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하루 / 박선애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시간의 시골 역이 우리 아이들 십여 명만으로도 벌써 활기차다. 약속 시간인 일곱 시가 되려면 아직 10분이 넘게 남았는데 벌써 온 모양이다. 대합실에서 차분히 기다릴 수 없을 만큼 들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준다. 역사 앞에서 뛰고 장난치고 있다가 차가 들어가니 우르르 몰려와서 우리를 확인하자 기쁘게 인사한다. 선생님들께서 챙겨 준 간식과 물을 애들과 함께 내린다. 그 사이에 애들은 계속 오고, 태연이 아빠가 약속하신 간식을 주고 가신다. 호준이 엄마 아빠도 휠체어와 함께 호준이를 내려 주신다. 데리고 들어가니 작은 대합실이 꽉 찬다. 다섯 명씩을 책임진 이끔이들은 도착한 사람은 몇 명이고, 누구는 어디쯤 오고 있다고 모둠원들의 상황을 알려 주느라 왁자지껄하다. 기차는 기다려 주지 않으니 늦은 사람은 놓고 간다고 반복해서 겁을 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서른한 명이 모두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했다. 배웅하러 나오신 교장 선생님께서 이제부터 1학년은 등교 시간을 일곱 시로 바꿔야겠다고 놀리신다. 애들은 안 된다고 펄쩍 뛴다. 이렇게 반응해야 농담할 맛이 난다. 부담임 샘과 같이 물과 간식을 나눠 줬다. 반장과 이끔이들이 참 잘한다. 한 명도 안 잃어버리고 안전하게 놀다 오는 것이 지금의 가장 큰 바람인데, 이들 덕분에 이룰 것 같다.
여럿이 움직이려니 미리 차 타는 곳으로 갔다. 작은 역이라 장애인의 이동을 돕는 시설은 벽에 묶어 놓은 리프트밖에 없다. 보이지도 않는 직원을 찾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호준이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호준이는 작아서 계단 한 칸을 겨우 오른다. 학교에서는 엘리베이터가 먼 곳에서는 손 짚고 기어 올라가기도 해서 보고 있으면 안타깝다. 한 손은 난간을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구령까지 붙여 가며 씩씩하게 간다. 휠체어를 접어서 번쩍 들고 가는 태우가 듬직하다. 신난 아이들은 이곳에서도 뛰고 장난친다. 선로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장난치면 위험하다고 직원이 주의를 준다. 이 역에는 서지 않는 고속철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니 불안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워진다. 해가 떠오르는지 구름이 발개지며 하늘이 예쁘다. 거기로 눈길을 돌리려 해 봐도 남자애들은 툭툭 치고 장난하느라 여학생들은 서로의 화장과 옷차림을 평가하느라 관심이 없다.
차가 들어올 시간이 가까워지자 이끔이 중심으로 모둠끼리 줄을 서서 인원 확인이 쉽게 한다. 드디어 기차가 들어왔다. 질서 있게 줄을 서서 미리 정한 자리에 착착 앉는다. 애들은 생각보다 훨씬 잘한다. 기차 여행객다운-창밖 풍경도 구경하고, 그러다가 상념에도 잠기는-모습을 그렸던 내 기대와는 달리 애들은 거의 다 핸드폰만 보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남학생들은 게임하느라 바쁘다. 장난 삼아 휴대폰 걷겠다고 했더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하느냐고 받는다. 40분은 금방 지났다. 목적지인 광주 송정역에 도착하니 한 사람도 놓치지 않게 이끔이들이 야무지게 챙겨서 내린다. 일단 한고비 넘겼다.
이제 지하철을 타러 가야 한다. 처음 타 보는 사람이 열 명이나 된다. 몇 년에 한 번 경험하는 나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거기에 호준이는 길이 다르다. 휠체어를 밀며 돕겠다고 했던 아이들도 마음과는 달리 일행과 떨어지는 것이 불안한지 무리 속으로 합류해 버린다. 호준이는 내 차지가 되었다. 부담임 샘이 같이 가지 않았으면 어려울 뻔했다. 부담임 샘은 애들과 함께 계단으로, 나는 호준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 나도 일행이 안 보이면 불안하다. 지하철 타는 곳까지 가니 초등학교 3학년까지 대전에서 살다 온 금성이가 휠체어를 잡는다. 차 안에 휠체어 자리가 따로 있는 줄 몰랐는데, 금성이가 알아서 그곳으로 밀고 가서 안전띠까지 채워 고정시킨다.
광주에 사는 오빠가 미리 알려 준 대로 화정역 4번 출구로 나갔다. 이번에도 금성이, 지훈이와 함께 호준이를 데리고 가려니 우리가 늦었다. 먼저 나간 애들이 찾은 버스 정류장에는 우리가 타고 갈 26번 버스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당황했다. 쳐다보니 이곳은 화정역 정류장이다. 현대 아파트 정류장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곳의 방향을 모르겠다. 애들이 네이버 지도를 찾아서 보여 준다. 다시 보니 오빠가 보내 준 데에 약도까지 있었는데, 그것조차 흘리는 담임보다 애들이 훨씬 똑똑하다. 200여 미터쯤 걸어서 정류장에 가자마자 버스가 와서 그냥 보내고 다 왔는지 확인했다. 배고프다는 아이들이 있어 태연이 엄마가 보낸 샌드위치를 먹이고 있으니 20분이 금방 갔다. 버스에는 이미 승객이 꽤 있어서 나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 탔다. 대부분 애들은 처음 경험해 보는 만원 버스였다. 천장에 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고 40분을 서 있으려니 힘들 텐데 그것마저 재미있어한다.
드디어 패밀리랜드에 도착했다. 며칠 전부터 애들과 함께 기도한 대로 날씨는 밝고 바람 없이 따뜻하다. 자유 이용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께서 아침에 주신 과자 이름처럼 여기서는 이제 자유 시간이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모둠이나 친한 친구들과 다니며 놀이 기구를 타면 된다. 인기가 많은 곳에 가서 줄 서는 시간을 줄이려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같은 기구를 여러 번 다시 타기도 한다. 아이들은 자기 취향과 수준에 맞는 놀이 기구를 찾아 잘 놀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혹시 혼자 처지는 아이는 없는지, 안전하게 잘 놀고 있는지 가끔 돌아보면 된다.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광주에 사는 선생님이 커피를 사 들고 왔다. 나 좋다고 일을 벌여서 여러 선생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참 고마웠다.
음식 종류를 미리 선택하여 주문해 놓은지라 점심시간도 매끈하게 잘 지나갔다. 음식을 먹고 곧바로 심장 떨리는 놀이 기구를 타는 것보다는 산책이 좋을 것 같아 동물원으로 향했다. 애들은 놀이 기구에 더 마음이 있는지 동물원 구경은 건성이다. 시간을 채우고 다시 놀이 기구 쪽으로 간다. 그 사이 사람이 많아져 축제장처럼 흥성거리고 오전에는 멈춰 있던 것까지 운행하니 아이들이 더 신났다. 이럴 때 시간은 참 잘 간다. 약속한 세 시가 되었다. 지친 아이도 있지만 아쉬워서 더 놀다 가면 안 되냐고 하는 아이도 있다, 기차 시간까지는 세 시간 가까이 남았으므로 시간을 조금 더 줄까 마음이 약간 흔들렸지만 여유 있게 가는 쪽을 택했다.
나와서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안 와서 금세 불안해진다. 출발지에서 가까운지 버스는 텅 비어 있다. 피곤했던지 몇 명은 자리를 잡고 앉자 금방 잠든다. 갈수록 승객이 많아져서 깨어 있는 아이들은 양보하고 선다. 정이는 내 옆에 서더니 “선생님, 기차랑 지하철 처음 타 보고요, 광주도 처음 와 봤어요.”라고 말한다. 듣고 있으니 짠한 생각에 마음이 젖어 든다. 오후라 그런지 오는 길은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송정역에 오니 시간 여유가 별로 없다. 바로 차 타는 곳으로 내려가서 기다렸다. 이제는 해가 지느라 하늘이 붉게 물들고 선로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고 있다. 밝아 오는 것을 보고 떠나왔다가 어두워질 때에 돌아가려고 차를 기다리고 있다. 차 올 시간이 가까워지니 인원 확인이 쉽게 또 모둠별로 서서 기다리다가 한 명도 안 떨구고 다 기차에 탔다. 이제 내리기만 잘하면 되니 마음이 한결 놓인다. 기차 칸이 거의 다 우리 차지다. 기차는 열심히 달려 아침에 떠났던 우리 동네 역에 데려다주었다. 호준이 손을 잡고 맨 꼴찌로 계단을 올라왔다. 역사에 들어가 잘 따라 준 고마운 아이들에게 감사 표현과 칭찬을 넘치게 했다. 마지막 아이가 부모를 따라가는 걸 보고 나서야 하루종일 팽팽했던 긴장이 풀렸다.
선천적으로 약해서 엄마에게 언제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그러나 너무나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태연이가 집에 오더니 “오늘 참 멋진 하루였다.”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 들으니 눈물이 나왔다.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뜻밖의 학급운영비가 추가로 지원되어서 학기 초에 계획하지 않았던 일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걱정 어린 충고도 듣고, 그만둬야 하는가 생각이 들 만큼 마음 고생도 했다. 그러나 거둬들일 수 없게 원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기꺼이 했다. 호준이가 걱정인데 좋은 방법이 없겠냐고 묻는 내게 업고라도 가겠다고 하는 태우와 호준이 가방을 메고 휠체어를 밀고 다닌 금성이와 여러 친구들, 차마 부탁하지 못했는데 같이 가겠다고 나서 준 부담임 샘이 있어서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행복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참 멋진 하루였다.
첫댓글 힘들었겠지만 멋진 하루를 보내셨군요. 항상 아이들과 행복하게 보내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우와. 패밀리랜드에서 아이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네요.
고민이 많으셨겠습니다. 혹시 모를 사고때문에 쉽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소중한 경험을 했네요.
선생님 닮아 아이들도 착하군요. 신났을 아이들과 다르게 긴장하고 수고가 많았을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마음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멋진 하루입니다..
멋진 하루에 읽는 저도 박수가 처집니다.
선생님들의 우려가 너무나 잘보입니다.
그런데도 강행한 선생님은 진짜 멋진 선생님이세요.
아이들 가슴에 두고두고 아름다운 날로 기억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