지?” 그런 생각 조금도 안해요. 그런 생각 안하셔야 돼요. 그러한 것이 ‘절대 승리’예요. 그래 내가 ‘절대 승리’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라고 하는 게 이 싸움 아니오?
예수님이 사람 같지도 않은 가바야요 제사장이요 하는 것들의 핍박을 받고, 하나님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진리가 뭐냐?”고 묻던 빌라도 같은 사람 앞에서 수모를 당하면서도 조금도 수모로 알지 않고 태연하게 당하시고, 그 일로 인해서 세계 인류의 구주가 되셨는데,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할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나로서도 어쩌면 해방 후의 역사가 이렇게 될까, 그 말을 다 하고 한번 시원해졌으면 좋겠어. 여러분도 같이 손뼉이라도 치면서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남이 어려워하는 걸 구태여 하지 않아요. 나쁜 짓을 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못하고 몰래몰래 하려는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채 죽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난 사실은 도둑질할란다” 그러진 않고 착한 사람같이 가서 슬슬 속여 불시에 도둑질을 한다든지, 사람을 죽이고도 죽이지 않은 것처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래도 양심 있는 것 아니오? 그걸 어떻게 살려 주도록 해야지. 내가 매를 맞으면서도 마음은 큰 마음으로 “저보다 내가 아저씨지, 내가 그래도 이긴 사람이지” 하고. “잘못하면 지지 않아?” 그러면 악이 바짝 나지만, 뭐 넘어져도 내가 이길 거고 죽어 쓰러진대도 내가 이길 거라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강한 법이에요. 낙심 안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그렇게 잘 되지 않아 나도 속에서 고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남 앞에서 설교를 한다 그러면 안 돼요. 이제까지 나도 하나님 앞에 추태를 보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간에는 하나님이 내 속에다 허락을 해서 “말해 봐” 그런 것이니까 합니다. 나는 누구처럼 기도하다가 “아무개야, 너 가서 해라” 그런 소리를 들어본 건 아닙니다. 성신을 받는다면 중얼중얼하다가 무슨 굉장히 이상한 경험을 한다든지 손만 대면 뜨끔한다든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그런 점도 있겠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 지금 차분히 앉아 하는 이 생각 속에 조금도 꺼림칙한 것 없고, 감추고 싶은 것도 없고 자랑하고 싶은 것, 부끄러운 것, 내세우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다, 그렇게 고백해서 좋습니다.
그런 생각에서 오늘 얘길 읽은 건데, 적어도 「요한복음」 13장부터 여러분이 읽으셔야 돼. 오늘 본 것이 그 마지막 결말하는 말씀이에요. 나는 성경 중에도 「요한복음」을 더구나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차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겐 가장 그것이 좋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글이 바울의 글입니다만, 암만 그래도 유대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중에는 구약 시대 얘기, 유대 사람 얘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은 겉에 나타난 무슨 사건이 이랬다든지 그걸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생각은 어떻게 하셨고 말씀은 무슨 말씀을 했는지를 주로 전해 보자는 글이기 때문에 좋습니다.
사람의 겉 껍데기보다, 그 사람이 한 일이나 사업보다 그 사람의 마음이 뭔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에요. 마음이 주인이 돼서, 그것이 발표된 것이 사업이란 건데, 사업은 뜻대로 반드시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대로 되기도 하지만 안 되기도 합니다.
일전에도 우리가 저 강원도 신림에서 김용기 장로가 하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가서 사흘을 지냈는데, 거기서는 날마다 교회의 청년 남녀들이 한 이백여 명씩 와서 훈련을 받고 가요. 두 주일씩 한다는데, 훈련이 다른 게 아니에요. 새벽 일찍 일어나서 뜀뛰기하고, 우리 갔을 때는 밭의 일은 별로 하지 않습디다. 뛰면서 구호를 외칩니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는 김 장로의 뭣인데, 그걸 지금은 아들들이 나가 뛰면서 외칩니다. 거 확실히 좋은 거예요. 우리 나라 사람같이 확신이 없어 하는 민족에게 하면 된다는 걸 가르쳐 주는 건 좋습니다만, 그걸 들으면서 내가 속으로 ‘하면 안 되는 것도 있다’(웃음) 그랬어요. 그것도 알아야지. 하면 된다고 다 했다가 어떡할 작정이야? ‘하면 된다’도 물론 알아야지만, 해도 안 되는 거 있어.
우리가 해방이 됐다, 이젠 우리 새 나라 건설하련다, 얼마나 그랬어요? 그러나 그것이 잘 안 됐어. 안 됐으면 그럼 어떡하지? “내버리지” 할 수는 없지 않아요? 우리가 믿는 데는 “하면 되지! 내가 믿는 마음으로 하면 저 산더러 일어나서 바다에 가라 해도 된다” 그런 믿음이 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 산더러 빠져 바다에 가라 해도 안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믿더라도 하나님이 무슨 뜻으로 안할 수도 있으니까, 안한다 해도 나무랍지도 않고 “나 그대로 좋다.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가장 좋게 주는 걸 거다” 하고 그걸 또 받으실 준비도 돼 있어야지. 하면 된다 그러는데 외아들이 감옥에 갔다, 하나님 없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외아들 잡아갔나? 그러면 믿음이 무너지겠어요, 안 무너지겠어요? 하면 된다는 것을 내 생각에서 믿긴 믿었지만, 그건 인간이 하는 말이지.
예수님이 마지막에 뭐라셨지요? 제자들이 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나라를 다른 나라의 속박에서 건지고 그저 사람마다 제 농사 해먹으면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살게 해주려니, 그렇게 바랐는데 십자가에 돌아갔다고 하니 기가 막혔지.
「사도행전」 첫 장 보세요. 승천하려는 장면에 제자들이 가서 “선생님, 이제 우리 나라를 도로 찾아 주실 순간입니까?” 그러는데 기가 막히게도 “나도 몰라” 그러지 않았어요? 또 찾아 주지도 않았고. “몰라” 하실 뿐만 아니라 “그건 나도 모르고 아버지께서 자기 손 안에 두시는 것, 자기 권력대로 하시는 거니까 그건 너의 소관이 아니고” 하셨어요.
우리가 생각해서 됐나 그대로 안 됐나가 아니라 내 할 의무가 뭐냐?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안 되는 것이 너의 일이 아니야? 한 나라가, 어떤 나라가 많이 무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예수님만이 아니라 동양의 성인인 노자도 그런 말을 했어요. 천하는 신기(神器)라, 나라라는 것은 싱그러운 그릇이야. 하나님의 그릇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위자(爲者)는 패지(敗之)요, 집자(執者)는 실지(失之)라”, 하겠다는 놈은 반드시 다 잘못되는 법이야. “내가 이 나라 할란다” 그러는 놈마다 반드시 무너지고 말 거다, “내가 이제 할 거다” 그러는 놈마다 놓치고야 말 거라는 겁니다.
벌써 이천 년 전에 노자가 그 말 했어요. 그랬건만 이 동양 사람이 듣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러는 거예요. 중국 천지에서 세상을 다 하는 것 같은 모택동조차도 안 믿었어.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훌륭한 모택동이라고 그러더니, 죽으니까 이제는 쓴 오이 꼭달이만치도 생각 안해. 그러면 역사를 꿰뚫는 것이 그런 것 아니오? 거 뭣이 있지 않아요?
땅에서 솟는 샘물처럼
그래 내가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적어도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를 여러 번 읽어 보시라는 거예요.
우리 지금 현대의 이 역사를 보고 기가 막혀서 “여, 어떡하지?” 아무개도 들어가고 아무개도 들어가고 아무개도 들어가고, 오늘 뉴스 들으면 이럴 줄을 몰랐는데, 내일 뉴스 또 모르겠는데, 그 다음 뉴스 또 모르겠는데, 자꾸 그러는 역사인데, 그렇게 걱정이 되시거든, 하나님이 있나 없나, 또 믿기는 믿지만 이거 어떻게 되려는 건가 마음이 흔들림이 오거든, 가만 앉아서, 다른 것도 있지만 「요한복음」 13장 이하 17장까지를 읽으세요.
예수님도 돌아가시고 싶지 않았어요. 12장 마지막을 보세요. 보면 바리새 교인들이 자꾸자꾸 그랬기 때문에 슬쩍 숨어서 안 나타나셨다 그랬어요. 비겁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괜히 주책없이 된 소리 못된 소리 지껄이다가 감옥에 가서 영광이 될 것 아무것도 없어요.
실력도 없으면서 “우리가 반드시 이길 거다!” 그러고 잡혀 가서 매맞고 가서는 맛이 어때요? 내가 좀 말하기에 어려운 말입니다만, 나는 확실히 우리 요 동안에 하는 일에 실패된 점의 하나가 거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실력도 없이 하는 것.
그럴 만한 능력, 실력이 어디서 오나? 나라를 건지고 못 건지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어!” 물론 어디에도 있는 이 아니에요. 우리 마음을 통해서만 오지만, 모든 샘물은 땅속을 파야 솟는 거예요. 모든 생각은 사람의 가슴팍을 깊이 파 들어가야 솟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땅 속에서 솟는 샘이 어디서 왔나? 하늘에서 온 비예요. 하나님이 우리더러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먹고 살게는 안 만들었어. 땅을 파서 샘물을 마시게 만들었는데, 내리는 동안에 더러운 것 묻은 게 대지 속에 들어갔다가 자연히 여과가 돼 가지고 사람 먹기에 아주 적당하게 된 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샘물 파먹는 게 옳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뭔지를 모르니까 찾고 바라고 하지만, 비가 일단은 와서 저 땅 속 깊이 들어가는 모양으로 하나님의 그걸 찾을래도 마찬가지요. 비 왔다가도 빗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으면 썩어지고 말지 생명이 없어. 하나님의 말씀이 내렸다고 해도, 성경 속에 있다 그래도, 수천 년 됐다고 이것도 묵어 버려서 힘이 없어져. 그보다는 그 내린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잦아 먹어 들어서 그것이 자기의 생각으로 솟아날 때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목사님이 하신다고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지.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에요. 일단은 마음속에 잦아 먹어서, 잦아 먹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딴딴하면 안 돼.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믿고 그것이 내 마음에 솟아나서 “야, 어떻게 돼서 이 말씀이 내 생각에 났지?” 그러지 않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연히 구조가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웅덩이의 물이 뭐겠어요? 어느 교회에, 어느 학교에, 무슨 성당에 더러운 건 다 들어가고 썩어서 그걸 당장 먹으면 안 돼. 사람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말이 하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내 생각이 헤플 때 말이 나가지, 정말 사람이 심각하면 말 없어요.
그러는 동안에 우리 마음속에 살 속에 뼈 속에 속속들이 스며들어가요. 그게 스며들어가면 가만있는 법이 아니야. 언제 벌써 뚫고 나와요. 비가 와서 땅 속에 잦아 먹으면 여과가 돼 사람 먹기에 깨끗해지는 모양으로 내가 성경을 보는 동안에, 혹은 사람의 말을 듣는 동안에,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 그것이 여과가 돼 나올 때에는 그때처럼 내 마음에 기쁜 때가 없어. 땅 속에서 자연히 솟는 샘물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건 돌아간 박정희 씨가 왔대도 못 막을 거예요. 틀어막아도 또 덧구멍을 뚫고 나가도 나가지.
우리가 세상을 이겼다는 말
그런 것이 다 온전히는 아니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라고 하던 때 터져 나왔던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주 깊이 못 들어갔어. 참 여과가 돼서 그 중간에 있던 오줌물 똥물이 안 섞이도록 깊이 들어갔다 나왔어야 할 건데 그렇게 못 됐다는 말이야. 쉬운 말로, 성경을 읽긴 했지만 깊은 체험은 못하고 웅덩이모양으로 받아들인 정도밖에 안 됐어. 그런 고로 거기에 인간적인 생각이 섞였어. 그걸 가지고 남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은 없다 그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좇아 나온 말이어야만 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 속에 계십니다. 지금 대충 내가 비유한 말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셔. 우리 속이라니 심장 쪽에 어느 구석에 있습니까? 아니지, 물론 그건 아니지. 심장 안쪽에도, 폐장 쪽에도, 뼈를 빻아서 가루를 만든다 해도 그 속에 하나님이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살아 있어서 말을 듣고 말을 하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속에 분명히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내 말이 아니라 세계에 유명한 심리학자였던 칼 융(C. Jung)의 말을 빌면 “허망, 그런 소리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있다.” 그는 하나님이라고 그러진 않았어요. 분명히 있다, 그러면 그걸 뭐라 할까? 그건 움직이는 것, ‘루미노스 살게’라는 건 뭐냐?
하나님이라는 건 뭐냐? 인간의 심리학에서 말하면 잠재 심리이지. 무슨 언컨셔스니스(unconsciousmess)라든지, 그런 걸 아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모든 것이 주장이 되는, 가만있지 않는 어떤 능력의 하나님, 그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 아니냐?
심리학자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는 누구나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이 그러기 전에 성경에서 실컷 말한 거지요.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하늘 나라 네 안에 있다.”
그래 또다시 하는 말입니다만,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싶지 않았지. 하지만 암만 해도 그렇게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맡겨 주신 걸로 알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인생이라는 것도 아시고, 지금 자기에게 명령이 그렇게 오는 것을 다 아시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준비를 시키는 게 이 13장 이하 17장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17장은 마지막에 하실 말씀 16장까지 다 하시고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말씀이지만, 그전에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여기 와서는 비유가 아니고 사실로 말합니다. 그러기에 제자들도 “그전에는 비유로 말씀을 해주시더니, 이제는 사실대로 말씀을 해주시니까 참 좋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그랬어.
알았다 해도 그때도 채 모르는 때. 그래도 그만 했으면 자기가 떠나가셔도 염려가 없는 줄 알아. 왜? 내가 가기는 가지만 간 다음엔 내가 없어지냐, 그 다음엔 이 육신은 아니고 영적인 그날이 올 거니까, ‘진리의 신’이라는 때도 있고, ‘거룩한 성령’이라는 때도 있고, ‘보혜사’라 그러기도 하는데, 그전에 들어 두었던 말이 우리 가슴속에 잠겼다가 생명이 되어 나오는 모양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여기서 들려 와. 그런 줄 알기 때문에 맡겨 두고 가신 거예요.
16장 마지막에서 그랬어요. “너희가 세상에 있을 때에는 근심할 수밖에 없을 거야.” 왜? 이 세상은 근심하게 마련된 세상이에요. 사람이 몸을 가지기 때문에, 몸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감정도 있고 지식도 있고 그래요. 감정이란 건 제일 많이 헤매는 놈, 지식도 헤매기 쉬운 놈, 의지도 굳센 게 아니라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의지, 반드시 다 믿을 수는 없어요.
더구나 우리는 감정이 세련되어야 하는데, 참사람이 옳게 나자고 하는 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아마 감정입니다. 감정이란 다른 게 아니고 세상에 있는 것과 달라붙는 거예요. 그저 꽃을 봐도 달라붙고 싶고, 무슨 먹을 걸 봐도 달라붙고 싶고, 간 데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방해가 되는 때가 많이 있어.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도 감정에 있어서 완전히 세련이 못 됐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마지막 준비를 해주시기 위해서 하는 말씀인데, 한 말로 따지면 정말 절대 이기는 것, 이겼다가 졌다가 그런 것 아니고,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기고 들어가는 싸움이라고 해요. 왜? 우리는 싸워서 그 결과를 먹자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맨 마지막까지 세상에서 불의와 싸워 가는 게 우리의 일이다, 그렇게 고백해요.
그러기 때문에 싸워서 얻은 결과를 보고 좋다 언짢다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내가 하나님 명령하시는 대로 능히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싸울 수 있으면 그것이 곧 이기는 것이고, 육신이야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간에, 나는 죽더라도 이 일로 이기는 거다 하는 확신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제 ‘그랬던가?’ 하실 거예요. 하지만 13장부터 16장 17장까지를 죽 읽어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새 계명이라고 하지만 새 계명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는 계명이다, 그런데 이제 새로 준다, 그러면 뭐냐? “사랑해라.” 사랑한다는 건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거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지.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게 절대의 신입니다. 그게 아니고는 안 되는데, 소위 세상에서 이겼다고 하던 것도 다 헛것인 것이 그 증거가 돼.
세상에서 의를 위해서 힘있게 싸웠다고 하는 사람도 마지막에 가면 처음과 다른 점이 많이 생기는 수 있잖아요? 말을 길게 하지 않을 겁니다만 나는 내 속에 있는 것을 증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는 마음이 연약해질수록 「요한복음」 13장 이하 17장까지를 읽어 봐. 그러면 맥이 나려고 하다가도 또 용기가 거기서 나와. 내 마음이 좁아지려고 하다가도 넓어지고, 축 맥이 빠지고 낙심이 되려고 하다가도 용기를 주고. 그건 사람이 누가 와서 주는 용기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내가 여러분한테 권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지식으로 알기야 알지 모릅니까마는, 그걸 내 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거예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느껴야 하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내서, 여러분 바쁘신 중에 있어서도 다른 생각을 마시고 가만 생각해 보세요. 마치 저 땅 밑에서 샘이 스스로 올라와서 터지고 시원한 것이 올라오는 모양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걸 여러분이 보실 거야.
그러면 자연히 그 다음엔 두렵지 않은 생각이 나. ‘우리가 이겼다.’ 예수님이 “세상에 있을 때는 너희가 걱정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모양으로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이겼다, 그런 말을 과연 내 말로 느껴 볼 수 있는 시간이 올 겁니다.
운명과 사명
오늘 말씀 드리는 중에 구체적으로 권하는 것이 그거예요. 성경을 읽어 보시고, 그 다음은 접어 놓고 적어도 몇십 분씩 조용하게 생각을 하시오. 생각을 해야 물이 깊이 배어 들어가고, 깊이 배어 들어가서야 깨끗해져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할 때에 “네가 새로 나지 않고는 하늘 나라 못 얻는다” 하셨는데 새로 난다는 게 뭡니까? 거기 아래쪽에 “영으로 나라”는 말이 있어요. “영으로 나는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고쳐 나야 된다.” 물이라는 건 뭘까? 이제 아마 그럴 거예요, 우리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이 세상에서 듣는 것, 보는 것, 내 속에서 나는 것, 그것 때문에 내가 아주 마음이 더러워져. 그래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 어디서 주워 들은 말인데 내 속에서 나갈 때에 내가 잘 여과를 시키지 못하면 나를 더럽혀요. 나가서 세상 더럽게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내 자신이 더러워져.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오줌 똥 안 섞이는 물이 없지만, 그것이 땅 속 깊이까지, 지구의 압력에 의해서 견딜 수 없어 산 생명체로 터져 나올 때까지 들어가면 자연히 그 물이 맑아져요. 나 자신도 깨끗해지고 마시는 사람도 깨끗할 수 있어. 생각도 그렇고, 또 그런 생각이 깨끗한 말로 나오지.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물이라는 건 아마 그런 걸 두고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과 문답하는 걸 보아도 물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처럼 요렇게 된 다음에는 고생하게 마련입니다. 그 본토만 해도 우리 나라보다 스물 다섯 배 이상 큰 중국이라는 큰 나라가 우리 서편에 있지, 만주가 있지, 러시아가 있지, 일본이 있지. 그러게 이 틈바구니에 든 다음에는 고생하게 마련입니다. 칼쯤 가지고 용기를 뽐내 보지만 그것이 빤한 용기입니다. 무기로 오는 용기를 가지고 이 나라를 크게 만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점은 깊이 여러분이 생각하셔야 돼.
하나님이 우릴 아시아의 틈바구니에다 갔다 놓고, 중국이란 아주 크고도 교만한 나라, 일본이란 또 아주 그런 나라, 러시아, 그런 틈에다 맹장같이 요렇게 생긴 나라를 두고 나라를 해보라니 이게 뭐냐? 그래서 내가 한번 해볼란다, 내가 한번 해볼란다 그러지만, 자기 속을 깊이 파고 거기서 나온 샘물, 가슴속에 구멍이 뻥 뚫려서 거기서 나오는 샘물을 마셨다면 그 사람에게 나라를 부탁해도 될 만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럼 왜 여기다 갖다 두고 하나님이 이런 일 하게 하나? 요새 일 보면 “아니, 미국 놈 참 밉더라”, “미국 놈 하는 일 꼴보기 싫어서 못 견디겠더라”, 내 입에서도 나간 일 있습니다만, 여러분도 그 말 많이 할 거야.
의리상 누구든지 우리 나라 환경이 이렇게 됐다면 자기네 유리하게만 생각을 말고, “하나님이 수천 년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내신 것인데, 여기도 데모크라시가 돼 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도울 의무가 있지. 툭하면 내정 간섭을 한다, 그런 나쁜 소리 하지 말고. 내정이 무슨 내정이냐, 하나님이 보내서 하라고 한 일인 다음엔 옆집이거나 백 리 저쪽에 있는 사람이거나 어렵다면 가 도와 줘야지. 네가 만일 그런 생각을 한다면야 어찌 일이 이렇게 될 수 있겠냐?” 그런 말 하고 싶은데, 아주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미국보고도 나무랄 수가 없어.
세계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아요? 왜 소련 놈이 아프가니스탄까지 기어 내려와요? ‘기어 내려온다’고 그럽니다. 그건 소련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소련이라는 그 나라 사람보고 욕하면 못써. 사람은 다 불쌍한 거야. 다 그 속에 내가 들어가 있어. 내 속에 그것들이 다 와 있어. 우리 다 형제지. 다 하나님의 모습을 가졌으니까. 그 사람 욕하진 마시오. 허나 그들을 잡아 가지고 쓰는 그 소위 민주주의, 공산주의, 또 무슨 주의, 무슨 체제, 그게 다 성경에 말하는 “공중의 권세 가진 자”예요. 그것과 우리가 싸워야 해요. 오늘날만 싸우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났다가 죽고, 우리 자손도 나와서 또 싸울 겁니다. 천대 만대를 내려가더라도 인간 역사는 싸움일 겁니다. 싸움, 싸움만이 있는 겁니다. 그런 데서 뭣을 얻었다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옳은 편에 진리편에 서서 거짓 것과 내가 싸웠나가 문제지요. 선한 편에 서서 악한 것과 싸웠나? 사랑하는 편에 있어서 미움에 대해서 싸웠나?
우리 나라에 나라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개인으로도 내 있는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한 나라인 다음엔 나라로서 사명을 느껴야 될 거예요. 도무지 이 나라의 사명이 뭐냐 하는 걸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 마디도 하는 법 없어. 언제 들어 봤어요? “우리 민족의 사명이 이렇다” 하는 말 합디까? 사명이란 무엇에 대한 사명이에요? 세계 인류에 대한 사명. 세계 모든 나라가 있으니까 우리 나라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도 세계에 대해서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한 국민이 그런 생각이 없다면 거 뭘 하겠어요?
공부를 대학까지 해서 이제 무슨 고시에 패스를 하고 월급쟁이가 돼서 돈을 얼만큼 모으고, 그런 꿈만 꿀 게 아니라, “나도 그래도 세상에서 뭘 할 것이 있다” 그런 생각이 되어야 그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개인이 그렇다면 민족도 그래. 민족, 민족 자꾸 팔아먹지만 말고, 이 민족은 뭘 하기 위해 나와 있냐? 나더러 말하라면 “인류가 지은 그 죄악의 짐을 맡아서 가지고 가라”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 고생의 역사, 고난의 역사라 그 말이야.
먹고 내버린 찌꺼기는 다 우리 잔등에 맞게 마련이야. 왜? 약한 놈이니까, 옆집은 다 잘사는 집이니까. 쓰레기는 저희는 다 싫으니까 먹을 거 다 먹은 껍데기 저 멀찍이 내버리지 않아요? 그러면 가난한 사람이 그걸 모두 뒤집어쓰게 마련인데, 가난한 사람도 “허긴 그래, 잘사는 양반들 아주 잘살게 만들어 줘야지.” 그러고 짐으로 져다가 어디 땅 속에 파묻어 주면 좋은 일 아니에요? “그럼 좋은 일 하면 무슨 보수가 있습니까?” 보수는 해 뭘 하게? 보수가 있어도 죽고 보수가 없어도 죽고, 그런 걸 말하려면 끝이 없습니다만.
그래서 우리 민족으로서 하나님 앞에 갈 때에, “세상에 가 있는 동안 우리 한 일 이겁니다” 그렇게 말할 것이 뭐 있어야 할 건데, 도무지 그런 걸 안 가르친 것이 이 나라의 현재 역사의 잘못이오. 정치한다는 사람 그 죄 못 면할 거요. 그건 정치하는 사람만이 아니야.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걸 물론 힘써 가르치고 주장해야 되지만, 더구나 나라의 정치를 누가 맡긴 것도 아닌데 제가 나서서“내가 할란다”, 내가 하되 나는 이러이러한 생각으로 할란다 말하는 게 아니라, 이것부터 쥐고 내 말로 “다 이리 오너라” 하려는 사람들이 우리한테 무슨 소리를 가르쳐요? 사명을 가르친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뭣에 써 먹잔 말이야?
그런 것이 확실히 있은 다음에야만 우리가 이겨도 이기고 져도 이기고, 절대의 승리, 보통 세상의 그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을 해주시는, 하늘 나라에서 상을 받는 승리가 정말 올 거예요. 그런 걸 말만 듣지 마시고, 속는 줄 아시고라도 가서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몇 번 읽어 보세요. 가만히……
씨알의소리 1988년 12월호 96호 1980년 8월 17일 주일 서울 봉원교회에서 하신 말씀
저작집30; 13- 271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