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1. 1. 24. 일요일.
날씨가 괜찮다.
오후에 아파트 단지 안을 천천히 걸었다. 눈이 많이도 녹아서 산책로가 깔끔하다.
석촌호수 서호 쉼터로 나가니 바둑 장기를 두는 영감들이 많았고, 구경꾼은 더욱 많았다.
서호 동호로 연결된 석초혼수 한 바퀴는 2,565m. 한 바퀴 돌았으면 싶은데도 아내는 '석촌호수에는 나가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기에 혹시라도 코로나 19에 감염될까 봐 하는 우려이다.
쉼터에 있는 화장실에만 잠깐 들르고는 이내 아파트 단지로 되돌아왔고, 안에서만 맴돌았다.
천천히 걸으면서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음력설이 언제쯤일까?
달력을 보니 오늘은 아직도 정자년 섣달이다. 열이틀.
설날은 2월 12일이니 이제는20일도 채 안 남았다.
나는 해마다 찾아오는 음력설이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해마다 한 살씩 더 먹는다는 게 여엉 부담이 가기 때문이다.
내가 '세배돈이 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사실이 마땅하지 않아서이다.
설날에 윗어른을 찾아뵙고는 절을 한 번 올리면 절을 받은 어른들은 주머니,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준다.
나한테도 어린시절이 있었다.
명절 설을 지낸 뒤 어른들한테 절을 올렸다. 내가 세배돈을 받은 기억은 없다.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살 때다.
집안어른들한테는 당연히 세배를 했고, 동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나이 많은 분들한테도 세배한 것은 기억한다.
절을 하면 밥상 위에 여러 음식물을 올려주었다. 떡이며, 과일이며...
하지만 돈을 받은 기억은 하나도 없다. 아마도 가난했던 1950년대, 60년대여서 그럴까?
나는 초등학교시절에 객지로 전학을 갔고, 방학 때에만 고향에 돌아왔다. 겨울방학 중에 음력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세배돈은 받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세배하려 다닐 만한 곳이 없다.
서울 아파트 안에서 살기에 더욱 그렇다.
고향인 시골에 있다고 해도 동네 어른들한테 세배할 수도 없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별로 없기에.
더군다나 내가 지금 집나이 일흔세 살이니...
이제 스무날 안으로 음력설이 오면 나는 집나이 일흔네 살.
누가 나한테 세배하러 올까?
세배 오면 나는 겁이 날 게다.
세배돈을 내주어야 하니까...
세배돈이 적다고 땡깡을 놓으면 어쩌지?
나도 세배 다녔으면 싶다.
내 나이에 걸맞게 세배돈 대신에 다른 거 하나쯤을 받았으면 싶다.
'저한테는 세배돈 줄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그냥 아파트 한 동(棟)이나 또는 대형빌딩 한 채라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번 설날에 큰아들네, 작은딸네가 와서 나한테 절을 하면...
여덟 살이 되는 친손녀, 일곱 살이 되는 친손자, 이제 4살 째 되는 외손자한테 나는 세배돈을 주어야 하나?
돈은 없으니까 그냥 '옛다'하면서 '꿀밤'이나 한 대씩 살짝 때릴까 보다.
할아버지가 된 내가 정말로 쬐쬐하면 안 되는데... 벌써부터 걱정거리가 생겼다.
설날 즈음해서 어디로 미리 도망쳐서 숨어야 하나?
자꾸만 사라지는 옛풍속.
자손도 별로 없고, 저 먹고 살기에도 바쁜 자식들이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 가까운 친척들은 각자가 알아서 설 차례를 지낸다.
* 수십 년... 내 시골집은 큰집이었기에 종조부, 숙부네가 와서 덕실벅실거렸다.
21세기인 지금... 서울에서 사는 나는 우리 가족끼리만 차례 지내는 흉내를 낼 터.
이마저도 이제는 그만 없앴으면 싶다. 이런 설 명절은... 법정공휴일이라서 쉬는 직장인한테는 설 추석 명절이 있어야 하겠지만서도 '날마다가 휴일이며, 공휴일'인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뜻도 없다. 나한테는 모든 나날이 똑같은 하루에 불과하기에...
세배돈 안 주려고 내가 잔소리를 길게 늘여봤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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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골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내 초등학교 4학년까지... 1960년 4월 벚꽃 필 무렵에 나는 객지로 전학갔고... 할머니는 친정집에 들렀기에 할머니를 뵙지도 못한 채 ... 친정에 다녀온 할머니는 한 달 뒤에 시골집 변소깐에서 쓰러졌고 그참 돌아가셨다. 자신이 충남 부여군 세도면 친정집에 들른 사이에 두 쌍둥이 손자가 객지로 떠났다며 한참이나 울었다던 할머니... 변소깐에서 쓰러진 뒤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가 며칠 뒤에 먼길 여행 떠나셨다.)
시골에서 밥 굶지 않고도 사는 집(함석집)이었기에 동네 청장년 어린아이까지도 늘 들락거렸다.
이들은 내 할머니한테는 정월 대보름까지도 세배하러 다녔다.
먼 곳에도 찾아오는 세배꾼들은 정월 보름까지도 문안 드릴 겸 찾아뵈었다.
1950년대, 60년대의 시대를 떠올리면 그 당시에는 시골에는 정말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2020년인 지금...
시골에는 동네 할머니가 겨우 몇 분이고. 영감들은 별로 없다.
이들은 자꾸만 뗏장 속에 묻히고 있으니 설 명절이 찾아와도 이제는 쓸쓸한 산골마을이다.
나중에 보탠다.
첫댓글 저도 새뱃돈을 받았지요
새뱃돈을 받으면
마을 입구에 있는 구멍가게에 달려가서 껌을 사거나 뽑기를
뽑았던 기억이 있네요
그리고 돈 많이 썼다고 혼이 나곤 했지요
아직 다듬지도 않았지요.
그냥 초안상태..
조 선생님은 기억이 좋군요.
산골 살았던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대전에서 살았고...
저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네요.
모두 야박한 어른들만 있었나요?
지금은 제가 세배돈을 나눠줘야 할 처지..
저는 하나도 안 주었을 겁니다.
제 아내가 알아서 주고...
저는 돈 아내한테 맡겼지요. 제 용돈은 제가 알아서 조금 쓸 뿐...
세배돈을 여기저기서 받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올해 음 정월은... 코로나 때문에 서로들 안 만나는 게 나을 듯...
이제는 세배 하면 우선 고향이 생각나네요
세배 돈은 상상도 못하구요
그저 밤 몇톨이 전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