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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인물? 고구려를 패망의 길로 이끈 주역?, 아니면 고구려의 뛰어난 장수? 우리 역사의 위인 중 논란이 많은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연개소문 장군이다.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포악한 독재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신채호, 박은식 선생들은 연개소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제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특히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을“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과연 연개소문은 포악한 독재자일까? 아니면 4천년 역사의 위대한 영웅일까? 지금부터 연개소문에 대해 하나 하나 차근 차근 알아보기로 하겠다.
1.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인가?
연개소문에 대해 평가하기에 앞서, 연개소문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번 장에서는 연개소문의 출생과 그의 가계, 그리고 그의 사망 년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➀ 연개소문의 출생
연개소문은 언제 태어났을까?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홍무(弘武)1) 14년 5월 10일에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홍무 14년은 603년이다. 『한단고기』는 아직 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책이지만, 한단고기에 의거하면 그의 출생이 603년임을 알 수 있다. 강화군의 향토지인 『강도지(江島誌)』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사루봉 기슭에 태어났다고 전한다. 강화군은 이 곳을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하고 하점면 지석묘 앞 고인돌공원 들머리 큰길 가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연개소문이 이 곳 시루봉 기슭에 태어나 치마대와 오정에서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➁ 연개소문은 동부출신
연개소문의 가계는 『한단고기』, 천남생 묘지명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자료에 나타난 연개소문의 가계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대기』에 가로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일명 개금(蓋金)이라고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太祖)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 하고, 증조부는 광(廣)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의 성을 연씨(淵氏)가 아닌 천씨(泉氏)라 기록하였다. “개소문의 성은 천씨이다.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무리를 현혹시켰다.”라 하여 연개소문의 성을 천씨라 기록했는데, 이는 당 태종 이세민의 아비 이름 이연(李淵)이라, 이를 피하기 위해(忌諱:기휘) 성을 천씨로 둔갑한 것이다.
고구려는 동・서・남・북・내부 5부가 있는데, 이들 5부가 국정을 운영한다고 한다. 동,서,남,북 4부는 귀족 출신이고, 내부는 황족 출신이다. 그런데 『한단고기』, 『조선상고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구당서』 등의 기록에는 연개소문을 서부 출신이라 기록하고, 『삼국사기』 「개소문열전」, 『신당서』, 『자치통감』 등의 기록에는 연개소문을 동부 출신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 출신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한원(翰苑)』이란 사료가 답해주고 있다. 『한원』에는 고구려의 귀한 부족 다섯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부(內部)는 왕가의 종족이기는 하나 동부의 밑에 위치했다. 그 나라의 일을 함에는 동쪽으로서 머리를 삼는 고로 동부를 위에 놓는다.” 이 책의 저자 장초금은 자신의 눈에 비친 7세기의 고구려 상황을 적었다. 즉 고구려 내부가 동부의 밑에 위치했다는 것은 7세기의 상황일 뿐이다.2) 7세기는 연개소문이 혁명에 성공한 이후 강한 권력을 쥔 시기이다. 결국 장초금은 연개소문이 혁명에 성공한 이후 동부출신이 황실이 속한 내부보다 강한 권력을 쥔 고구려 후기 상황을 기술했던 것이다. 위 기록은 연개소문이 동부 출신이며, 이를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➂ 연개소문은 언제 죽었을까?
마지막으로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에 관한 것은기록 마다 다르다.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와 『조선상고사』에는 연개소문이 657년에 죽었다고 씌여 있다.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 선생은 남생이 막리지가 된 시점(657년)을 연개소문이 죽은 해라고 주장했다. 남생이 막리지에 올랐다는 것은 곧 정권과 병권을 잡은 증거이며, 연개소문이 이 때 죽었기에 남생이 그 직위를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막리지는 여러 명이 있었다. 연개소문이 막리지 자리를 지켰던 647년에 보장왕의 둘째 아들 임무가 막리지로 활동했고, 돌궐에 망명한 고문간 또한 벼슬이 막리지라 하였다. 만약 연개소문이 657년에 죽었다면 662년 연개소문이 당의 방효태의 대군을 사수에서 몰살시켰다는 기록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남생묘지명》을 보면 남생이 막리지에 오른 시점은 24세가 아닌 28세인 661년이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666년에 죽었을까?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의 사망 년도는 『구당서』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3) 『구당서』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사망 년도는 666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666년 6월 임인날은 연개소문이 죽은 시점이 아니다. 이 날은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이를 접수한 당이 계필하력에게 남생을 맞이하라고 명령한 시점일 뿐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사망 일시는 이보다 한참 이전이며, 사수 전투를 승리로 이끈 662년 이후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남생이 태막리지에 오른 665년을 연개소문의 사망 일시로 보지만,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보기에는 몇 가지 점에서 의문이 따른다.
『일본서기』 「천치천황」 3년 10월조의 기록을 보면 “이 달에 고구려 대신 연개소문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여러 자식들에게 유언해 말하기를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일은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따르면 연개소문은 664년에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남생이 당에 가서 고국을 멸망시키려 했던 시점을 667년, 3년의 터울을 두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남생이 당을 끌어들인 것은 666년이지, 667년이 아니다. 고로 『일본서기』의 기록은 1년 오차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사망 시점은 664년이 아닌 663년이라 볼 수 있다.4) 일본서기를 통해 연개소문의 죽은 연대를 살펴보면 663년 또는 664년이 된다. 그런데 선인들은 선친이 죽으면 3년의 장례를 치렀다.5)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사망년도를 남생이 부친의 작위를 계승한 665년보다 이른 663년 10월이라 볼 수 있다.
2. 연개소문은 왜 혁명을 일으켰나?
〖연개소문은 대당강경론자였다!〗
642년, 연개소문은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왜 쿠테타를 일으켰을까? 단순한 정권욕이었을까? 정권욕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그가 왕을 죽이고, 자신이 전권을 차지했는데, 백성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은 점을 보건대, 연개소문이 쿠테타 아니 혁명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요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 좁게 말하자면 고구려와 당의 국제관계에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그 여파로 수는 망하고, 전국은 군웅할거시대(群雄割據時代)에 돌입하였다. 이런 혼란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 바로 618년 당(唐)을 건국한 이연(李淵)이다. 그러나 당이 중원을 통일했으나, 아직 건국 초라 나라 안정에 힘을 기울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고구려 또한 전란으로 황폐해진 요동지역을 복구해야 했기 때문에 두 나라는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당은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고 있었으나, 영양태왕 뒤를 이은 영류왕은 당의 검은 속셈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살펴보자. 수와의 전쟁 이후 당이 들어서자, 당에 대해 화친해야 한다는 주화파와, 당과 대결해야 한다는 대당강경파가 있었다. 연개소문은 대당강경파의 거수였다. 그래서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가 죽고, 그가 동부 대인 자리를 물러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대신들을 일일이 찾아가, 자신에게 과오가 있으면 스스로 물러날테니, 아버지의 작위를 잇게 해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로, 연개소문은 온건파 대신들에게 있어서 눈엣가시였다.
626년 당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현무문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 정변은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이 자신이 제위에 오르기 위해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여 강제로 폐위하고, 자신이 제위에 오른 사건을 말한다. 당 태종이 즉위함으로써, 서서히 고구려와 당의 관계는 험악해져갔다. 당 태종은 첩자 진대덕을 파견해 고구려의 산천을 염탐하게 하였고(641년), 631년에는 고구려의 전승 기념탑인 경관을 헐게 하였다. 경관은 고구려인들의 자존심이다. 경관을 헐어버리는 것은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짓밞고, 수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고구려 장병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영류왕은 패강에서 수나라의 수군을 몰살시킨 패기와는 달리, 당에 대해 유화책을 쓰고 있었다. 영류왕의 정책은 연개소문을 비롯한 대당강경론자들과 고구려 백성들의 불만을 낳았다. 더구나 영류왕은 당으로부터 도교를 들여와, 백성들의 상무정신을 헤이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를 당에 바쳤으며, 세자 환권을 보내 당에 조공을 하는 국치를 자행하였다. 더구나,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국경에 장성을 쌓는다는 것은 고구려의 국시를 잇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본래 고구려의 국가정책은 남수북진(南守北進:남쪽을 방어하고 북쪽으로 진출한다)이다. 그런데 당과의 국경에 장성을 쌓는 일은 기존의 방침을 수정한다는 것이다. 바로 북수남진(北守南進:북쪽을 지키고 남쪽으로 진출한다) 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그 동안 영류왕의 정책에 대해 시정할 것을 요구해왔다. 특히 장성 쌓는 일은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니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건의를 묵살하고, 오히려 연개소문을 장성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온건파 대신들과 의논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 소식을 먼저 입수한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열어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 대신 100여명을 초청하여 그들을 모조리 주살하였다.6) 혁명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장을 받아들이니 이 분이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태왕이다. 연개소문이 병권과 정권을 장악하자 스스로 신크말치(태대막리지)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당과 고구려는 전운에 휩싸이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는 권력에의 욕심이 아닌, 고구려를 집어 삼키려는 당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 일으킨 것이다. 즉 당의 마수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내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이유이다.
3. 연개소문은 포악한 독재자인가?
중국의 기록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대개 부정적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연개소문은 흉포하고 무도한 인물이다”
“연개소문이 전국을 호령하며 나랏일을 제멋대로 하는데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이나 무장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며 발판을 삼았다.”
“연개소문은 왕을 시해한 다음 그 몸을 몇 도막으로 잘라 개천 속에 버렸다.”
“몸에 다섯 개나 칼을 차고 있으니 좌우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평가로,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포악한 독재자, 임금을 죽인 무도한 신하라 인식하게 되었다. 더욱이 유교질서를 엄격히 가르치던 조선시대에 있어서, 연개소문은 반역자와 마찬가지였다. 그런 인식이 현대까지 이어져, 연개소문을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독재자,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주역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과연 반역자이고, 독재자이며,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주역이었을까? 그것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NO이다. 지금껏 우리는 연개소문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사로잡혀 왔었다. 이번 장에서는 영웅으로서의 연개소문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➀ 기존의 연개소문에 대한 이미지 제고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고구려의 적국이었던, 신라와 중국 측의 기록만이 남아 있다. 그러니 이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특히나 중국의 역사서술 특징은 춘추필법7)이다. 그러니 중국 측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괴멸시킨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한 가지 웃긴 것은 당 태종이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자, 안시성주가 연개소문 정변이 일어났을 때 저항을 하여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략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안시성주의 성주 직위를 수락하고,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소가 웃을 노릇이다. 연개소문에게 대항하던 안시성주가 어찌 당에 저항을 하겠는가? 또한 연개소문 정권을 안시성주가 반대했다면,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을까? 이는 한 마디로 말해 자신들의 패전을 숨길려는 중국인들의 못된 습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중국 측의 기록에 답습하지 않고 옥석을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대기』에 가로되)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儀表雄偉)하고 의기호일(意忌豪逸)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에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 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緯)로 삼고, 하늘을 경(經)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써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마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연개소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항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송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王介甫:王安石)와 국사를 의논할 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어째서 이기지 못했는가?’하니 왕개보는 ‘개소문이 비상(飛上)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소문도 또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연개소문은 포악하고 무자비한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국난에 처한 고구려를 구한 영웅이고, 부하들과 백성들을 사랑하는 위대한 정치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는 역사에 아무런 말도 못하는 법이다. 승자인 당과 신라는 자신들의 기록을 남길 때 그들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을 흉포한 인물로 깍아내렸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양하고, 객관적으로 연개소문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➁ 연개소문과 칼 다섯 자루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씩이나 차고 다녔다는 것에 대해 독재자로서의 위엄과 과시를 나타낸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니는 것이 연개소문이 독재자라는 증거가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독재만을 생각했지, 왜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 씩이나 차고 다녔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연개소문은 칼을 다섯 자룬 차고 다녔을까? 그 답은 바로 『한원(翰苑)』에 있다. 『한원』 「고려조」에는 남자들이 허리에 은띠를 차는데,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항상 다섯 자루나 되는 칼을 차고 다녔을까? 이를 밝혀 줄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구당서』를 보면 혼인전 자제가 경당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나라이니, 아무래도 일반 백성들의 무술 연마에 사용했을 것이다. 즉 이 칼들은 장식품이 아니라, 생활상의 필요와 함께,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등 각종 무술을 연마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로 쓰였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결국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는 것은 『삼국사기』 「개소문전」에서 기록된 대로 독재자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 남성들의 평범한 일상사인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독재자의 증거로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가 아닐 수 없다.
➂ 병법가로서의 연개소문
고구려가 당 태종의 30만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요인에는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과 고구려 군사들의 용맹, 관・군・민이 하나가 되어 적을 격퇴하겠다는 일념 뿐 아니라 연개소문의 지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연개소문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연구한 바 있다. 단재는 남아있는 기록만으로 연개소문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자, 중국 곳곳을 발로 누비며 현지의 각종 전승(傳承)과 비사를 중심으로 연개소문의 활약상을 추적하였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연개소문이 병법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지은 병법서가 있었으니, 그것이 『김해병서(金海兵書)』8)이다. 김해병서는 고려 때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부임할 때 마다 한 벌씩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그 병서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의 이정(李靖)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가장 뛰어난 명장이 되는데 기여했으며, 이정은 훗날 연개소문의 김해병서를 바탕으로 『이위공병법(李徫公兵法)』을 지었다고 한다.9)
이상과 같이 연개소문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포악한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부하와 백성을 먼저 생각한 장수요, 나라를 지킨 위대한 장수요, 뛰어난 병법가인 것이다. 연개소문... 그는 신채호 선생이 말한 대로 “조선 4천년 역사상 첫째 영웅”인 것이다.
4.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요청을 거절했나?
서기 642년 백제 의자왕은 장군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신라를 공격,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40여성이 함락되었다. 이 전투 중 김춘추의 사이 대야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랑이 죽었다. 김춘추는 신라 단독으로 백제를 제압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을 하고,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갔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실력자 연개소문과 신라의 떠오르는 실력자 김춘추(金春秋:뒤의 태종무열왕)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연개소문은 동맹을 맺으러 찾아온 김춘추에게 신라 진흥왕이 빼앗아간 죽령 이북의 땅을 되돌려준다면 백제를 칠 원병을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김춘추는 이 제안이 부당하다며 반대를 하였고, 이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가두었다. 그러자 김춘추는 재치를 발휘하여 거짓으로 보장왕과 연개소문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 무사히 고구려를 빠져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이 때 신라와 동맹을 맺었어야 한다며, 연개소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요청을 거부했을까? 지금부터 이 문제에 대해 차근차근 논의해보고자 한다.
➀ 연개소문, 신라를 버리고 백제를 선택하다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구원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돌려주는 문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고구려의 안보와도 직결되는 백제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더 큰 이득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는 신라 대신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이 643년 11월에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취해 신라가 당과 통하는 길을 막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가 철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었음을 가리키는 기록이다. 양국이 동맹을 체결하고 공동 출병을 했다는 것은 643년 11월보다 이른 시기에 두 나라 사이에 교섭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협상하러 간다는 사실을 백제에서 알았다면, 백제 또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협상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김춘추에 대한 정보를 얻게된 것은 혹자(或者)를 통해서이다. 혹자, 즉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필시 고구려인이 아닌 백제인일 가능성이 크다. 신라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갔고 있던 백제가 고구려-신라간의 협상을 결렬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김춘추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은 크다. 이런 가능성을 좇는다면 연개소문은 백제와 신라 양국을 저울질하면서 어느쪽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한 가를 판단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당과 일전을 겨룰 것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맹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국가가 백제였다. 당시 백제는 신라보다 국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할만큼 해양강국이었다. 만약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한다면 백제는 당과 연합을 할 것이고, 그리 된다면 고구려는 서해 상에서 적의 군대를 막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안보 차원에서 백제를 선택하는 것이 신라를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함으로써, 자연히 왜국과의 교섭 또한 활발해졌다.10)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을 맺자, 신라가 왜국과 교섭할 것을 우려해 왜국과의 외교 정상화에도 빠르게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한가지 말해둘 것은 김춘추가 거짓으로 고구려의 옛땅을 돌려준다는 편지로 고구려로부터 빠져나온 것을 가지고 연개소문을 구전 설화인 구토설화에 나오는 용왕과 비유하여 어리석은 인물이라 치부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당의 대군을 물리친 전략의 귀재인 연개소문이 그깟 한낱 어린애의 말장난을 믿었으랴...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놓아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춘추는 협상실패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고구려에 가기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게다가 고구려인의 반(反) 신라 감정이 고조되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전선이 구축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더 큰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그를 놓아준 것이며, 협상을 통해 충분한 실익을 얻은 셈이었다.
➁ 연개소문, 김춘추에게 중원정벌을 제의
그런데, 연개소문이 청병(請兵)을 하러 온 김춘추에게 중원을 정벌하자고 제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한단고기』와 『조선상고사』가 그것이다. 『조선상고사』를 보면 연개소문이 당을 정복하기 위해 젊였을 때 지나(支那:中國)를 염탐했으며, 혁명을 하여 왕을 죽이고 각 부의 호족을 무찌르고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거두어 잡은 것이 바로 당을 정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중원정벌계획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야사의 검증되지 않은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당시 연개소문이 중원정벌을 꿈꾸었다고 본다. 당시 고구려는 수의 100만 대군을 막아내, 국가적 자부심이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더욱이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광개토경호태열제) 때 이미 고구려는 중원제국 못지 않은 제국(帝國)을 건설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중원도모계획을 세웠으리라 본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高成帝:영류왕)를 내어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高藏)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寶藏帝)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성기(成己)․자유․개물(開物)․평등으로 하고, 삼홀(三忽)을 전(佺)으로 하고, 조의(皂衣)에 율이 있게 하고,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죄평과 함께 의(義)를 세웠다. 또 사신 김춘추(金春秋)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루르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라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로서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했으나, 춘추는 종내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桓檀古記』 「太白逸史」
“연개소문은 처음에 영류왕에게 아뢰어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연합하여 당과 싸우려 하였으나 영류왕이 듣지 아니하였고, 김춘추(金春秋:뒤의 신라무열왕)가 고타소랑(古陀炤嫏)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구려에 와서 구원을 청하니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자기집에 머무르게 하고 서로 천하의 대세를 이야기하고, 이어 춘추에게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조선 세 나라가 제휴하여 지나를 칩시다.’라고 하였으나 김춘추는 한창 백제에 대해 갈고 있는 때였으므로 또한 듣지 않았다.” 『조선상고사』
5. 두 영웅의 격돌: 연개소문 VS 당 태종
연개소문의 라이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은 김춘추나 김유신을 연개소문의 라이벌로 꼽는다. 하지만 그 둘은 연개소문과 비교할만한 인물이 안 된다. 김유신은 명장이라기 보다는 음모가였다.11)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스스로 당의 연호와 복식을 따르며, 자기의 자식을 당에 인질로 남길 만큼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다. 그런 그들이 당을 정복하려 했던 연개소문의 라이벌이 될 수 있겠는가? 연개소문의 라이벌은 동돌궐과 토번을 비롯한 이민족을 정복하고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를 구현한 당 태종 이세민이라 하겠다. 동아시아의 위대한 두 영웅은 천하의 패권을 놓고, 맞붙으니 이른바 고구려와 당과의 문명대전, 고당전쟁이다.
➀ 고당전쟁의 개시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은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다. 이세민은 전쟁 명분으로 “고구려 개소문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하고 있으므로 어찌 인정상 참을 수 있으리오”란 유교적 논리를 명분으로 자신이 일으킨 침략의 대의를 밝혔다.12)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 기록된 고당전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44년 11월, 당 태종은 요동도행군총관 이세적(李世勣)에게 6만의 군사, 평양도행군총관 장량(張亮)에게 수군 4만 3000여명, 밀 1만 필, 전함 500척을 주어, 먼저 요동을 공략하게 하였고, 그 다음해 4월, 이세민이 친히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침략하였다. 당 태종의 정예병력 30만 대군은 먼저 현도성을 함락시킨 다음, 개모성을 공격하여 포로 2만명과 10만석의 양곡을 얻었다.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최대의 전략거점인 요동성을 공략하였다. 요동성은 수 양제가 수차 공략하다가 실패한 고구려의 중요한 방어거점이었다. 요동성의 군사와 주민들은 당군을 맞아 힘겹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11일만에 요동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백암성 성주 손대음의 항복으로 손쉽게 백암성을 손에 넣고, 드디어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 안시성에 육박했다. 연개소문은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15만의 대군을 주어, 요동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로(大盧) 고정의(高正義)의 충고를 듣지 않아, 결국 당에 의해 괴멸되었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의 포로가 되었다. 당 태종은 붙잡은 고구려 15만군 중 말갈군 3300명을 생매장시키고 나머지 군사는 돌려보냈다. 한편 안시성은 당의 대군을 맞아 60여일간의 항전하였고, 당 태종은 “요동이 일찍 추워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兵馬)가 오래 머물기 어렵고 양식 또한 떨어지니 군사를 거둔다”라고 하며 후퇴를 하였고, 결국 고당대전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고당대전의 전말이다. 하지만 고당대전을 보면 선 듯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다. 이제, 그 부분을 하나 하나 파헤쳐보고자 한다.
➁ 고당대전의 진실
삼국사기와 구당서에 기록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다. 특히 이 책들을 보면 당이 항상 승승장구하였는데, 안시성을 공략하지 못하니 패퇴하였다고 기술을 하는데, 요동지역의 큰 승리를 거둔 군대가 고구려의 조그만 성이 항전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났을까? 중국의 사관은 춘추필법이다. 자국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숨기는 것이 그들의 역사법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지껏 알고 있는 고당대전은 진실이 가려져 있을 수 있다. 이제부터 고당대전의 진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A. 요동이 일찍 추워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마(兵馬)가 오래 머물기 어렵고, 양식이 다하니 군사를 거둔다
분명 삼국사기와 중국사서를 보면 당 태종이 개모성을 공략하여 곡식 10만섬을 얻었고, 요동성을 함락시켜 곡식 50만 섬을 얻었다. 그런데, 왜 양식이 다하여 회군한다고 하였을까? 당이 탈취한 고구려의 곡식 60만 섬이면, 몇 달은 견딜 수 있다. 그런데 양식이 다하였다는 당 태종의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는 결국, 당 태종의 승리를 과장하여 빼앗지도 않은 곡식을 빼앗았다고 기술했거나, 고구려군이 이 지역을 재탈환 하거나 게릴라전으로 식량을 빼앗았을 가능성이다.
B. 당 태종이 포로로 잡은 15만 대군을 놓아주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고정의의 말을 듣지 않고, 무리하게 당군을 공격하였다가 당군에 의해 고구려군이 궤멸되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포로로 잡혔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웃긴 것은 당 태종이 포로로 잡은 15만 대군을 풀어준 점이다. 병법에 있어서 잡은 포로를 놓아주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더욱이 이세민은 고구려를 정복하러 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포로로 잡은 적군을 놓아줄 수 있겠는가? 만약 이세민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군을 풀어주었다면 그는 미친 놈이요, 정신병자라 할 수 있다. 사실 이세민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군을 풀어주었다는 것 또한 춘추필법에 의한 역사왜곡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주필산 전투 장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C. 당군이 요동성 함락 후 백암성 공격, 다시 요동성으로 회군, 안시성 공격에 이르는 시간이 무려 32일이나 소모되었다.
당군의 요동침공을 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으니, 바로 지체된 시간이다. 사실 당군이 요동성 함락이후 백암성 이동에 1일, 백암성 점령에 3일13), 다시 요동성으로 이동 1일, 안시성으로 이동 2일을 포함해 불과 7일이면 족히 걸리는 전략을 무려 32일이나 걸쳐 행하였다. 당시 당군은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가벼운 경장을 했으며, 식량 또한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면 왜 당군은 시간을 지체했을까?
첫째, 요동성이 함락되었지만, 그 저항세력이 워낙 강력해 이들을 진압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을 가능성이다. 둘째, 요동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다. 신성과 국내성에서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해 파병된 4만의 군대 중 일부가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 군대는 여전히 요동성 주변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들과 싸웠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요동성은 요동 방어의 핵심이자, 많은 군량이 보관된 곳이다. 따라서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되찾기 위해 적극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당군도 이 곳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셋째, 당군이 천산산맥을 넘어, 고구려의 후방을 치려는 시도를 했다가 고구려군에 의해 좌절되었을 가능성이다. 당군은 계필하력의 군대 외에 다른 군대를 보내 직접 오골성을 공략하려고 천산산맥을 넘으려 했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요동성으로 퇴각했을 것이다.14) 넷째, 고구려의 성들은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그물망처럼 연결돼 한 성이 함락되더라도 주변의 성에서 협력하면 적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d동성 주변에 작은 성이 있는 만큼, 당군이 이 성들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떠한 가능성으로 보든, 요동성은 함락되었지만, 고구려군은 거센 반격을 통해 당군을 요동성 주변으로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연개소문은 전쟁을 장기전으로 전환시켜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➂ 주필산 전투와 안시성 대첩
고구려가 당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를 꼽으라면 단연 안시성 전투를 꼽는다. 물론 이는 틀린말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다. 바로 주필산 전투이다. 주필산 전투의 승리가 있었기에 안시성 대첩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부터 이 두 전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A. 고구려 15만의 지원군을 지휘한 사람은 누구?
백암성을 점령한 당군은 건안과 안시 두 곳 중 어느 곳을 칠까 논의 끝에 안시성을 치기로 하였다.15) 안시성이 공격당할 위기에 처하자, 연개소문은 대로(大盧) 고정의(高正義)와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에게 15만 대군을 주어 구원하게 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필자는 고연수와 고혜진이 고정의의 말을 듣지 않고, 당군을 공격하였으나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당 태종이 15만의 고구려군을 풀어주었다고 하였다. 필자가 왜 갑자기 앞에 말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바로 이 내용이 지금 말할 주필산 전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온 고정의, 고연수, 고혜진은 작전 회의를 하였다. 고정의는 안시성과 연계하여 지구전을 펼치자고 하였으나, 고연수와 고혜진은 속전속결을 원했다. 그런데 당군 또한 속전속결을 원했다.16) 그래서 당은 고구려군을 유인하였고, 함정에 빠진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군을 뒤쫓다가 당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퇴로마저 차단되자 고연수는 고혜진과 함께 당에 항복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항복한 고구려군을 처리하는 당군의 대응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욕살 이하 추장 3,500을 가려내어 군직을 주어 당나라 내지로 옮기고, 말갈인 3,300명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는 평양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사망자와 얼마의 병사가 항복했는지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가 크다.
『구당서』를 보면 사망자 1만명에 포로가 15만 6,800명이라고 기록되는데, 이 기록은 의심이 든다. 『구당서』에 따르면 당군은 6,800명의 포로를 처리하고 나머지 15만 명은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건안성과 신성의 10만 대군이 무서워 안시성을 공략하려 한 당군이 15만이나 되는 포로를 그냥 놓아주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정신이상자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이 기록은 당군의 조그마한 승전을 과장하기 위함이다. 실제로는 포로 6,800명에 고구려 지원군 15만명을 단순히 합산한 수치를 모두 항복했다고 표현한 춘추필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전군이 포로라는 것은 지휘부 전체가 적과 내통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신당서에는 항복한 고구려군이 3만 6,800명이라고 기록했는데, 이 기록 또한 3 만명의 고구려군을 다시 돌려보냈다고 씌여있다. 이 또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신당서 고려전에 기록된 고연수군을 포위한 숫자가 3만명이었다.17) 그런만큼 당군이 3만의 고구려군을 순순히 풀어줄 수 없다. 결국 당군의 유인 포위섬멸 작전에 당한 고구려군의 실질적인 병력 손실은 3만 6,800명에 불과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당나라 좌무위장군 왕군악(王君愕)의 죽음이다. 왕군악은 고연수가 항복한 6월 23일 고구려군과 맞서 선봉에 나섰다가 진영이 무너지면서 위기에 몰려 싸우다 죽었다. 그럼 왕군악의 부대를 격파한 부대는 어떤 부대일까? 항복한 고연수의 부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안시성의 부대는 아니다. 안시성은 방어하는데도 힘을 썼는데 무슨 여유로 적 그것도 3만이나 되는 부대를 공격할 수 있었을까? 결국 왕군악의 부대를 격파한 부대는 포위당해 항복한 고연수의 군대를 구원하러 온 고구려 지원군의 본진일 것이다. 당군에 의해 풀려났다고 기록된 고구려군은 실상 고구려 지원군 본진의 구출작전에 의해 탈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 지원군의 본진을 이끈 장수는 누구일까? 흔히 고구려 지원군의 지휘자를 고연수와 고혜진으로 보지만 그들의 품계를 살펴보면 고연수는 위두대형 이대부(理大夫) 후부군주, 고혜진은 대형 전부군주로 이 품계는 고구려 관등 중 각각 5위와 7위에 해당된다.18) 그런데 이들이 과연 고구려 병력의 4분의 1인 15만 대군을 지휘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이를 지휘하려면 위두대형보다 높은 대대로, 태대형, 주부, 태대사자가 직접 나서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고정의의 벼슬이 대로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로는 대대로로 볼 수 있다.19) 대대로는 고구려 최고의 관직 겸 관등이다. 그러므로 고연수는 지원군의 선봉장일 뿐이며, 사실 많은 수의 지원군을 이끈 사람은 고정의이고, 포위된 고연수의 3만의 군대를 구원한 것도 바로 그라고 볼 수 있다.
B. 주필산 전투의 승리
주필산 전투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온게 없다. 개설서에서는 그냥 지구전을 펼쳤다고 밖에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주필산 전투에 대한 자료가 있으니 바로 『한단고기』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보장왕 8년조 〈사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유공권의 소설에 가로되,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을 합친 군대가 40리에 뻗치었는데, 이세민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했으며, 또 ‘육군(陸軍)은 고구려의 승리가 되어 거의 떨치지 못했고, 염탐하는 자가 고하기를 이세적이 거느리는 흑기군이 포위되었다고 하자. 이세민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다. 비록 스스로 빠져나왔다고 했으나, 위험함이 저와 같았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이를 언급하지 아니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일을 감추기 위함이 아닌가?”
『한단고기』를 보면 삼국사기에 비해 주필산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을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 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으며, 병력을 종횡무진으로 풀어놓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중략) 고연수는 대로 고정의의 계략에 쫓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ㄱ 하자 이세민은 백 가지 계략으로 적군을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 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중략)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英公)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 군기 색)로 에워싸였다고 보고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 해도 위험은 이와 같았다.”
이 두 사서를 보면 주필산에서 큰 전투가 있었으며, 당군이 큰 손상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당에 항복한 고연수가 『한단고기』에서는 당의 포로가 되지 않았을 뿐 더러, 오히려 게릴라전으로 당군을 크게 괴롭혔다고 씌여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주필산 전투로 요동지역에서의 당군의 활동이 제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군이 이 때부터 승기를 잡은 것은 확실하다 하겠다.
C.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지구전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주필산에 오래 머문 당군은 결국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 방어선의 중심인 안시성20)을 함락시키려 하였다. 안시성을 방어하고 있던 성주는 양만춘 장군이다. 당군은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포차를 집중 배치해, 비오듯이 돌을 날려보냈으나, 포차공격을 받은 안시성은 성주와 군사,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목책을 세우고,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만들게 하였다. 이는 토산 위에서 성을 공략하겠다는 작전이었다. 토산을 쌓기 위해 당군은 60일간 무려 50만 명의 공력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군의 희망이었던 토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성벽쪽으로 무너져 안시성 성벽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러자 안시성의 군사 수 백명이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아가 토산을 점령하고 참호를 파서 길을 차단한 다음 불을 놓고 방패를 둘러처셔 수비를 굳혔다. 애써서 만든 토산이 점령되자, 당 태종은 패전의 책임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부복애를 죽였고, 도종 이하 군관들이 맨발로 용서를 빌어야 했다. 토산을 빼앗으므로써 우위를 차지한 고구려군은 고정의군과 연계하여 당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세민은 전투의 패배로 더 이상 안시성을 공략해 빼앗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자신의 눈이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21) 가지고 온 양식이 다하고, 추워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세민은 눈물을 머금고 철군을 결정하였다. 토산 쌓기에 시간 낭비를 하고,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하지 못한 당군은 고구려를 정복하여 자신들만의 제국을 건설하려다,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고 패배의 쓴 맛을 맛보았고, 결국 철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당군을 고이 보낼 고구려군이 아니었다.
6. 연개소문의 오랜 숙원: 중원 정복
➀ 당은 왜 요택으로 퇴각했을까?
9월 18일 퇴각을 결정한 당군은 9월 20일, 요동성에 도착했고, 21일 곧장 요수를 건넜다. 당군은 쫓기듯 신속히 퇴각했다. 그런데 당군이 퇴로로 삼은 오택은 건너는데 매우 힘든 길이었다. 왜 당군은 요택을 퇴로로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이 길이 바로 영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당군이 요택을 퇴로로 삼은 것은 고구려군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군이 퇴각하자, 고구려군은 곧바로 당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군이 퇴로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3가지였으니 요택으로 가는 것과, 요하 하구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는 것, 요동도행군이 왔던 요하 중류를 건너 통정진을 지나 퇴각하는 길이 있다. 그런데 요하 하구에는 건안성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요하 중류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당시 당군은 군량이 떨어지고, 고구려군의 추격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하루 빨리 당의 영토로 들어가야 했다. 결국 당군은 퇴각로조차 가장 어려운 요택을 퇴각로로 결정하였고 이 또한 고구려군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요택이 어떤 땅이길래 중원 사람들에게 공포의 땅이었을까? 요택은 200여리에 걸친 진흙펄이다. 수레와 말이 통과하지 못하는 죽음의 늪지대였다. 요택을 건너기 위해 장손무기는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삼았다. 이세민 또한 이 곳을 건너기 위해 직접 말에다 통나무를 메고, 작업을 할 만큼 요택을 건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세민은 요택을 건너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한다. 헌우란에 이르러 말이 수렁에 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거의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당의 용장 설인귀(薛仁貴)가 달려아 이세민을 구하여 말을 갈아태우고, 전군(前軍)의 선봉 유홍기(劉弘基)가 뒤를 끊고 혈전을 벌여 당태종이 가까스로 달아났다고 한다. 『성경통지(盛京通志)』해성고적고(海城古蹟考)의 ‘당 태종의 말이 빠진 곳’이란 것이 곧 그곳이니, 지금까지도 그 곳 사람들에게 “말이 수렁에 빠지고 눈에 화살을 맞아 당태종이 사로잡힐 뻔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➁ 연개소문, 만리장성을 넘다
당 태종이 급하게 퇴각을 한 이유는 앞서 설명한 식량부족과 고구려 추격 뿐 이었을까? 사실 당 태종이 퇴각하기로 결정을 한 결정적 이유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당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당을 공격한 정식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연개소문의 중원 공략을 허구적인 기록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에서 만리장성을 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이미 고구려는 1세기, 모본왕 때 만리장성을 넘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략하였으며, 광개토태왕 때는 연군(북경지역)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당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지방에 진출했다는 기록은 『조선상고사』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데, 『조선상고사』는 『해상잡록』, 『성경통지』 등의 자료를 근거로 연개소문의 중원 진출사를 조명하였다. 『조선상고사』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북경지방에 고구려 관련 유적이 출토되었다. 이는 『조선상고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 ․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상곡, 지금의 하간)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治:당 고종)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당태종은 곧 임유관(臨渝關:산해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중략)
“연개소문이 지나(支那:중국)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朝陽門)외 7리지(里地)의 황량대(詤糧臺)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 ․ 직예(直隸:하북성)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懸)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의 고려성 회고시에 ‘외딴 곳 성문은 활짝 열렸는데, 흰 구름이 성가퀴에 걸렸어러, 물이 맑아지는 해 잠겨 있고, 모래는 어슴푸레 별빛이어라. 북소리 구름 밖에 퍼져나가고, 갓 핀 꽃들이 땅을 장식했으려니, 문득 세상은 변하여, 다시는 풍악소리 울리지 않네. 가시덤불 먼지 가운데, 길가에 쑥대만 우북. 먼지 속엔 비취가 묻혔는데, 거친 무덤 위엔 소들이 오가누나. 당년의 일을 이제와 무어라 하랴, 소조한 가을 기러기 줄지었구나’라고 하였는데, 이 시로 보건대 연개소문이 한 때 당의 땅에 드나들며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서 북소리가 구름 밖에까지 울려퍼지고, 땅은 온통 꽃밭인데 거리가 번화하고 음악소리 유량하며, 비취와 보옥 등이 넘쳐나서 새로 점령한 땅의 풍성함을 자랑하던 것을 읊은 실록(實錄)으로 볼 수 있겠다.…”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지역 깊숙이 들어갔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북경시 순의현의 고려영(高麗營) 유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채호는 고려영은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성22)으로 보았다. 『북경 순의현지』에는 당나라 때 고구려인이 이주해왔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있다. 연개소문이 북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을 넘어야했다. 그런데 당시 만리장성은 그리 대단한 장벽이 아니었다. 5호 16국시대, 남북조 시댕 많은 북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만리장성같이 일직선상에 쌓은 성은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적군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성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기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었을 것이다.23) 최근 북경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북경 동북쪽의 황량대에서 ‘고려포보(高麗鋪堡)라 새긴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는 연개소문의 중원지역 공략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 정복을 운운하던 당 태종이 이런 쇼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적어도 1일권 안에 있었음을 반증한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군이 활동하던 것은 북경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있어 보인다.24)
➂ 당 태종의 항복
고당대전의 승자는 고구려였다. 고당전쟁에서 패한 당나라는 고구려의 추격을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퇴각하였다. 그런데 학계에서 아직 정식사서로 인정받지 못한 한단고기에 놀라운 내용이 실려있다. 바로 당 태종의 항복이 그것이다. 당 태종의 항복...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당 태종의 항복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안타깝게 찾아 해매던 기록이 바로 이 「태백일사」라 한다.25)
“겨울 10월, 당군은 포오거(浦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전군이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많은 군사가 죽었다. 그래서 불을 길에 지피고 머물렀다. 그 때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급히 추격했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에서 하간현(河間懸)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갔다. 당군은 갑옷과 병기를 버리고 도망가 마침내 역수(易水)를 건넜다. 그러자 막리지는 고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涌道城)을 개축케 했는데, 지금의 고려진(高麗鎭)이다. 또 군사를 나누어서 일부는 요동성(지금의 昌黎:창려)을 지키게 했고, 일부는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했으며, 또 일부는 상곡(上谷:지금의 대동부)을 지키게 했다.
궁지에 몰린 이세민은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했다. 막리지는 추정국, 양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長安)에 입성한 후 세민의 항복을 받고 산서성(山西城) ‧ 하북성(河北城) ‧ 산동성(山東城) ‧ 강좌(江左:양쯔강 북쪽)를 이양받았다. 그결과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밖에서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요서에 함께 있게 되었다.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한단고기』의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단고기』를 후대에 조작된 위작이라고 평한다. 그리고 당시 정황으로 봐서 당의 침략에 방어하기에만 급급하던 고구려가 어떻게 당 태종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냐며, 『한단고기』의 당 태종 항복 기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연개소문에게 궁복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당 태종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고구려 사신이 가지고 온 글 또한 궤변으로 가득찼음, 당나라 사신을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고구려가 전승국으로서, 당에게 전쟁 배상을 물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승국인 고구려가 패전국인 당으로부터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당의 영토를 이양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노릇이다. 즉, 당 태종의 항복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구려가 당의 영토를 이양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였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혹시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지는 않았을까? 물론 이 기록은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려는 저의에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그들의 기록대로 교만하고 오만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 태종이 고구려에 항복했다는 전설이 있다. 바로 요동성 해성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가 그것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당 태종의 동정(東征)시 이곳(海城)의 서남쪽에 다다랐을 때 고려대장 연개소문은 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당태종을 잡으러 오고 있었다. 이세민이 당황하여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는데, 연개소문이 긴 창을 곧추 세우고 뒤에서 추격을 해왔다. 어느 순간 말이 멈춰서서보니 앞에는 넓고 깊은 진흙뻘강인 어니하(淤泥河)가 있었는데, 당태종은 우습게 생각하고, 설마 당나라가 운세가 다해 고구려에 물려주고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고구려 장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려는데 “이세민이다”는 함성과 함께 들리면서 쫓아 오니 말의 네 다리가 세 자도 넘는 진흙뻘강으로 빠져들었고,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칠 수록 더욱 깊게 진흙수렁 속으로 빠지게 되어 연개소문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이세민을 보고, “당나라 왕아! 네가 항복을 하면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노라!”하자, 당태종은 이 말을 듣고, “당나라의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고 진귀한 보물은 황실에 가득한데 상은 무슨 상을 준단 말이냐? 내 비록 오늘 지형을 잘 살피고 준비를 못하고 추격을 당해 이 곳까지 와 진흙구덩이에 빠졌지만, 백만당병을 거느리고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연개소문이 활과 화살을 잡고 당태종을 조준하고, 수하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명한 뒤 당왕에게 항복문서를 쓰리고 명령했다. 만약 항복문서를 쓰지 않는다면 화살 한 방에 죽을 것이다 하니, 당왕은 항복문서를 앞에 두고 통곡하였다. 이 때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벽력과 같은 함성이 들리니, “왕께서는 마음 놓으십시오, 신(臣) 설인귀가 구하러 왔습니다. 연개소문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여, 보니 흰 옷과 흰 갑옷을 입고26) 손에는 긴 창을 꼬나들고 젊은 장수가 산 위에서 말을 달려 나는 듯이 달려와서 연개소문의 10만 대군을 물리쳤다. 연개소문은 옷을 붙잡고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을 쳤다. 설인귀는 왕을 구하려고 장창으로 말의 배 밑을 푹 찔러 양 어께로 힘을 써서 사람과 말을 강위로 끌어 올렸다. 당왕은 기뻐하며 젊은 장수에게 유격장군으로 삼고 훗날 안동도호부에 봉하고 요동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어니하(淤泥河)27)에서 왕을 구한 설인귀>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소설은 한족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설인귀의 호령 한마디로 연개소문의 1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말도 안되는 결말을 내리고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전설이 남아, 소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이 역대 최고의 황제로 숭상하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전설이 내려올 수 있을까? 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넒은 중원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 태종의 항복기사를 다룬 『한단고기』는 그 내용 자체가 역사적 사실면에서 세인으로부터 찬반론을 일으키고 있고, 요동침공 관련 기사에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 태종과 요동침공 관련 기사의 석연찮은 태도나 삼국사기의 미묘한 의문 등을 보건대, 『한단고기』의 관련 기사를 무시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검토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고당대전이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비단 고구려와 당뿐만 아니라 e아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이 패전함으로써, 동방지역(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동쪽지역)을 직접 영유하려던 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문화권, 당 중심의 천하질서로 묶으려던 당의 계획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고당대전의 승리로, 고구려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동방의 패자임을 실력으로 입증한 셈이다. 고당대전의 승리는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고당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이야 말로 “조선 4천년 역사상 첫째 가는 영웅”이라 할 만하다.
7. 연개소문, 중국의 전설이 되다.
당 태종의 침략을 물리치고, 패주하는 당 태종을 추격한 연개소문은 그가 죽은 후, 많은 중국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연개소문이 얼마나 무서우면, 우는 아이에게 “연개소문이 온다”고 말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일까?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에 어김없이 등장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마침내 중국의 전설이 되었다.
➀ 전설의 영웅,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등 확인된 종류만해도 네 종류나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28)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푸른 빛의 얼굴 화장은 위엄이 있는 그의 모습과 아울러,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경극을 보면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 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일본군에게 있어 진주성 대첩은 치욕스러운 전투이고, 그런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을 좋게 볼리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심리를 잘 다룬다 하겠다. 연개소문을 두려워 한 그들의 심리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전설의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사용했다는 날아다니는 칼 ‘비도(飛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➁ 연개소문의 비도(飛刀)와 설인귀의 신전
앞에서 연개소문의 상징 다섯자루의 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은 고구려 남자들의 일상생활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으니 바로 ‘비도(飛刀)’이다. 송원 때의 『사략』에는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생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자,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장에서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경극 <독목관>에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칼’을 사용하는 연개소문과 맞붙는 설인귀의 무기는 신통력 있는 화살, 신전(神箭)29)으로 이는 무기를 통해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립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연개소문의 ‘비도’는 권위용이 아닌 실전용이었다. 사략은 연개소문에 대해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赤虯馬)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매고,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실전에 나섰을 때 모습으로 여차하면 목숨을 잃는 전장에 나서면서 거추장스런 권위용 칼을 다섯 자루씩 지고 나갈 장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다섯 자루 칼이 실전용이라는 것은 이 칼이 ‘비도’라는데서 알 수 있다. 경극에서는 날아다는 칼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칼이라면 한 자루면 충분하지 다섯 자루일 이유가 없다. 비도는 고구려 고유의 ‘비도술(飛刀術)’, 또는 ‘비검술(飛劍術)’을 위한 무기인 것이다.
➂ 공포의 고구려 비도술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이하 『고사』로 약칭)는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된 사회이다. 『고사』에 실려있는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이란 그림은 연개소문이 사용했던 비도술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측 위쪽에 ‘천자’라고 쓴 당 태종이 있고, 아래측 좌측에 신전을 든 설인귀, 우측에 비도를 든 막리지 연개소문이 잇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화살에 맞서 칼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일부 전통무예 연구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하던 검이나 도를 던지는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또는 비검술)의 실상이다. 그림에서 연개소문이 던지는 칼30)은 신통력으로 날아다니는게 아닌 그의 무술 실력 때문이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 ․ 당군은 고구려 장수들의 ‘비도술’에 혼이 빠졌을 것이다. 옛 싸움에서 장수들의 무예 실력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장수들의 무예가 그 군대의 승패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창이나 칼을 가지고 덤빈 중국 장수들은 열이면 열 고구려 장수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이나 칼이 닿기도 전에 묵직한 칼이 번개처럼 목을 관통했거나 갑옷을 뚫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경극에 묘사된 것처럼 연개소문의 비도술에 혼쭐이 났으며, 그 어느 장수도 그에게 맞설 수 없었다. 비도술은 연개소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고구려 장수나 전사들의 검술이었고, 연개소문은 비도술에 가장 정통한 무장이었을 것이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고사』에 묘사된 연개소문의 비도-
➃ 청룡의 화신, 연개소문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의 복장을 홍포(紅袍)로 묘사한다. 『사략』에서 연개소문의 복장을 ‘진홍색 사복(獅服)’으로 묘사한 것이나,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 연개소문을 ‘문무에 능한 홍포장군’이라고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중국인에게 있어 붉은색은 각별하다. 그들은 광적으로 붉은 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경극에서도 붉은 색은 긍정적인 인물을 가리키고, 검은색은 지혜로운 인물, 푸른색과 녹색은 민간의 영웅호걸, 금색과 은색은 신이나 귀신을 나타내는데, 연개소문이 홍포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설인귀가 백포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다.
경극 <분하만> 서두를 보면 연개소문이 영혼으로 등장해 “나는 본래 청룡으로서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라며 자신을 청룡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설인귀는 백호(白虎)로 등장한다. 청룡과 백호는 풍수나 고대 천문학의 사상(四象)에서 동쪽과 서쪽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동쪽을 지키는 사방신으로 승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중원의 서쪽과 동쪽이 당과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온 군영에서 두 장군(연개소문과 설인귀)을 환호하니, 온 세상이 두 사람을 강하게 하네/ 당조(唐朝)가 이 두 장군을 얻는다면 천하가 태평지 않은들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의 신과 같은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그를 중국의 장수로 회유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마음이 동쪽을 지키는 청룡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경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청룡의 화신이라 평한 것이다.
연개소문, 그는 포악한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구국을 위해 당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임금을 죽이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이 아닌 고구려를 구하기 위해 깊이 고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놀라운 비도술로, 중국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당 태종을 추격하여, 당 태종이 벌벌 떨게 만든 고구려의 영웅이었다. 그는 당의 야욕을 물리침으로써,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구축한 일세의 쾌걸이었다.
연개소문은 당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당 태종의 강병과 맞서 승리를 거둔 것은 비단 고구려와 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이 연개소문에게 패전함으로써, 한반도를 직접 영유하려던 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고당대전의 고구려 승리는 비단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승리이다. 고당대전의 승리로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천자국임을 실력으로 입증한 셈이다. 당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써, 동방지역을 구하고, 동방에서의 천하질서를 구현한 연개소문이야 말로 우리 역사의 위대한 영웅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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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21세기 무인
첫댓글 스크랩해갑니다. 그런데 인용자료를 보니 그다지 주목할만한 것들은 없는 것 같군요. 남들에게 설득력을 더하려면 인용자료는 보다 좋은 것들을 구해서 써야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