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시절의 경험담( 본인의 경험담 입니다)
1986년 2월, 인턴 마지막 달에 나는 서울 공릉동에 소재한 모 종합병원의 일반외과로 파견을 나갔다.
거기서 보았던, 지금까지도 언제나 생각이 나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이야기를
하나 써보고자 한다.
파견 나가자마자 병동에 중한 환자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는 21살 인지 22살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위암 말기인 여자 환자로,
벌써 3살짜리 아들이 있었으며 남자와 결혼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거 중이었다.
이 환자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시작하여 먹는 것마다 모두 구토를 하게 되자 병원을
찾게 되었다.
진단은 위암 4기로 커다란 종양이 십이지장으로 나가는 유문을 다 막고 있었다.
개복을 하였으나 복강 전체에 암세포가 전이되어 할 수 없이 음식물 공급을 위한
공장루술(jejunostomy)만을 하고 봉합을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파견 나간 다음 날 그 jejunostomy tube가 빠져버렸다는 소식을 간호사가 전해 왔다.
“이런 된장 !”
큰일이었다.
그것 하나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할 수 없이 그 당시 처음 시도되던 쇄골하 카테터를 삽입하기 위해 시도를 하는데,
피골이 상접한 상태의 그 환자의 카테터 삽입이 어찌도 그리 안 되는지
좌, 우 합쳐 30번 이상을 찔러도 계속 되는 실패
- 그래도 환자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참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전공의 선생님께 부탁을 했고, 하지만 그 전공의 선생님도
거의 30번에 가까운 시도 끝에 가까스로 겨우 삽입을 할 수 있었다.
항암주사와 완전비경구영양법(Total parenteral nutrition)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고 있던 중,
어느 날 환자의 보호자인 동거남이 우리를 찾아왔다.
“저, 부탁이 있어서 찾아 왔는데요.”
“예, 말씀해 보시지요.”
“저....... 혹시 우리 애 엄마를 데리고 3일간만 외출을 하면 안 되나 싶어 부탁을 드리러
찾아 왔습니다.”
“예??? 무엇 때문에요? 혼자 걸음도 잘 못 걷는 저런 중환자를 데리고 외출하시겠다니요?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혹시 불상사라도 생기면 저희들의 입장이 무척 곤란해지거든요.“
“무엇을 할 건지는 묻지 마시고, 어차피 애 엄마는 며칠을 더 살다 죽을지는 모르지만
만일 밖에서 그런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필요하다면
천통이라도 써드릴 테니 3일만 외출을 시켜 주십시오. 간절한 부탁입니다.“
의국회의가 비상으로 열리게 되었고, 많은 토의 끝에 결국 어려운 허락이 떨어지게 되었다.
비록 부축하여 겨우 걷고 있는 환자지만 그녀를 포함한 세 식구는 환한 표정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시간은 지나 3일이 다 되어가는 저녁,
의국 및 병동 식구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의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세 사람 모두가 병실로 돌아왔다.
환자의 얼굴에는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분홍빛 홍조가 띠워있었고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병실을 향하였다.
우리는 환자를 도와준 후 동거남을 불렀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제는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궁금증을 풀어주실 수 있습니까?“
“아, 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말을 꺼내던 그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고,
“저, 사실........ 사실........ 데리고 나가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도 호적에 올리구요. 흑~~“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병동 식구들은 너나없이 동시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동거하던 사이니 환자가 사망하면 자신은 그대로 총각일 테인데,
식을 올려주고 아이를 호적에 올리고.......
아직도 이러한 순수한 총각이 있다는 생각에 모두들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추억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본원으로 돌아온 10일 후쯤 환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댓글 헤어지는걸 아무렇지않게 생각하는 요즘시대에 정말 가슴따스하고 아픈 사랑이네요..
감동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