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동기들 게시판에 오늘 새벽에 글 하나를 남겼다.
나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내용이었다.
여기에 전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얘기이자 그런 편린들의 일부다.
글의 제목은 '압력밥솥'이다.
나는 소싯적부터 산과 들을 좋아했다.
캠핑도 많이 했고 비박도 즐겼다.
그땐 펌핑식 석유버너에 찌그러진 코펠로 밥을 지었는데 밑은 새카맣게 타고 위는 설익기 일쑤였다.
지금은 지정된 구역이 아니면 취사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각종 장비들도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1980-90년대엔 그렇지 않았다.
넓은 들이든, 높은 산이든, 깊은 계곡이든 삼천리 금수강산 어디에서나 야영과 취사가 비교적 용이했던 시절이었다.
밥이 타고 설익었어도 그땐 매번 꿀맛이었다.
돌도 씹어 삼켰던 시절이었으니까.
여행이나 추억의 절반은 먹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과연 그랬다.
일박이일이든 이박삼일이든 나는 집을 떠나 깊은 숲속에서 대자연의 일부로 스며들 때마다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곤 했었다.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거의 모든 집에서 '전기 압력밥솥'을 사용한다.
캠핑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 단단한 밀폐성으로 인해 김이 전혀 새지 않는다.
그 덕분에 밥 짓는 시간이 짧아졌다.
밥맛도 찰지고 구수하며 쫀득하다.
매번 입안이 행복감으로 가득했고 식사시간이 되면 사람들의 얼굴이 하회탈로 돌변했다.
그랬다.
뭔가를 이루거나 꽃을 피워내려면 반드시 값지불을 해야만 했다.
뜨거워진 수증기와 고압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왕후의 밥'이 완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지탱하는 강력한 힘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모두가 잘 된 밥엔 환호하지만 그 과정 속의 숱한 에너지와 기다림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세상의 인심도, 작금의 세태도 그렇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단체활동'이나 '공동체 생활'이 쉽지 않은 이유다.
왕왕 인구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김샜다"
흥이 깨지고 맥이 빠졌다는 얘기다.
그래서 갑자기 에너지가 사라지고 공든탑에 금이 갔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동력을 상실했다는 말이다.
강력한 밀폐성과 에너지의 응집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맛있는 밥이 될 리 없었다.
3월 하순에 입사 동기들과 부산으로 일박이일 간 M.T를 가기로 했었다.
이미 작년 가을에 했던 약속이었다.
그리고 금년 초에 인원파악을 해보니 총 9명이었다.
남성 6명, 여성 3명이었다.
부산의 기호 씨가 우릴 초대했고, 우리도 부산의 봄내음과 해풍이 그리워 적극 추진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나 '수정 씨'가 대학교 학사일정 때문에 중도에 불참을 통보했고, '민정 씨'는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의 진료 때문에 엠티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백 번 천 번 이해하고 공감했다.
또한 불참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사정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소릴 듣자마자 '옥자 씨'도 여성 혼자서 참가하기 어려우니 본인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일리 있었다.
그 다음 날, '대형 씨'의 전화를 받았다.
딸이 갑상선 수술을 앞두고 있으며 집안 분위기도 좋지 않아 자신도 M.T에 적극 나서기 어려운 입장이라고 했다.
역시 일리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5명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모두와 통화했다.
이유를 떠나 이구동성으로 그랬다.
"자꾸만 김이 빠진다"고 했다.
호스트였던 '기호 씨'는 "화가 난다"고 했다.
그렇게 끝내 밥이 되지 못한 채로 식사준비는 무산됐다.
이미 주방엔 상당한 식재료들이 다듬어 지고 손질되어 순차적으로 쿠킹을 기다리고 있었고 식탁엔 밑반찬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지만 더 이상의 파티준비는 한발짝도 진전되지 못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언의 시간이 침묵 속에서 흘렀다.
뒤치다꺼리는 나와 '기호 씨'의 몫이었다.
누굴 탓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고생했다고 생색을 내기 위함도 아니다.
나는 KTX와 렌터카를 취소했고, 모든 이들에게 계좌를 물었고 곧바로 엠티비를 환불해 주었다.
'기호 씨'는 해운대 '엘시티 레지던스'에 예약했던 객실 2개를 해약했다.
최고급 시설이라 일박 투룸에 90만원이었고,이 비용은 동기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본인이 부담하겠노라고 했었다.
M.T가 끝날 때까지 그 내용은 비밀로 해달라고 나에게 부탁까지 했었다.
기호 씨는 4월 중순에 창업 이래 최초로 감사원 '감사'까지 앞두고 있었다.
이삼 주 전부터 자료준비와 감사대비로 밤 늦도록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비상 상황이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지만 그는 표시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올 동기들을 생각하며 식당, 카페, 관광지 등을 순회하며 사전 답사까지 하고 다녔다.
심지어 꽤 거리가 먼 '거제도'까지 흝었다.
나는 매번 '기호 씨'의 성의와 진정성에 가슴이 저릿했다.
1990년 11월에 만난 동기들.
햇수로 34년째니까 세월이 엄청나게 흘렀다.
나는 긴 세월 동안 동기들 모임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열정과 에너지를 쏟았다.
그 빠쁜 연말에 '송년모임'을 한다고 식당을 예약했다가 덩그러니 혼자서 동기들을 기다리다 쥔장에게 욕만 실컫 먹고 나온 적이 두 번 있었고, 10 자리를 예약했는데 겨우 두세 명만 식사를 하고 나온 적도 많았다.
어느 땐 동기들을 만나 즐거웠고, 어느 땐 정말로 비참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며 명예가 걸린 문제도 아닌데, 그럴 때마다 내 아내는 안타까움에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
내 자신이 무척 한심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매번 부산에서 달려와 준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살면서도 동기회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하는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외에 살면서도 한국에 올 때마다 연락을 주고, 동기들의 안부를 물으며 25년 연초에 베트남으로 동기들을 초대해 준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김이 새나가지 않도록, 그리하여 밥이 잘 되도록 도우며 모두가 즐겁게 식사할 수 있게끔 성심을 다해 힘을 보태준 동기들이 있었다.
말의 성찬이 아니라 행동으로 묵묵하게 실천해 준 그들의 진정성과 열정이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기에 다시 힘을 내서 달릴 수 있었다.
이 지면을 빌려 특히 '부산 사내'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보내고 싶다.
나라면 매번 동기들 모임을 위해 부산까지 달려갈 수 있었을까?
고백하건대, 나는 십중팔구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인품도 열정도 그 '부산 사내'보다 함참 낮은 수준이고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진심이다.
동기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서울에서 꼴랑 2-3 시간을 만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매번 감동했다.
절대로 쉽지 않은 실천이었다.
많은 시간, 많은 비용, 많은 에너지를 흔쾌하게 쏟았던 그에게 나는 그에 합당한 그리움과 감사와 신뢰를 건네줬던가.
동기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해 봐도, 고마웠던 그에게 그리 존중하고 대접하며 살았던가.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하게 되는 3월 31일의 아침이다.
벌써 24년도 1분기가 끝났다.
세월은 비호 같고 우리는 속절없이 늙어간다.
나도 머지 않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때가지 만이라도 챙길 건 챙기고, 맞잡을 손이 있다면 따스하게 맞잡고 싶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했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소통하고 공감하자.
이 한 생각 뿐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땐 보고 싶어도 기회가 그리 쉽지 않을 테니까.
캐나다로 이민 간 '두열 씨'도 이민 초기엔 한동안 교제를 했었고, 한국에 들어오면 꼭 만났었는데 언제부턴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상해 주재원으로 발령난 남편을 따라 출국할 때 인사를 나눈 뒤로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던 '혜윤 씨'와 거의 15년 만에 다시 연결이 되었다.
긴 세월 동안 소식을 몰라 궁금했던 '죽마고우'와 반갑게 재회한 듯하여 매우 기쁘다.
우리네 인생길.
모두가 바쁘고 정신없이 산다.
바쁘게 사는 게 좋아 보이고 또 열정적인 뒷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분주하게 사는 건 좋지만 때로는 뒤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찍어온 발자국들을 바라보며 성찰도 하고 기도도 했으면 좋겠다.
내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아전인수에 너무 천착하지 말고 때로는 들판 전체를 헤아리고 챙기며 살자"
많은 소유나 권세로 위세를 떨친 사람이나 지리산 두메산골의 어느 이름 없는 필부나 어차피 우리는 속절 없는 세월 앞에서 한 줌의 재로 남겨지고 말, 그런 미미하고 바람 같은 존재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에게 건강이 있고 시간이 주어졌을 때 스스로 자가발전을 하면서 함께 힘을 합쳐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무엇보다도 김이 새나가지 않도록 힘을 모으고, 배려와 열정으로 각자의 삶을 의미있게 채색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믿는다.
내년 2월의 베트남 M.T
어떤 모습으로, 어떤 패턴으로 우리의 하모니를 완성하게 될 지 나도 자못 궁금해 진다.
2월 초순에 간다면 이제 딱 10개월 남았다.
24년도 1분기, 수고한 모든 동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파이팅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