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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3월 2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마태오 5,20ㄴ-26)
if you bring your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call that your brother
has anything against you,
leave your gift there at the altar,
go first and be reconciled with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말씀의 초대
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각 사람은 드러난 행실에 따라 하느님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제1독서). 구약의 율법의 근간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새로운 정신으로 재선포한 그리스도의 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려면 먼저 악한 마음을 뿌리 뽑아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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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바보나 멍청이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말을 할 때 좀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탈무드』에도 말로 생기는 피해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남을 헐뜯는 말은 살인보다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남을 헐뜯는 말은 세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곧 남을 헐뜯는 말은 그 말을 퍼뜨리는 사람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을 죽입니다.” 한 번 입에서 나간 말은 자기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듣는 사람,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모두 악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사람이 마귀가 들렸다고 하면 그의 머리에 뿔이 두 개 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라틴 말에서 ‘마귀’라는 말은 ‘디아볼루스’(Diabolus)입니다. 이 말은 ‘중상 모략하는 자’, ‘비방하는 자’, ‘이간질하는 자’, ‘두 마음을 품은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을 중상하고 비방하며, 두 마음을 품고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은 마귀나 하는 짓입니다. 마귀라는 말이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면, 나는 과연 평소에 어떤 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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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관계’입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서로의 관계에서 늘 우리는 웃고 우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숱하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가깝게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어쩌면 승합차 한 대 인원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의 승합차에 동승하고 가는 가까운 사람들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미움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몸과 같아서, 누군가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받으면 ‘출혈’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더욱 큰 아픔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출혈을 막는 방법은 ‘미움’이라는 압박 붕대로 눌러서 지혈시키는 것입니다. 곧,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려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치료하는 약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다가와 용서를 청하면 화해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지면 피해자의 마음의 상처는 비록 흉터는 남지만, 출혈이 멈추고 새살이 돋아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자주 큰 상처를 주는지요? 지금도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누군가가 아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받은 상처의 고통보다 내가 상대방에게 준 상처의 아픔을 더 크게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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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에는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힌 이들이 숨어 살던 곳입니다. 반드시 레위 지파 영역 내에 설치했습니다. 유목민에게 보복은 당연했습니다. 그러기에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도피성에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해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도피성은 ‘스켐’으로, 예루살렘 북쪽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구약의 ‘도피성’은 살인자를 보호하는 곳입니다. 물론 우발적인 사고를 낸 사람입니다. 그렇더라도 철저한 율법 국가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지기에 보복을 막는 차원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그들처럼 글자나 따지는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아버지였던 모세는 ‘도피성’까지 만드는 유연함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그렇게 걸어선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살인이라는 어마어마한 것에 매달리기보다 형제에게 욕하고 성내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소홀히 하면서 ‘먼 곳의 사람들’에 대해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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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바치는 예물보다 형제들과 화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며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불목하여 싸우는 인간들에게서는 그 어떤 예물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어제 복음 말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주님의 마음은 진정 사랑이 넘치는 부모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더 많이 상속받으려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형제들이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 원수처럼 지내면서도 저마다 부모 앞에 나타날 때에는 온갖 예를 갖추고 선물을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부모가 그러한 문안 인사와 선물을 반기겠습니까? 진정 부모를 위한다면 서로 화해하고 잃어버린 우애를 되찾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지 또는 이웃과 서로 불목하여 마음이 불편한 상태에 있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먼저 상대편을 찾아가 화해의 마음을 전하려는 용기를 내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화해하는 바로 그 자리에 분명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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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무시하기에 그를 바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얕보는 마음이 있기에 그를 멍청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그런 말과 행동을 삼가라는 내용입니다. 형제를 무시하고 얕보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합니다. 협박이 아닙니다. 그만큼 가까운 사람을 잘 대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말로써 상처 주지 말라는 것이지요. 허물이 없기에 ‘아무렇게나 말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본인은 허물없이 말한다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은 상대의 마음이 되어 봐야 합니다.
“그것도 못 들어? 한물갔구먼.” 아내는 무심코 한마디 합니다. 남편이 김칫독을 들려는데 꿈쩍을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지요. ‘벌써 늙었나!’ 헛웃음을 참는데, ‘한물갔다’고 한 것입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집니다. 아내가 멀리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당신은 좀 빠져라.” 시누이 생일 날, 아가씨들과 어울린 아내에게 남편은 무심코 한마디 합니다. 농담인 줄 알지만 얼굴이 굳어집니다. 억지웃음으로 자리를 뜨지만,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립니다. ‘매양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나?’ 남편이 멀리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말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평생 사랑하며 살아야 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허물없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다른 내용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의롭다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주변 열강들의 외세에 시달려왔던 우리 민족이기에, 숱한 나날 동안 식민 통치에 이력이 난 우리들이기에, 긴 세월 동안 군부 통치에 시달림을 받아온 우리들이기에 '의로움'이란 단어만 보면 즉시 뇌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강함' '결사항전' '혈서' 같은 말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하면 즉시 떠오르는 대상은 불의를 보면 절대 못 참는 사람, 삭발하고 머리띠 두른 사람, 길거리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한자 의(義)자 분석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의(義)자는 양(羊)과 나(我)의 합성어입니다. 결국 의로운 사람은 자신 안에 한 마리 양이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순한 채식동물, 염소와는 달리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동물, 흠없고 순결한 동물, 겸손하고 순응적인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양은 염소와 대비되어 천국의 동물, 하느님의 동물로 묘사됩니다. 이는 우리가 장례미사 때 마다 읽게 되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오면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갈라놓듯이 의인은 오른쪽에 악인은 왼쪽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의롭다는 것은 강경일변도, 투쟁일변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기보다 겸손하다는 것, 순수하다는 것, 순응적이라는 것, 부드럽다는 것, 하느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의 표방했던 의로움은 거짓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은 한없이 뻣뻣했습니다. 그들의 콧대는 하늘 높은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뒤는 구리고 또 구렸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때로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불의 앞에 날 선 대립과 섬뜩한 비판, 강한 투쟁과 강직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부드러움과 온유함도 필요합니다. 따뜻한 배려와 측은지심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얼마나 자상하고 부드러우셨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섬세하고 다정다감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예수님의 한없는 부드러움이 우리 인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
-권태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언급하시면서,
그들보다 더욱 올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후 살인에 대한
말씀으로 그 결과에 집중하시기보단 그런 극단적인 죄의 행위에 앞서
신앙인으로서 보여 줘야 할 자세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이는 죄악의 싹을 초기부터 잘라 버리시려는 그분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들을 어떻게 조절하고 다스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살인해서는 안 된다.’의 율법 규정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재조명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심판은 죄행위의 유무有無만을 따져 단죄와
판단으로 공동체를 갈라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로
내 이웃 모두를 사랑의 공동체로 초대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현실의 삶에서 우리 행동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정화되리라는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서 얼마만큼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는지, 특히 그분이 보여 주신 용서와 화해의
삶을 얼마나 실천하고 살았는지 성찰해 보는 그런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욕이 무슨 접속사나 조사라도 됩니까 ?
- 노성호 신부-
네 살 때쯤인가, 놀다가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심하게 맞은 적이 있었다. 밖에서 듣고 온 말 한 마디를 어머니 앞에서 했기 때문인데, 그 말은 욕이었다. 어떤 욕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호되게 매를 맞고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나는 그때부터 욕을 하지 않을 뿐더러 이 세상에서 욕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
한번은 신학생 때 동기들과 택시를 탔다. 그런데 우리가 올라타기 무섭게 출발하던 기사님은 갑자기 험한 욕설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물론 그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뒤에 두고 어쩜 그리 욕을 잘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바로 문을 열고 내렸다.
현재 나는 학교에서 사목을 하고 있는데, 학생들과 지내다 보면 자기들끼리 욕하고 떠드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멀리서도 욕이 섞인 된소리를 들을 때면 순간 기분이 상한다. 얼마 전에는 어느 초등학생이 친구들과 놀다가 심하게 다투었는지 친구들한테 딱 세 마디 욕을 하면서 집까지 걸어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요즘에는 욕이 접속사나 조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화나는 일이 있으면 욕하면서 풀기도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욕은 다시 자신한테 돌아와 자신을 최고 의회와 불붙는 지옥에 넘기고 만다. 욕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욕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실을 고치고 바른 언행에 힘쓰면서 긍정적으로 화를 풀고 주변의 모든 것과 화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겠다.
나이 듦
- 양미강 목사-
나이 듦, 이 말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30대를 눈앞에 둔 20년 전 일이다. 남들은 20대를 넘기기가 죽도록 힘들다고 하던데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방황하던 20대를 끝내고 무엇인가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 몸 안에 있던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한 후련함과 홀가분함이 있었다. 20대에 나를 억눌렀던 것은 바로 결혼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내 생각에서 자유로움을 얻었을 때 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꺾어진 나이 50대에 진입하면서 다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이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넉넉함과 관용이기보다 편협함과 나만 옳다는 고집불통의 완고함이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나이가 들수록 지갑을 열고 말을 닫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맞는 말이다. 나이 들수록 지갑을 열어야 한다. 후배도 먹이고 친구도 먹여야 한다. 훈훈함은 지갑에서 나온다. 비록 그 지갑이 두툼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지갑도 있으니 말이다.
나이 들수록 말을 닫아야 한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말을 아끼라는 말이다. 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따를 때 가능하다.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은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진정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말을 적게 하더라도 그 속에서 풍기는 나이 듦의 권위를 품어내야 한다. 이래저래 50이 되면서 나는 인생을 배우고 있다.
소리와의 화해
-김찬선신부-
이곳에서도 비가 왔겠지만 어제 광주는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잠을 자다 비 오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비가 눈보다 좋은 것이 있다면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나뭇잎이면 나뭇잎,
시멘트 바닥이면 시멘트 바닥,
그 어디에 닿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는다면
그 소리는 즉시 내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가 됩니다.
내 듣지 않는다면 땅을 적시든 흘러가 버리든 하고 말았을 것이
잠에서 깨우듯 내 마음을 두들겨 깨우고
창밖으로 불러내듯 나를 나에게서 불러내어
널려진 존재에게로 인도하고
그리고 널려진 존재로 계신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그 빗소리 하나 때문에 하느님과 만나고 이웃을 만납니다.
내 잠에 묻혀버린 하느님의 부르시는 소리.
내 생각에 묻혀버린 이웃들의 외치는 소리.
오늘의 화해는 이 소리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나의 마음 무디게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올림픽이 한창인데
어찌 보면 우리도 그들처럼 결승선만을 보며 무한질주 했습니다.
어떤 소리도 듣지 않고 그저 나의 길을 달렸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간다고 하며 갔습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에서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과 화해하라고 하지만
오늘 우리의 화해는 이 소리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러도 듣지 않고 나의 길, 죽음의 길을 갔는데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진심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악인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살인을 하지 않음은 물론
누구보고 바보 멍청이라고도 하지 말라 하시고,
누구에게 원한 산 일이 있었다면
제단의 예물을 바치지 전에 먼저 화해하라고 하시지만
오늘 우리의 화해는 화해할 일조차 없을 정도로
이웃과 무관하게 살아온 삶을 돌이켜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보, 멍청이라고도 해보고
바보, 멍청이라는 나의 소리가 이제는 메아리 되어
나에게 되돌아오는 소리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겹습니다.
그래서 바보, 멍청이라고 한 것이
바보, 멍청이인 나임을 서로 일깨우는 것이어서 고맙습니다.
미사의 준비
-전삼용신부-
이번에 다시 사형제가 합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13년 전의 찬성-반대, 7-5에 비해 이번엔 5-4로 근소하게 찬성이 선택되었습니다.
인터넷 서울 연합뉴스엔 “사형제 합헌에 탄식한 ‘사형수 대모’”라는 제목으로 글이 실렸습니다. 바로 20년이 넘도록 사형수들을 찾으며 뉘우침을 도왔던 올해 79세의 조 모니카 수녀님입니다.
수녀님은 처음부터 재판을 지켜보았고 합헌 결정이 나자 헌재 주차장 한편에 다른 이의 시선을 피한 채 우울해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녀님들과 신자 분들의 위로에 “애들 어떻게 하느냐”며 마음아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재판관들이 결정을 내렸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라며 ‘인간 생명은 존중받아야 하고 지구보다 더 무거운 게 사람 생명인데… 회개가 되어가고 잘 살아가려는 그때 죽을 날도 알리지 않고 집행하는 것은 참 잔인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 밑에 달린 의견들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리플을 달았습니다.
대부분의 의견은 사형은 꼭 사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종교인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고 수녀님에 대해서도 ‘사람을 죽인 사람이 사람인가? 혹은 너도 한 번 피해자들처럼 당해 봐라.’라는 식의 심한 욕설을 써놓은 것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사형제 폐지를 찬성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겠지.’하며 밑으로 계속 읽어 내려갔습니다. 읽어내려 갈수록 더욱 마음만 무거워졌고 결국 30-40개의 악플을 읽고서야 찬성의 글을 한, 두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당한다면 그 땐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사람인가?’ 하면서 사형제를 옹호하면서 비록 우리 손으로 죽이지만 않을 뿐이지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많은 아픈 사연 중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듣는 것만큼 마음 아픈 사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다 보면 이런 사연을 가끔 접하게 됩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 가정이 파괴가 되는 경우는 더 가슴 아픕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신의를 저버린 사람은 새로 만난 사람과 잘 살아가는데 버림을 받은 사람은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든지 자녀를 키우기 위해 혼자 궂은 일을 하며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신의를 저버리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바람피우는 사람을 다 죽여야겠습니까? 나는 과연 어떤 누구에게도 잘못하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것입니까? 죽을 죄를 지어서 죽어야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고해성사 때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다가 뉘우치며 앞으로는 가정에 충실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또 세상에 알리고 신고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크건 작건 하느님 앞에 다 죄인입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려 나오는 이유도 우리 죄를 용서받고 또 용서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해 미운 감정만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 죄를 어떻게 용서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성전에서 기도는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일러주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부부가 온전한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서로 보이지 않는 밖에서도 신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우리들도 미사를 드리러 오기 이전에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였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해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의 유일한 계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믿고 지키지만 그것과 관련된 것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형제들에게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큰 죄는 사실 다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지금은 교만하여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지만, 사실 ‘상황’이 그리되면 우리도 사형자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같은 죄로 취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은 절대 용서 못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정의 자체이시기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미사를 하고 많은 예물을 바쳐도 용서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먼저 예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하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준비는 봉헌금을 준비하고 몸만 성당으로 와서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구원받아야 하는 온전한 영혼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양승국신부-
<꼽냐?>
언젠가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데려나왔던 한 아이가 기억납니다. 나이에 비해 체격이 땅땅한 것이 아주 야무졌습니다. 마음이 여리고 착했지만 첫인상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척 보면 "깍두기" 계보라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눈빛이 사납다보니 본의 아니게 친구들과 자주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별 생각 없이 쳐다보는데도 상대방에서는 "저것이 내게 감정이 있나?"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눈빛이 날카로웠지요.
소년원이나 심사원, 또는 구치소나 교도소에서 자주 체험하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이나 공동체 안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밀집되어 생활하다보니 사소한 일로 마음 상하고 또 심하게 다투기도 하고 급기야 큰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형사건의 첫 시발점은 너무도 사소한 것이어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입니다.
머리가 터지고 갈빗대가 나가는 전치 5주쯤 되는 싸움의 원인을 추적해 가다보니 "왜 째려봐?"였습니다. 상대방이 "내가 언제 째려봤다고 그래?" "그래서 꼽냐?" "그래 꼽다." "아니,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하면서 주먹을 한 대 날립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날아든 주먹에 코피가 터진 상대방은 격분한 나머지 있는 힘을 다해 상대방의 턱에 시속 100Km짜리 헤딩으로 응수합니다. 턱이 얼얼해진 상대방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어 흉기가 될만한 것을 집어듭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전치 10주의 부상, 결국 살인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심한 다툼의 원인을 보니 라면이 좀 더 맛있으려면 "라면 스프를 먼저 넣느냐? 면을 먼저 넣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 인간들의 "욱하는 마음", "부족한 인내심"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 싸움이 나중에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가지 않도록 아예 불화나 다툼의 원인을 원천봉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은 아예 애초부터 하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에게 "바보"라는 말을 던지면 저쪽에서는 더 심하게 "바보 병신"으로 응수합니다. 이쪽에서 "미친놈" 하고 화살을 날리면 저쪽에서는 "죽일 놈"으로 응수합니다. 순식간에 증오와 반감이 쌓이고, 순식간에 둘은 원수지간이 됩니다.
회개의 첫걸음은 다른 무엇에 앞서 그릇된 우리의 언어습관을 고치는 일입니다. 왜곡된 언어구조, 비꼬는 습관, 공격적인 대화, 헐뜯는 식의 말들을 고치는데서 회개는 시작됩니다.
격려와 위로가 되는 말, 삶의 의미와 희망을 주는 고운 언어습관을 통해서 우리와 동행하는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노고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노고이다. 사람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미사의 준비
-전삼용신부-
많은 아픈 사연 중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듣는 것만큼 마음 아픈 사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다가보면 이런 사연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 가정이 파괴가 되는 경우는 더 가슴 아픕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신의를 저버린 사람은 새로 만난 사람과 잘 살아가는데 버림을 받은 사람은 병이 걸려 일찍 죽는다든지 자녀를 키우기 위해 혼자 힘든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정이 소중한지 두 집 살림을 하면서도 상대를 속이고 몇 년을 살기도 합니다. 이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사람의 마음은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의를 저버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하면서 몸만 집에 들어와 산다고 하여 그것이 상대나 자녀를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혼인을 하였다면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갈 때야만 상대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 않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단순한 진리이지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핑계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주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이기지 못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을 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진리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해당됩니다. 미사는 단순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혼인 계약을 맺은 신부이고 특별히 성체를 영하면서 그 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어떤 계약에나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계약은 파기되고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혼인도 하나의,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계약입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그리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심으로써 하실 의무를 다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과연 그분께서 내려주신 혼인계약 조건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 어쩌면 그 혼인 계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즉, ‘사랑’이 우리가 지켜야 할 혼인조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혼인한 부부가 서로 신의를 지키며 살다가 집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것처럼, 미사를 드리러 오기 이전에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였는지 먼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용서 못한 사람이 있다면 먼저 용서를 하고 미사에 참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신의를 저버리고 몸만 집에 들어와 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신랑인 그리스도께 모욕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채 성체를 영하면 그 분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그 성체는 그의 영혼과 육신의 독이 되게 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죗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저는 이것을 연옥과 연결시키고 싶지만, 어쨌든 죄를 지으면 그 죗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합니다. 그 죗값은 이 세상에서부터 치러지고 그래서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하느님나라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믿고 지키지만 그것과 관련된 것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형제들에게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큰 죄는 사실 다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현재로 말하면 이들은 형제에게 해야 할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전례에만 열심히 참례하며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미사의 준비는 바로 이전 미사가 끝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사랑하는 삶 자체가 바로 다음 미사 때 온전히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화해의 속 뜻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를 찾아뵈러 가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하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기도는 충실히 하면서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얘기가 담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지만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높이 쌓다가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 계시어
거기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사람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을 만나려면 단절된 관계를 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화해하라고 하신다고 화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스스로 화해하려고 해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지내자고 찾아가 악수를 했는데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和解, 이 한자어의 뜻을 잘 보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和하려면 먼저 解를 해야 합니다.
화해란 다 풀어버리고 잘 지내는 것인데
그와 잘 지내기에 앞서 내 안의 풀 것을 다 풀어야 합니다.
무엇을 풀어야 합니까?
미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복수의 감정.
질투의 감정.
서운한 감정.
한 마디로 내 안의 모든 惡感情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감정을 갖게 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에게 나의 감정 해소를 책임지우지 말고
나의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할 때
나에게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더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분노의 화살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그런 말에 서운했던 나의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말에 상처받았던 나의 허약함을 진정 강인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계략에 넘어갔던 나의 허술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전에는 그로 인해 내가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로 인해
넓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져
더 이상 그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진정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 하느님 사랑으로 충분하여
그와 상관없이 진정 행복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삶에서 그를 배제하고
오직 기도만 하며 하느님과만 잘 지내려던 나에서
이제 그와도 잘 지내고
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와 함께 예물을 봉헌하러 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해와 예물
- 배미애 수녀-
수도회에 입회해 지원기와 청원기를 보내는 동안 몹시 미워했던 자매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신혼처럼 달콤해야 할 수도 생활 초반을 매우 어둡고 활기 없이 보냈다. 그러면서도 내 감정을 한 번도 솔직히 나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매와 밤늦도록 서로의 느낌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서 화해가 시작되었다. 날아갈 듯한 자유로운 마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강하게 경험했던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자기 형제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지 말라는 가르침에서 시작해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원한을 품은 형제가 생각나면 먼저 그를 찾아가서 화해하고 예물을 드리라고 한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사는 가족·친지·수도회 회원·친구들이 우리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려고 준비한 예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선물이 아닐까? 재능을 활짝 꽃피울 때는 언제일까? 사랑받고 사랑할 때, 곧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때다. 우리 마음 안에 미움이 가득할 때 삶의 활기는 시들고 재능과 선물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화해는 자유를 위한 선택과 결단이다. 자유로운 결단이 우리를 더욱 풍요로운 삶으로 초대한다고 복음은 말한다.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부어주신 축복의 선물은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감사와 찬양의 예물로 빛을 낼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
-류충희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율법 이해를 다룬 여섯 가지 ‘대립명제’(마태 5,21-48)
중 첫 번째로 ‘화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유다인들은 탈출기 20장 13절과
신명기 5장 17절에 기록된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 때문에 살인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행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문자화된 율법 규정만을 좇다보니 정작 글로 씌어지기 이전의
하느님의 성스러운 뜻과 의로움을 놓치고 만 인간들의 어리석은 행위들을
예수님께서는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금령을
더 심화하여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하는 것조차 금하셨습니다. 어떠한
율법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이 사라지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성전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려 할 때 형제에게 원망을 품게 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사를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되새겨보아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한 형제님께서 식사를 위해서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주문을 하는데 맞은편에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기를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어요.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담당하는 웨이터에게 후한 팁을 주었지요.
웨이터는 간만에 손님에게 받는 후한 팁이었습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기에, 이 좋은 기분을 가지고서 복권을 한 장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권이 글쎄 1등에 당첨된 것입니다.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던 이 웨이터는 집으로 향하면서 한 명의 불쌍한 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갑 전체를 이 걸인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걸인 역시 최고의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날따라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푼돈이 아니라 지갑을 통째로 주는 사람을 만나다니요. 이 걸인은 오랜만에 가게에 들러서 맛있는 음식 재료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먹게 되는 음식을 떠올리니 너무나도 행복했지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주 불쌍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이 강아지의 처지를 보니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맛있는 음식꺼리를 구입했으니, 이 강아지와도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아지와 함께 집으로 왔고,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강아지 역시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대접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날 밤이었어요. 이 집 건물에 글쎄 불이 난 것입니다. 강아지가 가장 먼저 불이 난 것을 알았지요. 강아지는 무섭게 짖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강아지의 소리를 듣고서 아무런 희생자 없이 불이 난 건물에서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밖으로 무사히 나왔던 꼬마 아이 중에 한 사람이 장차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네요.
이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한 아가씨의 환한 미소였습니다. 그 환한 미소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코 우리들이 추구하는 거창한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지요. 내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과 작은 사랑이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로써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예물 봉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내 이웃에 대한 자그마한 사랑도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받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은 아닐까요?
자그마한 관심과 사랑. 이 정도로도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그 정도의 관심과 사랑도 없었던 우리들의 한없는 욕심과 이기심과 무관심이라는 것이지요. 욕심과 이기심과 무관심이 관심과 사랑으로 바뀌는 날, 이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세상으로 다시 변화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세요.
빠다킹신부
회복을 바라는 이가 먼저
-허찬란 신부-
싸움판에서 “잘못한 사람은 저 사람인데, 왜 당신이 나서서 참견이냐?”며
따지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왜 그렇듯 나서서 고통받으시고
수난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주시려고
그러셨던 것입니다. 화해를 시키는 중간자의 입장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화해는 누구든 잘못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빨리 원상태로 돌리길 바라는 이가 먼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족한 나의 삶에 들어오셔서 나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것이 바로 내게 쏟아주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삽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항상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선 매일 죄를 성찰하고 양심을 청소해야 합니다.
옛날부터 저희 사제들은 미사의 시작 때에, 그리고 잠자기 전 하루의 일을
반성하며 성찰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것을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과 사소한 시비가 있을 당시에는 내가 떳떳했다고 생각되던
일들도 다시 돌아보며 뉘우치게 됩니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
“주님, 이 밤을 지켜주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하고 성호를
그으며 잠을 청하지요.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는 사제의 삶 안에서
오늘 복음은 특별히 더 깊이 와닿습니다.
이웃, 또 다른 나
-이동훈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름대로 열심한 신앙인이었다. 수백 개나 되는 실천조항을 만들어 놓고 철저히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2퍼센트 부족하다고 하신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율법 정신이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챙기신다. 살인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과 성냄, 무시하는 말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성을 내고, 미워하고 무시하는 대상을 두고 ‘남’이 아니라 ‘자기 형제’라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을 내고 화를 내고 무시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형제라는 것이다. 나의 일부라는 말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자본을 최고의 우상으로 삼고 있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 딛고 일어서야 할 대상, 적인 것이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미워하고 화를 내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다. 자녀들에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를 안겨주기 위해 고액과외를 하고 조기유학을 보내 파행적 가정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만의 생존법을 배워가는 자녀들이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부모를 제 몸처럼 사랑하며 공경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나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을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최현욱 신부-
사순 제1주간 금요일이라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먼저 여러분들의 주변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들이 함부로 내뱉은 말로 인해서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원망하는 사람, 내가 힘들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를 울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원망을 품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울게 만든 사람이 없는지 말입니다.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지는 않습니까? 오늘 아침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바로 그러한 사람들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들에게 가서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라고 하십니다.
방금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 23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일은 잘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알맹이가 빠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을 너희가 들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하고, 이웃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고 업신여김으로서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고, 울도록 만들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라.”
다시 한 번 우리 주위를 돌아봅시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구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면서 내가 다가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다음이 아니라 바로 오늘 그들과 화해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지금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를 하늘나라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
-이회진신부-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아는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근무하는 성당으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차로 모셔다 드리는데,
수녀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던군요.
1년 전에 제가 수녀님께 이야기한
첫 세례 때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이야기를
성당 예비자들에게 했더니 그 가운데 한 자매가 나중에 당신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수녀님, 정말 하느님께서 세례 때의 첫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가봐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의 집에 차가 필요해서
‘하느님, 차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들어주세요.’ 하고 기도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며칠 전에 차가 하나 생겼습니다.
시숙네가 새 차를 사면서 쓰던 차를 저희에게 그냥 주었거든요.
그런데 수녀님 이럴 줄 알았으면 새 차를 하나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할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중고차가 아닌 새 차가 하나 생겼을 텐데 말이예요.”
사순절을 보내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 사순절이
음식을 적게 먹고, 술을 줄이며, TV를 적게 보며 절제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순절을 보내는 다른 방법은 더 많이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할 수만 있다면,
사순절 기간 동안 음식이나 술이나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을 줄이는 것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더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사순절을 더 온전하게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한 것이고,
술을 적게 하는 것은 집에 일찍 들어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고,
TV 보는 시간을 줄이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혹은 사순절을 잘 지내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혹은 끊어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 역시 여전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율법에 메여 있는 것이고,
여전히 악을 미워하라는 율법에 메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너머 형제들에게 성을 내는 것조차
바보라고 부르는 것조차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혹은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가에 관한 것을 넘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더 기쁘게 할 수 있는가? 를 기억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더 큰 어떤 것을 청하는 것이
인간적인 마음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바치는 사순의 희생과 보속 역시 하지 말아야할 어떤 규칙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느님 당신과 다른 이의 기쁨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자신의 더 큰 기쁨을 위해 오늘을 봉헌합니다.
“주님, 당신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아멘.”
"과거가 아닌 현재"
-이수철신부-
중요한 건 지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입니다.
초발심의 자세를 잃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 살면 과거 잘 살았던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도 단연 현재의 삶에 초점을 둡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
“버리고 돌아서서”란 말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실천적 회개의 중요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악인도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살 것이며,
그가 과거에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합니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하면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죽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죄악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길만이 살 길이요,
사순시기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매일 매일이 죄악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와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지금 잘 살아야지
과거 잘 살았다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역시 우리에겐 새로운 도전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하는 의로움 역시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직접 살인은 물론 간접 살인이라 할 수 있는
형제들에 대한 분노,
형제들을 ‘바보’나 ‘멍청이’ 라 내뱉는
간접적인 살인과도 같은 일체의 욕설들
뚝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생각이나 말, 행동 모두가 순수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결국은 마음의 순수로 귀착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생각도, 말도, 행동도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바치는 예물 역시,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형제와 화해한 후
돌아서서 예물을 바쳐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결같이 주님은 먼저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구체적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결코 하나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좋으신 주님은
죄악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선 우리 모두에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새 마음과 새 영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화해
-김훈일 신부-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갈등과 분쟁입니다. 이런 갈등과 분쟁과 미움이
일어나는 근본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만 들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분쟁은 결국 나와 이웃을 파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평화를 되찾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빚을 탕감하고, 증오를 사랑으로, 두려움을 신뢰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와 하느님의 화해를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신비를 통해서 이를 완성하셨고, 이제
두려움은 갔으며 우리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해는
뉘우치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해는
죄의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지 깨닫는 삶을 통해서
다가옵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미움이 싹트는 것을 막는
것이고 그것이 죄와 죽음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화해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가 손상시킨 것이나 상처 낸 것을 회복시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실수를 먼저 인정하고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다른 이들의 화해를 위해서
중개자가 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화해와 평화의 사도가 될 것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양승국신부-
<왜 내 안에 그 ‘몹쓸 인간’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형제에게 절대로 성내지 마라.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바보라고 부르지도 마라. 최고의회에 넘겨질 것이다. 멍청이라고도 부르지 마라.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수행자의 당부처럼,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祖 혜능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존 CH 우, ‘선의 황금시대’ 참조).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한 착한 수련자 형제가 이런 생각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수도생활, 저는 너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나 행복한지, 나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서 되나, 하는 걱정과 죄송스러움을 안고 매일을 살아갑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매일 하얀 백지 같은 또 다른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유 있게 기도할 기회를 주십니다. 형제들과 담소할 수 있는 기회, 기쁜 마음으로 노동할 수 있는 기회,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놀 수 있는 기회,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선물이 분명한 형제들과 함께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강도 높은 수업, 집중적인 양성과정이 계속되는 팍팍한 수행생활에 힘겨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형제다 보니 단조로운 수도생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 인간관계 안에서 오는 갖은 상처 앞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율법의 출발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복음의 처음 부분에서 들려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어떤 면으로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비교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배운 것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민족의 정신을 지켜오던 사람들과 달리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저 고개 숙이고 빌 줄만 알던, 그리고 정해진 율법의 굴레에 맞춰 의무만을 성실히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기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하늘나라의 조건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산다는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이런 경향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하느님에 대해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람들과 그것을 평생 배워야 하는 듯 여겨지는 사람들이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생각들 중 하나는 하느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하늘나라 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여겨지기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존중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배워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사람보다 훌륭히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거나 혹은 건방지거나, 불손한 생각 정도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율법이나 어떤 정해진 진리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어서 누구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생각해보면 율법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준을 갖다 댈 필요도 없이 누구나 율법의 근본 정신대로 살아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에 적혀 있는 가장 커다란 죄라 할 수 있는 ‘살인’을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율법에는 ‘살인하지 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살인’은 대죄입니다. 그러니 그 죄를 지으면 하느님 앞에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제시된 살인만이 죄가 아니며 자신의 형제와 같은 가장 가까운 이를 욕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이 ‘살인’이라는 율법에 해당되는 죄를 짓기 전 그 죄가 남을 시샘하고, 미워하는 아주 사소한 욕심에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 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옳게 살지 못한다면 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로써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런 커다란 죄를 짓게 되는 계기를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조심 시켜주시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마주 대하기 전 그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잘 준비하게 하십니다.
또한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속뜻을 설명해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마라에서 살인이란 율법은 사실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것에서 출발하고 또 그것 역시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이 숨겨진 듯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깝게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더 생각하고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록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자격으로는 못할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충분히 그들보다 옳은 사람이 될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갈등과 원한
-강희수 수사-
내 삶 안에 갈등과 원한 관계가 만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그 상처와 갈등을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리려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냅니다. 그까짓 것 과거지사로 돌려놓고 가급적이면 직접적인 접촉이나 충돌만 피하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원한을 품고 있는 나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런 상황 속에서 다만 내 안에 깊이 곪아가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그 모든 행위를 보상받으려 하거나 없애버리려 합니다. 그러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시고 화해한 순간은 죽음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한 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도전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내 몸은 욕구에 길들여져 골수 깊은 곳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나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수없이 넘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첫걸음은 용서라는 것을 체험합니다. 지난날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나와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합니다.
† 더 옳게 사는 법을 따라... †
- 박상대 신부 -
8가지 참된 행복의 길을 훈시하는 것으로 시작된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도래로 세워지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조건과 지침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자격조건은 모세의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신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손수 돌판에 새겨준(출애 31,18)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십계명에 딸리고 관련된 수많은 규정들과 법령들이다. 후자(後者)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도 있고, 조상들에 의해 덧붙여 만들어진 규정과 전통들도 있다. 여기에 예언서의 말씀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으로 유다인들은 생각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이를 잘 따르고 지켰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음과 의로움을 인정하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은 율사와 바리사인의 '옳음'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옳음'이다. '더 옳음'이 원급(原級) '옳음'의 비교급(比較級)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원급과 비교급의 관계와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옳음'의 깊은 뜻은 다른 데 있다는 말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옳게 사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옳음은 그들만의 생각에 기준을 둔 것으로서, 결국 율법의 자구(字句)에만 매인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이 요구되는 '더 옳음'은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둔 것이며, 율법의 정신을 파고드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도 하느님 계명의 근본정신은 분명히 있다.(신명 5,32-6,25) 그러나 그 근본정신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다는 행실'에는 빠져 있음을 예수께서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정신을 다시 심어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실이 우선 소금과 빛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것이 되기를 요구하신다.(5,13-16) 그런 다음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신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6개의 대당명제 중 첫 번째의 대당명제에 해당한다.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2-17)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따라서 옳게 사는 방법은 이 율법을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옳게 사는 것인가? 더 옳게 사는 것은 율법을 다 지켰다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의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역설적인 도식 속에 숨겨져 있다. 율법에는 '살인'이 '재판'(사형)에 해당되지만, 예수께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살인과 같은 '재판'(사형)을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바보'라는 욕은 '중앙법정'에 넘겨지며, '미친놈'이라는 폭언은 '불붙는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형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바보'나 '미친놈'이라는 폭언에 대하여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어도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허나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요구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제5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에 결코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 않음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고 모든 성냄과 폭언이 살인을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형제에게 화도 내고 욕도 하고 폭언을 일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화가 욕이 되고 욕이 폭언되며, 폭언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 자기제어능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을 내기 전의 단계인 마음속의 원한까지도 사전에 풀기를 바라신다. 형제에게 원한을 품은 마음으로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신다. 예물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위의 결과보다 그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