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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전성기를 경험하라.
역대상 1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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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목사님이 한 자매를 위해 기도해 주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자매를 위해 기도해 준 것 밖에 없는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이 자매가 사업체를 계약하기 전에 목사에게 와서 은밀히 기도부탁을 했는데, 이 목사님이 그것을 악용해서 문제의 가계를 먼저 계약해 차지했다는 소문이었던 것입니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문 때문에 이 목사님은 억울했다고 합니다. 그 자매와 함께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게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소문이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 이 목사님이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이 목사님을 신뢰했던 사람들마저도 등을 돌리자, 이 목사님은 너무나 억울해서 울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이 억울함에서 건져 주시고 해방시켜 주세요.”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육신의 귀가 아니라 마음의 음성으로 들려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외로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너를 지키고 있단다.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그런데 너는 십자가를 통과했느냐? 네 자존심을 내려놓아라.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어야 네가 살 수 있다.”
이 음성 앞에서 이 목사님은 자신의 단단한 자존심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믿음이 적고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신을 돌아보며 통곡하고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박윤희, 「안고 우는 자」, 규장, 「생명의 삶+플러스」, 두란노, 2018년 9월호, p. 119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고 마음 아파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셨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역대상 19장은 이스라엘이 암몬, 아람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은 나하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사절단을 그 아들 하눈에게 보냈습니다. 2절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가 전에 내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의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리라 하고 사절들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문상하게 하니라….”
여기에 기록된 ‘호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이 단어 가 하나님께 적용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만, 사람에게 적용이 되면 ‘친절함’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을 때, 암몬 왕 나하스가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나하스가 살아 있을 때에 자신에게 베풀었던 호의를 잊지 않고 대신 그 아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전쟁사에 보면, 다윗은 서쪽으로는 블레셋과, 동쪽으로는 모압, 북쪽으로는 아람과 싸웠지만, 다윗이 유독 암몬과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왕의 호의를 하눈은 거절했습니다. 다윗이 조문객을 보내오자, 암몬 자손의 신하들이 하눈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자, 우리 다함께 3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존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의 신하들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정탐하여 전복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는지라.”
무슨 말입니까? 암몬의 신하들은 다윗이 조문을 핑계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 땅을 염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을 들은 하눈은 다윗의 신하들을 붙잡아 그들의 수염을 깎고, 그 바지를 볼기 중간까지 잘라 돌려보냈습니다.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에게 수치를 준 것입니다.
자, 이 일이 다윗 왕의 귀에 들렸습니다. 다윗이 베푼 호의가 처참하게 짓밟히고 그의 신하들이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6절에 보면, 암몬 자손은 자기가 다윗에게 밉게 한 줄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된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윗에게 가서 빨리 사과해야 합니다. 오해가 있었노라고, 내가 너무 경솔했노라고 진정성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진 관계를 복원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과 대신 전쟁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눈은 은 천 달란트를 가지고 아람을 찾아갔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으로 대신 전쟁에서 싸워 줄 아람 용병을 구한 것입니다. 그냥 다윗에게 찾아가서 잘못했노라고 진정성 있게 사과를 하면 될 것을, 어마어마한 돈으로 용병을 사서 구지 다윗과 전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 몰고,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세계에는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반복될까요? 두 나라 간의 전쟁이 평화와 정의를 위해 벌어진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몇 권력층의 자존심 싸움에 죄 없는 수많은 생명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어야 한다면 이것처럼 불합리하고 끔찍스러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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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리디머 신학교의 목회상담학 교수인 폴 트림 박사가 지은 「경외」 (생명의 말씀사, 2016)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이 책의 부제가 “뒤틀린 삶을 바로 잡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폴 트립 교수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3년 전, 몸무게를 18킬로그램 줄여야 하는 상황을 겪으면서 일상적인 상황에서 겪는 문제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몸무게가 느는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폭식과 비만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 곧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 상태와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 물질에 대한 집착, 일중독, 폭식과 비만, 간음 등 작고 사소한 문제에서 도덕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도 여전히 빚이 많다. 나는 왜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공하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물질에서 내 삶의 안정감을 찾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특정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하면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나의 정체성을 잃고, 사람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불안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권력과 통제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의 주권자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689283
에서 인용.
자, 이러한 폴 트립 교수의 주장을 하눈과 우리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저는 하눈이 낭비 기질이 있어서 돈을 펑펑 써가며 용병을 구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눈이 은 일천 달란트로 용병을 구하는 대신 그 일천 달란트를 다윗에게 주며 겸손히 용서를 구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았을까요?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더 가치 있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덜 가치 있고, 심지어는 낭비로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눈은 아람 병거 삼만 이천 대와 용병들로부터 삶의 안정감을 찾으려 했고, 이것을 위해 은 일천 달란트를 소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그의 안에 있던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의 뿌리는 다윗을 불신한데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여 호의를 베풀었을 때, 그는 다윗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그와 화친의 관계를 맺었어야 했습니다. 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에게 모욕을 주고, 뒤늦게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눈은 겸손하게, 용기를 내어 다윗에게 사죄하고 뒤틀어진 관계를 회복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기회를 놓쳤고, 그가 이런 바보스러운 결정을 내리게 된 최초의 동기는 결국 다윗을 불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범한 이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는 사탄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폴 트립 교수는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사랑하는 영적 간음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분의 율법을 거역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분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689283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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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하눈이 아람 군사들을 용병으로 구해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요압과 용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었습니다. 자, 이스라엘과 암몬, 아람 연합군 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암몬 자손을 도우러 온 아람 용병들은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넓은 들판에다가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전쟁의 발단이 된 암몬 자손들은 어디에 진을 쳤는지 아십니까? 8절에 보면, 암몬 자손들이 성문 앞에 진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성문 앞에 진을 쳤을까요? 만약 아람 용병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면 암몬 자손들은 제일 먼저 성 안으로 도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5절에 보면,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도망하여 성문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아람 군사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어차피 이 전쟁에 1차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전쟁에 참여하는 용병들이기 때문에 구지 목숨을 걸면서까지 무리하게 전쟁에서 승리할 이유는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이스라엘과 전쟁이 시작되자 도망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먼저 다윗 왕의 명령을 받고 전쟁터에 나간 요압 장군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자 중에서 또 뽑은 최고의 정예병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군사들이었습니다. 요압은 군사를 두 대로 나뉘어 자신은 숫자가 많은 아람 군사들과 싸우고, 그의 아우 아비새는 후방에서 공격하는 암몬 자손과 싸우게 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요압은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다함께 12~13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우리라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 말은 비록 요압 장군의 말이지만, 이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이 전쟁은 서로 협력할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은 말합니다.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네가 너를 도우리라.” 이 전쟁은 서로의 약함을 돌아보고 서로 협력할 때 승리가 주어지는 전쟁입니다.
그 다음 이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13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요압은 이 전쟁이 자신의 안위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전쟁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자, 이러한 이스라엘 군사들의 모습은 언제든지 도망갈 궁리를 해 놓고 여차하면 도망치겠다는 암몬 자손들과 다릅니다. 또 대충 싸워주는 척 하고 돈만 챙기겠다는 아람 군사들과도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확실히 다른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영적인 전쟁에 임하는 영적 군사들입니다. 우리는 오합지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협력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자들입니다. 우리교회 올 한해의 표어가 “코이노니아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이 코이노니아는 수직적 의미의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와 수평적 의미의 다른 성도들과의 코이노니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서로 협력함으로 영적 싸움에 임할 것이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영광을 위하여 영적 싸움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 된 코이노이아 공동체, 서로의 연약함을 도와 협력으로 이루어 가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군사의 숫자와 전투 장비들은 우리의 대적들이 훨씬 뛰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으며,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불순종의 삶의 열매를 맺으며, 서로를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군사요,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반드시 저와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의 신앙과 정신은 그가 섬기는 다윗 왕으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다윗 왕은 그의 신하들이 암몬에 조문했다가 수염이 깎이고 볼기 중간까지 바지가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분명 다윗도 호의(好意)를 적의(敵意)로 받아들이는 암몬 왕과 신하들에게 분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무찌르며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터라, 다윗은 급히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한 수치를 감정적으로 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보다 더 큰 수치감을 느꼈을 자신의 신하들을 챙겼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행했는지 우리 다함께 5절을 찾아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가서 그 사람들이 당한 일을 말하니라 그 사람들이 심히 부끄러워하므로 다윗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왕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다윗은 자신보다 더 큰 충격에 빠져 있을 부하들을 배려했습니다. 그들의 수염이 다시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명령은 수치감에 빠진 신하들을 배려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기다리며 다윗은 먼저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힘이 있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근원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힘을 낭비하지 않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신중하게, 보다 침착하게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다윗의 모범은 그의 부하 요압에게 영향을 주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되었나요?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했던 아람 군사들은 전쟁에서 패배하여 아람 병거 칠천 대의 군사와 보병 사만 명을 잃었고, 군대 장관 소박이 죽게 됩니다. 결국 아람은 다윗과 화친을 맺고 그 후로는 아람 사람이 암몬 자손을 돕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대상 19:18~19 참조).
또 그 다음 해에, 다윗의 부하 요압은 군사들을 이끌고 암몬의 수도 랍바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다윗 왕은 암몬의 왕관을 빼앗아 머리에 쓰게 되었는데, 이때가 다윗의 정복전쟁의 정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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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들에게도 다윗과 같은 인생의 전성기가 찾아올까요? 만약 전성기가 찾아온다면 그 정점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들 교회 소그룹 리더 중에 중장비 운전을 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식비를 절약하려고 도시락을 싸 들고 새벽 4시에 출근합니다. 부인은 식당에서 일하는데, 교회 모임을 섬길 수 있는 재정 형편이 아니어서 처음 소그룹 리더라는 직분이 주어졌을 때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지체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려면 자신들의 점심 값 뿐 아니라 커피 값도 다 아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오는 지체들이 리더가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도 고마워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그것이 또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크니 세상사의 고달픔도 다 잊게 되었습니다. 모임 하는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중장비 일이 워낙 힘드니 일을 마치면 동료들과 한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도 다 끊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아이들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자가들에겐 좋은 것 못 먹이는 엄마 아빠가 교회 식구들을 정성껏 대접하는 모습을 보고 배가 아팠겠습니까? 불평불만만 했겠습니까? 아이들이 저절로 영적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게임도 끊고, 교회도 열심히 다닙니다. 온 가족이 예배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김양재, 「살피심」, 두란노, 2017, 「생명의 삶」, 두란노, 2018년 6월호, p. 151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전성기는 어쩌면 지금 여러분에게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처럼 호의를 거절당하고 수치스러운 시기를 보낼 때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하들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우리들교회 소그룹 리더로 섬기시는 집사님 부부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자신들의 재정을 아껴서 소그룹에 오는 지체들을 대접하고 섬길 때 그것이 그들에게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고 축복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전성기, 축복의 정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고달파도, 그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갈 때, 하나님은 그것이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십시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인생의 전성기를 경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