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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
옛날 문왕(文王 : 주나라의 문왕)은 덕행을 노래했고 무왕(武王)은 흥성함을 노래했다. 무릇 절대 군주는 몸을 세워 도의(道)를 행하는데, 오직 한 시대뿐만 아니라 또 다음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단서를 열어 후세까지 빛을 발하는 자이다. 우리 중한(中漢 : 후한을 가리킴) 말기부터 왕실은 권력을 잃고, 영웅호걸이 함께 일어나 전쟁이 빈번하여 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도탄의 고통 속으로 빠졌다. 그 결과 선제(世主)께서는 이 일을 개탄하며 걱정하셨다. 연(燕)ㆍ대(代) 땅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인의의 명성이 현저했고, 제(齊)ㆍ노(魯)에 온 이후(예주자사가 되어 원소에게 몸을 기탁한 일)로는 풍모가 널리 퍼졌으며, 형주(荊)ㆍ영(郢) 당에서 창업했을 때는 군주와 신하의 마음이 합쳐졌고, 머리를 돌려 오(吳)와 월(越) 땅을 원조했을 때는 현인이든 어리석은 자든 간에 모두 그의 명성을 우러렀으며, 파(巴)ㆍ촉(蜀)에서 위세를 떨쳤을 때는 천하가 진동되었고, 용(庸)ㆍ한(漢)에서 병사를 일으켰을 때(한중토벌을 가리킴)는 강대한 적군은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때문에 우리 군주는 고조(高祖)의 창업을 계속 이어 대한(皇漢)의 종묘 제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간사하고 흉악한 적에 대해서는 아직 천벌을 가하지 못하여, 주무왕이 맹진(孟津)에서 부대를 결합한 것처럼, 또 은의 탕왕이 하의 걸왕(條)을 멸하지 못해 명조의 전투를 기다린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의 복록에는 끝이 있어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엄습했다. 천하가 통일로 달려가고 각 국가가 한 몸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해서는 당시 탁월한 인사가 천하를 보조하며 영웅다운 군주를 추대하고, 영명한 덕행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들은 많아 볼 만하다. 그래서 이들의 아름다운 풍모를 모두 서술하여 후세 사람의 이목을 감동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 소열황제를 찬함(贊昭烈皇帝) 】
황제(皇帝)가 남긴 자손은 팔방(八方)에서 번창하고 있다. 중산정왕(中山)을 다로 내보내 신령스런 정기가 응집하고, 기일에 따라 삶을 받아, 돌연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연(燕)ㆍ대(代)를 출발점으로 하여 예주(豫) 백(伯)ㆍ형주(荊)의 군(君)이 되었으며, 오(吳)와 월(越)은 귀순하여 신뢰했으며, 멀리서 풍모를 우러르며 결맹을 청했다. 파(巴)와 촉(蜀)을 지배하고 용(庸)ㆍ한(漢)을 병탄시켰다. 천지는 질서를 회복하고 종묘는 안정되었으며, 선조가 남긴 기초에 올라 덕망을 전하고 명성을 날렸다. 중화의 땅은 미덕을 사모하고, 서백(西伯)의 그림자를 따랐다. 후인에게 복을 열어주고, 대대로 흥성했다.
【 제갈승상을 찬함(贊諸葛丞相) 】
충무후(忠武)는 영명하고 고매하며, 장강가에서 위나라 군대를 격멸시킬 책략을 바쳤다. 오(吳)를 끌어들여 촉(蜀)과 연맹하도록 하고, 우리 군주를 위해 도모했다. 선제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고, 문무(文武)를 정비하였으며, 덕행과 교화를 넓히고, 사람들을 계도하여 풍속을 바꾸었다. 현인과 어리석은 자도 마음을 경쟁하고, 모두 자신의 몸을 잊고 받든다. 영내를 안정시키고, 사방의 국경지대를 안정시켰다. 자주 적지로 들어가 그 위광을 빛나게 하고, 대국(大國)을 소모시켰는데,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 허사도를 찬함(贊許司徒) 】
사도(司徒)는 맑은 풍격을 갖고 있고, 선악을 판단하며, 인물을 잘 식별하고 아끼고, 높은 명성이 울렸다.
【 관운장과 장익덕을 찬함(贊關雲長張益德) 】
관우(關)와 장비(張)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한신(韓)ㆍ경감(耿)과 공적을 비교하면 그들과 명성과 덕을 나란히 말할 만하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
【 마맹기를 찬함(贊馬孟起) 】
표기장군(驃騎將軍)은 분연(奮然)히 일어나 [한수(韓遂)와] 합종(合從)하고 [양추(楊秋) 등과] 연횡(連衡)하여 먼저 삼진(三秦)에서 [군사를 일으켜] 하서(河西)와 동관(潼關)을 지켰더라.
조정(朝廷)을 위하여 계책을 세웠으나[宗計-계책을 서로 의논하는 것] 혹은 다르고 혹은 같으매[或異或同- 의견이 서로 맞지 아니한 것. 즉 마초와 한수가 갈라선 것을 말함]
적이 이 틈을 타니 집안은 깨어지고 군사들은 망하였다.
방도(方道)가 어그러지매 덕(德)있는 이에게로 돌이켜[反] 봉(鳳)을 붙잡듯 용(龍)을 더위잡듯 하였다.[托鳳攀龍-덕있는 이에게 귀부하여 의지함을 말함]
【 법효직을 찬함(贊法孝直) 】
익후(翼侯 : 법정)는 훌륭한 책략을 사용하고, 세상의 흥함과 쇠함을 예측했다. 주상에게 몸을 던져 의탁하고, 의견을 서술하고 자문했다. 잠깐 생각하고도 바른 평가를 내리며, 사태를 보고 변화의 징조를 알았다.
【 방사원을 찬함(贊龐士元) 】
군사(軍師 : 방통)는 덕행이 지극한 인물로, 풍아한 기질이 빛난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부터 충성을 발했다. 이 인의(仁義)를 종주로 하여 몸을 죽이고 은혜에 보답했다.
【 황한승을 찬함(贊黃漢升) 】
장군(將軍 : 황충)은 돈후하고 웅장하고, 적군의 선봉을 부수고 난국을 극복하였으며, 공업을 세운 당시의 재간꾼이었다.
【 동유재를 찬함(贊董幼宰) 】
장군(掌軍 : 동화)은 맑은 절조를 갖고, 의기가 높고 마음이 항상 같았다. 직언을 하고, 백성들은 그 기강을 사모했다.
【 등공산을 찬함(贊鄧孔山) 】
안원장군(安遠 : 등방)은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절조는 아름답고 장렬했다. 재산을 가볍게 여기고 과감하고 용맹했으며, 어려움을 만나도 미혹되지 않았다. 적은 수로써 많은 수를 이길 수 있었으며, 이역에서 공업을 세웠다.
등공산(孔山)은 이름이 등방(方)이고 남군(南郡) 사람이다. 형주종사(荊州從事)의 신분으로 선주(先主)를 수행하여 촉(蜀)으로 들어갔다. 촉이 평정된 후, 건위군(犍為)의 속국도위(屬國都尉)가 되었고, 이 때문에 군(郡)의 이름을 바꾸었으며, 주제태수(朱提太守)가 되었다. 안원장군(安遠將軍)ㆍ내강도독(庲降都督)으로 선발되었으며, 남창현(南昌縣)에 주둔했다. 장무(章武) 2년(222)에 죽었다. 그의 품행과 업적에 관한 것은 산실되었기 때문에 전(傳)을 만들지 못했다.
【 비빈백을 찬함(贊費賓伯) 】
양위장군(揚威 : 비관)은 재간이 있고, 문무(文武)는 감탄할 만하다. 관직에 있을 때 임무를 잘 수행하였고, 당당하고 말을 잘 하여 자주 거론되었다. 재산 증식을 꾀하고 많이 배풀었으며, 인의와 공덕이 지극했다.
비빈백(賓伯)의 이름은 비관(觀)이며 강하군(江夏) 맹현(鄳) 사람이다. 유장(劉璋)의 모친은 비관의 재당고모이며, 유장은 또 딸을 비관에게 시집보냈다. 비관은 건안(建安) 18년(213)에 이엄(李嚴)의 군대에 참가하여 면죽(綿竹)에서 선주에게 저항하다가 이엄과 함께 항복했다. 선주는 익주(益州)를 평정한 후 비관을 비장군(裨將軍)으로 임명했으며, 후에 파군태수(巴郡太守)ㆍ강주도독(江州都督)으로 임명했다. 건흥(建興) 원년(223),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진위장군(振威將軍)을 더했다. 비관은 사람과의 교제에 뛰어났다. 도호(都護) 이엄(李嚴)은 천성이 자존심이 강해 호군(護軍) 보광(輔匡)과 나이와 지위가 서로 비슷했지만, 이엄은 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비관은 이엄보다 20여 세 적었지만, 이엄과 마치 동년배인 양 친밀하게 왕래했다. 비관은 37세에 죽었다. 그의 사적은 산실되었기 때문에 전을 만들지 못했다.
【 왕문의를 찬함(贊王文儀) 】
둔기교위(屯騎 : 왕련)는 옛 주인을 존중하고, 절개를 굳게 지키며 마음을 옮기지 않았다. 유장이 항복하여 나아가 임명을 받았을 초기에는 마음을 다해 세상의 모범이 되었고, 군수물자를 담당하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
【 유자초를 찬함(贊劉子初) 】
상서(尚書 : 유파)는 청결하고 고상하고, 언행을 단정하게 하고 몸을 닦았다. 뜻은 높고 도의를 갖추었으며, 고전 문장을 음미했고, 그 고아한 풍모에 기댔으며, 옛 사람과 견주기를 좋아했다.
【 미자중을 찬함(贊麋子仲) 】
안한장군(安漢 : 미축)은 온화한 용모로, 어떤 때는 인척이 되고, 어떤 때는 빈객이 되었다. 이 사람은 훌륭한 신하라고 할 수 있다.
【 왕원태ㆍ하언영ㆍ두보국ㆍ주중직을 찬함(贊王元泰ㆍ何彥英ㆍ杜輔國ㆍ周仲直) 】
소부(少府 : 왕모)는 몸을 닦아 신중했고, 홍려(鴻臚 : 하종)는 명석하고 성실했으며, 간의대부(諫議 : 두의)는 드러내지 않고 행동했고, 유림교위(儒林 : 주군)는 천문에 밝았다. 이들은 위대한 교화를 선양하였으며, 어떤 자는 중심이 되고 어떤 자는 일원이 되어 활약했다.
왕원태(王元泰)는 이름이 왕모(王謀)이고 한가군(漢嘉) 사람이다. 그의 용모는 단정하고, 행동거지는 전아했다. 유장(劉璋) 시대에 파군태수(巴郡太守)가 되었고, 귀환하여 주(州)의 치중종사(治中從事)가 되었다. 선주(先主)가 익주목(益州牧)을 겸임할 때, 별가(別駕)로 임명되었다. 선주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형초(荊楚)의 명족으로 영릉(零陵) 사람 뇌공(賴恭)을 태상(太常)으로 임명하고, 남양(南陽)의 황주(黃柱)를 광록훈(光祿勳)으로 삼았으며, 왕모(謀)를 소부(少府)로 삼았다. 건흥(建興) 초년,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고, 이후에 뇌공을 대신하여 태상(太常)이 되었다.
뇌공(恭)ㆍ황주(柱)ㆍ왕모(謀)는 모두 그 사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전(傳)을 만들지 못했다. 뇌공(恭)의 아들 뇌굉()은 승상서조령사(丞相西曹令史)가 되어 제갈양(諸葛亮)을 수행하여 한중(漢中)으로 출정했지만, 요절했다. 제갈양은 이를 매우 애석해 하며, 유부장사(留府長史) 장예(張裔)와 참군(參軍) 장완(蔣琬)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 영사(令史)에서는 뇌굉을 잃고, 연속(掾屬)에서는 양옹(楊顒)을 잃어, 조정에 크나큰 손실이 되었습니다.
양옹 또한 형주(荊州) 사람이다. 후에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이 장휴(張休)에게 질문했다.
“한가군(漢嘉)의 선배로 왕원태(王元泰)라는 자가 있었는데, 현재 그를 계승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장휴가 대답했다.
“왕원태에 이르러서는 주(州) 안에서 이을 만한 자가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군에서야!”
그가 중요시된 것은 이와 같았다.
양양기(襄陽記): [[양옹전]]으로 분할
하언영(何彥英)은 이름이 종(宗; 하종何宗)이며, 촉군(蜀郡) 비현(郫) 사람이다. 광한군(廣漢)의 임안(任安)에게 학문을 사사받았으며, 임안의 기술(미래를 예측하여 아는 방법)을 충분히 연구했다. 두경(杜瓊)과는 같은 스승 아래서 배웠지만, 명망과 학문은 그를 뛰어넘었다. 유장의 시대에 건위태수(犍為太守)로 임명되었다. 선주가 익주를 평정하고 목을 겸임하고 있을 때, 초빙하여 종사좨주(從事祭酒)로 임명했다. 후에 도참(圖讖)을 인용해 선주에게 즉위하여 칭제할 것을 권유했다. 선주가 즉위한 후, 대홍려(大鴻臚)로 승진했다. 건흥(建興) 연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적은 산실되었기 때문에 전(傳)을 만들지 못했다. 아들 하쌍(何雙)은 자가 한우(漢偶)이다. 그는 해학적으로 말하고, 순우곤(淳于髡)ㆍ동방삭(東方朔)의 풍모가 있었다. 쌍백현(雙柏)의 장(長)이 되었는데, 요절했다.
【 오자원을 찬함(贊吳子遠) 】
거기장군(車騎 : 오일)은 강인한 사람으로,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약한 병력으로 강한 적군을 제압했고,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오일전]]으로 분할
【 이덕앙을 찬함(贊李德昂) 】
안한장군(이회)은 남방의 장관이 되어 떨쳐 일어나 고향의 악한 사람을 토벌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쓸어버렸으며, 형벌을 세웠다. 만(蠻)과 복(濮)을 광범위하게 개척하여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 장군사를 찬함(贊張君嗣) 】
보한장군(輔漢 : 장예)은 총명하고 기민하며 자애로웠다. 장래의 생각을 말하고, 절실한 물음에 근접하게 대답하였으며, 시대의 미덕을 돕고, 우리 공업을 화합시켰다.
【 황공형을 찬함(贊黃公衡) 】
진북장군(鎮北 : 황권)은 민첩한 두뇌를 가졌으며, 책략을 운영함에 있어 방향이 있었다. 군사를 지휘하여 사악한 자들을 몰아내고, 임무를 수행하여 공적을 이루었다. 동쪽 구석 땅에 임명되어 말년의 운명은 불우했다. 선주의 패배로 위나라에 항복하여 본래의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타향으로 떠돌았다.
【 양계휴를 찬함(贊楊季休) 】
월기교위(越騎 : 양홍)는 매우 충성스러우며 뜻을 세우려고 스스로 신중했다. 안팎의 직무를 맡아 공적인 일을 염두에 두고 사적인 일을 잊었다.
【 조자룡ㆍ진숙지를 찬함(贊趙子龍ㆍ陳叔至) 】
정남장군(征南 : 조운)은 성정이 후덕하고, 정서장군(진도)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다. 당시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써 공훈을 날렸다.
진숙지(叔至)는 이름이 진도(到)이고 여남군(汝南) 사람이다. 예주(豫州)에서 선주(先主)를 수행하여 명망과 관위는 항상 조운(趙雲)의 뒤였다. 그들은 함께 충성과 용맹으로 칭송되었다. 건흥(建興) 초, 영안도독(永安都督)ㆍ정서장군(征西將軍)에까지 관직이 올랐고, 정후(亭侯)로 봉해졌다.
【 보원필ㆍ유남화를 찬함(贊輔元弼ㆍ劉南和) 】
진남장군(鎮南 : 보광)은 호기가 있고, 감군(監軍 : 유옹)은 숭고하고 독실하다. 나란히 군사 임무를 담당하여 변방지역에서 활약했다.
보원필(輔元弼)의 이름은 보광(輔匡)이고 양양군(襄陽) 사람이다. 선주를 따라 촉(蜀)으로 들어갔다. 익주(益州)가 평정된 후, 파군태수(巴郡太守)로 임명되었다. 건흥(建興) 연간, 진남장군(鎮南)으로 승진하였고 우장군(右將軍)이 되었으며, 중향후(中鄉侯)로 봉해졌다.
유남화(劉南和)의 이름은 유옹(劉邕)이고 의양군(義陽) 사람이다. 선주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익주가 평정된 후, 강양태수(江陽太守)로 임명되었다. 건흥(建興) 연간, 점점 승진하여 감군(監軍)ㆍ후장군(後將軍)까지 올라갔으며, 관내후(關內侯)의 자구이를 하사받았으며, 이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유식(式)이 뒤를 이었다. 작은 아들 유무(武)는 문학(文)에 재주가 있어 번건(樊建)과 이름을 나란히 했으며, 관직은 또한 상서(尚書)에 이르렀다.
【 진자칙을 찬함(贊秦子敕) 】
사농(司農 : 진밀)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아름다운 문장을 썼다. 문장은 화려하고 내용은 논리정연하며 탁월한 광채가 있었다.
【 이정방을 찬함(贊李正方) 】
정방(이엄)은 선주에게 유명을 받아 후세의 기강 정립에 참여했는데, 의견을 서술하지도 않았고, 협조하지도 않았다. 이단을 만들어 그 시대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므로 임무나 공적도 없어졌다.
【 위문장을 찬함(贊魏文長) 】
문장(위연)은 강직하고 용맹하며, 어려움에 임하여 명령을 받아 외적을 막아 싸우고 국경을 지켰다. 그러나 협력하지도 않았고, 조화를 이루지도 않았으며, 절개를 잊고 반란의 뜻을 언급했다. 그래서 최후의 행동은 증오를 받았고, 최초의 공적은 아낌을 받았는데, 이것은 실재로 그의 본성이었다.
【 양위공을 찬함(贊楊威公) 】
위공(양의)은 마음이 좁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다른 것을 취했다. 한가할 때에는 논리를 따랐지만, 위급할 때에는 사람을 상하게 하고 침해했다. 도리를 버리면 흉한 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주역에서 말한 것이다.
【 마계상ㆍ위문경ㆍ한사원ㆍ장처인ㆍ은공휴ㆍ습문상을 찬함(贊馬季常ㆍ衛文經ㆍ韓士元ㆍ張處仁ㆍ殷孔林ㆍ習文祥) 】
계상(季常)은 선량하고 성실하고, 문경(文經)은 근면하며, 사원(士元)은 규범이 되는 말을 하고, 처인(處仁 : 장존)은 계책을 얻었으며, 공휴(孔休 : 은관)ㆍ문상(文祥 : 습정)은 각기 재능과 명망을 가졌다. 모두 넓은 뜻을 펴서 초(楚) 땅의 우수한 인물이 되었다.
위문경(文經)과 한사원(士元)은 모두 그 이름ㆍ사적ㆍ출신지의 군현(郡縣)이 산실되었다. 장처인(處仁)의 본명은 장존(存)이고, 남양군(南陽) 사람이다. 형주종사(荊州從事)의 신분으로 선주(先主)를 따라 촉(蜀)으로 들어갔다. 남쪽으로 낙현(雒)까지 이르러서 광한태수(廣漢太守)가 되었다. 장존은 평소 방통(龐統)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방통이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선주가 방통을 찬미하는 말을 하자, 장존은 이렇게 말했다.
“방통은 비록 충성을 다하여 아까운 인물이지만, 위대하고 아정한 도의를 어겼습니다.”
선주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방통은 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사람입니다. 다시는 그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장존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오래지 않아, 장존은 질병으로 죽었다. 그의 행적은 산실되었기 때문에 전을 만들지 못했다.
은공휴(殷孔休)는 이름이 은관(殷觀)이며, 형주(荊州)의 주부(主簿)ㆍ별가종사(別駕從事)가 되었다. 선주전(先主傳)에 보인다. 그의 출신지 군현(郡縣)은 전하지 않는다.
습문상(習文祥)은 이름이 습정(習禎)이고 양양군(襄陽) 사람이다. 선주를 수행하여 촉(蜀)으로 들어갔으며, 낙현(雒)과 비현(郫)의 령(令)을 지냈으며, 광한태수(廣漢太守)가 되었다. 그의 사적은 전하지 않고 있다. 아들인 습충(忠)은 관직이 상서랑(尚書郎)까지 올랐다.
『양양기(襄陽記)』에 이르길: 습정(習禎)은 풍류(風流)가 있고 담론(談論)을 잘하여, 그 명성이 방통(龐統)에 버금가고, 마량(馬良)보다 높았다. 아들 습충(習忠) 또한 명성이 자자했으며, 습충의 아들 습융(習隆)은 보병교위(步兵校尉)로 군의 기밀문서나 기밀사항을 주관하였다.
【 왕국산ㆍ이영남ㆍ마성형ㆍ마승백ㆍ이손덕ㆍ이위남ㆍ공덕서ㆍ왕의강을 찬함(贊王國山ㆍ李永南ㆍ馬盛衡ㆍ馬承伯ㆍ李孫德ㆍ李偉南ㆍ龔德緒ㆍ王義彊) 】
국산(國山 : 왕보)은 훌륭한 풍격이 있고, 영남(永南 : 이소)은 사려가 깊으며, 성형(盛衡 : 마훈)과 승백(承伯 : 백제)은 가슴속의 것을 피력하고 시세에 대해 말했다. 손덕(孫德 : 이복)은 과감하고 날카로우며, 위남(偉南 : 이조)은 항상 후덕하다. 덕서(德緒 : 공록)와 의강(왕사)은 지기가 있고 용감하다. 사람들이 본성을 닦아 촉에 향기가 나도록 했다.
왕국산(王國山)의 이름이 왕보(王甫)이고, 광한군(廣漢) 처현(郪) 사람이다. 그는 인물 평가와 의론을 좋아했다. 유장(劉璋)의 시대에 주(州)의 서좌(書佐)가 되었다. 선주가 촉을 평정한 후 면죽현(綿竹)의 령(令)이 되었고, 돌아와서 형주(荊州)의 의조종사(議曹從事)가 되었다. 선주를 수행하여 오(吳)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군대가 자귀(秭歸)에서 패배하여 해를 입었다. 아들 왕우(王祐)는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고, 관직은 상서우선랑(尚書右選郎)에 이르렀다.
이영남(李永南)의 이름이 이소(李邵)이고 광한군(廣漢) 처현(郪) 사람이다. 선주가 촉을 평정한 후, 주의 서좌부종사(書佐部從事)가 되었다. 건흥(建興) 원년(223), 승상(丞相) 제갈양(亮)이 불러서 서조연(西曹掾)으로 임명되었다. 제갈양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갈 때, 이소를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임명하여 남겼다. 이 해, 세상을 떠났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서 이르길:[[이막전]]으로 분할
마성형(馬盛衡)의 이름은 마훈(馬勳)이고, 마승백(馬承伯)의 이름은 마제(馬齊)인데, 모두 파서군(巴西) 낭중현(閬中) 사람이다. 마훈(勳)은 유장(劉璋)의 시대에 주(州)의 서좌(書佐)가 되었고, 선주(先主)가 촉(蜀)을 평정한 후, 초빙되어 좌장군속(左將軍屬)에 임명되었다가 이후에 주(州)의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전임되었고, 후에 세상을 떠났다. 마제는 태수(太守) 장비(張飛)의 공조(功曹)였다. 장비는 마제를 선주에게 추천하여 상서랑(尚書郎)으로 임명했다. 건흥(建興) 연간, 마제는 종사승상연(從事丞相掾)이 되었다가 광한태수(廣漢太守)로 승진했으며, 다시 참군(參軍)이 되었다. 제갈양(亮)이 세상을 떠난 후,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마훈과 마제는 모두 재간에 의지하여 스스로 빛냈는데, 고향에서의 위신은 요주(姚伷)만 못했다.
요주는 자가 자서(子緒)이고 역시 낭중현(閬中) 사람이다. 선주(先主)가 익주(益州)를 평정한 후, 공조서좌(功曹書佐)가 되었다. 건흥(建興) 원년(223)에 광한태수(廣漢太守)가 되었다. 승상 제갈양은 북쪽의 한중(漢中)에 주둔하고 있을 때, 그를 불러 연(掾)으로 삼았다. 요주는 문무의 인재를 동시에 추천했다. 제갈양이 그를 칭찬하여 말했다.
“군왕에게 충성하고 이익이 되게 함에 있어서 인재를 추천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인재를 추천할 경우에는 각각 자신들이 좋아하는 분야에 힘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요연(姚掾)은 강함과 부드러움을 병존시켜 문ㆍ무 두 방면에서 쓰는 사람의 수요를 확대하고 있으니, 넓고 전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연의 지위에 있는 자들이 각기 이 일에 주의하여 나의 기대에 보답하기 원합니다.”
그는 참군(參軍)으로 승진되었다. 제갈양이 세상을 떠난 후, 점점 승진하여 상서복야(尚書僕射)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성실함과 순수함에 감독했다. 연희(延熙) 5년(242)에 세상을 떠났는데, 계한보신찬이 씌어진 후의 일이다.
이손덕(李孫德)의 이름은 이복(李福)이며, 재동군(梓潼) 부현(涪)사람이다. 선주가 익주(益州)를 평정한 후, 서좌(書佐)ㆍ서충국(西充國)의 장(長), 성도현(成都)의 령(令)이 되었다. 건흥(建興) 원년(223)에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옮겼고, 강주독(江州督)ㆍ양위장군(楊威將軍)이 되었으며,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임명되었고, 평양정후(平陽亭侯)에 봉해졌다. 연희(延熙) 초,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이 한중(漢中)으로 출정했을 때, 이복(福)은 전감군(前監軍)의 신분으로 사마(司馬)를 겸했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에 이르길: 제갈량이 무공(武功)에서 병세가 악화되자, 후주는 이복을 파견하여 병세를 알아보고, 이후로의 국가를 위한 계책에 대해 상의하고자 했다. 이복은 가서 빠짐없이 임금의 뜻(聖旨)을 전하여 제갈량의 말을 듣고 헤어져 며칠을 가다가, 돌연 (제갈량이 말해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말을 달려 제갈량을 보러 돌아갔다. 제갈량이 이복에게 말하길,
“나(孤)는 그대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알고 있소. 근 며칠동안 말을 주고 받았지만,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으니 다시 와서 결론을 듣고자함이오. 그대가 묻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공염(公琰= 장완)이겠지요.”
이복이 사의를 표하며 묻기를,
“이전에 공(公= 제갈량)께 묻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렸었는데, 공의 백년(百年: 여기서는 제갈량의 사후) 뒤에는 누구에게 대사(大事)를 맡겨야(任) 하겠습니까? 그것을 묻고자 다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청컨데, 장완(蔣琬) 뒤에는 누구에게 맡겨야 됩니까?”
제갈량이 답하기를,
“문위(文偉= 비위)에게 이어받게 한다면 적합하겠소.”
(이복이) 다시 재차 그 다음을 물었지만, 제갈량은 답하지 않았다. 이복은 돌아와, 사명을 받들고 후주의 명령을 받아 수행했다. 이복은 사람됨이 식견이 정통하며 과단성 있고 영민하여 정무에도 능했다. 이복의 아들 이양(李驤)은 자가 숙룡(叔龍)으로 그 역시 유명하였다. 관직은 상서랑(尚書郎) 광한태수(廣漢太守)에 이르렀다.
이위남(李偉南)은 이름이 이조(李朝)이고 영남(永南)의 형이다. 군(郡)의 공조(功曹)가 되었다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며, 임공현(臨邛)의 령(令)이 되었고, 중앙으로 들어가 별가종사(別駕從事)가 되었다. 선주(先主)를 수행하여 동쪽의 오(吳)나라를 정벌하러 갔고, 장무(章武) 2년(222)에 영안(永安)에서 세상을 떠났다.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에 이르길: 이조(李朝)에게는 또 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 저마다 재주와 명망이 있어,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이씨삼룡(李氏三龍)이라 일컫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이르길: 뭇 신하들(群下)은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되어야 한다고 표를 올렸다. (이 때,) 그 표문의 작성은 이조에 의한 것이다.
신 송지가 기구잡기에 기록된 것을 살펴 보건대: 이조와 이소 또한 일찍 죽은 자들이기에‘삼룡’으로 불린 것이다. 이막(李邈)은 지나치게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삼룡으로 치지 않았다.
공덕서(龔德緒)는 이름이 공록(龔祿)이고, 파서군(巴西) 안한현(安漢) 사람이다. 선주는 익주를 평정한 후, 그를 군의 종사아문장(從事牙門將)에 임명했다. 건흥(建興) 3년(225)에 월수태수(越嶲太守)로 임명되었고, 승상(丞相) 제갈양(亮)을 수행하여 남쪽으로 정벌하러 갔다가 만족(蠻夷)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당시 31세였다. 동생 공형(衡)은 경요(景耀) 연간에 영군(領軍)이 되었다.
왕의강(王義彊)은 이름을 왕사(王士)라 하고, 광한군(廣漢) 처현(郪) 사람이며 왕국산의 사촌 형이다. 선주를 따라 촉으로 들어간 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고, 부절(符節)의 장(長)으로 임명되었으며, 아문장(牙門將)으로 승진했고, 지방으로 나가 탕거태수(宕渠太守)가 되었다가 건위태수(犍為太守)로 옮겼다. 마침 승상(丞相) 제갈양(亮)이 남쪽 정벌에 나서 익주태수(益州太守)로 전임되었다. 남쪽으로 가기 전에 만족(蠻夷)에게 살해당했다.
【 풍휴원ㆍ장문진을 찬함(贊馮休元ㆍ張文進) 】
휴원(休元 ;풍습)은 적을 경시하여 시기를 잃고 위험을 초래했다. 문진(장남)은 분투하였지만, 똑같이 이 패배로 목숨을 잃었다. 재난은 한 사람으로부터 생겨 확대된다.
풍휴원(馮休元)의 이름은 풍습(馮習)이고 남군(南郡) 사람이다. 선주(先主)를 수행하여 촉(蜀)으로 들어갔다. 선주가 동쪽의 오(吳)를 정벌하러 갔을 때, 풍습(習)은 영군(領軍)으로 임명되어 여러 군대를 통솔했는데, 효정(猇亭)에서 크게 패배했다.
장문진(張文進)은 이름이 장남(張南)이고, 역시 형주(荊州)에서부터 선주를 수행하여 촉으로 들어갔으며, 병사들을 인솔하여 선주를 따라 오를 정벌하러 갔는데, 풍습과 전사했다. 당시 또 의양군(義陽)의 부융(傅肜)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선주가 군대를 후퇴시킬 때, 적의 추격을 끊으며 오나라 군대에 저항하다가 병사들이 전원 죽었다. 오나라 장수는 부융에게 투항하라고 말했다. 부융은 욕을 하며 말했다.
“오(吳)나라 개들아! 한(漢)나라 장군으로 항복하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그리고 전사했다. 아들 부첨(傅僉)은 좌중랑(左中郎)으로 임명되었고, 후에 관중도독(關中都督)이 되었다. 경요(景耀) 6년(263)에 또 위험에 임하여 목숨을 바쳤다. 논의하는 자들은 그 부자의 2대에 걸친 충의를 칭찬했다.
『촉기(蜀記)』에 기재된 진무제(晉武帝= 서진(西晉) 1대 황제 사마염(司馬炎))의 조서(詔)에 이르길:
- 촉나라 장군(將軍) 부첨(傅僉)은 전에 관성(關城)에 있을 때, 몸소 관군(官軍: 조정의 군사, 여기서는 진나라 군대)을 막아가며 죽음에 직면했음에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부첨의 아비 부융(傅肜)도 역시 유비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천하(天下)의 선(善)은 하나일지언대, 어찌 서로 다르게 여기려 하는가? –
부첨의 자식 부저(傅著)와 부모(傅募)는 후에 죄인으로서 그 재산이 몰수되고 그 일가가 해관(奚官: 진(晉)조에 설치된 국가에 소속된 말(馬)의 관리를 맡은 관직)으로 (종이 되어) 잡혀들어갔으나, 서인(庶人)으로 사면해주었다.
【 정계연을 찬함(贊程季然) 】
[[정기전]]으로 분할
【 정공홍을 찬함(贊程公弘) 】
공홍(公弘 : 정기)은 뒤에 태어났지만 탁월한 정신을 갖고 있었다. 20세에 요절하여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 슬프다.
정공홍(程公弘)의 이름은 정기(程祁)이고, 정계연(程季然)의 아들이다.
【 미방ㆍ사인ㆍ학보ㆍ반준을 찬함(贊糜芳ㆍ士仁ㆍ郝普ㆍ潘濬) 】
옛날 도망친 신하는 예의에 따라 추격했다. 그들은 장관에게 원한을 품고, 커다란 덕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은 없고, 다른 마음이 북쪽으로 달려가게 했다. 사람들과 단절되고, 위와 오 두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미방(糜芳)은 자가 자방(子方)이고 동해군(東海) 사람이다. 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었다.
사인(士仁)은 자가 군의(君義)이고 광양군(廣陽) 사람이다. 장군(將軍)이 되었고, 공안(公安)에서 주둔하며 관우(關羽)의 지휘하에 있었는데, 관우와 불화가 있어 반역하여 손권(孫權)을 맞아들였다.
학보(郝普)는 자가 자태(子太)이고 의양군(義陽) 사람이다. 선주는 형주(荊州)에서 촉(蜀)으로 들어온 후, 학보를 영릉태수(零陵太守)로 임명했다. 오(吳)의 장수(將) 여몽(呂蒙)에게 속아 성문을 열고 여몽에게 투항했다.
반준(潘濬)은 자가 승명(承明)이고, 무릉군(武陵) 사람이다. 선주(先主)는 촉(蜀)으로 들어올 때, 그를 형주치중(荊州治中)으로 임명하여 남아 지키면서 주(州)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역시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자, 곧 오나라로 들어갔다. 학보는 관직이 정위(廷尉)까지 올랐고, 반준은 태상(太常)까지 올랐으며 후(侯)로 봉해졌다.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益州耆舊雜記)에는 왕사(王嗣), 상파(常播), 위계(衞繼)의 이야기들도 있는데, 모두 유씨가 촉나라를 지배할때 사람들이어서 이곳에 적는다
왕사(王嗣)는 자가 승종(承宗)이고, 건위(犍為)군 자중(資中)현 사람이다.
연희연간(238년-257년)에 공업과 덕행이 현저했기 때문에, 효렴에 추천되었다. 점차 승진해 서안위독(西安圍督), 문산태수(汶山太守)가 되었고, 안원장군(安遠將軍)가 부가되었다. 영내의 강족과 호족들을 은애와 신의를 가지고 접했기 때문에, 모두 그에게 복종했다. 또, 평소 난폭한 여러 부족들도 모두 복종해 왔기 때문에, 당시 북방의 국경 지대는 안정이 되었다. 그 때문에, 대장군 강유(姜維)가 북벌 할 때마다, 강족은 마·우·양·모직물을 제공했고, 한층 더 곡물을 내 자금의 도움으로 했기 때문에, 강유는 그 자재를 기반으로 싸울 수 있었다. 진군(鎮軍)장군으로 승진해, 그대로 군 태수도 겸임했다.
후에 강유의 북벌에 수행했을 때,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고, 그때문에 수개월 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이민족들이 수천명이 몰려 들었고, 눈물을 흘려 소리를 높여 울었다. 왕사는 인정에 두텁고 진심 있는 인품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신뢰 받았다.
강족들은, 왕사의 아이 및 손자들에 대해서 육친과 같이 접해, 혹은 의형제의 인연을 묶거나 했다. 그에게의 은애는 매우 두꺼웠다고 한다.
상파(常播)의 자는 문평(文平)으로, 촉군 강원현 사람이다. 상파는 현에 벼슬하여 주부,공조가 되었다. 현장 광도 사람 주유가 건흥 15년(237년) 상관에게 관곡을 빼돌렸다고 무고를 당해, 중죄로 논해지게 되었다. 상파는 옥으로 가서 쟁송하였는데, 몸에 수천 대의 매를 맞아. 살이 다 문드러지고, 장독이 오른 것이 매우 참혹했으며, 다시 세 번의 옥고를 치뤘고, 2년여간 유폐되었다. 매번 고문을 당할 때마다, 관리가 먼저 심문했으나, 상파는 대답하지 않고 말하길 '어서 벌을 내릴 것이지, 여러 번 물을 게 무어냐!' 그 언사가 종시 흔들리지 않았기에, 일이 마침내 밝혀지게 되었고, 현장은 사형을 면했다. 이때 오직 주부 양원이 또한 이 일을 증명했는데, 상파의 말과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상파가 몸을 잊고서 군을 위한 것을 아름답다 하였고, 절의가 지극히 열렬하다고 하였다.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처현의 장에 제수되었으며, 50여세에 죽었다.
위계(衞繼)는 자가 자업(子業)이고 한가(漢嘉)군 엄도(嚴道)현 사람이다. 형제가 5명 있었고, 아버지는 현의 공조(功曹)였다. 위계가 어린아이였을 때, 형제들과 같이 아버지를 따라가 정원 뜰에서 놀고 있을때, 현장이던 촉군 성도(成都)사람 장군(張君)이 아들이 없어서, 수차례 공조에게 명해서 아들을 데려오게 해, 그를 그 아이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장군은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는 도중에, 공조에게 아들을 줄 수 없으냐고 부탁했고, 공조는 즉시 허락해서, 곧 위계는 양자가 되었다. 위계는 영민하고 총명해, 고전을 좋아하고 아는 것이 많아, 곧 주군에서 일하게 되었고, 청현(清顯)의 장을 역임했다. (다음부터는 발번역) 다른 네명의 형제들은 각각 모두 세상을 감당할만한 사람이 없었고, 아버지는 항상 몸이 쇠약해진다고 말했고, 장명부(장씨로 개명한위계를 말하는 듯)는 점점 강성해져 갔다. 그 당시에는 다른 성씨가 후사를 잇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다시 장명부는 위씨로 개명했다. 나중에 수차례 봉거도위(奉車都尉), 대상서(大尚書)로 임명되었고, 충성이 두텁고 믿음이 있고 신뢰가 깊어, 사람들이 모두 그를 깊이 존중했다. 나중에 종회(鍾會)의 반란 때에 성도에서 죽음을 당했다.
- 평하여 말한다.
등지(鄧芝)는 정조가 곧고 간결명료한 인물로써 관직에 있으면서는 가업을 잊었다. 장익(張翼)은 강유(姜維)의 날카로움에 항거했고, 종예(宗預)는 손권(孫權)의 위엄에 대항하여, 모두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양희(楊戲)는 사람들에게서 탁월한 점을 발견하려는 의도로 인물을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지혜에 결함이 있어 세상의 재난을 만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