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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4 / 임마누엘의 참뜻 (마1:23)-성탄 주일
어떤 분이 바쁜 하루를 보낸 후 퇴근 무렵에 우연히 달력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이 자신들의 결혼기념일이었던 겁니다.
이제라도 생각난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아내에게 뭘 선물할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아내의 시계가 생각이 났습니다. 결혼 때 사준 시계가 낡아서 시간이 잘 안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늦었지만 서둘러 백화점에 들러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그중 예쁘고 고급스러운 시계를 하나 사서 들고 기분 좋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반갑게 맞아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내는 화가 나서 내다보지도 않습니다. 오늘 같은 날 전화 한 통도 해 주지 않고 늦게 들어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알아서 먹으라고 차려 놓았는지 식탁 위에 싸늘하게 식어 버린 국과 반찬 몇 가지만이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는 것을 보며 남편은 혼잣말로 ‘오늘 아내는 전혀 즐거울 준비가 안 돼 있군.’ 하며 선물로 사 온 시계를 몰래 책상 서랍에 넣어 버렸다고 합니다.
오늘은 성탄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가장 많이 듣는 인사가 아마도 ‘메리 크리스마스’ 일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라고 인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올 2023년 성탄절에 즐거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지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성탄절이 즐거운 사람은 왜 즐거운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왜 모두가 즐거운 성탄절에 즐겁지 못하다고 하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첫째로 사람들이 어렸을 때는 성탄절이 되면 가족과 함께 외식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즐거워했습니다. 둘째로 나중에야 그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성탄절엔 산타클로스가 굴뚝으로 들어와서 선물을 주고 갔기 때문에 즐거웠습니다. 세 번째로 성탄절이 노는 날인 데다가 거리엔 흥겨운 캐럴이 울려 퍼지고 사람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어, 그냥 즐거워야 하는 걸로만 압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남들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의 성탄절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즐겁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신나고 기쁜 성탄절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조건이 만족 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충족되면 그냥저냥 넘어갈 수 있는 성탄절이지만, 그런 것들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순간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는 우울하고 심드렁한 크리스마스가 되고 말 뿐이게 됩니다.
어떤가요? 올해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즐겁다’의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흔히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할 때, 영어로 ‘메리’란 말은 ‘즐거운’ 이란 뜻입니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이 메리 크리스마스라 할 때면 무의식중에 하나같이 메리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주종 관계를 잘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에서의 핵심은 메리가 아니라,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때문에 ‘즐거운’이 ‘크리스마스’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어야 그게 진정한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여러분의 크리스마스에는 ‘즐거운’이 조건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수입이 줄었거나 졸지에 실직되신 분은 선물 하나 못 사주고 외식 한번 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아이들에게 실망만 안겨줄 크리스마스가 괴롭기만 할 것이고, 어제처럼 오늘도 쌀독의 쌀알을 세고 있어야 하는 어머니에게서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고달프고 걱정 많은 날 중 하나일 뿐일 겁니다.
그렇다고 성탄절이 즐거워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성탄절이 우울해야 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말 그대로 즐거운 성탄절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탄절에 메리가 아닌 크리스마스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꼭 기억해 두세요. 즐겁기 위해 있는 날이 성탄절이 아닙니다. 성탄절이 즐거운 건 성탄절 즉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가 뭐길래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는 걸까요?
사실 ‘크리스마스’는 교회 용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크리스트’와 예배한다는 뜻의 ‘마스’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예배하는 날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을 축하하는 날이기에 크리스마스 혹은 성탄절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산타가 끼어들 자리가 없으며, 루돌프가 등장할 이유도 없습니다. 달력에 빨간 표시가 됐다고 단순히 놀고 즐기는 ‘홀리데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분에게는 올해의 성탄절이 예수님 때문에 즐거운 날이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굳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죽음 이후의 천국이야 지옥이냐의 문제로만 인식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에게 가져오신 구원은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받게 되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를 보면 이스라엘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연줄과 빽이 앞서고, 경제적으로는 돈이 앞서고, 사회적으로는 처세술을 앞세우는 그런 사람들이 잘사는 그런 시대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마치 어둠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으로써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한번 실패한 자는 재기할 길이 없었고, 한번 가난하면 자식 대까지로 가난이 물려져야 했으며, 한번 패배하면 만회할 길이 없던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 예수님은 재기와 가능성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어느 분의 간증을 보니 함박눈이 내리는 추운 성탄절 날. 남편을 따라 성탄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내는 계속 의심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그러는 중에 집에 도착했는데 쌓인 눈 때문에 먹이를 얻지 못한 새들이 문 앞에서 비실대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남편이 얼른 먹이를 가져와 새들에게 던져 주었으나 놀란 새들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남편이 새들을 향해 ‘너희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이걸 먹지 않으면 너희는 굶어서 얼어 죽는다고.’라며 외쳤으나 사람 소리에 새들은 더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남편이 혼잣말로 ‘나의 이 맘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이라고 하는 순간 아내의 뇌리에 번쩍하고 뭔가가 스쳐 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베풀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 품을 떠났던 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그리고는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가 기도했다고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이런 탄생과 구원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 탄생 당시 천사들이 선포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히브리어에서 임마누엘이라고 할 때의 ‘임’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아누’는 ‘우리’란 뜻이며. ‘엘’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린 하나님이 우리와는 상관없이 저 멀리, 혹은 저 높은 곳에만 계시는 종교적인 신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성탄절이 우리에게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나와 함께 계셔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찬찬히 새겨들어 보세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어른 아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른이 됐으면서도 어린아이 시절에 있었던 나쁜 기억에 사로잡혀 어른이 된 후에도 어른답게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는 증후군을 말합니다.
이때 어른 아이들이 가지는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내가 필요로 할 때 부모는 내게 없었다.’는 거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 부모가 함께 있어 주지 못했던 아이들이 받는 상처는 커서도 계속 상처로 남더라는 겁니다.
‘함께 한다’라는 것이 사람에게 이처럼 중요합니다.
육신의 부모를 예로 들지라도, 부모는 어린 자식이 밤새 고열로 신음하며 아파할 때면 부모의 마음은 그 아이 곁에 함께 있어 내가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하는 것일 겁니다.
또한 자녀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능이란 큰 시험을 칠 때 부모는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자식을 따라나서서는 교문에 막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얼어붙은 철로 된 교문을 붙잡고라도 자녀와 함께 하려고 합니다.
우릴 향한 하나님의 임마누엘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단지 동일한 시간이나 동일 장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함께 한다’는 심정은 ‘대신 한다.’라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을 재해석하자면 단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신다.’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중에 실패한 성도, 가난한 성도, 병든 성도, 슬픈 성도, 힘들어하며 피곤해하는 성도나 괴로워 몸부림치는 성도들을 보시며 ‘내가 함께 해줘야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내가 대신 해줘야지.’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무엇이든 십자가로 다 해결하시는 그런 분으로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점에서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즐거운 날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릴 찾아오셨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의외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말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의 믿음엔 어떤 변화가 있으신가요?
여기서 우린 말을 조금 바꿔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고 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왜 찾아오시는 걸까요?
일전에 TV를 보니까 한 실직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생활이 어려워지다 보니 부인이 가출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6살, 4살 바기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 애들을 데리고는 어떤 돈벌이든 직장 일이든 할 수가 없어 고심 끝에 얘들을 보육원에 맡깁니다.
그날 밤 생전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둘만 남은 아이들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겠습니까?
4살 바기 아이는 아빠와 떨어진 게 싫다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투정을 부리는데, 그나마 형이라고 6살짜리는 동생에게 “아빠가 데리러 올 거야, 아빠가 곧 우릴 데려가실 거야”라고 하며 동생 달래기에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이 아빠는 방이 딸린 직장을 얻게 되어 일주일 만에 아이들을 데리러 보육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때의 장면이 잊혀지지가 않는데, 기쁨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형이 동생에게 그러더라고요 “거봐 데리러 오신댔잖아!!!”
그렇습니다. 신앙의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나를 데리러 오심’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예화에서 아버지와 아이들이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께 할 수 있었기에 아이들만으론 안 되고 못 하는 것들을 아버지가 대신해 줌으로써 아이들은 행복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이겁니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성탄절이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위해 나를 찾아오셨고 이후로 쭉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 날이 성탄절인 것입니다.
이렇듯 성탄절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날이기에 우린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서일지라도 성탄절이면 당연히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의 성탄절은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이 나를 데리러 오신다는 믿음과 하나님이 내게도 찾아와 나와 함께 하시며 인생살이에서 나를 대신하여 역사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에 까짓 카드 한 장 못 받으면 어떻습니까?
크리스마스에 선물 하나 못 받으면 어떻습니까?
나를 데리러 오신 예수님만 만나면 즐거운 성탄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탄절의 예수님이 내게는 임마누엘이시라고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럴 수만 있으면 화려한 장식이나 트리가 아니라 평소와 다름없는 형광등 불빛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성탄절이 될 수 있습니다. 호텔 뷔페나 호화스러운 외식이 아닌 조촐한 식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아닌 단란한 우리 식구만으로도 훌륭한 성탄절 축제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올해에는 여러분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기 위하여 ‘메리’보다는 ‘크리스마스’의 은총을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크리스마스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진정한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올해도 성탄절이라 해서 교회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이런저런 행사와 이벤트들로 떠들썩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더라도 우리만이라도 성탄절 이브인 오늘 밤엔 잠깐이라도 조용한 시간을 내서 마태복음 2장의 성탄절 이야기를 읽으며, 누가복음 1장에서 3장의 예수님 탄생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계시는 그래서 예수님과 나만의 오붓한 성탄절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탄절의 예수님은 여러분을 평강과 번영과 기쁨과 건강과 행복과 축복의 자리로 데려가셔서 거기서 부족함이 없이 각종 인생의 잔이 넘치는 복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는 이런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 성탄절이 여러분 모두에게 진정한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