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약 먹을 나이 / 봄바다
밖에서 보면 학교는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이 다인 듯 보이지만 실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관리자로서 10여 년 넘게 이런 분들과 부딪히며 살다 보니 내 모든 언행에 자기검열은 자동이고,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 삭이는 게 다반사다. 그동안 이렇게 무의식에 억눌린 채 가라앉은 감정이 스트레스로 이어진다는 걸 애써 부인했다. 나처럼 참을성 없는 인간 수양하는 셈 치며, 돈 주고 그런 길을 찾는 이도 많은데 저절로 이루어지니 이 또한 좋은 일 아닌가 위안 삼아 어려움을 넘기고 두드러진 일 없이 긴 시기를 잘 보냈다. 하지만 작년 한 해는 그동안의 인내도 아무런 효과 없는 막강한 분을 만나 쉼 없이 우울감에 시달려야 했다. 잘 넘기려 애쓰는 만큼 몸은 힘들어서 여기저기 아우성을 쳤다. 몸이 이유 없이 부어 검사를 했더니 신장의 이상보다는 혈관의 건강이 치명적이라며 이런 정도로는 지금 길을 걷다 갑자기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며 당장 약을 먹지 않으면 큰일 난다며 약을 권했다.
가져온 약을 꾸준히 먹어도 머리가 아픈 일이 잦아, 그 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려니하고 넘겼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집에 있는 혈압계로 혈압을 쟀는데 140에 85 정도의 혈압이 잴 때마다 이어져 다음날 일찍 병원에 갔다. 의사는 홀더를 채워 주고 다음 날 오라고 했다. 역시나 평균 혈압이 140에 80이었다. 의사는 중간에 무슨 원인인지 모르나 170, 180까지 치솟는 부분이 이어지는 게 그냥 두면 혈관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며 이번에는 고혈압 예방약까지 처방했다.
아버지는 뇌출혈로, 어머니는 당뇨로 돌아가셔서 그동안 이런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스트레스는 그동안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었다. 아직 약 근처에도 안 가고 건강하게 사는 친구들을 보니 그동안의 노력이 억울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약을 끊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약 먹은 지 일 주일 쯤 되는 날, 얼굴은 술 먹은 사람처럼 붉게 상기되고 한 쪽 머리는 지끈거리고 역시 같은 쪽 팔에 힘이 빠졌다. 조퇴를 하고 병원을 찾아 혹시 약의 부작용아닌지 물었다가 의사의 분노를 샀다. 겨우 일 주일 먹고 무슨 부작용이냐며 그 약을 먹고 나 같은 증상을 호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며 염려말고 약이나 꾸준하게 먹으라고 다그쳐서 더 대꾸하지 못하고 나왔다. 나와서도 그 증상이 계속 이어져 내과의로 있는 조카에게 현재 내 증상을 알렸다. 그는 별로 위중하지는 않은 듯하나, 내 나이를 고려해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응급실에 가보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냐며 얼른 가라고 했다.
입구에서 수련의인 듯한 젊은이가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머리가 아프고 팔에 힘이 빠져 왔다고 하니 혈압부터 쟀다. 187에 95가 나오자 다시 재 보더니 즉시 CT실로 보냈다. 나와서 다시 응급실에 대기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MRl를 찍고, 팔에는 혈압강하제를 넣으려고 장치를해 두었다. 조금 있으니 의사가 와서 CT에 이상이 없어, MRl까지 찍어 전문의와 살펴 보았으나 혈압이 그렇게 높아질 이유가 없다며 스트레스 받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이놈의 스트레스라니! 혈관에 전혀 이상이 없으니 혈압 강하제도 좀 지켜보자고 했다. 30분 쯤 지나 다시 재 보더니 140에 85이니 집에 가도 된다며 팔목의 장치를 제거했다.
어쩌랴.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없으니 약의 도움을 받아야지. 받아들이려 마음 먹으니 아프던 통증도 서서히 사라졌다. 모든 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실감한다. 심장에 스텐트 시술을 한 후배와 만나 약을 거부한 그 하루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눈을 부릅뜬다. 나이 육십이면 약을 밥 먹듯 할 준비를 할 나이란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동안 노력한 게 어딘데.' 스트레스와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처지에 또 저 가슴 밑에서 스멀스멀 분노가 치민다. 이크, 또 혈압 오를라.
첫댓글 그래요. 지나고 보니 스트레스가 신체를 망가뜨리는 가장 나쁜 독소라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부터라도 몸 관리 잘해야 합니다. 퇴직하고 나자 건강이 급하게 나빠지는 분을 여럿
봤습니다. 아직 충분히 회복할 시간이 있으니 체력관리에 집중하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