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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남자의 로맨스 2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작은 방안에 가득히 울리는 시계 알람 소리.
곧 누군가의 손에 의해 알람이 꺼지고, 커텐이 쳐진다.
"으악! 지각이다!"
시계를 보던 누군가가 침대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간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
오늘이 고등학교 2학년 첫 수업인데 지각이라니 말도 안 돼!
침착해, 윤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돌아가라는..
에이씨.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있다!
"다녀오겠습니다!"
세차게 문을 닫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는 누군가.
아, 이제 누군가라고 하기엔 내가 너무 많이 등장했나?
그럼 앞으로 학교에 도착 할 10분의 짧은 시간동안 내 소개를 하겠어.
내 이름은 윤별. 나이는 아까 말했듯이 꽃다운 나이 열여덟살.
이름을 봐서 알겠지만 성별은 여자, 그리고 직업은 학생.
뭐 이런 기본적인 소개들 말고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하자면,
난 피아노를 전공하는 특기생이다.
고등학교야 물론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쳐왔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미국에 있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오빠와 언니가 있는 나는
여덟살 때 미국으로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난 박박 우겨서 한국에 남았다.
이모와 함께 살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독립을 시작했다.
내가 한국에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꼬맹이 또 지각이네"
"으아악! 스톱! 스톱! 문 닫지마! 기이다아려어!"
쾅.
"저, 저기.."
"왜"
"무, 문 좀..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무사히 들어왔잖아"
"내 치마가 꼈잖아! 빨리 열어줘!"
"치마는 지각했나 보네"
"뭐라?"
"지각하기 싫으면 치마벗고 들어가던지"
"야, 이 나쁜놈아!"
"어제 왜 전화 안 받았어"
"지금 어제 전화 왜 안 받았는지가 중요해!
문 열어줘! 빨리!"
"난 그게 중요한데"
"저기 학주오잖아! 빨리 열어줘!"
"지각했네"
"자, 자고 있었어! 자고 일어났는데 부재중 전화가 왔더라구!"
"일곱시에?"
"응!"
"학원은?"
"어, 어제 학원수업 없었어! 선생님이 아프시대!"
내 치마를 낑기게 한 이 녀석은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나를
특유의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문을 열여준다.
그 틈을 타 치마만 쏙 뺀 나는 히히 웃으며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저 녀석. 저 녀석이 누구냐고 말할 거 같으면.
이름은 지은환. 나이는 열여덟살로 나랑 동갑이다. 직업은 학생.
키는 182cm에 몸무게는 68kg. 모델같은 몸매의 소유자다.
왜 이렇게 잘 아냐라고 물으실 것 같으면,
이 녀석과 내가 알고 지낸지 올해로 7년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싹퉁머리없는 짝궁으로 처음 만나 지금까지 끈질긴 인연이다.
다들 궁금하시겠지만 외모?
"너 오늘 은환오빠 봤니?"
"당연하지! 운 좋게 교문앞에 있더라구!"
"아,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잘생길 수 있는거지?"
교실로 올라가는 복도에서 얘기하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시면
짐작하시겠지만,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잘생겼다. 저 녀석.
"윤꼬맹이!"
"잘 만났다. 이 기지배! 너의 목을 졸라버리려고 내가 왔다!"
"어머어머, 왜 이래? 어제 소개팅 마음에 안 들었어?"
"쉿쉿, 조용해! 조용하라구!"
"니 목소리가 더 커. 이 지지바야"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날 반기는 건 나의 베스트 프렌드 도가음.
가음이랑도 은환이 만큼은 아니지만 무려 3년을 함께 지낸 사이다.
아무튼 가음이의 소개팅이라는 발언에
난 누군가가 들을까봐 조용히 가음이의 입을 막은 채
우리의 전용좌석 맨 뒷자석으로 향했다.
"어땠어? 용수오빠 죽이지?"
"죽이긴 개뿔. 너 때문에 내가 교문에서 수모를 당했어! 수모를!"
"어머, 왜? 오빠가 학교까지 찾아왔어?"
"어제 그 이상한 소개팅 대타 뛰어주는 바람에
은환이 전화 안 받아서! 아침부터 날 갈궜단 말이다!"
"난 또 뭐라고. 남자친구냐? 남자친구도 아닌데 왠 호들갑이야"
그렇다. 남자친구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저녀석이 바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닌
한국에 있어야 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100% 확신하진 않는다. 아직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확신하다. 저 녀석을 술에 취하면 날 공주님이라고 부른다!
이 정도면 확실한 거 아닌가?
"너 또, 또. 그 왕자님 타령 하려면 관두.."
가음이가 내 눈치를 챘다는 듯이 얘기를 꺼내면
난 재빨리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이유인 즉슨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녀석 때문이였다.
"꼬맹이 밥 먹었어?"
말투가 다르다고? 그렇다. 다른 녀석이다.
이쯤되면 하나하나 소개하기 힘드니깐 한꺼번에 모조리 소개하겠다.
은환이 외에 나랑 7년이란 세월을 함께보낸 인연이 셋이나 더 있다.
하나는 지금 막 손에 빵을 들고 들어 온 라이.
성은 윤이요, 이름은 라이다.
아시다시피 세 녀석 모두 나와 나이가 같은 동갑내기 친구다.
라이로 말할 거 같으면 모델같은 몸매에 잘생긴 얼굴로
일년 365일 중 300명의 여자를 만날 정도의 능력있는 바람둥이다.
이 정도면 라이를 소개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다른 녀석은 지금 막 라이를 뒤따라 들어온 세류.
까칠하기로 유명한 네 녀석 중에 가장 착하고, 다정한 세류.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도 잘 웃어주고 늘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준다.
그래서 아마도 라이 못지 않은 바람둥이 가음이가
3년동안 좋아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하나는,
은환이와 티격태격 들어오고 있는 도은이.
도은이는 네 녀석중에 가장 까다롭고 가장 까칠하고 가장 차갑다.
까칠의 종결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덕분에 남자나 여자나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리고 도은이는 여자를 질색할 정도로 싫어한다.
나도 여자이긴 하지만 나는 도은이가 여자를 싫어하기 전에 만난 유일한 여자
라고나 할까? 훗. 난 도은이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면 된다.
아무튼 짤막한 나의 소중한 보물들 소개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겠다.
"히히. 나 주려고 빵 사온거야?"
"그래, 임마. 아침 안 먹었지?"
"응!"
"먹을거라면 아주 좋아죽네"
"뭐야!"
"워워, 그냥 빵 먹어. 은환이 말 신경쓰지마"
"오늘 첫 수업 뭐냐?"
그렇다. 우리 다섯은 이번에 지겹게도 같은 반이 되었다.
항상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녔어도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후로 넷이 같은 반이 됬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일 끝자리를 나와 가음이가 차지한 결과로
앞으로 도은이와 세류가 앉고, 그 앞에는 라이와 은환이가 앉았다.
"꼬맹이 근데 어제 어딨었어?"
잠자코 있던 도은이가 물었다.
도은이의 회색빛 눈은 마치 '난 차가운 사람이니깐 신경꺼'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거짓말은 차마 못하겠다.
하지만 앞에 있을 녀석이 듣고 있으므로 뻔뻔하게 거짓말을..
"꼬맹이! 너 어제 소개팅했다며!!"
"으악!"
"소개팅?"
"너 저 옆 학교에 있는 찌질이새끼랑 소개팅 했다며!"
"용수오빠가 왜 찌질이야?!"
"시끄러, 못생긴 주제에"
"뭐야?"
"니가 꼬맹이 꼬드겨서 소개팅 시켰지? 못난아"
"너 죽어볼래!"
또 다시 시작되는 마치 하루 일과같은 가음이와 라이의 싸움.
라이는 이상하게 다른 여자들한테는 무지하게 다정한데,
유독 가음이한테만은 태클적이다.
누구나 다 상상하듯이 라이가 가음이를 좋아하냐고?
그건 아니다. 예상외겠지만 라이한테는 이제 막 1년이 넘은 여자친구가 있다.
라이가 사귄 여자중에 제일 오래 사귄 여자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고 가음이가 못난이는 아니다. 못난이라면 내, 내가..에헴.
170cm에 48kg이면 누구나 원하는 몸매를 가진 그녀가 아닌가?
찰랑거리는 생머리에 한예슬을 닮은 얼굴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녀가 아닌가?
근데 왜 라이가 가음이를 싫어하냐고?
"꼴통"
"너 진짜 죽는다!"
"죽여봐, 꼴통"
"윤꼬맹! 저 녀석 좀 어디다 갖다 버리라니깐!!"
그렇다. 그녀의 매력은..매력이라고 해야 하나..매력이면 매력이다.
그녀는 머리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오는 여자 마다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라이가 싫어하는 여자는 머리 빈 여자다.
같은 바람둥이로써 싫어하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 벌이는 그 둘을 잠재운 건 열리는 교실문.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은..오잉?
"저 뉴페이스는 누구냐"
"새로 온 영어선생님 같은데?"
"영어선생?"
"응. 이번에 젊은 영어선생님 한 분 들어왔다 그랬는데"
"오오, 정세류. 왜 그렇게 잘 알아?"
"그거야 세류는 너와 다르게 공부를 잘하는
선생님에게 촉망받는 학생이니깐 그렇지. 멍청아!"
"아, 저 꼴통. 또 참견이네. 너나 잘해, 임마"
문을 열고 들어 온 말 그래도 젊은 영어선생님은 귀여운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자, 자. 조용하세요"
"오오오오! 선생님 이뻐요!!"
"선생님 몇 살이에요!!"
"자, 자! 조용!"
마치 담임을 처음 해보는 선생님 처럼 수줍게 아이들을 달래는 선생님.
저 사람이 우리 담임선생님인가?
키는 나랑 비슷한데 왜 몸매는 나보다 더 좋은 걸까? 응? 왜 그런거야?
"이번에 2학년 3반 담임을 맞게 된 윤한영이라고 해요.
아하하, 어린 나이 아니니깐 선생님이 반말해도 되겠지?"
이쁜 이름을 가진 담임선생님은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넋놓고 쳐다보고 있는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몸매도 이쁜데 이름도 이쁘네. 재수없다! 재수없는 인물이다!
"선생님 몇 살이에요?"
잠자코 있던 라이가 물었다.
"으응?"
"선생님 나이. 몇 살이냐구요"
"아하하. 그, 그건 왜 물어봐?"
"이뻐서요"
"응?"
"스물여섯이죠?"
"선생님 나이는 교칙상 비밀이야!"
"왜요? 낙하산이에요?"
"뭐라구?"
"아니에요. 이쁘다구요"
"하하, 그, 그래. 고마워"
이쁘다는 말이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는 선생님을 보며
피식웃는 라이.
그리고 이어서 여러가지 얘기를 한 선생님은 있다 보자며 쑥스럽게 웃고 나갔다.
"너 왜 선생님 민망하게 그런 걸 물어봐"
"이뻐서"
"다인이한테 말해야지~"
"뒤질래, 정세류"
"그럼 나중에 선생님한테 사과해"
"내가 왜!"
"낙하산이 뭐야, 낙하산이"
"그럼 저 나이에 어떻게 들어왔겠냐?"
"공부를 잘 하셨나보지"
"아, 몰라몰라. 잘래"
세류의 말에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라이가
이내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그나저나 잊고 있었는데 나 소개팅 사건을 은환이에게 들켰다.
그래서 저렇게 앞만 보고 있는건가?
2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는 동시에
은환이 역시 책상에 고개를 묻었고, 가음이는 숨겨온 만화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세류는 빛나는 모범생이므로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도은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창밖만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 네 남자의 로맨스 3
마지막 시간.
라이는 재미없다며 점심시간이 끝나마자마 학교를 나갔고,
도은이는 아프다는 핑계로 양호실을 내려가 자고 있으며,
가음이는 수많은 '오빠'를 만난다며 꽃단장 중인 지금 이 시각.
은환이가 단단히 삐졌는지 말 붙여도 그저 무반응이다.
잠깐 2시간전에 있던 점심시간으로 돌리자면,
"왜, 왜 아무말도 안 해?"
"뭐가"
"왜 그렇게 조용히 있냐구.."
"..내 맘이야"
이렇게 나눈 대화가 전부다.
이상한 녀석이다! 내가 소개팅한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난 가음이의 대타로 나가줬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딱 밥만 먹고 왔을 뿐이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이것저것 얘기를 하고,
땡땡이를 친 라이를 잡겠다는 강한의지를 보이고는 나가셨다.
집에가는 길.
보통 네 녀석과 나, 그리고 가음이가 함께 가지만 오늘은 왠지
은환이와 나, 둘만 남았다.
왜 하필 이럴 때에 둘만 남아서 이런 민망한 상황을 만드는 건지..
"왜, 왜 암 말도 안 해.."
"할 말 없어"
"삐졌어?"
"내가 왜"
"그, 그냥..
우리 시내가자! 나 핸드폰이 고장나서 바꿔야 돼!"
"혼자가"
"으악! 가음이도 없잖아..같이 가자.."
"..귀찮게"
"히히. 내가 떡볶이 쏠께!"
은환이의 팔을 잡고 시내로 끌고 나가 핸드폰 대리점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 별아!"
"용수오빠?"
"이햐, 여긴 왠일이야? 역시 우린 운명인가보다!"
"아하하하, 오빠 왠일이세요?"
"나 핸드폰이 물에 빠져서 고치러 왔지. 넌?"
"전 핸드폰 고장나서 사러 왔어요!"
"아, 그렇구나! 옆에는..이름이 지..은환이던가?
만나서 반가워! 얘기 많이 들었어!"
"누구한테 들었는데"
"응?"
"내 얘기를 니가 누구한테 들었냐고"
"아하하, 듣던대로 까칠하네.
너야 뭐 이 동네에서 유명하니깐 소문으로 들었지"
"그래서"
"그래서..라니. 난 그냥 별이 친구니깐.."
"니가 소개팅 했다는 게 이거야?"
"응? 아하하, 소개팅이라니.
그, 그냥 만난거지! 아, 안 그래요. 오빠?"
"대타로 나왔다지만 소개팅은 소개팅이지!"
이 아저씨가 눈치를 안드로메다로 보내셨나.
"앞으로 얘 만나면 아는 척 하지마라"
"응?"
"너같은 찌질한 새끼가 얘 아는 척 하는 거.
거슬리니깐 하지 말라고"
"야아, 너 왜 그래. 오, 오빠 저희 먼저 가볼께요!"
"그, 그래. 조심히 가~ 친구도 잘 가고!"
"안녕히 계세요!"
"핸드폰 산다며"
"빨리 나와!"
억지로 은환이의 손을 끌고 대리점에서 나왔다.
입장이 바꼈다. 이젠 내가 투덜거리며 앞장서서 가는 길.
"야, 삐졌냐?"
"..."
"어쭈, 이제 말도 안 하겠다 이거냐?"
"..."
"쌤쌤으로 쳐"
"뭐가 쌤쌤인데?"
"너 소개팅했잖아"
"근데? 그거랑 이거랑 같아?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
"아는 사람? 한 번 만났다며"
"그래도!"
"소개팅했잖아"
"그래서!"
"열 받는다고"
"뭐가? 내가 소개팅 한 게 열받아?"
"어, 열받아"
"왜? 왜 열받는데?"
"됬다"
"뭐가 됬는데! 왜 열받냐니깐!"
"아, 됬다고! 집에나 가!"
"우리집 아직 멀었거든요?"
"그럼 조용히 입 다물고 가"
"왜 열받는지 이유를 알아야겠어!
왜 오빠한테 그렇게 대했는지 말하란 말야!"
"오빠는 개뿔"
"오빠지! 나보다 두 살이나 많다구!"
"아, 그럼 그 새끼한테 집에 데려다 달라 그래!
짜증나게"
뭐? 뭐라? 짜, 짜증나게?
지금 나한테 짜증나게라고 한거야! 내가 짜증난다는거야! 그런거야!
"..가"
"..."
"가라고! 따라오지마!"
"따라가는 거 아니고 우리집도 그 쪽이거든"
"그럼 먼저 가!"
"어디가는데"
"소개팅하러 간다! 왜!"
"..."
"왜 그렇게 쳐다봐?"
"..미안해. 잘못했어"
"..."
"소리질러서 미안"
"왜, 왜 이래. 갑자기"
"소개팅하지마"
"안 해! 집에 갈꺼야"
"가자, 그럼"
"안 데려다 준다며!"
"그럼 따라와"
터벅터벅. 터벅터벅.
나와 나란히 걷던 녀석이 내 앞으로 세 발자국 앞서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는 거나 데려다 주는거나 차라리 데려다 줄 것이지.
참, 이렇게 둘만 있는 것도 오랜만인데,
이 기회에 한 번 물어볼까? 정말 그 때 그 어린왕자님이 맞는지, 아닌지..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큰 결심을 한 찰나, 주머니에서 울려대는 핸드폰.
주머니에서 꺼내 액정을 보니 화면에 뜨는 이름은,
"도은아!"
"응. 어디야?"
"나 집에 가는 길!"
"혼자?"
"아아니- 은환이랑. 왜?"
"아니. 집에 잘 들어가라구"
"에엥? 그것때문에 전화한거야?"
"응. 조심히 들어가"
"알았어!"
뭐지? 이 싱거운 전화는?
아무튼 그렇게 이상한 모냥으로 터벅터벅 앞, 뒤를 걷는 우리들의 행진은
도은이의 전화가 끝남과 동시에 우리집에 도착했다.
아, 왕자님인걸 물어봤어야 했는데..
"가"
"먼저가. 보고 있을께"
"됬으니깐 가라"
"좀 곱상하게 말해주면 덧나? 가. 이게 뭐야?"
"..."
"됬네요. 갈께! 잘 가!"
"뚱이 밥 많이 주지 말고"
"남이사!"
끝내 다정한 인사 한 마디 안 하는 놈에게 입을 삐쭉 내민 후에
후다닥 집으로 들어갔다.
절대로 그 녀석에 무서워서 후다닥 들어간 거 아니고,
집에서 나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닌 밥을 기다리고 있을 우리 뚱이를 위해서다.
뚱이로 말할 거 같으면..딱히 소개없이 내가 키우는 강아지다.
난 재미삼아 뚱이라고 이름을 귀엽게 붙여줬는데 진짜 뚱이가 되버린 우리 강아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힘겨운 몸을 이끌고 아장아장 걸어온 뚱이에게
밥을 주고 쇼파에 걸터 누웠다.
그와 동시에 옆으로 살짝 빠진 목걸이.
단 1초도, 1분도 빼놓지 않고 걸고 다닌 나의 왕자님이 준 목걸이.
그래. 내일은 꼭! 물어보는 거야! 은환이가 왕자님인게 틀림없어.
내 직감은 빗나가지 않아. 소름끼칠정도로 끝내주지. 하하하!
그렇게 혼자 뿌듯해 하는 동안 스르르르 뚱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음냐, 음냐.."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 진동소리에 잠에서 깨보니 벌써 어둑어둑 어두워졌다.
전화를 받고 후다닥 달려가 불을 켰다.
켜자마자 보이는 건 열한시를 가르키고 있는 시계 초침. 그리고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
"별아! 별아!"
"누구세요..냠냠"
"자고 있었어?"
"세류?"
"응, 나야. 나!"
"응. 무슨 일이야?"
"도은이랑 같이 있어?"
"도은이? 아니. 학교끝나고 본 적 없는데.."
"전화! 아까 통화했다며!"
"응..아까 통화하고 아무 연락 안 했는데..왜?"
다급한 세류의 목소리에 조금 긴장이 된 내가 물었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세류의 전화기를 낚아챘는지 이어 들리는 다른 목소리.
"밖으로 나와. 도은이가 연락이 안 돼"
"전화 안 터지는데 있는 거 아냐?"
"그게 아니니깐 그래. 빨리 나와봐"
"무슨 일인데.."
"빨리 나와"
세류와 같이 다급한 은환이의 목소리에 난 무의식적으로 현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전화를 끊고 신발을 신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울리는 전화.
액정에 뜬 번호는 난생 처음보는 번호다.
혹시 도은이가 아닐까하는 마음에 다급하게 전화를 받으면,
"여보세요!"
"아, 저기..정도은씨 보호자 되세요?"
"네?"
"여기 ㅇㅇ병원인데 지금 정도은씨가 응급실에 실려왔는데,
보호자도 없이 혼자 있어서요. 보호자 되세요?"
"병원이요?"
"네, 지금 좀 급해서 빨리 오셔야 될 거 같은데.."
전화를 마친 나는 후다닥 밖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는
은환이와 세류에게 얘기할 틈도 없이 무조건 시내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걸 틈도 없이 달려나가는 나를 따라 달려오는 은환이와 세류.
재빨리 택시를 잡고 올라탔다.
"야..너 어디 가는.."
"ㅇㅇ병원이요! 아저씨 빨리 가주세요!"
"병..원?"
"병원이라니? 병원엔 왜 가?"
"아저씨!! 빨리 가주셔야 되요!!"
은환이와 세류의 질문을 쿨하게 씹은 나는 아저씨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빨리 가야되요. 진짜 빨리 가야되요.
도은이는 병원에 있으면 안 되요, 아저씨. 병원은 안 되요. 병원은 진짜 안 되요..
업쪽 - 은환, 도은, 라이, 세류
첫댓글 잘보고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