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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출처
| ~에 앞서테굴렌 | 쿠빌라이 칸 의 왕비 (1234–1281) | 후임자 :남부이 |
| ~에 앞서쿠투그타이 카툰 | 몽골의 카툰 (1260년~1281년) | |
| ~에 앞서송나라의 권황후 | 원나라 황후 (1271년~12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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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골의 무력과 티벳의 불경은 어떻게 한몸이 되었나?
쿠빌라이 칸과 티벳 샤카파의 고승 파스파의 인연은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어,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제사(帝師) 제도'의 시초가 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몽골 제국이 티베트를 통치하고, 원나라라는 거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 역사적 첫 만남 (1253년)
쿠빌라이가 아직 칸의 자리에 오르기 전, 티베트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캬파의 수장인 사캬 판디타를 초청하였다.
하지만 사캬 판디타는 고령으로 사망했고, 대신 그의 조카였던 19세의 젊은 파스파가 쿠빌라이를 만나게 된다.
파스파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해박한 불교 지식과 논리로 쿠빌라이와 그의 부인 차부이 왕비를 감동시켰다.
쿠빌라이는 파스파를 통해 티베트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했고, 파스파는 몽골의 무력을 빌려 티베트 내 불교종파 간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2. 제사(帝師)와 십지법왕(什地法王)
쿠빌라이가 황제로 즉위한 후, 그는 파스파를 국사(國師)로 임명했고, 1270년에는 황제의 스승인 제사(帝師)로 격상시켰다.
쿠빌라이는 파스파로부터 '헤바즈라(Hevajra)' 관정(기독교의 세례와 유사한 의식)을 세 번이나 받았다. 이를 통해 쿠빌라이는 단순한 정복자를 넘어 불교적 성군인 전륜성왕(Chakravartin)의 권위를 얻게 된다.
그 대가로 쿠빌라이는 파스파에게 티베트 전역의 종교 및 행정 관리권을 부여했다.
3. 파스파 문자(八思巴文字)의 창제
쿠빌라이는 대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몽골어뿐만 아니라 한어, 티베트어 등을 모두 표기할 수 있는 공용 문자를 원했다.
파스파는 1269년 티베트 문자를 모델로 하여 사각형 모양의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바쳤다.
비록 실용성 문제로 널리 쓰이지는 못했지만, 이 문자는 원나라의 공식 문서와 화폐에 사용되었으며 훗날 한글 창제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송광사에도 원감국사 충지가 쿠빌라이 를 만나고 제사가 발급한 파스파 문자가 전해진다
쿠빌라이칸과 파스파 두 사람의 관계는 티베트 전통의 '욘네(Yon-mchod)' 관계로 정의된다.
욘(Yon): 세속적 보호자이자 시주자인 쿠빌라이.
네(mchod): 영적인 스승이자 복전(福田)인 파스파.
쿠빌라이와 파스파의 인연은 몽골의 칼과 티베트의 경전이 만난 사건이었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통치 철학을 불교에서 찾았고, 파스파는 몽골의 비호 아래 티베트 불교를 동아시아 전역에 전파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쿠빌라이 칸의 정비인 차부이(察必, Chabi) 왕비는 원나라 초기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가 제국의 국교 수준으로 격상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원자였다.
그녀의 후원은 단순한 신앙을 넘어 정치적, 문화적 방면에서 매우 전략적이었다.
차부이 왕비가 불교를 후원한 구체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파스파('Phags-pa)와의 가교 역할
차부이 왕비는 쿠빌라이 칸보다 먼저 파스파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녀는 파스파로부터 불교의 비밀 전수 의식인 '헤바즈라(Hevajra) 관정'을 가장 먼저 받았고, 이후 남편인 쿠빌라이 칸에게도 이 의식을 받도록 권유했다. 이는 쿠빌라이가 티베트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황제와 스승(파스파) 사이의 서열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공적인 자리에서는 황제가 상석에 앉되, 법을 배우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스승이 상석에 앉는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여 제사(帝師) 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2. 경제적·물질적 후원
왕비로서 가진 막대한 영향력과 재산을 불교 불사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대도(베이징)를 비롯한 제국 전역에 사찰을 짓는 일을 지원했으며, 승려들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토지와 노비를 기부하였다.
화려한 불화(탱화)와 불상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보석과 옷감을 보급했다. 그녀는 검소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불교 행사나 공양물을 준비할 때는 매우 화려하고 정스럽게 준비하도록 했다.
3. 승단(僧團)의 보호와 권익 증진
몽골 제국의 통치 아래서 불교가 타 종교(도교 등)와의 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정치적 방패 역할을 했다.
당시 도교와 불교 사이의 치열한 논쟁(불도논쟁)이 벌어졌을 때, 불교 측이 승리할 수 있도록 심리적·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 포로로 잡혀온 남송의 황족이나 유학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이 불교적 가르침 안에서 예우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4. 생활 속의 불교 문화 확산
그녀는 일상생활에서도 불교적 가치를 실천하며 몽골 귀족 사회에 불교 문화를 전파했다.
그녀가 고안한 '이치마(앞은 짧고 뒤는 긴 기마용 옷)' 등 실용적인 복식 문화와 함께, 왕실 여성들 사이에 불교식 공양과 기도 문화가 자리 잡게 했다.
차부이왕비는 쿠빌라이의 지혜로운 조언자이자 티베트 불교의 실질적인 수호자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파스파 문자가 만들어지고, 원나라가 불교적 이상 국가를 표방하는 '전륜성왕'의 논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황실에서 불교고승들과. 도교 도사들간에 불.도대결이 펼쳐지다.
원나라의 역사를 바꾼 1258년 '불도대결'의 긴박한 순간을 소개한다.
원황실에서 이루어진 불도대결은 종교간 토론을 넘어, 제국의 정신적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거대한 대결의 장이 되었다.
쿠빌라이 칸과 차부이 왕비가 황금빛 옥좌에 앉아 양측의 법력 대결을 엄격하고도 지혜로운 눈빛으로 판정하고 있다.
왼쪽의 불교 진영 (파스파 스승)젊은 파스파가 중심에 서서 티베트 밀교의 신비로운 법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주변으로는 화려한 광배와 함께 만다라와 불교적 상징물들이 장엄하게 떠오르며 승리를 암시한다.
오른쪽의 도교 진영은 전진교의 도사들이 자신들의 경전과 도교적 술법을 사용하며 맞서고 있으나, 파스파의 압도적인 논리와 영험함에 점차 밀려나는 긴장감이 표현되어 있다.
원나라의 상도(Shangdu) 궁전을 배경으로, 몽골의 장군들과 고려에서 온 사절단 등이 이 세기의 대결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1258년 불도대결(佛道對決)의 장면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본다.
이 대결은 단순한 종교적 토론을 넘어, 제국의 운명을 가른 '영적 전쟁'에 가까웠다.
1. 중앙의 심판자, 쿠빌라이 칸과 차부이 왕비
화면 상단 중앙, 높은 옥좌에 쿠빌라이 칸이 위엄 있게 앉아 있습니다. 그 곁에는 지혜로운 차부이 왕비가 앉아 파스파의 논리를 경청하며 미소 짓고 있다. 두 사람 주위로는 원나라 특유의 화려한 금색 구름이 감돌고 있다.
2. 좌측: 젊은 파스파의 압도적인 기세
왼쪽에는 당시 23세였던 파스파 스승이 티베트 승복을 입고 서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불법의 지혜를 상징하는 법륜(Dharma Wheel)이 빛나고 있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금색 범자(산스크리트어)가 되어 도교 측을 압박합니다. 그의 등 뒤로는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의 형상이 은은하게 떠오릅니다.
3. 우측: 당황하는 도교 도사들
오른쪽에는 전진교의 도사들이 도교 경전인 『화호경』을 들고 맞서고 있으나, 파스파의 논리적인 공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도교의 상징인 태극 문양이 파스파의 법력에 의해 점차 가려지는 모습으로 패배의 전조를 묘사한다.
4. 하단: 긴장한 관중들
화면 하단에는 몽골의 기마 장군들과 고려에서 온 사절단, 그리고 서역의 학자들이 이 세기의 대결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바닥은 고려 불화 특유의 섬세한 꽃무늬와 원나라의 기하학적 문양이 혼합된 화려한 카펫이 깔려 있다.
이 대결에서 파스파가 승리하자, 쿠빌라이 칸은 즉석에서 도교 도사 17명을 승려로 개종시키고, 도교 사원들을 사찰로 바꾸라는 칙령을 내렸다.
사진은 대원제국의 황실에서 쿠빌라이 칸과 차부이 황비가 지커보는 가운데 佛.道대결이 열린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