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의 인연
나는 커피 한모금을 삼킨다. 향긋한 커피가 목구멍을 넘어가며 야릇한 만족감이 온몸에 서서히 퍼진다. 나는 금방 청소를 끝낸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참빗질하여 본다. 어데 한곳 미진한데가 없도록 알른알른 닦아야 직성이 풀린다. 눈에 보이는 오물은 씻고 닦으면 되니깐. 그러나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물 때문에 황금더미우에 앉아서도 최고 의 불행을 겪고있는 사례들이 수없이 많고 많다. 그러한 정신적인 오물은 어떠한 세척제에도 씻겨 나가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 왔다고 나름대로 만족하고 살았던 녀자이다. 내 나이 오십, 직장에서도 정년퇴직을 했고 딸자식은 올해 명문대학을 졸업한다. 꾸리고 있는 미용원도 잘 운영되고 있다. 물질적인 욕구만족으로부터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있는 나는 서서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나는 커피잔을 놓고 서랍을 연다. 거기에서 나는 책가위에 <<무산계급문화대혁명 만세!>> 라고 쓴 퇴색한 오랜 목책을 꺼낸다. 실로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목책이였다. 80년대의 어느날, 5.1절을 쇠려고 친정에 갔던 나는 어머니를 도와 창고를 정리하다가 이 일기책을 발견하였던것이다. 그것은 내가 70년대에 쓴 일기였다.일기책을 뒤져보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내 생활에는 새하얀 얼굴에 차거운 표정으로 말이 없는 한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세월과 더불어 내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던 그 남자,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예지로 반짝이던 새까만 눈동자의 그 남자는 시시로 내 마음속에 찾아와 나를 추억의 두메산골에사정없이 내동댕이친다. 지금은 회억하기조차 싫은 기억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지식청년들은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교시에 따라 사면이 산으로 꽉 막힌 두메산골 집체호로 내려갔다. 농촌에 내려가자 곧 <<모택동사상선전대>>의 대원으로 뽑혔던 나는 공사에서 꾸린 무용학습반에서 배운 짧은 밑천으로 춤을 창작하대원들에게 배워주군 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그 남자를 만났다. 바이올린을 잘 켰던그 남자는 선전대의 대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창작한 춤동작들은 그 남자에게 검사를받고 통과되여야만 대원들에게 배워주는 단계에 들어갔다. 련습하는 중간중간에 나는 내 뒤를 쫓는 그 남자의 시선을 느낄수 있었다. 웬 영문인가고 머리를 쳐들어 볼 때마다그 남자의 불타는 눈매와 마주칠수 있었다. 20살의 묘령의 처녀가 사랑을 몰랐다면 지은 말이 안되지만 그때 나는 정말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하고있었다. 철이 늦게 든 탓일수도있지만 그보다는 그 시절에는 사랑이 금지구역이였던것이 더 큰 까닭이였을것이다. 다만 남자들과 어쩌고 저쩌고 하면 집에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다는것만은 분명히 알고있었다.
그때 우리 집체호에 있던 순희는 생산대의 한 남자와 밤에 방에서 단 둘이 앉아 이야기를 했다는 리유로 그 남자가 생산대에서 비판을 받을 때 함께 욕을 먹어야 했고 그 후부터는 얼굴조차 들고 다니지 못했다. 다른 생산대의 한 쳥년은 하향지식청년 녀자를 임신시켰다는<<죄>>로 감옥에 가기까지 했다. 그때의 나에게 있어서는 사랑은 다치면 터지는 폭탄이나
다를바 없었다. 아버지가 우파에 걸려서 고생하였고 그 미열로 나도 학교에서 등기표를 때마다 조직에 교대할 문제란에는 항상 아버지가 우파에 결렸었다는것을 상세하게 적어야 했었다. 선생님의 입에서 한번씩 우파분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 가슴에서 커다란 돌멩이가 떨어지는듯하여 꼼짝달싹도 못하는 환경에서 자랐던터라 우에서 하라는대로 하는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자위본능이 몸에 배였었다.
련습은 밤 12시까지 진행되였다. 다른 사람은 죄다 집으로 다녔지만 나는 집체호가 먼탓에 대대식당에서 먹고 자군 하였다. 어느날 오전, 련습이 끝나고 다들 집에 가려는 순간그 남자가 나를 불렀다.
<<선이, 점심을 먹고 일찍 나와 뭘 좀 토론하기요.>>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련습실로 나갔는데 거기에는 그 남자가 아닌 다른 한 사내가 걸상을 마주붙여놓고 누워자고있었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나에게 호감이 있었던 그 사내는 그 남자가 나한테 접근하는것을 방해하려고 점심마저 굶으면서 그곳에 누워있었던것이다. 그 남자의 뜨거운 시선은 항상 나를감싸왔지만 <<남자면 절대로 단독으로 만나서는 안된다.>>는 나만의 <<규칙>>과 다른 사람의 끈질긴 방해 때문에 나와 단독으로 만나려는 그 남자의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
갔다. 다른 사람들의 의식과 재래적인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그 남자의 개성은 녀자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어느날 신나게 새장구를 치는 그 남자의 모습에 문득 눈길이 간
나는 웬 일인지 가슴이 활랑거렸다. 잠자던 녀자가 깨여나는 순간이였던것이다. 나는 저도모르게 콩닥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그러안았다. 그러나 사랑은 자본주의생활방식이고 남자는 절대로 가까이 하면 안된다는 신념같은 결의는 그처럼 감미롭고 그처럼 황홀하였던나만의 감수를 꽁꽁 꿍져서 누구도 모르게 시궁창에 처 넣었다.
공연하러 다니면서도 그 남자가 의도적으로 나와 나란히 걸으려고 옆에 오면 나는 부랴부랴 다른 사람들속으로 피해가군 하였다. 지금 같으면 례의를 차려서라도 몇마디 할수 있는 시간은 줬으련만 한마디 할 틈도 허락하지 않고 총알처럼 피해야 마음이 놓였던것이다. 같이 련습할 때에도 그의 눈길은 항상 나를 찾았고 어두운 밤에 공연을 끝내고 돌아올 때에도나를 찾군 하였지만 나를 만나려는 그 남자의 모지름은 한번도 이뤄지지 못하였다.
한 단계의 공연이 끝나던 날 총결을 지으면서 오락모임이 있었다. 공연을 하면서 목이 쉬여 말도 할수 없었던 나는 내 차례가 되자 춤을 추게 되였다. 신나게 춤을 추고 자리에돌아와 앉았을 때 친구들이 눈을 끔벅거리며 신비스럽게 속삭거렸다.
<<얘, 네가 춤출 때 대장이 새장구치는 모습이 꼭 마치 미친 사람 같더라.>>
나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게로 먼저 나와 내가 자는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식당휴식실에 들어서서 불을 켜기 바쁘게 그 남자도 따라 들어왔다.
그 남자는 전등을 꺼버리고는 나의 손을 꽉 잡았다. 미처 어쩔 사이도 없었다. 나는 필사의 힘으로 그 남자를 밀쳐버리고는 스위치를 당겨 불을 켰다. 그때 항상 우리를 감시하던 그 사내가 그 남자의 뒤를 밟았던지 곧 집안에 들어서는것이였다.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은 작은 촌마을에 일장풍파를 일으켰다. 대대지도부에서는 그 일에 대해 중시를 돌렸고그 남자는 비공개적인 비판을 받게 되였다. 그런데 나를 보호하기에 급급했던 나는 아주 열정적으로 그 남자를 비판하는 선두자로 나섰다. <<이 사람은 자산계급의 부화방탕한 사상에 물젖어 모택동사상선전대에 수정주의기풍을 ….>>지도부에서는 나를 계급투쟁관념이 분명하다고 칭찬하였다. 하다보니 나의 한심한 의식은 인생의 회한을 남기는 일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보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후에 일어났다.대대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죄명은 생산대의 삼바를 훔쳤다는것이였다. 사실 그때는 일할 때 모두 생산대의 도구를 리용하였기에 일이 끝나지 않은 한 도구를 집에 가져왔다가 식사하고 다시 갖고나가 일할수도 있고 며칠씩 집에 보관하는것쯤은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던 그 세월에는 사실을 따지거나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비판하라면 비판하고 투쟁하라면 투쟁하는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였다.
황차 우리는 명색이 지식청년인데 농민들의 재교육을 받는것보다 투쟁마당에 나서는 선봉대의 역할을 하는것이 주된 임무였다. 그때에도 나는 발언하였다.
<<작디작은 검은 손을 뻗쳐 사회주의 담벽을 허물고…>>그때 머리를 숙이고 초라하게 서 있던 그 남자의 백지장처럼 창백하던 그 얼굴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에 대한 다른 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 남자가 자기를 따르던 한생산대에 있는 어느 처녀를 집에 데리고 가서 마구 뒹굴었다는둥, 그 처녀가 임신했는데그 남자가 차버렸다는둥….사람들은 그 남자가 타락하였다고 말하였다. 그후 그 남자가온 집 식솔들과 같이 돈화에 이사 갔다는 소문을 들은후 나는 다시는 그 남자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러 나는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리고 출근하는 일에 바쁘다보니 여가없이 헤매였다. 그런데 십년도 더 지난 그 어느날 무심결에 일기책을 들었던 나는 갈피갈피에 나를 추구하는 그 남자의 행동들은 자본주의사상에서 나온것이고 나는 마땅히 그 남자의 자산계급사상과 견결히 투쟁해야 한다는 내용이 빼곡이 적혀 있는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 남자의 사랑의 표현은 그처럼 순수했고 용감했지만 그 만이 가진 그
인간적인 개성의 표현은 그를 자산계급사상에 물젖은 사람으로 만들었던것이다.
나는 어제날의 부끄러움과 자책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자기를 안위해보기도 하였다. 나의 잘못만이 아니라고, 나를 그렇게 만든것은 시대였다고, 나 말고도 더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다고, 그러나 책임을 시대에다 떠 넘기려고 애썼지만 나의 량심은 이를 용허하지 않았다. 내 량심의 법정은 시도 때도없이 나를 심판하면서 그때 그 시절의 세절들로부터 그 남자가 받았을 심리적 타격과 갈등까지 나한테 똑똑히 보여 주는것이였다.
그때 설 쇠러 집에 간 나를 기다리느라고 그 남자는 며칠씩 빈 식당에 있으면서 뻐스가 올때마다 신작로에 나가 기다렸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남자를 피하여 에돌아갔다.
그때 그 남자의 마음은 얼마나 애탔을가?<<식당사건>>이 있던 그날도 그냥 내 손만 잡았는데 나는 그를 매몰차게 밀쳐버렸던것이다. 원망과 안타까움이 서린 눈길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그 남자, 방해군의 출현으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던 처진 그 어깨, 지금은 그 남자의 그 어깨에 매달려 울고만 싶은것이 나의 심정이다.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자고 때린 놈은 발편잠 못 잔다.>>는 속담이 있다. 그때 그 남자를 비판하던 나의 목소리는 그대로 마디마디 비수가 되여 그의 가슴을 란도질했을것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나 자신을 용서할수가 없다.
지금 그 남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내 마음에 흐르는 반성의 눈물이 이제라도 그 남자의 아팠던 상처를 쓰다듬어 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나의 이 애절한 뉘우침이 메아리로 되여 그때의 그 사람한테 날아가 늦은 용서나마 받고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이 마음껏 사랑하고 보다 좋은, 보다 인정이넘치는,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