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행
강흥구
겨울하면 대게, 대게하면 영덕과 울진이 떠오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제철 대게를 즐기러 당진 영덕 간 고속도로에 올랐다. 아내와 애완견 꿍이가 함께하는 여행이다. 그래서 애완견과 함께할 수 있는 펜션을 예약했다. 수많은 터널과 교량으로 연결된 도로라 주변이 아름답고 시야가 넓게 펼쳐져 답답함 없이 달려갔다.
봄부터 가을까지 힘든 농사일로 한해를 마무리 지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을 뽑아주었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폭염을 견뎌냈고, 장기간 대지를 말렸던 가뭄도 극복했다. 그러면서 새해엔 시원한 바다가로 여행을 가자고 약속했었다. 그날만을 고대하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왔다. 오늘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출발했다.
펜션은 막내딸이 인터넷 검색하여 애견 펜션을 예약해 주었다. 아내와 나는 간단하게 가방을 준비하고 꿍이의 먹거리도 준비했다. 축하라도 해주는 듯 날씨는 쾌청했다. 미세먼지 농도도 보통으로 예보되었다. 모든 출발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데 마음이 천정에 붙어 잠이 오질 않는다.
드디어 출발이다. 옷가방과 간단하게 준비한 음식을 싣고 셋이서 출발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동쪽을 향해 달려간다. 콧노래를 부르며 달리니 지나치는 산과 들이 함께 춤추며 노래하고 어울렸다. 텅 빈 들판을 지나칠 때 지난여름이 떠올랐다. 농부들을 애타게 했던 들판이다.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공룡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원형볏짚들만이 바둑알처럼 열 지어 놓여있다.
한참을 달려 영덕 오보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고랑이 진 푸른 바다에 파도만 일렁일 뿐 아무도 없다. 바람에 출렁이는 보리밭처럼 파란 물결이 다가왔다. 텅 빈 바닷가엔 우리 셋만이 발자국을 찍고 있을 뿐이다. 바다는 지나온 들판과 같은데 색깔만 파랬다. 파란 바다 들판은 마음에 편안함을 안겨 주었다. 해수욕장 한쪽 방파제에는 파도가 몰려와 부딪치며 하얀 거품을 쏟아 놓는다. 바다 밑에 사는 게들이 뱉어놓은 거품이 하얗게 밀려온 듯싶다.
바다냄새는 비릿하다. 들판의 구수한 내음과는 다르다. 하지만 역겹지 않고 입맛을 돋운다. 일 년 내내 맡았던 들판의 냄새보다 잠깐이지만 훅 풍겨오는 바다냄새는 왠지 싫지 않고 정겹게 폐 속 깊은 곳까지 스르르 밀려든다.
모래밭에 찍힌 발자국은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심술장이 파도가 지워보려 안간힘을 쏟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곧바로 포기하고 물러선다. 도망치는 파도를 잡으려고 꿍이가 바다로 뛰어 들어간다. 발자국을 지우려고 몰려오는 파도를 방어하기 위해서인가보다. 짠물을 먹고 몸이 흠뻑 젖자 당황하여 물러서며 젖은 몸을 털어낸다. 추위도 잊은 채 이동하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뛰며 그림을 그렸다.
풍력 발전단지로 올라갔다. 세찬 바람이 반겨준다. 발전기의 기계음과 바람소리가 합창을 한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그들의 노랫소리를 빨아들이며 경청하고 있다. 바람에 밀려 산 아래로 내려오니 해맞이 공원이 반겨준다. 연말연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주변 시설물들이 망가지고 지쳐 어깨가 축 쳐져있다. 인간 병에 걸렸나 보다. 하루속히 치유되어 또 다른 여행객을 맞이해야 할 터인데 걱정이 앞선다.
길 아래쪽 계단에 대게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블루로드길 시작 지점인 것 같다. 계속해서 관광버스가 도착하고 답답했던 버스에서 내린 여행객들은 푸른 바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버스 가득 싣고 온 가슴속 울분을 뱉어놓는 듯하다. 참고 참으며 삼켜왔던 원한들을 모두 바다에 던진다. 바다는 대꾸 없이 다 받아 들인다. 그 원한들이 서려 바다가 파랗게 물들었나 보다.
울진 바닷가에 자리한 펜션은 조용했다. 여행객들의 아우성에서 벗어나 잠시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쉬면서 저녁에 아내와 즐길 먹거리를 검색했다. 역시 게의 고장 영덕에 왔으니 박달대게와 회를 사다 먹기로 했다. 꿍이도 좋다는 듯 짖어댄다.
짐을 내려놓고 항구로 나갔다. 대게거리에서 박달대게를 구입하고 회 센터에 가서 회도 사서 포장을 했다. 차에 싣고 돌아오는데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걸음을 재촉했다. 주거니 받거니 달콤한 영덕의 밤을 즐겼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사방이 온통 파랬다. 밤이 스스로 물러나고 해맞이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어디까지 하늘이고 어디부터 바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바다가 수줍게 붉어지자 선명하게 드러났다. 잠시 후 하늘과 바다가 뒤바뀐 듯 빨간 불길이 뻗어 나왔다. 그 길을 한없이 걷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 너머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궁금했다.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발걸음에 바다에 묻혔던 소망과 원성들이 들려온다. 다가왔다 밀려나는 파도에 나의 작은 소망도 실려 보낸다.
크고 작은 파도들이 가족처럼 보인다. 바위에 부딪치며 철석일 때마다 여행객들이 놓고 간 새해 소망들이 뒤섞여 알 수 없는 신음소리로 들린다. 그 소리를 바위가 받아주고 모래 속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다시 조용한가 보다. 넓은 바다의 마음으로 포용하고 용서하고 받아준다. 자갈과 모래가 굴러가며 내는 사그락 소리에서 조금씩 들리는 것 같을 무렵에 우리는 다시 출발지점에 와 있었다.
준비해간 간편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펜션을 나왔다.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바다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계속 붙잡았다. 보내기 싫은가 보다. 그러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포기한 듯 우리를 놓아주었다. 서운함을 느끼며 서로 멀어져 갔다.
바다를 실컷 즐기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몸과 마음이 상쾌하다. 영덕으로 갈 때 보았던 들판이 돌아오면서 바라보니 파란 바다로 보였다. 바둑알로 보였던 원형볏짚은 파도가 물고와 뱉어놓은 거품처럼 보인다. 그 너머에 가족들이 아련히 나타났다 사라진다.
잠시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바다는 많은 사람들의 새해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하늘과 손을 맞잡고 쉼 없이 출렁인다. 그런 바다의 모습에서 인자하고 온화한 엄마의 품속을 느끼고 돌아왔다.
첫댓글 파도와 함께 한 겨울여행 좋네요. 새해소망 잘 이루고 오셨겠어요. 겨울여행 잘 읽었습니다.
와~~제가 옆에 살짝 묻어 함께 다녀온 듯 합니다
마음이 천정에 붙었다는 표현에 빵 터졌습니다~ㅎ 멋지게 살아가시니 이리 달근한 수필도 나오네요^^
여행은 계절이 없으나 겨울여행도 운치가 있지요.
어디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가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두 분이 함께 하셨으니 금년 운은 만사형통입니다.
힐링의 신년 여행 잘하셨네요.
꿍이까지 세 식구 오붓하게 바닷바람으로 거풍을 ㅎㅎㅎ
가족의 정을 느끼게 하는 따스한 작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