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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금(張嶔)
1. 가정제(嘉靖帝)의 생각
선덕(宣德)연간부터 명나라의 최고권력은 삼각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황권의 아래에 문관집단(文官集團)과 환관집단(宦官集團)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특히 문관집단은 내각제도가 성숙되면서, 발언권이 점점 강해져서 황권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제약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같은 문관집단에 속하는 언관(言官)세력의 발언권도 크게 높아졌다.
이런 행정전통을 가정제(嘉靖帝) 주후총(朱厚㷓)은 우습게 보았다. 그의 눈에, 무슨 문관이든 환관이든 내각이든 도찰원이든 사례감이든 모조리 황제의 노재(奴才)인 것이다. 착실하게 말만 잘 들으면 되는 것이다. 국가대사는 그저 황제인 그 본인이 혼자서 결단을 내리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들은 열심히 집행만 하면 천하는 태평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주후총은 일련의 조치를 취한다: 먼저 환관집단을 억누른다. 사례감의 실권을 약화시켜서 완전히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각지방에 파견된 태감들을 불러들이고 자리를 없앤다. 내각에는 밀봉전주권(密封專奏權)이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권력이 커진 것같았지만, 몇 대의 내각 각신들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언관집단은 가장 참혹했다. 누구든지 상소를 올려 그의 화를 돋구기만 하면 죽을 지경으로 얻어맞거나, 황량한 변방으로 쫓겨가야 했다. 가정연간에 상소를 올렸다가 처벌받은 언관들만 전후로 수십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언관집단들도 집단적으로 벙어리상태가 되어버린다.
특히 심한 것은 주후총의 정치적 수완이다. 신하들을 부리는 것을 마치 귀뚜라미를 데리고 노는 것처럼 했다. 대신들이 서로를 공격하게 하고, 그 후에 필요에 따라 어느 한쪽의 손을 잡아준다. 정치투쟁은 계속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자신은 황위에 편안히 앉아서 구경하면서, 권력게임을 즐겼다.
이렇게 통치하면서 치국의 성과도 나타났다: 주후총이 집권한 전반기는 명나라가 극히 번성한 기간이었다. 국가재정도 안정되고, 쌓아둔 물자도 풍족했다. 매년 백은 500여만냥이 남았고, 양초는 10년을 충분히 쓸 정도로 비축되어 있었다. 민간경제도 활발하여, 동남지방의 상품경제는 크게 발달한다. 그리고 가정4년(1525년)부터 명나라의 선과사(宣課司)는 정식으로 세금을 백은(白銀)으로 거둔다. 이 조치의 결과로 백은은 정식으로 법정화폐가 되었고, 이는 경제적인 의미가 아주 컸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가장 풍성한 것은 문화적인 성취였다. <삼국연의와 <수호전>이라는 두 명저가 간행출판되었고, <서유기>와 <금병매>오 이 시기에 세상에 나온다. 양명심학(陽明心學)이 널리 전파되고, 유파가 많이 나타난다. 그외에 희곡, 회화 그리고 과학방면에서도 거장들이 나타난다. 이개선(李開先), 이시진(李時珍), 서문장(徐文長)등 일련의 빛나는 이름들이 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의 태평성대를 증명한다.
이상의 성취를 종합하면, 심기가 깊었던 주후총이 그의 원숙한 정치적 수완으로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하며, 문화는 번영한 대명제국을 만든 것이다. 제왕의 업적으로는 상당히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후총의 집권후반기부터 이렇게 한때 번성했던 대명제국은 돌연 급변과 동탕에 빠진다. 국가는 계속하여 쇠락하게 된다: 북방의 타타르(韃靼)가 돌연 침입하고, 동남의 왜구(倭寇)도 갈수록 창궐한다. 거기에 재정은 거의 붕괴되고, 지방에서 백성들의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 내우외환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주후총이 사망할 때인 가정45년(1566년)에 이르러, 거의 엉망진창인 지경이 되어 있었다. 같은 해 직신(直臣) 해서(海瑞)가 올린 <치안소(治安疏)>에 따르면, 백성들은 일찌감치 집집마다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고, 가정제 주후총에 대하여 일찌감치 불만을 품게 되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총명하게 머리를 굴려온 주후총이 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후세인들은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여 이렇게 공인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일평생 총명했던 주후총이 굳이 한 간신배에게 눈이 멀어서, 그가 이십년간 권력을 휘두르도록 방임했고, 그 결과 좋았던 강산이 엉망진창으로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오늘날에는 악명이 자자한 간신(奸臣) 엄숭(嚴嵩)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엄숭이 부담하는 것이 맞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그의 인생부터 얘기해보기로 하자.
2. 간신도 원래는 정파(正派)였다.
악명을 떨친 간신이 되기 전의 초기에 엄숭은 역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재능이 뛰어난 준걸이면서, 강정불아(剛正不阿)하는 양신(良臣)으로.
엄숭은 강서(江西) 분의(分宜) 사람이다. 그는 선비집안 출신으로, 인물도 청수하고 준수하였으며, 행동거지도 명사의 풍모가 있었다. 25살이 되던 해 즉 홍치18년(1505년), 이갑제이명(二甲第二名)으로 진사가 된다. 즉 전국에서 5위를 한 것이다(一甲 1,2,3등을 장원, 방안, 탐화라고 부르고, 그후 2갑제1명, 2갑제2명의 순서이다). 순조롭게 서길사(庶吉士)로 뽑히고, 그후 한림학사(翰林學士)의 관직을 수여받는다. 엄숭을 합격시켜준 스승(과거의 주시험관과 합격자간은 스승-제자관계가 된다)은 나중에 정덕(正德)연간에 권력이 조야를 뒤흔든 명신(名臣) 양정화(楊廷和)이다. 그러니 앞길이 보장된 터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다. 엄숭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시작은 멋졌으나, 타격은 청천벽력같았다. 정덕4년(1509년), 엄숭의 모친이 사망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엄숭의 반응은 아주 단순했다, 대성통곡을 한 것이다. 너무 슬퍼해서 큰 병을 얻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는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사직. 전도유망한 그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이런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날개돛친듯이 퍼져나갔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그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엄숭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가지고 있던 약간의 재산으로 고향에 집을 짓는다. 그리고 이름을 "검산당(鈐山堂)"이라고 짓는다. 그리고 처자식과 거기에서 생활한다. 하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세속의 일체의 다툼과는 벽을 쌓은 청빈한 생활을 보낸다. 그렇게 8년을 지낸다. 옛날의 동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이 자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엄숭은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조정은 간신이 득세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그들과 같은 편이 될 수는 없다."
엄숭을 높이 평가해왔던 양정화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정덕11년(1517년), 그 자신도 상중임에도 직접 엄숭에게 편지를 쓴다. 모친이 사망한 후 한때 관료의 길에 흥미를 잃었던 엄숭의 마음이 다시 한번 활기를 되찾는다. 결국 그는 스승이 권하는대로 다시 관직으로 돌아온다.
엄숭은 다시 예전의 일자리인 한림원으로 돌아간다. 직무도 바뀌지 않았다. 직급도 여전히 칠품(七品) 편수(編修)였다. 그러나 대우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그는 연이여 여러 건의 아주 중요한 업무들을 맡는다: 내서당(內書堂)에서 환관들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동고관(同考官, 시험관)이 되어 회시(會試)를 주재하는 것등. 다음해에 양정화가 수보(首輔, 수석재상)로 돌아온 후, 엄숭을 더욱 중시한다. 정덕13년(1519년) 칠월, 그에게 중대한 임무가 하나 부여된다: 부사(副使)로서 광서(廣西) 계림(桂林)의 정강왕부(靖江王府)로 가서 작위를 승계하는 공무를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좋은 업무를 맡았다가 엄숭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엄숭이 강서를 지날 때, 마침 유명한 영왕반란(寧王叛亂)이 일어나, 현지는 온통 전쟁터로 바뀐다. 놀란 엄숭은 두 말 하지 않고 바로 도망친다. 북경으로 돌아와서 보고한 것도 아니고, 그냥 고향집으로 가서 숨어버린 것이다. 2년후에 명무종(明武宗)이 병사하고, 새로운 황제 가정제 주후총이 즉위한 후에 비로소 용기를 내서 북경으로 가 업무보고를 한다.
이상은 42살이전까지의 엄숭의 개략적인 이력이다. 전체적으로 봐서, 업무도 착실하게 하고, 학문도 뛰어나고, 품행도 방정한 좋은 관료였다. 후세의 여러 사학자들도 여기까지 살펴보고는 탄식을 금치 못한다; 어찌하여 이렇게 좋았던 사람이 나중에 그런 모습으로 변해버렸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이 이력중에도 엄숭의 범상치않은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정치적 후각이 예민하다는 것이다. 특히 은거한 8년동안 그는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다. 자주 조정의 중신들과 서신왕래를 했고, 조정의 변화를 확연히 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야심을 가지면 절대로 지중물(池中物)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처럼 빛나는 행적 중에도 엄숭 성격의 문제점도 드러난다: 빠르게 도망친다. 간신이 권력을 쥐자 숨어버리고, 강서반란이 일어나자 도망쳐버린다. 그가 나중에 가장 욕을 먹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3. 아부실력이 뛰어났다.
가정제 주후총이 등극한 후, 북경으로 돌아온 엄숭은 처지가 한때 아주 참담했다. 남경 한림원 시독(侍讀)을 맡는다. 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겨났으니, 앞으로 승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화가 복이 될 때도 있다. 엄숭이 남경 한림원으로 들어가자마자 명나라조정에서는 한바탕 대지진이 일어난다: "대예의지쟁(大禮議之爭)." 엄숭의 은사인 양정화도 결국 패배하여 관직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히려 남경한림원에 박혀 있는 엄숭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서, 무사히 태풍을 피해갈 수 있었다. 새로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계악(桂萼)은 엄숭과는 같은 고향사람으로 가까운 친구엿다. 가정4년(1525년), 계악의 도움으로, 4년간 한직에 머물러 있던 엄숭은 다시 요직으로 돌아오게 된다: 경성(京城) 국자감(國子監) 제주(祭酒).
가정초기 국자감제주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국자감의 일상적인 교육업무를 수행하는 외에 '경연일강(經筵日講)'에 참가해야 했다. 뜻이 원대한 문신에게 있어서 경연일강에 참가하는 것은 행운이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렇게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엄숭은 잘 잡았다. 그의 학문은 뛰어났고, 말재주도 아주 좋았다. 매번 강관을 맡을 때마다 멋지게 소화했다. 구토연화(口吐蓮花)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주후총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후 엄숭의 관직은 직속상승한다. 몇년에 한번씩 승진한다. 먼저 예부시랑(禮部侍郞), 다시 남경으로 가서 예부상서(禮部尙書), 다시 5년후 경성으로 와서 예부상서, 10년동안 그는 조정의 예부업무를 장악한 정2품대신이 되어, 권력이 상당하게 된다.
이렇게 총애를 받게 된 것은 업무에 적극적이고, 일상행동을 잘 했던 것을 제외하고, 또 한가지 재주가 점점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부.
주후총은 명나라 역대황제들 중에서, 모시기 극히 힘든 인물이었다. 성격이 강퍅자용(剛愎自用)하여 주변의 관리들에 대하여 아주 엄하게 살펴보았다. 대신으로서 권력중심에 접근하면 할수록, 생존환경은 더욱 험악해지는 것이다.
다만 엄숭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금방 물만난 고기처럼 잘나간다. 비교적 유명한 사례로는 가정7년(1528년) 그가 예부시랑으로 부임한 후에 벌인 한 가지 일이다: 당시 엄숭이 부사(副使)가 되어 주후총의 고향인 안륙(安陸)으로 가서 제사등 업무를 처리하는데, 돌아온 후에 엄숭은 2가지 상소문을 준비한다: 하나는 묘필생화(妙筆生花)하도록 가고 오는 도중에 보았던 각종 '상서(祥瑞)'를 묘사하여 주후총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어서 내놓은 또 하나에는 사실대로 하남지역의 재난상황을 적어서 세금을 감면해줄 것을 요청한다. 주후총은 기분이 좋았을 때이므로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써준다: 허가한다.
아부를 하면서도 해야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유사한 일이 이때의 엄숭에게는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비록 아부를 하기는 했지만, 그의 명성은 여전히 좋았다.
그러나 여러 명나라때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면, 엄숭의 변질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같다: 그는 계속하여 승진하는 관직과 더불어, 그의 생활수준도 직선으로 상승했다. 집안에서 날이갈수록 사치스러워졌다. 그리고 사치수준이 그의 봉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세묘식여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일찌기 국자감제주를 맡았을 때, 엄숭은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예부의 요직을 맡고나서는 규모가 갈수록 커졌다. 번왕에게 작위를 세습하도록 할 때면 모두 그에게 돈을 보내야 했다. 나중에는 번왕에게 내리는 상사에서도 그는 일부를 떼어서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경제문제가 갈수록 엄중해졌다.
진정 엄숭의 명성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은 가정17년(1538년) 구월의 사건이다: 주후총은 자신의 부친에게 묘호(廟號)를 추존하고자 한다. 그리고 신주(神主)를 태묘(太廟)에 넣어 모시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이 극력 반대한다. 예부상서인 엄숭으로서도 조심스럽게 하지 않은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주후총은 진노한다. 즉시 엄숭을 직접 거명하면서 질책한다. 그러자 엄숭은 겁이 덜컥 났고, 그 자리에서 태도를 180도 바꾸어 주후총을 전력으로 지지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엄숭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마침내 주후총은 뜻을 이룰 수 있었고, 부친에게 존호를 올리고, 순조롭게 태묘에 넣을 수 있었다. 18년간에 걸친 '대예의지쟁'은 이렇게 끝이 난다. 확실하게 말해서, 엄숭이 마침표를 찍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끝내자, 엄숭의 관직은 다시 올라간다. 태자태보(太子太保)에 봉해져서 종1품대신이 된다. 그리고 당시 주후총이 자주 불러서 직접 대면하는 대신중 한명이 되어 이미 심복근신이 되었던 것이다.
4. 고오(孤傲)한 수보 하언(夏言)
이 때의 엄숭은 이미 정치적 야망이 갈수록 커졌다. 그의 다음 목표는 권력중추인 내각에 들어가 만인지상의 내각중신이 되는 것이 된다.
내각은 대명왕조의 핵심권력중추였다. 가정연간는 그러나 화약통과 같아서, 불만 붙이면 큰 일이 터지곤 했으며, 매일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각은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그 안에서 버티기는 더욱 힘들었다.
주후총이 등극한 후, 내각의 요원들은 거의 매일 싸웠고, 멈추는 때가 없었다. 처음에 수보를 맡은 사람은 호인인 비굉(費宏)이었다. 나중에 그의 뒤를 이어 수보가 된 사람은 이시(李時)였다. 이들 두 호인은 기본적으로 실권이 없었다. 실권이 있는 몇 사람은 서로 싸웠다. 처음에는 장총(張璁)이 양일청(楊一淸)을 쫓아냈고, 그후 몇년의 악투를 거쳐 장총도 쫓겨난다. 내각의 실권자는 하언으로 바뀐다.
가정연간 초기에, 하언은 유명한 인물이었다. 업무처리에 있어서나 정치투쟁에 있어서나 모두 정력이 왕성했다.
실제업무능력은 더더욱 뛰어났다. 초기에 그의 최대의 업적은 바로 황장폐정(皇莊弊政)을 정리한 것이다. 쓸모없는 인원을 줄이고, 귀족들이 빼앗아간 토지를 대량 찾아냈는데, 일처리가 극히 깔끔했다.
특히 엄숭과 달랐던 점이라면, 하언은 경제문제가 아주 깨끗했고, 일처리에 있어서 철면무사(鐵面無私)했다. 가난하기 그지없었고, 동료들에게도 모두 미움을 샀다.
이처럼 일을 잘하면서 청백한 대신이니 주후총도 더 없이 신용했다. 그리고 엄숭이 승진하는데 있어서 하언이 잘나간 것도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언과 같은 고향사람이다. 오랫동안 관계가 아주 좋았다. 옛날 엄숭이 남경 예부상서에서 경성으로 올라왔을 때, 바로 하언이 천거해준 것이었다. 나중에 하언이 내각에 들어가고, 다시 엄숭을 자신이 맡았던 예부상서 자리에 추천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엄숭은 하언의 바로 뒤를 따라서 그의 덕으로 승진을 거듭했다고.
관계가 친밀한지 오래되다보니, 하언은 엄숭을 외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특히 유명한 사건은 엄숭이 한번은 주연을 베풀었는데, 하언에게 참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하필 하언이 그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엄숭은 어쩔 수 없이 직접 모시러 갔는데, 하언은 그를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체면이 상할대로 상한 엄숭은 집으로 돌아와서 손님들 앞에서 놀라운 행동을 보인다: 하언을 위하여 준비해둔 좌석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하는 것이다. 마치 신하가 주군에게 절을 하듯이. 비슷하게 냉대를 당한 경우가 여러 해동안 적지 않았다.
내각을 장악한 후, 하언의 개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가정17년(1538년)이후, 하언은 내각수보가 되면서 허리가 더욱 꼿꼿해진다. 관료로서 사람으로서 그는 더욱 전횡(專橫)하게 된다. 3년동안 여러번 주후총의 진노를 하고, 2번이나 파면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매번 파면된 후, 하언이 집에서 얼마 지내지 않아 바로 원직에 복귀했다. 원인을 따져보자면, 그의 업무능력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었고, 업무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주후총의 최대종교신앙이 도교인데, 하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언은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도교의 제사때 쓰는 전용의 "청사(靑詞)"를 아주 잘 썼다. 그런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은 학문이 뛰어나야 했다. 문장이 공정하고 문자는 화려해야 하는데, 통상적으로 팔고문, 변려체문장에 익숙한 조정신하들로서는 대다수가 그런 글을 쓸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하언은 그런 글을 쓸 줄 알았을 뿐아니라, 아주 잘 썼다. 매번 주후총이 도교행사를 할 때마다 하언이 써준 청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화는 나더라도 어떤 때는 참아야 했다.
바로 이런 원인으로 하언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나 없이는 황제도 잘 지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언의 이런 판단은 계속 하언에게 억눌려온 엄숭에게는 승리의 서광을 보게 해주었다.
오랫동안 하언이 보아온 엄숭은 그저 자신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가노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도 엄숭의 눈에서 지위가 점점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 더 이상 관료사회의 뒤를 받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앞으로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라는 것을. 내각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하언부터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엄숭의 신분과 지위로는 지위도 높고 권력도 큰 하언과 싸우기에는 난이도가 컸다. 다만 하나의 간단하고 거친 방식으로 그는 가정21년(1542) 오월, 신기하게도 하언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날 처음에는 아무런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주후총은 단독으로 엄숭을 접견하며, 조정문제를 협의한다. 업무보고를 마친 후, 엄숭은 기회를 노려 돌연 급습한다.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엎드리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언을 고발한다. 처음에 주후총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그저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차가운 눈으로 엄숭의 연기를 구경했다. 그러나 엄숭의 한 마디를 듣자 그때까지 관중이었던 주후총이 즉시 안색이 변하며 엄숭의 말에 빠져든다.
"하언은 지금까지 황상을 무시해 왔습니다. 황상이 직접 하사한 물건도 그는 가볍게 버려버렸으니, 실로 그 죄가 극악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의 연유는 이러했다. 주후총은 도교를 좋아하여, 특별히 오정침향목(五頂沉香木)으로 황관(黃冠)을 제작하여 가장 가까운 몇몇 대신들에게 하사했다. 그중에는 하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은총일 뿐아니라, 조정에 나올 때 반드시 쓰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언은 그렇게 하면 체면이 상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쓰지 않았을 뿐아니라, 주후총에게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당시 주후총은 체면이 상했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언에게 일은 시켜야겠기 때문에 그냥 참고 지나갔었다.
이번에 엄숭이 그 옛날 일을 꺼내자 다시 가슴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비교해보기 시작한다: 눈앞의 이 엄숭도 업무능력이 뛰어날 뿐아니라, 말도 잘듣는다. 그런 점에서 하언보다 훨씬 낫다. 내각이 설마 너 하언이 없으면 안돌아간단 말이냐. 즉시 꺼져라!
이렇게 하여 여러 해동안 은인자중한 후에 엄숭은 교묘하게 주후총의 마음을 파고 들어, 시기를 잘 택해서 암창(暗槍)을 찔러 일거에 하언은 무너뜨리게 된다: 주후총은 조서를 내려, 하언의 오대죄상을 열거하면서 하언을 파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 63세의 엄숭은 관직이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오르면서 정식으로 내각의 일원이 된다. 비록 경력으로 따지자면, 엄숭은 내각 내에서 말단이었다. 그러나 몇몇 내각대신중에서 오직 그만이 전주권(專奏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대권을 그 혼자서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엄숭은 마침내 문관으로서 권력의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당연히 아직 전성기는 아니다. 비록 하언이 떠나기는 했지만 권력중심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언제든지 권토중래할 수 있었다.
5. 부인지인(婦人之仁)으로 큰 실수를 저지르다.
내각에 들어간 엄숭은 업무에도 적극적이었다. 업무는 아침에 지시를 받으면 저녁에 보고했다. 특히 매일 새벽 일찍 주후총이 거처하는 서원(西苑)으로 가서 지시를 기다렸는데, 태도가 아주 근면했다.
그러나 실제업무효과는 하언과 비교하자면 전혀 다른 수준이었다: 행정수준이 한단계 차이가 날 뿐아니라, 최대의 문제는 부패가 만연한다는 것이었다.
엄숭의 부패변질은 하루이틀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나중에 명나라의 몇몇 문인들이 쓴 바에 의하면, 국자감제주로 있을 때부터 검은 돈을 자주 받았다. 하언을 내각에서 밀어내자마자 어떤 어사가 그의 부정부패를 고발하여 그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주후총이 그의 편을 들어주며, 직접 "충근민달(忠勤敏達)"이라는 네 글자를 그에서 써서 보낸다. 주후총이 이렇게 엄숭을 좋아했던 것은 첫째, 여러 해동안 엄숭은 그의 앞에서 성격이 온순하고 모든 일에서 자신의 말을 잘 들었다. 집안에서 기르는 고양이보다도 말을 잘 들었다. 둘째는 하언이 떠난 후, 청사를 누군가 써야 하는데, 엄숭은 문장수준이 하언보다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태도가 훨씬좋았고, 글을 쓰는 열정도 뛰어났다. 그래서 특별히 의지하게 된다.
황제가 신뢰하자 엄숭은 더더욱 겁날 것이 없었다. 내각내에서도 대권을 독단하고, 심지어 노련하고 인심좋은 적란(翟鑾)까지도 그가 쫓아내버린다. 가정23년(1544), 아들 엄세번(嚴世藩)이 상보사(尙寶司) 소경(少卿)이 된다. 상보사는 황제의 옥새, 인장을 관리하는 관직인데, 부자가 손을 잡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이때 엄숭에게 가장 큰 기회는 바로 주후총이 초기의 근면하게 일하는 것을 버리고, 가정21년(1542)부터 기본적으로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루종일 구중궁궐안에서 수도와 연단에 몰두했다. 그러다보니 국가대사는 거의 내각구성원들이 단독으로 보고하고, 결재를 기다렸다.
황제가 손을 놓자, 엄숭은 더욱 마음껏 이익을 챙겼다. 엄숭부자는 고양이보다도 탐욕스러웠다. 뇌물을 챙길 뿐아니라, 지방관리들과도 결탁하여, 국가의 염세, 농업세까지도 중간에서 떼어먹었다. 경제문제가 갈수록 엄중해진다.
엄숭의 이러한 짓거리로 인하여, 가정초기 강력한 단속으로 한때 깨끗했던 명나라의 관료사회가 다시 신속히 부패하기 시작했다. 관료사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본받아, 뇌물을 챙기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이 몇년간 국정운영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북발의 타타르가 침략해오는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군사비용지출이 급증했다. 그외에 주후총은 도교에 빠져서 매일 돈을 써댔으니, 재정문제는 날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정초기에 모아두었던 돈과 양식은 기본적으로 다 써버렸다. 매년의 재정수입은 지출을 감당하지 못했고, 날이갈수록 그 현상은 심해져 갔다.
주후총은 비록 일년내내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조정국면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일잘하던 하언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가정24년(1545) 십이월, 3년간 놀고 있던 하언이 다시 기용되어 내각수보로 돌아온다.
그러자 엄숭은 비참해졌다. 3년여동안 잘 지냈는데, 잠시 부주의한 틈을 타서 옛 적수가 돌아온 것이다. 비록 자신도 소사(少師)의 직을 추가로 받았지만 대권은 완전히 손에서 떠나게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하언의 조치를 기다려야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내각수보로 돌아온 하언은 비록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지만, 업무를 넘겨받은 후에는 화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요 몇년간 조정이 어찌 이 지경으로 되었단 말인가.
하언은 업무를 실질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번에 부임하고나서 즉시 정리정돈을 시작한다. 중앙관료에 대한 평가를 통해 불합격한 자들은 면직시킨다. 그렇게 정리정돈하고나니 많은 관리들이 관직을 잃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엄숭과 가까운 자들이었다.
이렇게 격렬한 폭풍이 불어왔지만, 엄숭은 침묵을 유지한다. 아무런 방법이 없어서 침묵한 것이다. 하언이 돌아온 후, 전주표의(專奏票擬)의 권한은 하언이 꽉 틀어쥐고 있었다. 자신은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고, 완전히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엄숭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하언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황제가 자신의 업무성취에 불만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일했다. 비록 조정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청사는 열심히 써서 주후총의 도교활동은 도와준다.그리고 적극적으로 주후총 주변의 환관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자신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므로 비록 하언이 맹렬하게 조치를 취하고, 엄숭은 권한이 없었지만, 그래도 관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각은 이런 국면이 형성된다: 하언이 큰 칼을 휘두르며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 엄숭은 황제를 세심하게 모셨다. 그들간의 업무배분이 명확했고, 관계도 괜찮았다.
그러나 이런 조화를 엄숭은 견딜 수 없었다. 지난 번처럼 그는 그저 현실을 꾹 참으면서, 상대방이 잘못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하언이 잘못을 범하기도 전에, 엄숭 자신이 먼저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고, 그것이 발각된다.
투지가 왕성한 하언은 갈수록 힘을 냈다.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관료사회를 바로잡는 일이다. 일을 크게 벌여서, 중앙을 정리정돈한 후에, 지방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수부문을. 하나한 장부를 대조하면서 여러 부패분자를 처벌했고, 많은 공금을 회수했다. 그리고 배후를 따라올라가다보니 엄숭에까지 이른다. 엄숭의 아들 엄세번은 상보사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뇌물을 받았고, 부패문제가 심각했다. 관련된 자료를 하언이 모두 가지고 있었다. 곧 처벌이 내려질 터였다.
이 일은 심각했다. 비록 이전에도 엄숭이 부정부패했고, 주후총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한다면 그것 어린아이 장난이다. 그리고 국사가 어려우니 부정부패의 전형부터 붙잡아야 했다. 하언이 고집한다면 엄숭부자는 처벌을 받는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엄숭은 자신의 특기를 발휘한다: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다. 아들을 끌고 후다닥 하언의 집으로 달려간다. 먼저 돈으로 하언 집안의 하인들을 매수한 후, 하언의 침실로 들어간다. 하언이 마침 오수를 즐기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들의 손을 잡고 꿇어앉아 대성통곡을 한다. 아마도 하언은 그들의 울음에 마음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예전이 그가 자신을 고양이처럼 모시던 것이 생각나서인지, 어쨌든 옛날의 정을 생각하여 이 일에 대하여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하고, 엄숭을 한번 봐준다.
그러나 하언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처럼 온순해 보이는 엄숭이 기실은 호랑이였다는 것을. 기회만 잡으면 바로 자신을 물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수보로 되돌아온 후 하언은 자신의 뜻을 펼친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롭게 했다. 그러나 관료사회의 적폐는 하루이틀에 쌓인 것이 아니다보니 그가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적이 더 많아지게 된다. 그외에 하언의 일처리방식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오만하고 독단적이었다. 무서울게 없다는 식이었다. 부정부패를 정리정돈하는데 전혀 봐주지 않을 뿐아니라, 주후총으이 근신들 앞에서도 폼을 잡았다. 엄숭은 죽어라 주후총의 환관들에게 잘보이려고 애쓰는데, 하언은 오히려 주후총의 환관들에게 밉보인 것이다. 매번 환관들이 와서 일할 때면 그들을 마치 가노를 대하듯이 했다. 가정제때 환관은 비록 권력이 없었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 말을 할 기회는 많이 있었다. 하언에게 여러번 무시를 당하다보니, 기회를 잡아 주후총의 앞에서 그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되다보니 주후총도 자연히 엄숭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화를 엄숭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묘하게 부추겼다. 하언이 스스로 문제를 노출시키면 목숨을 걸고 엎드려 고해서 이 적수를 철저히 분쇄하겠다고 기회만 기다렸다.
그러나 이렇게 날로 다가오는 위기를 득의양양한 하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는 경천동지의 대업을 완성시킬 준비를 했다: 하투(河套)를 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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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장금(張嶔)
6. 국사를 도외시하고 양신(良臣)을 해치다.
하투문제는 명나라 경태(景泰)연간부터 이미 명나라변방을 괴롭혀온 오래된 문제이다. 물산이 풍부한 하투초원은 오랫동안 타타르부족에 점거되어 있었다. 그들의 기병,전마를 기를 뿐아니라, 그들이 남하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가정연간부터, 하투에 자리잡은 타타르부락은 몽골초원에서 전투력이 가장 강한 엄답칸(俺答可汗)부가 되어 있었다. 엄답칸은 용병에 뛰어나고, 대병력을 이끌고 기습전을 잘 벌였다. 여러번 대거 남하하여, 변방을 휩쓴 바 있어, 명나라의 숙적이었다. 특히 가정19년부터 21년까지 엄답한은 3차례내 대규모로 산서를 침입하여, 군민을 무수히 살륙하고 약탈했다. 가정23년에는 더더욱 크게 움직여 완현(完縣)까지 다가와서 경성까지도 계엄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큰 문제에 대하여 엄숭이 수보로 있을 때는 거의 무시해버렸다. 그냥 지나갈 수 있으면 지나갔다. 그런에 이제 하언으로 바뀌자, 그는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일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일을 매우 중시하고 수보로 복귀한 후 아주 대단한 인물을 선발하여 삼변총독(三邊總督)에 앉힌다. 바로 증선(曾銑)이다.
가정8년(1529년)의 진사로서 증선은 당시 얻기 힘든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모략도 있어서 당시 순안요동으로 있을 때, 취임하자마자 병변(병사들의 반란)이 있었는데, 그는 당황하지 않고 약간의 계책을 써서 병변의 우두머리를 붙잡아버린다. 그리하여 병졸 한명 다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그리고 그와 하언의 관계는 아주 친밀했다: 하언의 장인인 소강(蘇綱)이 증선과 같은 고향의 가까운 친구였다. 이런 특수한 교분만 가지고도 증선은 계속 하언의 신임을 얻었고, 마침내 하언이 수보로 돌아온 후, 삼변의 병권을 장악한 봉강대리가 된 것이다.
증선도 탁월한 전적으로 증명해보였다. 그가 이 요직을 차지한 것은 관계때문이 아니라, 실력으로 얻은 것이라는 것을. 그가 직위를 맡은지 3개월만인 가정25년(1546) 칠월,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새문(塞門)에서 쳐들어오는 몽골기병10만을 물리친 것이다. 이는 여러 해 이래 명나라의 북부변방에서 힘들게 얻은 승리였다. 특히 고귀한 것은 이전에는 명군이 보루에 숨어서 방어에만 치중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증선이 병력을 변경에 풀어서 야밤에 적진영을 기습하여 앞뒤에서 협공함으로써 거둔 승리라는 것이다. 아주 멋진 야전기병기습전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변방장병들의 사기가 일거에 올라간다.
증선은 병력을 이끌고 군대를 지휘하는데 뛰어날 뿐아니라, 명나라중기에 보기 드문 군사전술대가였다. 설사 전체 중국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그는 대규모로 화기를 사용한 선구자이고, 부임이후, 그는 대규모의 화기전차부대를 조직하고, 독창적인 "오반윤사법(五班輪射法)"을 만들어 낸다. 즉 화기병사를 5열로 나누어 차례대로 화기를 쏘아 적군을 살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인 탐색은 전체 명나라전쟁사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다.
군사수준이 상당하면서, 증선은 탁월한 전략적인 안목도 있었다. 새문대첩이후 증선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과감하게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일거에 하투초원을 수복하는데 대한 결심을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분명하게 보고 있었다. 하투초원을 타타르가 장악하고 있는 한, 그들은 마음대로 오고 갈 수가 있어, 일년내내 침략의 위협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여야 비로소 천하가 태평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증선은 단순히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사람이었다. 8개조의 군사개혁조치를 제기하면서 명확한 작전단계를 규정했다: 먼저 섬서부곡(府谷)에서 내몽고 준가르기의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 군사출격의 전초로 삼고, 장벽을 만드는 3년동안, 병력 6만을 훈련시킨다. 그후 매년 봄여름이 교체되는 시기에 부대를 수륙으로 나란히 출격시켜, 50일의 군량을 휴대하고 출격하여 하투 타타르부락의 소굴을 직접 타격한다. 적을 쫓아낸 후에는 현지에 위소(衛所)를 만들고, 토지를 개간하여 변방을 방어한다. 이렇게 하면 일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군사적인 각도에서 보건 명나라의 당시 실력으로 볼 때, 증선의 이런 의견은 모두 상당히 근거가 있었다. 상소문을 올리자, 그를 밀어주던 하언은 감동을 금치 못한다.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고 황제에게 올려, 적극적으로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가 이렇게 하자, 나머지 신료들도 속속 그의 주장에 동조하여, 조정은 온통 한 가지 목소리였다.
유독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엄숭이다. 증선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첩보가 올 때 모두가 기뻐하는데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증선이 하투를 수복하자는 상소가 올라오자 모두 격동하는데 그 혼자 침묵을 지킨다. 황제 주후총도 흥분해 마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내각과 병부는 전력으로 증선의 전략계획을 지원하라고 명령한다.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병력을 달라면 병력을 주라고 했고, 하투를 수복하는 전략계획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엄숭은 침묵을 지킨다.
하언쪽의 행동은 순조롭기 그지없었다. 이 일을 대하면서 주후총의 적극성도 매우 높아졌다. 심지어 병부의 동작이 늦으면, 그가 조서를 내려 질책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증선의 진도도 계속 잘 나갔다. 가정26년(1547) 오월, 증선이 다시 출병하여 하투의 타타르부락을 급습한다. 적은 인마를 이끌고 북으로 달아났으며 황하이북으로 피난갔다. 증선은 계속하여 밀어부치면서 계속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정27년(1548) 정월에 이르러, 모든 것이 순조로운 와중에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주후총이 마음을 바꾼 것이다. 정월 초이틀, 주후총은 돌연 조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지금이 하투를 수복하는데 가장 좋은 시기인지 묻는다. 사람들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정월 초엿새, 주후총은 다시 한번 놀라운 조서를 내린다. 전쟁은 백성을 힘들게 하는데 여러분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런 돌연한 변심은 역시 침묵하던 엄숭때문이었다: 하투수복계획을 시작한 후, 엄숭은 과감하게 판단을 내린다: 역전의 기회가 도래했다. 업무로 따지자면 엄숭은 하언만 못하다. 그러나 주후총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를 따진다면 하언은 엄숭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주후총은 비록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만, 성격에 한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의심증이다. 이 일은 하언과 증선이 너무 밀착해서 중앙에서 지방까지 한 목소리로 지지한다. 그는 마음 속으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증선이 계속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조야상하에서 칭찬일색이 되자, 주후총의 마음 속은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엄숭은 정확하게 캐치한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침묵을 지키는 외에, 엄숭의 뒷공작은 계속되었다. 바로 이러한 때 명나라는 여러번의 자연재해를 겪게 된다. 엄숭은 주후총이 미신을 믿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매번 업무보고를 할 때면, 이들 천재를 언급하면서, 하투수복과 연결시키곤 했다. 모두 하언이 정치적업적을 세우기 위한 것이고, 증선이 공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결탁하다보니 마침내 하늘이 노했다는 것이다. 특히 악독했던 것은 엄숭이 주후총에게 심각한 악영향까지 경고한 것이다. 더 이상 하투수복의 일로 시끄럽게되면 아마도 황사의 수명과 건강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이렇게 되자 주후총은 오랫동안 축적된 분노가 일거에 폭발해버리게 된다. 정월이 되면서 연이어 두 번의 조서를 내려서 하투수복계획을 중단시킨다. 이렇게 되자 한창 기세가 오르고 있던 하언은 멍해지고 만다. 주후총이 근신들을 모아서 회의를 개최할 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엄숭이 돌연 기운을 차리고 묘어연주(妙語連珠)하면서 하투수복을 극력 반대한다. 하언은 그제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원래 엄숭이 뒤에서 장난을 친 것이었구나.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게 된 하언은 이어서 한번 더 큰 실수를 저지른다. 분노에 휩싸여 상소를 올려 변명을 한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엄숭을 줄줄이 욕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나오자 주후총은 더더욱 확신한다: 네가 쓸데없이 일을 만들어놓고, 하늘이 재해를 내리는데도 잘못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솔직하게 얘기하는 엄숭을 욕하다니.
황상이 이렇게 생각하게 되니, 하언은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순조롭게 추진되던 하투수복계획도 강제로 중지되고, 피를 뒤집어쓰면서 분전하던 증선은 금의위(錦衣衛)에 나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된다. 특히 사람들을 한탄하게 만든 것은 금의위가 전선으로 가서 증선을 체포한 것은, 증선이 막 하투로 들어가서 타타르부락을 급습하고 있었으며, 승전을 거두고 있었는데, 후방에서 병부가 군량공급을 끊는 바람에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다행히 그가 계책을 잘 세워서 적군을 속이고 수만대군을 전혀 손실을 입지 않고 후퇴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군사사상의 휘황한 장면을 만들었을 때였다.
그러나 그후에는 참극이 이어진다: 증선은 북경으로 끌려와 문책을 당하고, 하언도 연좌되어 일체의 직무를 박탈당하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엄숭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하언이 비록 면직되었지만, 면직은 하언에게 다반사였다. 몇년이 지난 후에 다시 동산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증선의 경우에도 위협이 너무 컸다. 그는 병사를 지휘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군대내에서 명망도 높았다. 금의위가 그를 체포할 때, 전선의 장병들은 모두 애석해 했고, 곡소리가 백리까지 들렸다. 그리고 그의 최정예 5천의 병사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하마터면 쿠데타가 일어날 뻔했다. 야사에서 얘기하는 대로라면, 증선사건이 벌어진 후, 이들 병사들은 하나같이 분노하여 매일 군영내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어떤 사람은 경성으로 쳐들어가서 엄숭을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소식은 엄숭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엄숭은 담담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펼쳐지면 정말 하언에게는 마지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변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말을 듣고 주후총은 대노한다. 그가 등극한 후, 북방의 요동, 대동에서도 여러번 병변이 발생한 바 있다. 그래서 그런 일에는 아주 민감했다. 그리하여 증선이 하옥된 후, 계속하여 엄히 고문했다. 증선은 좋은 신하이고, 철혈인물이었다. 각종 혹형을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증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엄숭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너 대신에 말하게 하면 된다. 그는 금의위 지휘사 육병(陸炳)과 사이가 좋았다. 그리고 육병의 배경은 간단하지 않았다. 부친대에는 흥헌왕부(興獻王府, 즉 주후총 부친의 왕부)에서 관직을 지냈고, 그의 모친은 주후총의 유모였다. 그래서 주후총과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 그런데 이전에 부정부패문제로 인하여 하언에게 한번 크게 당한 바 있다. 이제 옛날의 빚까지 갚을 시점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결탁하여, 일찌기 군기위반으로 증선에게 처벌받은 적이 있는 변방장수 구란(仇鸞)을 내세워, 증선이 하언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무고하게 한다.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무고하는 것은 고명한 방법이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언이 청렴하다는 것은 세상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발호전횡했다고 하는 것은 몰라도 돈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주후총만 읻으면 된다. 엄숭은 다시 한번 주후총의 맥을 잘 짚었다. 주후총은 원래 하언이 권력을 농단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리고 그와 증선의 관계가 보통이 아닌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명나라 변방의 장수가 중앙조정의 대신과 결탁하다니, 그건 극형에 처해질 일이었다. 이 죄명이 성립되면 아무도 구해줄 수가 없다. 가정27년(1548) 삼월 이십팔일, 증선이 참형을 당하고, 자녀들은 유배를 간다. 사월 이일, 면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있던 하언도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온다. 십월 이일, 서시(西市)에서 참형을 당한다. 이 가정초기에 탁월한 정치적 업적을 세웠던 철완의 대신이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 원안(寃案)이 '하투지옥(河套之獄)'이다.
하투지옥의 결과는 명나라의 변방에 있어서, 극히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하투수복은 단순히 하언과 증선의 주장만이 아니라, 명나라중기이래, 몇대의 군신들이 끊임없이 추구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풍파로 이 일은 철저히 내팽겨쳐지게 된다. 그리고 원래 이미 증선에게 연이어 패퇴하던 타타르의 엄답칸부는 다시 기회를 잡아 권토중래한다. 2년후에 명나라는 쓴 맛을 보게 된다: 가정29년(1550) 엄답칸은 기병으로 기습을 하여 명나라의 변관을 우회한 후 팔월 경성을 급습한다. 경성을 포위하고 20일간 괴롭힌 후, 약탈한 사람과 재물을 가득 싣고 득의양양하며 떠난다. 경성주변의 20여만 명군은 놀라서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한다. 이 치욕적인 사건을 역사에서는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고 부른다.
7. 황당한 짓거리로 사람들의 분노를 산다.
하언을 제거한 후, 내각을 독패하게 된 엄숭은 그때부터 전혀 겁내는 것없이 가정41년(1542)까지 유명한 '엄숭전권(嚴嵩專權)'시대를 연다.
사실상 전권이라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행정대권은 기실 아주 적었다. 주후총은 비록 조회에 나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업무를 내팽개친 것은 아니었다. 각종 국가대사는 결국 모두 그가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엄숭은 구체적으로 집행했을 뿐이다.
그리고, 권모술수의 수준에서 엄숭은 그의 몇몇 전임들과 비교하여 확실히 새로운 단계였다: 이전의 장총, 계악, 하언은 모두 총애를 극히 받았을 때, 잠시 주의하지 못해 실수하는 바람에 주후총의 분노를 사서 결국 참담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엄숭은 달랐다. 그는 주후총의 성격과 기질을 너무나 잘 파악하여, 적절하게 대응했다.
주후총의 가장 큰 특징은 강퍅자용이다. 이것이 국가대사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첫째는 혼자만의 고집을 밀어부쳤다는 것이고, 둘째는 체면을 극히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정에 어느 정도 수준이 있었지만, 대신을 선발하는데 최우선기준은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무릇 그의 뜻에 잘 따라야만 그가 보기에 좋은 관리였던 것이다.
엄숭은 이 점에서 상당히 잘 처신했다. 일상생활에서 아부를 잘했을 뿐아니라, 청사도 잘 썼다. 비록 수준은 하언보다 떨어졌지만 태도는 아주 좋았다. 그리고 일상적인 업무처리에서도 황상의 체면을 충분히 살려주었다. 하나의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이러하다: 매번 주후총과 국가대사를 논의할 때, 엄숭은 모르는 척하면서, 자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 주후총이 한차례 가르침을 내린다. 그러면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극력 떠받든다. 매번 이렇게 할 때마다 황상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소위 '엄숭전권'은 기실 이런 정치적 장면이 되는 것이다: 국가대사는 주후총 한 사람이 결정한다. 엄숭은 그의 뜻에 맞다고 맞장구치고, 그후 죽어라 집행한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엄숭이 나서서 책임을 진다.
이런 정치모델이 명나라에 준 가장 큰 상처는 이전의 명나라의 상호간에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던 체제의 최대작용은 전권을 방지하는 것 외에 잘못이 있을 때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특히 매번 황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문관집단의 권력으로 제약할 수 있었으며 최대한도로 잘못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는데, 주후총이 이렇게 해버리고 나니, 착오시정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게 되어, 만일 황제가 잘못하게 되면 그 결과가 극히 심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황권이 안정되면서, 주후총도 갈수록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비록 국가대사에 아직은 열심이었고, 상소에 대하여 적시에 회신해주었지만, 신선이 되기를 바라면서 수도를 하고 연단을 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처음에는 그저 구중궁궐 안에서만 이루어졌는데, 나중에는 드러내놓고 각종 도교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비용이 얼마가 들던 신경쓰지 않고 장생불로의 선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신체에 유독할 뿐아니라,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토목공사도 크게 벌인다. 각종 도관(道觀)이나 제대(祭臺)를 만드느라 국고를 모조리 탕진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연단수도에 심취해서인지, 중년이 된 이후의 주후총은 초기의 정명(精明)했던 스타일이 바뀌어 국가대사를 조령모개하면서, 많은 중요한 결정을 수시로 바꾸었다. 예를 들어, 동남왜구문제, 북방타타르문제에 대하여 하나의 결정이 내려지고 나서 아직 집행도 하기 전에 그가 이전의 결정을 바꾸기도 하고, 어렵사리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이미 얻은 성과마저도 사라지게 되고, 국가대사는 계속하여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만일 정상적으로 운용되는 내각체제하에서라면, 각신과 황제간에 일찌감치 여러번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내각은 모두 애완동물인 고양이같은 엄숭이 책임자였고, 모든 일에 황제의 뜻을 따랐고, 한마디도 반대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놓고 문제가 생기면 모조리 엄숭이 뒤집어 써야 했다.
그러나 엄숭은 속죄양이어서, 그 자신의 잘못이 있지만, 가장 큰 벌은 그가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주후총이 등극한 후, 각신은 아주 많았다. 예를 들면, 장총, 계악, 하언같은 사람들이다. 계속 서로 싸웠지만, 이들은 모두 책임지는 정치가였다. 개인은원으로 싸우는 것은 싸우는 것이지만, 그래도 국가대사는 함부로 처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장총은 "대예의지쟁"으로 양정화와 서로 욕을 하며 싸웠지만, 이후 내각을 장악한 후에는 양정화가 "갱화개원(更化改元)"시기에 해내지 못한 사랍을 그가 앞장서서 계속 했다. 그리고 하언같은 경우에도 한바탕 심하게 싸움을 벌이고나서 장총을 쫓아냈지만, 장총이 관료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 부정부패를 뿌리뽑던 여러 행위는 하언도 계속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 잘해냈다.
다만 이런 일에 대하여 엄숭은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당초 하언과 싸워서 그를 죽인 후, 하언의 개혁조치들까지 모조리 폐기한다. 그러다보니 변방업무는 더더욱 엉망진창이 된다. 황제의 말에 따라 일하는 외에 그가 가장 열정적으로 했
던 일은 바로 부정부패였다.
엄숭의 부정부패는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한림원에 있을 때도 돈을 받았다. 나중에 예부에서 일하면서부터는 번왕에게 작위를 세습하게 하면서도 돈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했던 행위들과 비교하면 이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엄숭이 권력을 장악한 후, 부정부패는 더욱 규모가 커진다. 심지어 전문대리업체까지 차린다. 바로 아들 엄세번이다. 매번 관리들이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 청탁을 할 때면, 엄숭은 항상 손을 내저으며: 나에게 말하지 말고, 내 아들과 얘기하라고 보낸다.
엄숭의 아들로서 엄세번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애꾸눈이었는데, 머리는 아주 총명했다. 당초 하투사건때 거짓진술로 증선이 하언과 결탁했다는 증언을 받아낸 것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엄세번의 재주는 더욱 대단했다. 첫째, 그는 안목이 아주 뛰어났다. 그는 문장이 뛰어날 뿐아니라,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공문서를 받아서 한번 훑어보면 잊지 않았다. 매번 엄숭이 주후총에게 보고할 때마다 엄세번은 먼저 어떤 것은 말해야하고 어떤 것은 말하지 말아야할지를 예측하곤 했는데, 그의 추측은 모두 들어맞았다. 그는 엄숭의 곁에 있는 최고위직 참모라고 할 수 있었다.
돈을 긁어모으는 문제에서, 엄세번의 재주는 더욱 뛰어났다. 부패를 규모화된 경영으로 만들었다. 조정에서 어떤 공사를 하면, 에를 들어, 수리공사를 하거나, 도로공사를 하거나 성벽을 쌓을 때, 공사를 맡으려면 그의 집으로 돈을 보내야 했다.그 돈은 멋지게 이름을 붙여 "매명(買命)"이라고 불렀다. 외지의 관리가 북경으로 와서 업무보고를 할 때도 돈을 보내야 했다. 그 돈은 멋지게 이름을 붙여 "문안(問安)"이라고 했다. 관리선발, 임용에는 더더욱 돈을 내야 했다. 그 돈은 멋지게 이름을 붙여 "강결(講缺)"이라고 했다. 그리고 승진하려면, 혹은 콩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관직을 얻으려면 매년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야 했다. 그 돈은 멋지게 이름을 붙여 "사례(謝禮)"라고 불렀다. 나중에 가장 창궐했을 때는 조정에서 전선으로 보내는 양초에서도 그는 뽑아먹었다. 가장 악랄할 때는 거의 손을 거치고 나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규칙하에서 명나라의 부패수준은 일거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원래는 그저 몰래 숨어서 개인적으로 하던 것이 이제는 광명저대한 규칙이 되어 조정의 관직도 돈으로 살 수 있고, 범인도 돈을 내면 풀려날 수 있고, 심지어 국가와 백성에 이로운 일을 할 때 예를 들어 군비를 정돈하거나, 수리사업을 할 때도 부패로 바꾸어버렸다. 이십년간, 명나라의 부정부패의 기풍은 갈수록 심해지게 되었다.
당연히 수보로서 이런 나쁜 짓들 말고 확실히 좋은 일도 하긴 했다. 예를 들어, 매번 지방에 재해가 발새아면 적시에 도움을 주었다. 경술지변이후, 북방의 변방국면이 갈수록 심각해지자,엄숭도 다시 징치하게 된다. 그외에 예전에 함께 짜고서 증선을 모함했던 구란과도 나중에 반목하여 엄숭은 그의 블랙자료를 모아두었다가, 구란이 엄답한과 마시(馬市)를 열었다가 기만당하여 타타르병이 침입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는 그 일과 함께 구란의 부정부패에 관한 자료까지 한꺼번에 꺼내어 증선을 처리한 후 가장 잘나가던 무장을 체포하여 심문한다. 그러자 그는 겁을 먹고 죽는다. 그후에 그는 다시 부관참시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수급은 변방에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게 한다. 최후가 극히 비참했다. 비록 엄숭이 그런 일을 한 것은 자신의 반대파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란이 죽은 후 마방(馬芳)등 소장파 장수들을 발탁했는데, 그건 엄숭의 공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엄숭전권이후, 대사는 거의 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모두 주후총의 말대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부정부패는 더더욱 주후총의 눈아래에서 갈수록 심하게 했다. 이전의 역대 수보들과 비교하면, 그는 더더욱 놀라운 일을 벌인다: '당'을 만들었다. 관리들 중에 그는 도처에 자신의 심복을 물색하고, 자신이 양아들로 삼는다. 그리고는 각 부문에 심어둔다. 예를 들어, 상소문을 보내는 통정사(通政司)는 그의 양아들 조문화(趙文華)가 장악하여, 상하를 속이기 좋았다. 그외에 나머지 육부구경중에도 그의 제자 심복이 깔려 있었다. 그의 친척들까지도 많이 지방관으로 나간다. 예를 들어 그의 친가의 진규(陳圭)는 양광총병(兩廣總兵)이고, 처가쪽의 조카인 구양필진(歐陽必進)은 양광총독(兩廣總督)이다. 나중에는 그의 손자인 엄효충(嚴效忠)등도 금의위등 핵심부서에 꽂아넣는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칭호가 있었다: 엄당(嚴黨)
당을 만드는데 엄숭은 원칙이 없었다. 그저 친한 사람이거나, 말잘듣는 사람이거나, 돈을 보내는 사람이면 업무처리수준이 어떠한지는 기본적으로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최대 실책은 바로 중대한 국가대사에 자신의 심복을 심었고, 그렇게 심은 심복들이 형편없는 능력을 지녀서 결국은 일을 망쳐버렸다는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동남왜구문제였다.
왜구가 해안을 괴롭히는 일은 주후총이 등극한 때부터 시끄러웠다. 그후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가정30년(1551)이 되었을 때는 이미 큰 골치거리가 되어 있었다. 많은 왜구들이 떼를 이루어 침입했고, 동남의 연해에 있는 세력가 호족들과 결탁하여 중국과 일본의 토비가 서로 결탁한 거대한 도적집단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이 한해에만도 왜구는 연해 주변 수천리를 침략했고, 전체 절강동부지역이 그 화를 입는다.
이 문제는 심각했다. 강남은 명나라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거두는 지역이니 혼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주후총도 결심을 내린다. 가정33년(1554) 남경 병부상서 장경(張經)이 나서서 정예부대를 모아 강남으로 간다. 일거에 왜구를 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주후총은 기다리지 못했다. 게다가 장경은 사람됨이 강직하여 엄숭의 양아들 조문화에게 밉보였다. 그러자 골치아픈 일이 생긴다. 어렵사리 장경이 승전을 거둔다. 왕강경(王江涇)지역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일거에 왜구 근 2천여명을 참수한다. 이는 명나라때 항왜전쟁에서 거둔 첫번째 승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제 왜구를 철저히 척결할 기회가 왔는데, 엄숭이 이를 깨버린다. 먼저 주후총의 앞에서 참언을 올린다. 장경이라는 자는 눈에 황제도 없으며 조정의 지휘도 듣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전선의 국면도 왜곡하여 보고한다. 장경은 조정의 재촉하에 이번 전투를 벌였는데, 진실한 모걱은 왜구를 길러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주후총이 속는다. 그는 바로 분노하여 장경이 승전보를 올렸는데, 주후총은 오히려 명령을 내려 장경을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를 참수한다. 승리를 거두고도 목이 달아나다니,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바로 엄숭이 중간에 장난친 결과이다.
장경의 죽음은 엄숭에 있어서 유리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동남왜구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크게 좋지 않았다. 원래 큰 손실을 입었던 왜구가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동남연해를 대거 침입한다. 이때의 명나라는 북방에서는 타타르가 매년 침입하고, 남방에서는 왜구가 오랫동안 횡행했다. 양쪽에서 싸우다보니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모두 엄숭이 악화시킨 문제들이었다.
당연히 인정할 점도 있다. 장경이 죽자, 큰 문제가 터진 것이고, 엄숭도 이것을 메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관리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장경의 목이 달아난 후, 동남왜구가 1년간 시끄럽게 굴었다. 더 이상 이를 감추고 지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엄숭은 다시 하나의 카드를 내민다: 자신의 심복인 호종헌(胡宗憲)을 절직총독(浙直總督)으로 앉힌 것이다. 이번에는 사람을 제대로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종헌은 비록 엄당의 당원이고, 아부를 잘 하지만 그는 능력도 있었다. 부임후에는 여러 수단을 써서 왜구두목 서해(徐海)를 유인하여 죽이고, 다시 계책을 써서 또 다른 왜구두목 왕직(汪直)을 체포한다. 이 두명은 왜구중의 중국인 대두목들인데, 차례로 붙잡혀서 처형된다. 세력이 커지던 왜구들은 군룡무수(群龍無首)가 되어 일거에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그후 명군이 전력으로 토벌하게 된다. 호종헌은 척계광(戚繼光), 유대유(兪大猶)등 명장들을 중용한다. 10년간의 피비린내나는 분전을 거쳐 마침내 왜환을 평정할 수 있었다.엄숭이 이 일에 공로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초에 왜구들이 소멸되기 직전에 그가 그들의 목숨을 연장시켜주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전란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8. 적담충심(赤膽忠心) 양계성(楊繼盛)
엄숭이 전권하기 시작한 여러해 후, 엄숭은 일찌감치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다만 가정연간에 주후총은 언관들을 엄하게 단속했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관을 엄벌에 처했다. 그리고 엄숭도 간교한 수완을 써서 누구든지 그에게 밉보히면 그를 반드시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그래서 적지 않은 정직한 언관들이 계속하여 상소를 올려 엄숭의 간악함을 알렸지만, 오히려 엄숭이 교묘하게 막아서, 엄숭은 전혀 다치지 않고, 오히려 상소를 올린 언관들이 모조리 악독하게 처벌받았다.
그리고 이 일에서 엄숭이 자주 쓰던 방법은 황제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매번 어떤 관리가 엄숭을 탄핵하면, 주후총이 묻게 된다. 그러먼 엄숭은 교언영색으로 갖은 수단방법을 써서 관리가 고발한 일을 주후총이 결정한 일과 연결시킨다. 그렇게 한 후에 최종적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들 관리가 겉으로는 나를 욕하지만, 기실 황상을 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번 엄숭이 바라는대로 주후총은 속아넘어간다. 상소를 올린 관리중 십중팔구는 감옥에 들어간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가정32년(1553) 병무 무선사(武選司) 원외랑(員外郞) 양계성(楊繼盛)이 엄숭을 탄핵한 사건이다. 양계성은 원래 이부(吏部)의 하급관리였다. 그는 먼저 무장 구란에 밉보여서 감옥에 들어갔었다. 나중에 구란이 처형되면서 엄숭은 이 일을 떠올리며 양계성을 자기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를 발탁하여 1년만에 4급을 승진시켜서 무선사의 이 알짜배기 관직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양계성은 사아니였다. 옛날에 구란에게 밉보인 것도 공무를 처리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지금 엄숭을 미워하는 것도 공적인 일때문이다. 1년에 4급이나 승진시켜주었지만, 그의 단순한 마음 속에 그것은 무슨 엄숭의 은덕이 아니었고, 오히려 황제의 은덕이었다. 그런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는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엄숭의 죄악을 고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정월, 양계성은 명나라역사상 호기장존(浩氣長存)한 일막을 연출한다. 장중하게 3일간 재계(齋戒)하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정중하게 자신의 상소문을 올린다. 그리고 천하에 자신의 태도를 선언한다: 사핵(死劾). 내가 탄핵하는 것은 간신 엄숭이다. 그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겠다.
엄숭을 탄핵하는 이 상소문은 저명한 <조주간험교영적신소(早誅奸險巧佞賊臣疏)>이다. 상소문에서는 엄숭의 10대죄상을 고발했다. 전권오국(專權誤國), 탐부성풍(貪腐成風), 종자주악(從子做惡), 탐점공로(貪占功勞), 인랑입실(引狼入室), 패회조정이미지(敗懷朝庭形象)등등. 붓은 칼과 같고, 글자 하나하나는 날카로웠다. 엄숭일당의 가면을 벗겨서 선혈이 낭자하게 만들었다.
상소가 올라가자, 엄숭은 겁을 먹는다. 그러나, 상소문을 읽은 후에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양계성은 열정을 담아 썼지만, 백밀일소(百密一疏)로 상소문중의 한 마디는 주후총의 금기를 건드렸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의 말을 들으셔서, 엄숭의 간악함을 조사해주시옵소서. 혹시 믿으시기 어렵다면 유왕(裕王), 경왕(景王) 두 왕께 하문해 보시옵소서."
유왕과 경왕은 주후총의 두 아들이다.
그런데 의심이 많은 주후총이 보기에 이 말은 완전히 다른 뜻이 되어 버린다. 나의 두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도대체 무슨 뜻이지? 내가 늙어서 노망이 들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누가 너를 시켜 이런 상소를 올리게 했단 말이냐?
그렇게 되자 양계성은 끝장난다. 먼저 하옥되고, 엄중하게 고문당한다. 모든 종류의 혹형이 다 동원된다. 그에게 배후의 주모자를 불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그러나, 양계성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했다. 평생동안 혹형을 써왔던 옥리들 조차도 모두 놀라마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한 가지 사건은 이러했다: 당시 양계성의 다리에 있는 살이 썩어버렸는데, 야심한 밤에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을 때, 양계성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도자기조각을 칼로 삼아 고통을 참으면서 그 썩은 살을 도려냈다는 것이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옥졸조차도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
양계성같은 철골의 사나이에 대하여는 엄숭도 무서워했다. 그러나 주후총은 그것을 들은 후에 오히려 망설인다. 그저 양계성을 감옥에 가두어 둘 뿐, 여러 해동안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이것은 주후총이 관리를 상대하는 관용수법이다. 누구든지 때려도 죽지 않음녀,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어 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살 기회를 얻는 것이다. 나중에 주후총을 욕한 상소를 올린 해서(海瑞)도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는다.
다만 엄숭은 이번에 결심을 내린다. 양계성은 반드시 죽여야겠다. 나중에 가정 34년(1555) 장경을 경성으로 압송하였을 때, 엄숭은 주후총이 장경을 죽도록 미워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고의로 장경에게 사형을 내리는 주의(奏議)에 양계성의 이름을 붙여서 올린 것이다. 주후총은 과연 그것에 속아서 사형령에 서명한다. 십월 이십구일, 양계성은 죽임을 당한다. 나이는 거의 40세였다.
엄숭이 보기에 양계성의 죽음은 자신에게 심복대환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가 양계성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날부터, 그는 한가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명나라는 대학사제도를 만든 이후, 그 어느 내각수보도 탄핵했다고 하여 상대를 사지로 몰아넣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심지어 당시 엄당에 붙었떤 초방(焦芳)조차도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다. 엄숭이 이렇게 처리하고나자, 그것은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이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이 알게 된 것이다. 이 내각수보는 아주 나쁜 놈이다.
그리고 더욱 엄중한 악영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엄숭이 더더욱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주후총은 원래 속이 좁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성격이 괴팍하지만 자주 엄숭에게 속아넘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심하게 속았다. 나중에 다시 생가해보니 속으로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만일 이전에는 그냥 엄숭을 총애했다고 한다면, 양계성사건이후에는 주후총이 비록 엄숭을 총애하기는 하지만, 마음 속으로 경계하는 것이 한단계 올라가게 되었다.
엄숭의 멸망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9. 양자, 친자가 모두 쓸모없다.
양계성의 초기 은사는 바로 엄숭과 함께 내각에 있던 서계(徐階)였다. 그리고 바로 이 서계가 최종적으로 엄숭 일가는 멸망의 불귀로로 몰아넣게 된다.
서계는 송강(松江) 사람이고, 가정2년(1523년) 진사이다. 성적은 아주 뛰어나서 탐화(探花) 즉 전국3등이었다. 더욱 우연스럽게도, 당시 그를 합격시킨 은사가 바로 양정화라는 것이다. 과거관계를 따진다면 서계는 엄숭의 사제(師弟)가 된다.
엄사형과 비교하면, 서계는 여러가지 비슷한 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태도가 비교적 온순하고, EQ도 아주 높다. 찰언관색(察言觀色)에 능하며 관계를 잘 맺었다. 그리고 그는 키가 작고 말랐으며, 미목이 청수하고, 성격이 아주 좋았다. 엄숭이 큰 고양이같다면, 그는 작은 흰고양이같았다.
특히 비슷한 점이라면 그도 청사를 잘 썼다는 것이다. 주후총의 수도에 그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와 엄숭은 같은 편이 아니었다. 처음 관료사회에 들어갔을 때, 서계는 비교적 날카로웠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말을 했다. 그러다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장총에게 밉보여서, 관직이 계속 좌천당한다. 나중에는 복건 연평(延平)으로 쫓겨가 추관(推官)을 지낸다. 그후 지방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힘들게 10년간을 버틴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좋아서 어디를 가든 열심히 일했고, 업적도 출중했다. 그리하여 하언에게 인정을 받아 마침내 경성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나중에 하언이 내각수보를 맡을 때, 한때 관직이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에 오른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 못했다. 나중에 하언이 하야하고 참사당하면서 서계도 영향을 받는다.먼저 이부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다행히 주후총이 그를 좋게 보았다. 그래서 그를 한림원에 넣어 한림학사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직위에서 항상 조용했던 서계는 처음으로 그의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가 한림원에서 교육을 담당할 때, 양명심학중에서 "지행병진"을 원칙으로 한림원의 학습기풍을 혁신하여, 쓸모있는 인재를 발탁했다. 나중에 만력연간에 개혁을 주도한 장거정(張居正)이 바로 이때 그에게 교육받은 준재였다.
하언이 힘들었던 시기에 하언이 발탁했던 서계는 더욱 조심하며 지낸다. 머리를 처박고 열심히 일하는 외에 일상생활은 더더욱 조심했다. 마침내 정치폭풍을 무사히 넘기고 가정29년(1550)에는 이미 조정의 예부상서로 정2품 고관이 되어 있었다.
바로 이 해에, 대명왕조는 치욕스러운 국난을 당한다. 그리하여 항상 조심스럽고 조용하던 서계가 처음으로 남다른 용기를 폭발시킨다; 경술지변
경술지변기간동안 대명왕조는 혼란의 극치였다. 주후총은 군신회의를 소집했다. 바깥에는 강적이 쳐들어왔는데, 대신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평소에 가장 나서던 엄숭마저도 이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이런 말을 할 뿐이었다: "이들은 악적입니다. 재물을 다 강탈하면 떠날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서계의 하는 말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만일 엄답한의 행위를 막지 못하여 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놔둔다면, 그것은 대명왕조에는 멸정지재(滅頂之災)가 될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들이박자, 엄숭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러나, 서계는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먼저 거짓으로 협사을 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원군이 도착하면 다시 반격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후의 사태발전은 서계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행된다. 명나라가 거짓협상으로 시간을 끄는데 엄답한이 걸려든다. 그후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원군이 도착하자 그들은 황급히 도주했다. 대명왕조는 이렇게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서계는 고속승진한다. 엄숭의 눈엣가시가 된다. 그후 여러 해동안 엄숭은 온갖 방법을 써서 서계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서계는 기민하기 그지없었다. 명창암전(明槍暗箭)을 모조리 교묘하게 피한다. 특히 그가 국자감에 있을 때의 제자인 양계성이 엄숭을 탄핵하자, 사람들은 서계가 배후에서 시킨 것이 아닌지 의심했었다. 그런데, 양계성이 처벌을 받은 후에 서계는 오히려 계속 승진한다. 가정32년에는 내각에 들어가고, 양계성이 죽은 같은 해에는 소부(少傅)에 올라, 엄숭 바로 다음가는 인물이 된다.
그 이후, 엄숭은 서계를 처리하는데 더욱 힘을 쏟는다. 그러나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옛날 하언이 자신을 대했던 수법을 그대로 쓴다. 철저히 배제시키는 것이다. 국가대사를 그 혼자서 농단하고, 각부문에 자신의 사람을 심는다. 서계는 내각내에서 허수아비가 된다. 네가 어떡할 거냐.
그러나, 세심한 엄숭도 옛날 하언이 했던 잘못을 그대로 범하고 만다. 주후총이 어떤 사람인가? 서계를 발탁했다는 것은 바로 엄숭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엄숭은 오히려 견제하려하면 할수록 더욱 날뛰니 그걸 그대로 놔두겠는가?
그렇게 시간이 오래 흐르자, 주후총의 엄숭에 대한 불만이 날로 커져간다. 설상가상으로 엄숭의 부인 구양씨가 사망하고, 예제에 따라 아들 엄세번은 집으로 돌아가서 모친상을 지내야 했다. 그의 고위참모가 떠나자, 엄숭은 골치아파진다. 예를 들어, 공문을 살펴보고, 청사를 쓰고 하는 일들을 대신 해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할 수 없이 자기가 혼자서 해야 했다. 엄숭은 팔십여세의 노령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아서, 공문에 회답하는 속도가 예전만 같지 못했다. 머리가 돌아가는 것도 예전같지 않았다. 그래서 주후총의 말에 어떤 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여러번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주후총의 불만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 엄숭의 양자들도 모두 실망스러웠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조문화이다. 공부상서(工部尙書)로서 주후총의 궁전을 짓는 돈까지 횡령했다. 일이 발각된 후에 그는 놀람과 두려움에 떨었다. 그후 주후총이 추궁해들어가자, 그는 군량을 횡령한 일까지 들통난다. 그러자 미움과 분노가 치밀어 조문화의 가산을 몰수해 버린다.
조문화가 무너진 것은 엄숭의 세력에 큰 타격이었다. 그후 주후총은 엄숭에 대한 불만이 날로 늘어난다. 그런데 엄숭은 다시 잘못을 저지른다. 가정40년(1561) 황궁에 불이 난다. 주후총의 침실까지 불에 타버렸다. 주후총이 거처할 곳이 없어서, 대신들이 방법을 강구하는데, 엄숭은 머리가 뭐가 잘못되는지 이렇게 말해버린다: "황상께서 남궁(南宮)으로 옮겨서 거처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말이 나오자, 주후총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남궁이 어떤 곳인가? 옛날 명영종이 연금되었던 곳이 아닌가? 네가 나보고 남궁으로 가 있으라고? 그러나 역시 서계의 머리가 빨리 돌아갔다. 즉시 끼어들었다: "제가 아들 서반(徐蟠)으로 하여금 건축을 감독하게 하면 십월이전에 황상께서 새로운 궁으로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임무를 원만하게 완성하면서 주후총을 더욱 기쁘게 해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계와 엄숭 두 사람의 주후총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가 완전히 뒤집혀져버린다. 그후, 주후총의 신임을 깊이 받고 있던 도사 남도행(藍道行)이 도교전례를 하는 기회에 주후총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말하기를, 현재 조정은 간신이 득세하고 있다고 하니, 황상께서는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시 엄숭이 이런 수법으로 하언을 모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계도 그대로 배워서 써먹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속아넘어가는 주후총이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41년(1562) 오월, 어사 추응룡(鄒應龍)이 엄숭을 탄핵한다. 이번 탄핵은 교묘하게 함사사영(含沙射影)하는 내용이었다. 직접 엄숭을 욕하지 않고, 오히려 엄숭의 아들 엄세번을 탄핵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엄세번은 모친상 기간동안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계집질을 했다. 그런 점들을 모조리 까발린 것이다. 그러자 주후총은 분노하여 그달 십구일 조서를 내린다: 엄세번을 하옥하고, 엄숭은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10여년간 권력을 장악했던 엄숭집단은 이렇게 무너져 내린다.
10. 혼수모어(渾水摸魚)로 엄숭을 제거하다.
엄숭이 무너지면서 서계가 수보에 오른다. 이번 투쟁은 그에게 있어서, 아직 승리를 경축할 때가 오지 않았다. 반대로 투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엄숭의 일당은 너무나 뿌리깊다. 면직된 후에도 먼저 주후총 주변의 환관들을 이용하여 도사 남도행을 여러 죄명을 엮어 하옥시킨다. 그리고 감옥안에서 죽게 만든다. 그후에 사방으로 활동을 벌여, 아들 엄세번을 빼내는데 성공한다. 먼저 충군유방(充軍流放)의 판결을 받게 하고, 그후에 유배가는 도중에 순조롭게 빼내어 고향에서 살도록 한다. 사실은 증명한다 엄세번은 확실히 나쁜 놈이다. 이런 지경에 처했음에도 고향에서 대거 토목공사를 벌이고, 주민들을 못살게 굴면서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
그런 문제점을 서계는 바로 잡아버린다. 원래 서계가 수보가 된 후에 남도행이 하옥되어 형세가 한때 그에게 아주 불리했었다. 그러나 남도행은 사나이였다. 죽을 때까지 불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면이 안정된다. 그후 엄세번이 고향이서 악행을 저지르며 마각을 드러내자, 서계가 이어서 행동을 개시한다. 먼저 어사 임윤(林潤)이 상소를 올려 엄세행의 악행을 고발하여 다시 한번 주후총의 분노를 자아낸다. 엄세번을 체포하여 하옥한다. 큰 화가 닥칠 위기였지만, 엄세번은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삼법사(三法司)에서 그를 심문할 때, 그는 고문도 하지 않고 진술을 압박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옛날 양계성을 해친 일을 자진해서 진술했다. 삼법사의 관리들은 그에게 속아서 그가 한 진술을 그대로 올린다. 이제 엄세번은 분명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계는 진술서를 보자마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건 엄숭, 엄세번 부자가 잘 쓰던 수법이다: 황제를 끌고 들어가는. 양계성의 사형명령은 주후총이 직접 서명한 것이다. 그게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는 절대로 그게 잘못되었다고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진술서를 보게 되면 분명 대노하여, 엄세번이 빠져나갈 수 있을 뿐아니라, 오히려 삼법사의 관리들만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서계는 일찌감치 준비해놓고 있었다. 사전에 또 다른 진술서를 준비해둔 것이다. 이 진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세번은 3가지 죄를 저질렀다: 하나는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고, 둘은 왜구와 결탁한 것이며, 셋은 왕기(王氣)가 있는 전답을 차지하려고 싸웠다는 것이다. 그는 대명강산을 전복하려고 기도했다. 과연 서계의 예상대로 이 진술서가 올라가자마자 주후총은 불같이 화를 내며 즉시 하명한다: 엄세번을 즉각 참수하라! 가정연간에 가장 교활했던 자가 이렇게 목숨을 잃게 된다. 여기서 한 마디 추가할 점은 이 변고에도 미리 준비를 해두고 자신만만했던 엄세번은 사형명령이 선언되자, 그 자리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후안무치한 일생은 끝이 난다.
엄씨집안의 대난에 경성의 백성들은 분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엄세번의 처형을 구경했다. 엄숭을 평생동안 총애했던 주후총은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다시 엄숭의 가산을 몰수하도록 명령한다. 모두 황금3만여, 백은200여만을 몰수한다. 그리고 보고서에 따르면 몰수한 가산은 단지 엄숭의 가산의 1/3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엇다. 한때 잘나갔던 엄숭은 이제 거지로 전락한다. 매일 고향에서 누군가 무덤 앞에 놓아둔 음식을 주워먹으면서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러다가 87세되던 해에 처량하게 죽는다. 명나라 만력연간에 이르러, 서계의 제자인 장계정이 권력을 쥐었을 때 비로소 관리를 강서로 파견하여 엄숭의 유골을 거두어 묻어준다. 명나라때 가장 유명한 간신은 그렇게 하여 입토위안(入土爲安)하게 된다.
엄숭의 사후, 후임 수보인 서계는 엄숭의 당초 고뇌에 부닥친다: 주후총의 나이가 이미 말년에 이르렀고, 일처리도 일관성이 없다. 연단,수도,행사를 갈수록 크게 벌였다. 그러나 서계는 엄숭과 달랐다. 엄숭은 그저 시키는대로 하면서 중간에 돈이나 챙겼지만, 서계는 책임감이 있었다. 매번 주후총이 터무니없는 일을 지시할 때마다 우회적인 방법으로 조심하면서 모셨다. 정면으로 안되면 측면을 공략했다. 주후총의 마음을 읽는데 있어서는 그가 엄숭보다 뛰어났다. 엄숭은 그저 주후총의 환심만 사려 했지만, 서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번 설득하여 주후총의 생각을 바꾸기도 했다.
그리하여 서계의 고심은 금방 보답을 얻는다. 재능이 탁월한 일련의 인재들을 발탁하게 된다. 양박(楊博),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과 같은 문관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외에 변방의 형세도 아주 좋아졌다. 동남의 담론(譚論), 척계광, 유대유가 잘 싸워서 마침내 왜구를 철저히 소탕할 수 있었고, 북방에서는 마방등이 지키면서 여러번 몽골의 침입을 좌절시킨다. 그렇게 하여 변방의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형세는 여전히 위기가 심각했다. 서남과 남방에는 모두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고, 자연재해도 다발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오랫동안 쌓인 관료사회의 적폐였다. 일거에 정돈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료사회의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고, 효율이 저하되면서 백성들의 세수부담은 침중해졌고, 곤궁해졌다. 불쌍한 서계는 이리저리 막으면서 힘들게 일했지만 오히려 적지 않게 욕을 얻어먹는다.
엄중한 통치위기를 주후총 본인도 기실 잘 알고 있었다. 가정45년(1566) 이월, 호부주사인 저명한 청백리 해서가 고금에 유명한 <치안소>를 올려, 주후총이 집권한 기간동안의 여러 잘못을 지적하며, 주후총에게 개혁해서 여정도치(勵精圖治)의 성군이 되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한다. 자신의 정치적 업적이 해서에 의해 이처럼 형편없는 것으로 묘사되자, 주후총은 다시 한번 폭발한다. 화가나서 상소문을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욕을 해댄다. 그러나 서계가 극력 보호해주어서 해서는 비록 감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나중에 융경연간에 사면을 받아 다시 관직에 나선다. 그렇게 청백리의 전설을 썼다.
주후총이 해서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 근원을 따져보면 그도 마음 속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서가 말한 것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러나 참담한 국면을 그는 이미 구할 방법이 없었다. 가정45년(1566) 가을부터 그는 병석에 눕고 십이월 십사일 세상을 떠난다.
스승 양정화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때의 내각수보 서계는 대국을 주재하는 중임을 맡는다. 유조(遺詔)를 초안하고, 유왕(裕王) 주재후(朱載垕)를 즉위시킨다. 십이월 이십육일 등극의식을 거행하고, 다음해의 연호를 "융경(隆慶)"이라고 선포한다. 사전에 황태자를 세우지 않았던 황권의 과도기는 이렇게 평온하게 지나게 된다.
그러나, 대명왕조의 정국은 평온하지 않았다. 북방 타타르의 침입은 여전했고, 남방의 왜구가 평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광동, 강서등의 성에서는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마저도 뒤에서는 명나라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조선사절이 중국으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전에 국왕은 특별히 이렇게 당부했다: "현재 명나라의 국면이 불안정하니, 아마도 큰 난리가 일어날 수 있을 것같다. 네가 이번에 가면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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