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과 정수
제19차 정기 답사(안)
원주/여주의 겨울폐사지를
찾아서...
(거돈사지-법천사지-목아박물관-고달사지)
1. 답 사 일
: 2004년 2월 1일 (일요일 당일)
2. 답사
장소 : 원주 거돈사지 -
법천사지 - 여주 목아박물관 - 고달사지
3. 여행
일정 :
2004년
2월 1일 (일요일 당일)
07:30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공영주차장 (3호선 3번출구)
09:00 남한강 산책로
09:30 거돈사지
11:00 법천사지
12:30 걸구쟁이 식당 사찰정식
13:30 목아박물관
15:00 고달사지
17:00 해산
20:00 서울 도착 예정
* 긴급 전화번호
이종원 016-219-6001
토구 019-207-2286
스파이크 011-9941-9098
|
4. 이번
답사여행의 특징
가.
폐사지는 겨울에 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황량한
가운데 생명력을 느낄 수 있거든요. 거돈사지에서
한적하게 거닐어보세요.
나. 예전 수운창인 흥원창에도 들러봅니다.
이곳에서 본 남한강의 경치가 일품이랍니다.
다. 지난번 경복궁 답사 때 법천사지 부도를
보셨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부도였지요.
그 현장을 직접 찾아갑니다. 우리나라 3대
부도중의 하나인 고달사지 부도도 함께 봅니다.
라. 이번에도 맛집이 빠질 수 없지요. 목아박물관
내에 있는 걸구쟁이 식당을 방문합니다.
주인아줌마 취미가 산에 가서 산채를 캐는 것이
취미일 정도로 산채에 일가견이 있답니다.
오신채를 쓰지 않고 담백한 사찰정식 맛을 봅니다.
(1만5천원) 생전 보지 못한 산채가 상에
가득하답니다.
느낌이 가득한 답사를
위해 노력 하겠습니다.
카페
'모놀과 정수' (http://cafe.daum.net/monol4)
대장 이종원 (016-219-6001
ljhkhs44@hanmail.net)
참고) 미리 보는 답사
사진... 누르세요.
1)
겨울엔 폐사지를 거닐어보라 (원주 거돈사지-법천사지)
2)
걸구쟁이 식당
3)
목아박물관
4)
우리나라 최대의 부도 - 여주 고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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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지:
남한강 산책로
시 간 : 09:00
위치: 영동고속도로 - 문막IC - 42번 국도 - 문막교
앞에서 좌회전 - 계속 직진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샛길
이용(49번 지방도로) - 강이 나오는 첫머리가
흥원창이고 2분 정도 더 가면 남한강 산책로라는
돌표석이 있음. 그앞에 주차장에서 만날 겁니다.
부론이라고 쓰여진 팻말을 찾아오시면 됩니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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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에서 꾸는 꿈 -
남한강변의 옛 절터 (원주, 여주)
지역
개관 : 원주
전통지리 개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백두대간이
우리나라의 동쪽으로 바짝 치우쳐 있기 때문에
강원도는 지대가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지고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원주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도시다.
원주와 서울을 오가는 방법은 지금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되지만, 전근대
시대에는 한강의 뱃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답사할
남한강변의 폐사지가 있는 <충주와 원주>는
강을 따라서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기도 했고
행정구역이 통합된 적도 있었다.
원주는 치악산(1,228m)과 백운산(1,097m)에서 흘러내린
영창천, 단계천, 홍양천 같은 작은 개울이 한데
모여 원주 시가지를 가로 질러서 흐르는 원주천 곧
봉천을 이룬다. 서울에 신림동과 봉천동이 있듯이
원주에도 신림과 봉천이라는 지명이 있다. 봉천은
예전에는 동천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던 내인데
원주시 호저면에서 좀 더 큰 물줄기인 섬강과 만나
마침내는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1930년대만 해도 이
물줄기를 따라서 서울의 마포나루에서 새우젓,
소금 같은 해산물을 실어오고, 강원도 지방에서
나는 재목인 땔나무, 밭곡식, 삼베 따위를 사러
가던 장삿배가 드나들었다. 서울의 삼개 곧 마포(麻浦)는
그 이름이 강원도에서 싣고 간 ‘삼베’를 많이
부리던 ‘개’여서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다.
원주는 원삼국시대에 마한의 가장 동쪽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마한의 영토를 통합했을
때는 백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후
백제, 고구려, 신라가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접경지대가 되었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했을 때 평원군(平原郡)을
설치하였고, 신라가 차지했을 때에는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남북국시대에는 남국인 신라가
전국의 중요한 지역 5군데에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라 할 ‘소경’을 둘 적에 그 하나로
북원경을 두었던 곳이다.
후기신라 말기에는 고려 건국의 씨앗이 된 이른바 '양길의
난'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진성여왕이 제가 아끼던
벼슬아치인 위홍(향가집 ‘삼대목’을 엮은
사람이다)이나 잘생긴 소년들을 안방에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일삼으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아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다른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지방에서도 관리들의 수탈에 지친
농민들이 늘어갔다. 양길은 그러한 농민들을
모아서 군대를 조직하고 원주를 중심으로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의 고을들을 차지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그 뒤에 궁예가 양길을 꺾고 철원에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그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세웠다. 왕건을 후삼국을 통일한
후 이곳을 북원이라는 지명대신 원주라고 고쳐
불렀다.(고려 태조 23년, 서기 940년)
고려 성종 14년(995), 전국의 행정구역을 10도 12목으로
개편했을 때 원주지방은 충원도(忠原道, 충주와
원주를 중심으로 한 현재의 충북지역)에
소속되었고 주지사가 배치되어 관할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서 충원도는
중주목(中州牧) 소속이 되었다. 그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5도 양계로 나누었을 때, 원주는 교주도(交州道)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의 교주도는 대체로 오늘날
강원도 중에서 관동지방(당시 東界)을 제외한
영서지방이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이곳은 이
나라가 겪은 전란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고려 고종 때인 1217년에는 쳐들어온 거란의 군대를
맞아서 이곳 사람들은 9차례나 밀고 밀리며
싸웠지만 마침내는 그들에게 지고 말았다. 1291년
원나라의 합단적(哈丹賊)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항공진사 원충갑을 포함한 이곳 주민들이 힘껏
싸워 물리쳤고, 1361년에는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에는 싸움에 패해 원주지역은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또 임진년부터 시작된 조일 간의 7년 전쟁 당시엔
원주목사 김제갑과 주민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 원주역 앞에는 김제갑을 기리는 충혼탑이 서
있다.)
그후 고종32년(1895)에 근처 여섯 지방에 두었던
군대인 연대의 본부가 이곳에 있었고, 한국전쟁
시기 휴전에 들어설 때부터 상가가 형성되어
지금은 우물시장이 된 봉산2동이 구한말 군인들이
훈련 받던 곳이라고 한다. 이 자리에 사열대라고 할
수 있는 열무당이 있었는데 봄과 가을에 열무당
앞의 너른 들판에서 원주를 중심으로 횡성, 영월,
평창, 삼척, 춘천 같은 곳에 흩어져 있던 군인들이
모여서 열병식을 하였다고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원주시는 규모가 큰
군부대가 자리잡은 곳이 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치열한 싸움터가 되어서 시가지가 거의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휴전 뒤 1953년 말에
인제군에 설치되었던 제1군 사령부가 이곳으로
옮겨오고 곳곳에 군사시설이 세워지자 군인들을
따라온 그들의 식구와 그들을 상대로 해서 장사를
하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갑작스럽게 불어나 원주는
군사도시의 성격을 띄기 시작하였다.
해방직후에 2만 명쯤이던 인구가 2000년에 26만 5800여명으로
불어났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전쟁 뒤에 다른
지방에서 옮겨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피난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사람도 적지 않은데
1954년 개운동, 명륜동 등 9군데에 세웠던
피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피난민만 하더라도 35,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원주는 전근대시대에는 지아비를 도끼로 찍어 죽인
여자가 났다거나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났다거나
임금의 태를 묻었다거나 권세를 쥔 관리의 외가가
있다거나 또는 주민들이 외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거나 해서 이름이 자주 바뀌었다. 또한, 현,
목, 도호부, 관찰부 등으로 행정단위가 승격과
강등을 거듭하다가 1895년 23부제가 실시될 때
감영이 폐지되고 원주군이 되었다. 1896년 강원도가
부활되면서 춘천에 관찰사를 두고 원주는 강원도
소속의 군이 되었다.
1910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원주면이 되었고, 1938년
원주읍으로 승격하였다. 1955년 원주시로 승격되고,
그 외의 지역은 원주군이 되었다. 1995년 원주군과
원주시가 합쳐 도농복합형 통합시가 되었다.
원주시는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천주교
원주대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오적> 등의
민중시와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김지하 시인,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족벌재단을
상대로 교수와 학생 교직원 동문이 학원민주화를
승리로 이끈 상지대학교, 상지대학교의 진보적
교수인 한완상, 김정란, 정대화 등의 인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 깊은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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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원창지(興原倉址)
흥원창은
조세미(租稅米)의 수송을 위하여 수로 연변에
설치하였던 창고로 강상수송을 맡았던 수운창이다.
조창 제도가 완비된 것은 고려 성종 11년(992)경
이었다. 세금으로 바치던 쌀의 수송은 국가재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그 운영에
관하여 매우 철저하였다.
정종 때에는 12창의 수송선 수를 정하였는데, 이
당시 흥원창에는 2백 섬씩을 운송하는 배를 21척
배치하였다고 전한다. 아울러 이러한 조창에는
횡령 등 각종 부정한 행위를 막기 위하여 조창을
감독하는 관리 즉, 창감(倉監)이 파견되어 있었다.
이때 흥원창에는 원주를 비롯하여 평창·영월·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군의
세미(稅米)가 운송, 보관되었는데, 이들 지역에서
흥원창까지는 주로 육로로 운송되었고 흥원창에서
뱃길로 한양으로 운반되었다. 이후 고려말에는
몽고 등의 침략으로 인해 조창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다시
정비가 이루어졌지만 이전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원주의 주요 관창(官倉)은 읍내에 있는
사창(司倉)과 별창(別倉)을 제외하고 북창(北倉)[안창
(安倉)], 서창(西倉)[흥원(興原)], 동창(東倉)[주천(酒泉)]등
3개의 창고가 있었다. 이 중에 서창(西倉)의 경우
흥원(興原)에 있었기 때문에 흔히 흥원창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12조창(租倉)의
하나로 문막쪽으로 흘러나오는 섬강이 남한강
주류와 합류되는 곳으로 은담포라고도 하였다.
조창이 주로 이용되었을 때에는 문막이 중간 포구(浦口)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문막이 원주보다도 경제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흥원창지는 지역적으로 섬강과
충주 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이 만나 여주쪽으로
흘러가는 합류(合流) 지점이다. 이에 이곳을
뱃터라고도 하였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직전까지
뱃터가 남아있어 장터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는 모두 사라졌다.
남한강에서
김지하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 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 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애린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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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돈사(居頓寺)터
원주는
불교가 일찍부터 번성했던 곳이다. 그래서, 10여
개의 국보와 보물을 비롯하여 불교 유물과
유적들이 곳곳에 많다. 사찰과 암자들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많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도 126개나
되고, 이들 중에 신라 때에 창건된 것만도 14개나
된다. 절이 있었던 터만 남은 곳도 26곳이
발견되었다.
원주에서는 이처럼 많은 사찰 가운데에서 없어져
버린 가장 큰 절터를 발굴하려고 힘쓰고 있다. 이미
부론면의 거돈사지는 발굴이 끝난 상태이고,
법천사지는 발굴 작업이 착수 단계에 있다.
지정면의 흥법사지도 발굴할 계획을 짜고 있다. 세
곳이 모두 국보나 보물들이 있는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거돈사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임진왜란
시기에 소실되었다고 하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자료나 발굴자료는 없다.
1984년 정비보수공사와 1989~1992년 발굴조사로 절집의
대체적인 모습이 알려지게 되었다.
산지(山地) 가람인 거돈사의 가람배치는 당시의
사찰로는 보기 드문 신라의 전형적인 일탑식(一塔式)
형식으로서,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여, 가운데
중문지(中門地)가 있고, 중문지 앞에는 축대가 있다.
중문지 좌우에 회랑지(回廊址)가 동서로
나아가다가 북으로 꺾여 강당지 기단(講堂址 基壇)과
연결된다. 중문지 북쪽에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750호)이
있는데,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 북쪽에 있는 금당지(金堂地)는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서 현재 전면(前面) 6줄·측면(側面) 4줄의
주초석이 남아 있어 금당의 규모가 전면 5칸·측면 3칸인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지 중앙에는 높이 약
2미터의 화강석 원형 불대좌(圓形 佛臺座)가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와 크기로 미루어볼 때 금당은
외관(外觀) 2층이며 내부가 통층(通層)으로 된
건물이었으며, 본존상은 대좌석 상면에 철이나
청동록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등신불보다
큰 석조좌상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금당지
뒤에는 강당지가 있으며, 또 그뒤에는 승방지(僧房地)가
있다.
그리고 절터의 아래쪽에 있는 정산분교 운동장에는
총 길이 960cm, 폭 80cm, 두께 57cm의 거대한 미완성의
당간지주가 놓여 있다.
1.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 - 보물 제78호
절터 중심에서 동쪽으로 약 80m 떨어진 곳에는 각
부분의 보존이 완전한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있으며,
승묘탑(勝妙塔)은 뒤쪽 언덕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져 한때는 일본인 和田의
집에 있다가 광복 후에는 다시 경복궁으로 옮겼다.
고려시대 부도의 정형을 보이고 있는 승묘탑은
건립연대가 탑비가 세워진 현종 16년(1025)에
해당된다.
비석은 거북받침돌 위로 비석 몸을 세우고 머리돌(이수)을
얹은 모습으로 비석 몸이 작고 머리돌이 큰 것이
특징이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 모양이다.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육각형 안에는 卍모양과
연꽃무늬를 돋을 새김하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하다. 비석의 글은 현종이 명하여 최충이 글을
짓고, 글씨는 김거웅이 썼는데, 서체는 구양순,
구양통 부자의 서법이 어우러진 것이다.
이 탑비를 건립한 연대에 대하여는 비문의 끝에 '太平紀曆在
蒙赤奮若秋七月二十七日樹'라 하였으니, 태평은 요
성종의 연호(1021~1030)이고, 몽적분약은 옛갑자로
을축이므로, 현종 16년(1025)에 해당된다. 이는
원공국사가 죽은 7년 후에 건립된 것이다. 또한
비문 끝에는 僧 정원, 계상, 혜명, 전보, 득래 등이
새겼음을 명기하고 있다.
서문과 명문을 통하여 원공국사의 행적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원공국사(930∼1018)의 諱는 지종, 字는 신칙, 속성은
이씨로 전주인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행순이고,
어머니는 김씨였다. .
원공국사는 어려서부터 세속에 떠나 있어 나이
겨우 8세에 죽마와 같은 장난감을 버리고 불법의
탐구를 생각하여 사나사에 거처하고 있던 인도
승인 弘梵三藏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빌어
낙발득도하였다. 弘梵三藏이 인도로 돌아가자
거처를 광화사로 옮겨 景哲和尙에게서 수업을
계속하였으니, 이때 원공국사는 남이 열(十)을 하면
千을 하듯이 부지런히 수업하여 스승보다 뛰어났고,
사람들이 일컫기를 이미 숙성하였다고 하였다.
개운(開運) 3년(946)에 영통사에서 관단을 갖추어
유리계를 행하였고 광종때 승과에 합격하였다.
광종 6년(956)에 오월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영명사에
있던 연수(延壽)선사를 배알하고 열심히 불법을
닦아 심인을 받았고, 준풍(峻豊) 2년(961)에는
국청사에 가서 정광대사에게 대정혜론과 천태교를
배웠다.
개보(開寶) 원년(968)에 승통 찬영과 천태현재 임식
등의 추천으로 전교원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하다가 광종 21년(970)에 귀국을 했다. 귀국 후
광종의 요청으로 금광선원에서 거처하다가 광종
말년에 중대사(重大師)가 되었다.
경종 때 삼중대사(三重大師), 성종때에는 적석사의
주지, 현종 때는 대선사(大禪師)와 광명사 주지가
되었고, 開泰 2년(1013)에 현종의 왕사가 되었다.
이후 천희(天禧) 2년(1018) 여름에 원주 현계산
거돈사(賢溪山 居頓寺)에서 입적하였는데 나이가 89세,
법랍이 72세였다. 현종은 이를 깊이 애도하여
원공국사를 국사로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원공(圓空),
탑명을 승묘(勝妙)라고 하였다.
원공국사는 희양산파의 제4대 종주 형초(逈超)의
사법제자로서 광종의 후원으로 오월국에 유학하여
법안종계통인 영명사의 연수에게 가서 심인을
전수받고 이어 천태종의 본거인 국청사에 가서
정광에게 대정혜론과 천태교학을 배웠다. 당시
남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법안종은 선종(禪宗)
계통이면서도 교선일치(敎禪一致)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전제왕권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광종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지종은 광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자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좌절되면서 법안종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지종도 89세인 1018년 거돈사에서 사망하였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의 불교계를 주도해 나가던
법안종의 중심사찰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아래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개창한 천태종(天台宗)이 널리 유행하면서
거돈사는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선봉사(僊鳳寺)
비에는 물론 고려 후기에 백련결사를 일으켰던
원묘국사 요세의 비문에도 원공국사를 언급하고
있으며, 의천이 그의 문집에 원공국사의 제문을
지은 것으로 미루어 천태종 내에서 그의 위치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 보물 제190호
이
부도탑은 건조연대가 원공국사승묘탑비와 같은
고려 현종 16년(1025)으로 지금은 서울 경복궁내에
옮겨져 있으나 원위치는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터이다.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어 일본인
和田이 소장하던 것을 1948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겼다.
원위치에 지대석 두쪽이 남아 있고, 현재는
지대석이 없이 지면에 기단하대석부터 놓여 있다.
하대석은 8각으로 각면에는 일반적인 안상이 1개씩
있고 그 안에 꽃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부도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3.
거돈사터 삼층석탑 - 보물 제750호
거돈사지 삼층석탑은 일반형의 다른 석탑과 달리
토단을 마련하고 3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방단을 만든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방단의
남쪽면에는 돌계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흙을
둔덕지게 쌓아 지대석을 놓았다.
4장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결구하고 그 위에
상층기단 하대석 또한 4장의 판석을 동일형식으로
쌓았으나 지대석과는 방향이 다르다. 하층기단의
구성은 판석 사이에 장방형 판석을 끼워 놓고
우주와 탱柱를 새겼다. 하대중석 또한 4장으로서
각면의 중앙부에 접합시켰다. 그 상부 낙수면
위로는 중석받침과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상층기단 중대면석은 남북쪽에 양 우주가 표현되게
장면을 대고, 동서면에 탱주만 새긴 면석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수평한 낙수면을 가진 상대갑석은
위로는 사분원과 각형의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부는 각층마다의 옥신,옥개석이 각각 1石으로
구성되었고, 각층 옥신에는 양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부의 낙수면은 두꺼우면서도 끝부분을 살짝
반전시켰고, 옥개받침은 각 5단씩이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각형 2단의 괴임으로 위층 옥신석을
받쳤고, 각 옥개석마다 전각부에 풍탁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상륜부는 현재 노반 위에
복발만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초층탑신이 기단부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 왜소한 느낌을 주며, 옥개가 반전하면서도
전각을 수직이 아닌 사선으로 마무리한 점 등은
신라 후기의 석탑형식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러나 탑신 자체에 별다른 장식이 없고
옥개받침이 5단인 점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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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터(法泉寺址)
法泉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한
사찰로서 고려중기 불교의 양대 교단인 법상종과
화엄종 가운데 法相宗(惟識宗)系의 사찰이었으며
현재는 폐사된 채로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鳴鳳山에 자리잡고 있다. 法泉寺는 高麗 文宗 때에
智光國師가 머물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조선초기에는 유방선이 머물면서
강학하였는데, 이때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권람
등이 수학하였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했다고
한다.
사지에는 사찰 등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석조물로 高麗 宣宗 2년(1085)에 건립된
智光國師玄妙塔 1기와 당간지주(幢竿支柱), 그리고
1965년 발굴에 의해 출토된 불상광배, 불두, 파불,
배례석, 연화문대석, 용두, 석탑재 등 기타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물 등이 탑비전지 옆에 유존되고
있다. 옛 법천사 경내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주변
일대에는 민가가 들어섰고 대부분이 농경지로
변했으며 부락의 민가안에는 長大石의 石築과 塔의
部材 등을 볼 수 있다.
아늑한 野山에 자리잡은 塔碑殿址는 약 4m의 축대를
쌓아 올리고 100여평의 대지에 대석과 주초가
완존해 있어 중앙에 本殿과 좌우에 요사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本殿은 주초석으로 보아
전면 3간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 앞마당에
화강석재의 판석이 놓여 있어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碑殿에서 비켜 왼쪽에는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가
섬세한 조각을 지닌 채 귀부 위에 서 있다. 이 비는
현재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高麗 宣宗 2년(1085)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鄭惟産이 撰하였고 安民厚가
글씨를 썼다. 사실적으로 조각된 귀부의 귀두는
정면을 향하였고 등에는 이중의 귀갑문이 정육각에
가까우며 안쪽에 ‘王’字를 양각했다. 귀부와
이수가 화강암임에 비해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었고
비면에는 井間을 넣어 명문이 더욱 정제되었다. 또
비문 주위에는 아름다운 화문을 돌렸고 좌우측면에
각각 두 마리의 비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양각하였다. 이 탑비와 동형의 양식을 보이는
것으로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의 현화사비와
경기도 안성군 칠장사의 慧炤國師碑가 있다.
이들은 시대적으로 앞서고 있으나 조각에서는 단연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우수하여 11세기를 대표하는
정점에 도달한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탑비 옆에는 국보 제101호로 지정된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1915년에 서울
景福宮으로 옮겨져 현재는 國立中央博物館 정원에
있다. 이 부도는 조각양식 등이 우수하여
일제강점기에 일본 오사카까지 반출되었다가 국내
여론에 의해 반환되었으며 6.25 때는 포탄에 피해를
입어 1957년에 보수되는 등 원위치를 떠난 이후 많은
수난을 겪었다. 이 부도의 독특한 점은 일반형의
부도양식인 8각원형의 기본형태에서 벗어나
평면방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 양식을 이룩하여
한국 부도 가운데 최대의 걸작을 이룩했다는 점에
있다. 탑의 각부에는 조각이 가득하고 특히 지대석
네 귀퉁이에 龍의 발톱모양을 조각하여 지면에
밀착된 점은 탑의 견고성과 안정을 더해주고 있다.
상층갑석에는 화려한 장막형이 4면에 드리워져
장엄하게 표현되었고, 또 각면에 안상, 운문,
연화문, 초화문, 보탑 등이 빈틈 없이 조각되었다.
옥개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불, 보살, 봉황등이
복잡하게 조각되었고 상륜부도 보륜,보개, 보주가
층층이 조각되어 고려시대 탑으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대최고의 걸작이다.
法泉寺址에서 남쪽의 경작지 한 가운데는
화강암으로 된 완형의 당간지주가 서 있는데, 이는
당시의 법천사 규모를 대변하는 유물이다. 이
당간의 양식은 대체적으로 둔중하고 우람한
모습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1.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 - 국보 59호
범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는
법천사지 비존 앞에 있다. 이 碑에 대하여 <大東金石書>에는
“法泉碑在原州鳴鳳山法泉碑智光禪師塔碑侍中安民厚書陰記失名鄭惟産文遼道光大安元年乙丑立宗紳宗元豊八年同時麗順宗三年也”라고
싣고 있으며 또 東國輿地勝覽 卷46 原州牧
佛宇條에는 “法泉寺在鳴鳳山有高麗僧智光塔碑”라고
있다.
지광국사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석비로서의
특징적인 양식을 보이는 걸작품으로 조각 또한
정묘하다. 지광국사현묘탑은 원래 탑비의 우측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건되어 현재는
國立中央博物館 경내에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이
탑비도 탑이 이전될 때 함께 옮기려고 했으나 매우
정묘한 조각인데다 치밀함이 대단한 걸작품이어서
파손의 우려를 염려하여 이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탑비는 오랜동안 風磨雨洗와 雷電 등의 三災를
입어 파손된 곳이 많고 문자와 조각에 손상된
부분이 많다.
귀부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부분은
구름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용두화된 귀두의 목은
길게 빼어 정면을 향하고 목에는 魚鱗이
양각되었으며 머리는 입을 벌린 괴수의 형태로
치아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인다. 등에는 방형의
구획안에 따로 귀갑문을 새겼으며 그 내부에 ‘王’字를
양각하였고, 등의 중앙에 간결한 복련으로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밑으로 사선의 균열이
있고 하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고 있어 보호의
절실함을 기다리고 있다. 비신의 재료는 검은
청색으로 윗쪽에는 須彌山 扶桑樹 등 佛敎十長生을
정밀하게 조각하였고 바깥 둘레에 보상당초문을
조각하여 周廻하였고 양 측면에는 여의주를
회롱하고 있는 쌍용을 양각으로 새겨 주목된다.
이수는 하늘로 활짝 벌려진 형태로서 일반적인
양식을 벗어났으며 네 귀퉁이의 전각이 뚜렷하고
귀꽃을 달고 있는데 전면에 문양이 세밀하게
조각되었으며 그 중심에 상륜부를 두어 연화가
조각된 3층의 보부를 얹었다. 이와 같은 정밀하고
장중미려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복케 한다.
비문 내용은 지광국사가 수도한 내력과 불교
도덕의 진리를 통달하였다는 국사의 행적이
기술되었고, 비 뒷면에는 법천사의 내력과 탑비
건립 당시에 종사한 승려의 인원수 및 건립 내역을
적고 있다.
智光國師는
高麗 成宗 3년(984)에 태어났다. 俗姓은 元氏이고
이름은 海麟이다. 字는 巨龍, 幼名은 水夢으로 吉의
손자이며 休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李氏이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李守謙에게 수업하기를
청하였으나 李守謙은 이를 이상히 여겼는데,
하루는 관상을 잘 보는 노구가 海麟을 보고는 僧이
되면 반드시 세상에 귀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뒤에
開京에 있는 海安寺 俊光의 제자가 되어 삭발하고
出家修道 하였다. 穆宗 2년(999)에 16세의 나이로
龍興寺 官壇에서 具足戒를 받고 18세인 穆宗 4년(1001)에는
崇敎寺의 개창과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어
慈雲寺의 法會에 참석한 뒤 寬雄이 있던 법천사로
옮겨 수업하였다. 21세가 되던 穆宗 7년(1004)에
王輪寺에서 실시된 大選에 급제하여 大德이 되었다.
顯宗 2년(1011)에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眞肇를 만나 曆算法을 배웠고 이 해에 大師가
되었다. 顯宗 12년(1021)에 평양 重興寺에서 夏講의
說師가 되어 강의하였고 후에 왕이 重大師를
더하였고 水多寺의 住持가 되었다. 또 勅令을 받아
顯宗 21년(1030)에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德宗 때에는 三重大師가 되어 法衣,法號를 받고
특별히 探玄,道深의 法稱을 더하였고 곧 首座가
되었다. 靖宗 11년(1045)에는 僧統이 되었다. 文宗 1년(1046)에
궁중에 초청되어 唯心妙義를 강의하고
磨衲僧伽梨를 받았으며, 이듬해 李子淵의 제5자인
韶顯을 출가시켰다. 文宗 8년(1054)에 勅令을 받아
玄化寺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法相宗
교단을 이끌었다. 文宗 10년(1056)에 法服,香爐를
받았고, 文宗 11년(1057)에는 內帝釋院에 이르러
王師에 제수되고 同王 12년(1058)에는 奉恩寺에
親幸하여 國師에 올라 극진한 예우를 받았으며
靈通寺主僧統爛圓에 봉해졌다. 同王 13년(1059)에는
內殿에서 개최된 百高座의 제일 說主가 되었다.
文宗 21년(1067)에 법천사로 歸安할 것을 청하여
허락되어 이를 행하였다. 이해 9월 22일 玄化寺에
행차하여 闔院僧齋를 설치하였다. 본사인 法泉寺로
돌아와 머무르다가 이해 10월 23일에 입적하였다.
시호는 智光, 塔號는 玄妙이다.
智光國師玄妙塔碑는 高麗 初에 문장이 뛰어나고
詩를 잘 짓기로 유명한 吏部尙書와
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鄭惟産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잘 쓰던 安民厚가 碑文과
陰記를 書幷篆하였으며 李英輔와 張子春이
刻字하였다. 表面에는 碑銘과 裏面에는 陰記가
있다. 碑陰에는 國師의 弟子 이름 및 人員數를
새기고 있는데 그 숫자는 실로 1천 3백 7십여명에
달하였다. 표면이 2.1cm, 이면이 2.7cm이다. 글씨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러움과 단아함을
추구하였다. 立碑 연대는 碑文의 末尾에 ‘太安元年歲在乙丑仲秋月日樹’라고
있어 高麗 宣宗 2년(1085)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석비의 비신이 금이 가 있어서 앞으로의
보존대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 國寶 第101號
이 부도탑은 본래 원주군 부론면 법천리의
법천사지 뒷편 산 기슭에 있었으나 1912년 日人들에
의해 약탈되어 日本 大阪의 某富豪 집에
반출되었다. 이후 不法이 탄로되어 1915년에 되돌려
왔으나 원위치로 오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인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6.25 당시에 포탄으로 인하여 탑신부 이상의
각부재가 대파되는 큰 피해를 입게 되어 1957년에
國立中央博物館에 의하여 다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 지광국사현묘탑의
파손된 石材는 大小할 것 없이 약 1만 2천여 조각이
되었는데, 원형대로 복원하는 방법은 부도탑의
부재 중 제거되는 파편 석재와 지방에서 채취해 온
석재를 함께 분쇄하여 돌가루를 만들어 땜질하고
고착시키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智光國師玄妙塔의 구성은 부도탑의 형식대로
기단부 위에 탑신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옥개석을
덮었으며,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하고 있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넓게
자리한 지대석 위에 구성되었는데,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괴임 1단을 마련하고 그 위의 부재를
받았다.
각 층의 가부재에는 조각이 가득히 장식되었고
上部로 가면서의 구성은 층층의 높이와 넓이에
변화를 주었으며 특히 지대석의 네 귀퉁이에는
龍의 발톱 모양을 한 조각이 길게 지면까지 닿아서
지상에 완고하게 밀착된 듯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최상층의 갑석에는 화려한 작막이 4面에
드리워져 있어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 또한 각층의
각면에는 안상과 운문, 연화문, 초화분, 보탑, 신선
등이 가득히 조각되어 있어 각종 彫刻裝飾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4면의 조각 내용은
같은 것도 있지만 어떤 면은 전혀 다른 것이 있다.
4. 법천사터
당간지주 (法泉寺址 幢竿支柱) - 文化財資料 第20號
법천사지는
완재부락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당간지주는
부락의 남쪽에 건립되어 있다. 주변 일대는 밭으로
변해져 있으며 이 당간지주는 石築을 쌓은 넓직한
대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절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절 마당에 부처와 고행
행적을 그린 당번을 높은 깃대에 다는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는 지줏돌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상대해 동서로 서 있는데
높이가 3.9m로 中形에 속한다.
표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상단의 안쪽에
당간을 고정시켰던 長方形의 간구가 있고 그
외면은 부드러운 고형을 이루고 있다. 幢竿을
받치던 圓形의 간대가가 원위치인 원형주 사이에
잘 남아 있어 주목되며 그 중심에는 돌기가 있어
당간을 놓도록 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고려
전반기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서 주목되는 것은 양지주 상단의
부드러운 곡선과 돌기로 이루어진 간대이다.
보존상태는 좋으며 원형을 갖추고 원위치에 남아
있어 귀중한 문화재이다.
5. 법천사터
석조물 부재 (法泉寺址 石造物部材)
법천사지
비전에서 수습된 많은 석물들이 비전 우측의
요사치에 보존되고 있다. 여기에는 석탑부재, 불상,
광배, 배례석, 연화문대석, 용두,기타 조각석 등
다채로운 석조물이 있다.
석탑부재는 옥개석 2枚, 탑신 1石, 기단갑석 1枚
등인데 탑신에는 양우주가 있고 옥개받침은 4단씩이며,
갑석에는 탑신괴임대가 모각되어 있다.
광배는 전고 1.33m의 보주형이며 중앙에 큼직한 2중의
원광이 있고 주연에는 화염문이 유려하다.
배례석은 1.27mx0.63m로서 상면에 연화좌가 있고
측면에는 안상이 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
전반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智光國師玄妙塔碑와 같이 모두 조각이 화려하고
예리하며 다채로워서 고려시대 석조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비전과 더불어 보존은 잘 되고 있으나, 이밖에도
법천사지에는 많은 석조물이 산재해 있어 이들을
수습하여 보존해야 할 것이며, 이에 앞서 寺址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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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터(高達寺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있던 절로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 고려 제 4대 광종 이후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은 유명한 절이었으나,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절터에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 혜진탑과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국보 제4호인 부도, 그리고
보물 제8호인 석불좌가 있다.
1. 고달사터
부도 - 국보 제4호
현재
고달사지 서북쪽 산중턱에 건조되어 있는데 현
위치가 원 위치로 추정된다. 신라 이래의 전형인
팔각원당형으로서 동류의 부도로서는 거대한
작품에 속하는데 상륜부만 완전하지 않을 뿐
기단부와 탑신부, 옥개석 등은 모두 구존하고 있다.
수매의 판석으로 짜여진 8각 지대석위에 기단부를
형성하였는 바 기단은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된
괴임대위에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중대와
상대석을 얹어놓았다. 기단 중대의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과 구름모양을 조각한
솜씨가 힘차고 능숙하며 대담하다. 팔각 탑신의
각면에는 우주가 모각되고 문비형과 사천왕상,
창살 등을 조각하였는데 특히 자물통의 표현이
형식에 흐르고 있음을 본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꺼운 편으로 하면에는 깊숙이
낮고 넓직한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석 상단부와
맞게하였다. 낙수면은 석탑옥개형으로 기와골 등의
표현이 없으며 낙수면의 합각선이 뚜렷하고 8우
전각의 반전이 강하게 올라가려는데 큼직한
귀꽃문이 1좌씩 조식되어 있다. 이 귀꽃은 다른
부도 옥개석의 귀꽃문보다 높은 편인데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조각은 섬약에 흘러보인다. 옥개석
정상면에는 복련을 돌리고 상륜부를 받도록
하였는데 현재 상륜부재는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보개석 1석 뿐이다.
신라 부도의 기본형을 따르면서 세부에서 고려시대
양식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각부 양식 수법으로 보아
고려 광종 9년(958)에 입각한 원종대사의 혜진탑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2002년 7월 20일경 도굴꾼들이 옥개석을 나무로
받쳐서 들어올리려고 하다가 상륜부의 보개와
보주가 떨어져 나가는 손실을 입었다. 사실 이
부도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에
도굴당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보륜이 없어진 채
복원되었다. 도굴꾼들은 이러한 정황을 모르고
범죄를 저질렀으며, 문화재청에서는 사건 후
긴급복구를 하였다.
2.
고달사터 석불대좌 - 보물 제8호
석불대좌는 3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기 다른 돌로 4각형으로
다듬어 구성하였다. 상대는 앙련을 시원하고
뚜렷하게 조각했고, 중대는 4면에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을 음각했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하대는 상대와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으로
새기고 그 아래로 안상도 조각하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 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단이 1998년 7월 27일~1999년
1월 27일 기간동안 1차 시굴 및 발굴 조사를 한 결과,
석불대좌가 있는 곳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지로 밝혀졌다.
건물은 남향으로 추정되는데 일직선상으로
남쪽으로 10m 떨어져 석등과 또 남쪽으로 10.4m
떨어져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 보물 제6호
이
귀부와 이수는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원종대사지비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서기 1916년에 비석이 도괴되어
비신은 그당시 서울 경복궁내 국립 박물관으로
옮기고 지금은 귀부와 이수만이 현지에 남아있다.
이 비는 원종대사의 묘탑과 함께 세워진 묘비로서
왕명을 받들어 김정언이 비석을 찬하고 장단설이
비명을 써서 고려 광종왕 36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 공산 삼랑사에서 융제선사에게
사사하였다. 22세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3세에 입당하여 서주 동성현 적주산에서
자선화상에게 사사하였으며 경명왕 5년(921)에
환국하여 봉림사에 거주하였다. 그후 광주
천왕사에서 고려 광종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하니 왕이 애도하여 원종대사 혜진이라
추시하고 진영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귀부는 남향해서 안좌하고 있으며 귀배에는
연화좌를 조각하고 그 위에 길이 1.97m의 장방형
비좌를 새겼으며 귀부와 따로 떨어져서 쓰러져
있는데 운용문이 또렷하게 조각되어 있고 이수
정상에 적은 구멍이 뚫어져 있음은 아마도 보주가
꽂혀있던 흔적으로 보여진다. 대체로 매우 육중한
인상을 주는 유물이며 이수의 조각은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다.
4.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 - 보물 제7호
이 탑은 고려 경종 2년(977)에 건조된 원종대사의
부도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탄생하여 고려 광종 9년(958) 90세로 입적한 당대의
고승이다. 탑비와 같은 연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팔각원당형이며 각부 수법이
매우 섬세우아한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걸작품이다.
4매로서 짜여진 넓직한 방형 지대석위에는 1면에 5엽식과
각 우각에 1엽식 합 24엽의 단판 연화가 돌려 있는데
수법이 매우 정돈되었다.
이 위에 1단의 몰딩이 있고 중석과의 사이에
갑석형의 1매 방형 판석이 얹혀 있다. 중석은
상부에 돌린 1조대가 있어 8각의 의사를 알겠으나
신부는 이에 구애됨이 없이 상하에 피어오르는
운문을 조각하였는데 밑이 약간 넓은 편이다. 그
사이에는 정면에 귀형이 몸은 정면하고 머리만
우향하였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룡이
운중에 비상하고 있는데 조루가 섬세하고 웅혼하다.
상대석은 8판의 단판 연화의 앙련이 있는데
저면에는 잘숙한 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탑신
받침의 몰딩이 있다.
탑신은 8각이고 4면에는 문호형이 모각되고 다른 4면에는
4천왕 입상이 조각되었다. 옥개도 8각으로 옥리에
단목의 모각은 없으나 호형을 중심으로 상하에
낮은 받침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넓고 높은 또 한
단의 받침이 있어 단목에 대신하고 있다. 추녀는
수평이나 전각에 이르러 상향하였고 그 위에는
뚜렷한 귀꽃이 있으나 일부 손상을 입고 있다.
낙수면에는 우동이 표시되고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경기도박물관이 1998년 7월 27일~1999년 1월 27일
기간동안 1차 시굴 및 발굴 조사를 한 결과,
옥개석의 유실된 귀꽃이 지표에서 수습되었다.
5. 고달사터
쌍사자석등 - 보물 제282호
각 면에 두개씩 둥굴넓적한 안상 장식이 새겨진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쌍사자를
조각한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중절이 있는
팔각간석을 세워서 앙련으로된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이 간석은 상하 두 개의 돌로 위를 만들어서
접속해 세운 것이며 인양한 양각 운문을 사면으로
장식하고 있다.
화대석은 8각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화창이
뚫려져 있을 뿐 그 옥개석과 보주는 상교리
고달사자리 경기도 파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에
도괴되어 있던 것을 부락민 이기중이 수습하여
보관중이던 바 서기 1958년 5월 서울 특별시 종로구
종로 4가 동원 예식장 주인 정운근이 방출해서 동
주소에 이건한 것을 서기 1959년 봄 현 소재지로
옮겨 세운 것이다. 화사석까지만 경복궁에
있었으나 2000년에 기전매장문화연구원 (연구실장
김성태 011-890-9796)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석등지
상부퇴적토 바로 아래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폐사지에서
꾸는 꿈 - 흥법사터에서
누구라고
어디 한 번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랑 하나쯤 없으랴?
절도 중도 없이 돌덩어리만 덩그라니 남은
빈 폐사지의 그 황량함과 쓸쓸함
나는
또 다시 꿈꾸네
잔설 쌓인 저 숲속 어디에선가
풋풋한 웃음을 머금고
그대가 내곁으로 다가와선
손을 내밀면 우리는
우리 둘이는
쓰러진 집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짐을 잃어 여의주를 뱉어내지 못하는
돌거북에게 비석을 다시 얹혀주고
집도 절도 없이 오갈 데 없는
중들을 여기저기서 불러 모은 다음
새로운 절 이름 하나 지어주고 나서
아직도 잔설이 녹지 않은 겨울 숲으로
바로 그 겨울 숲으로
두 손 꼭 붙들고 사라져 가는
그런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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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아박물관
목아박물관
개요
여주에
위치한 목아불교박물관은 목조각가인 박찬수
관장의 작품들과 그간 박 관장이 수집한 불교에
관한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1990년 3월
전통공예관으로 출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그리 넓지는 않지만 한눈에도 예술가의 풍취가 잘
느껴질 정도로 단아하게 꾸며진 박물관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이 약 10m
가량의 미륵삼존불이다. 석상(石像)으로 전통적인
미륵삼존불과는 달리 선 처리가 단순화된 현대적인
모습이 특징이다. 미륵불을 지나 박물관까지는
야외조각공원으로, 작은 조각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박물관은 3층 건물로 지하를 포함해 네 개층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3층은 불교조각상실로
다양한 불상과 사천왕, 인왕, 보살상 등의
목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섬세함이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압축, 묘사한 목각 팔상도(八相圖)가
인상적이다. 2층은 나한전으로 박물관의 관장인
박찬수 선생이 제작한 500여 나한과 절에서 쓰였던
여러 유물들 그리고 목조각에 쓰이는 도구들을 볼
수 있다. 지하는 영상실과 명부전이 꾸며져 있고, 1층에는
여러 불상, 불화 유물들과 동자상을 위주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통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1994년 6월 세워진
목아박물관은 미륵삼존대불의 점안식을 시작으로
전문사립박물관으로서의 문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전통목공예의 맥을 이을 터전을 마련함으로서,
잊혀져 가는 우리나라 전통 불교조각기법을
보존하고 새로운 기법으로의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불교 문화유산과 현대 불교조각작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함으로써 옛 선인의 기술과
장인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목아박물관의
설립자인 목아 박찬수선생은 불교 목조각가로 1986년
아시안게임기념 불교 미술기획전에서 종합대상과
1989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불교미술가로서의 길을 걸어 왔다. 또한
「불교목공예」 등 저서 활동을 통해 불교
목공예를 쉽게 알리는 작업도 병행해 오고 있다.
1996년 신설된 목조각 부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목아선생이 인간문화재 108호
목조각장으로 지정, 그간의 전통 복원과 계승의
노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박물관의 전시시설은
전시관 본관 1동과 야외 조각공원, 유물관리실을
두고 있다. 전시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건축으로 외관은 인도의 석굴사원에 착안하여
창은 많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게 하였고,
건물의 중앙과 좌우에 둥근 계단을 설치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불·법·승의 삼보(三寶)를
상징한다. 지붕은 맞배식의 전통건축을
모방하면서도 용마루를 한쪽으로 치우치도록
설계하여 독특한 외장을 하였다. 내부의장은
전통한옥의 방식을 추구하여 한지 창문으로
통일하였다.
본관의
전시관 3층은 목아 박찬수 선생의 목조각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법상·인왕·사천왕·십이지·불보살상
등 3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나한전과
유물실이 있는데 나한전에는 5년간 16종의 나무로
제작된 500나한이 모셔져 있고, 유물실은 불교 관련
유물과 일반 역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1층은
기획전·특별전이 마련되는 공간으로 매장에서는
목조각공예품들을 전시·판매하고 있다. 지하
전시관에는 명부전과 영상실이 있는데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명부시왕이 모셔져 있고,
영상실에서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부처가
되고 싶은 나무’가 수시로 상영되고 있다.
목아박물관의 전통 건축물로는 고려시대의 양식인
주심포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큰말씀의 집(대장전)과
조선시대의 양식인 익공 팔작지붕으로서
대한민국의 국조인 단군을 중심으로 환인과 환웅을
모신 건물인 얼울늘집(개천궁)이 있다. 또
전통사찰에서 맞이문(일주문)을 거쳐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향하는 두 번째의 문으로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불법을 지키는 사천왕을 모시는 공간인
마음의 문(사천왕문)이 자리하고 있다.
목아
박찬수 (중요무형문화재 108호 불교 목조각가)
중요무형문화재 108호인 불교 목조각가,
목아불교박물관 관장 등... 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흔히 장인들이 가지는 아집과
홀로됨을 이겨내고 다양한 사회활동과 참여로
우리의 전통장인들의 목소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격의 없는 행동으로 그 자신 쌍놈이라는
지칭을 쓰고 요즘은 보기 힘든 상투 튼 머리를
보이고 다니면서도 그 자신 한없는 당당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진정 보기 힘든
장인이다
지난 1960년 13세의 나이에 김성수 선생을
은사로 전통 목조각계에 입문을 시작으로
목조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끊임없는
자기 개발로 현재 불교목조각 대가에 모습을
이루었다.
20대 초반에 조각학원을 운영할 정도였으니 그
자신 타고난 기예와 노력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다음의 일화는 그가 가진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현재의 목아 박물관을 지을 적에 그 주위에
살던 마을사람들 중 땅을 팔지 않고 값을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단다. 그 자신
여유있는 재력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고 소명감
하나로 시작한 일이라 많은 협상에도 불구하고
그 땅주인은 주위에 땅값보다 월등히 많은
땅값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돈은 없고
포기하자니 전체적인 박물관 모습에서는 꼭
필요한 땅이라 궁리하다 못해...
그 땅에 가서 몇 날 며칠이고 가부좌 틀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땅이 꼭 필요하니
자기가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일반 사람이
봤을 땐 미친 짓 같이 보이는 이 행동으로
진짜로 그 땅을 제 값 주고 사서 그 터에
박물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렇듯 자기가 마음먹은 일에 대한 열정은
박물관 건물에서도 드러난다. 지금 박물관
본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은 서울대 문리대
건물이었다. 그 건물이 헐린다는 소리에 그가
나서서 그 건물을 벽돌 한 장 안 남기고 그대로
옮겨와서 지은 게 지금의 목아 박물관
본관이다. 그러한 열정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내일 모래면 환갑인 그가
가지고 있는 열정은 젊은이가 무색할 정도이다.
지금도 황룡사지 9층 목탑을 건축하는 일로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 옛날 썼던 공법 그대로 재현해서 짓는다는
그 일에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관심이 많아서
NHK의 지원과 일본 팬들의 기부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라면 꼭 해낼
걸로 믿는다.
오래된 나무처럼 그늘과 풍경과 열매를
나눠주는 그가 참 아름답다.
목아박물관
홈페이지: http://61.77.110.182/kor/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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